그분과 함께

향심기도 첫 강의를 듣고...

pumpkinn 2015. 2. 23. 13:23

강의를 시작하시는 이윤제 베드로 주임 신부님...

 


사순절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 본당에서는 향심기도에 관한 강좌가 개최되었다. 이윤제 베드로 주임 신부님께서 직접 강의하시고 지도하시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향심기도’. 내게는 참 절묘한 타이밍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올해의 목표중 가장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과 애인처럼 친해지기였고, 그 방법으로 나는 성경 통독을 시작했다. 물론 깊은 묵상과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야무진 꿈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하루도 빠짐없이 말씀을 읽는다는 소박하지만 절절한 바램으로 시작된 성겨읽기였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성경 통독은 시작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잘해오고 있지만, 아무리 양(Quantity)은 나의 몫이고, (Quality)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라해도 내가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무언가가 빠져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기도였다. 물론 아침마다 복음을 읽으며 잠깐의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하지만, 그것은 출석도장을 찍는 정도의 수준이지, 차마 기도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모양새였다.


이런 가운데 시작된 향심기도프로그램은 내 눈을 번쩍 뜨이게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삶은 스승을 보내준다는 말씀은 진리다. 이윤제 신부님께서 향심기도를 들고(? ^^;;) 나타나신게다.


오늘이 바로 그 첫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거나, 배움에 임할때는 늘 여린 떨림이 함께한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좋은 말씀이니 그저 가서 들어보기나 하자라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 내것으로 온전히 만들 수 있는, 내게 맞는 기도생활을 갖고 싶었다. 기도든, 운동이든, 배움이든 모두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니까. 말씀 하나하나가 참으로 맛있었고, 귀에 쏙쏙 들어와 설레였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교무금을 받으러 일찍 가야하는 당번이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하루는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다가온 4. 우리는 극장으로 달려갔고, 정확한 시간에 토마스 키팅 신부님의 기도로 시작되었다신부님은 우선 향심기도를 설명하시기 전 카톨릭교 안에서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갔으며, 어떻게 현대의 기도로 이어졌는지 역사를 다뤘는데, 참으로 흥미로웠다. 들으면서 의아스러웠던 것은 기도에도 역사가 있었고, 그 역사 안에서 늘 그렇듯 많은 고통과 시련이 따르듯이,  기도 역시도 그러한 산통을 겪어야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치, 기도란,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그모습 그대로 그렇게 이어져온 것이라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기도의 역사는 내게는 마치 신세계 이야기 같았다. 또한 나 자신이 기도에 대해 그런 의문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도 놀라웠다.

 

기도의 역사


기도의 역사를 살짝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15세기까지는 관상 기도가 매우 긍정적이었다.

관상 (Contemplatio) = 지적 체험 (Theoria) + 경험적 체험 (Da’ath)

, 관상 기도란 지적 체험과 경험적 체험이 함께 어우러진 기도라는 것. 관상은 대 그레고리오에 의하여 사랑으로 충만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요약되었고,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관상은 성경의 하느님 말씀을 사색함으로써 얻어지는 열매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선물이고,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이다라고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가 있었는데이 렉시오 디비나는 글자 그대로 거룩한 독서로서 성경을 읽는다는 뜻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경청하는 수련이다. 수도자들은 입으로 성경의 말씀들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몸 자체가 이 기도 수행 과정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들은 렉시오 디비나를 통하여 내면의 더 깊은 수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자 했다. 기도란 그들에게는 성경으로 말씀을 듣고, 전례로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 하느님을 향한 응답이었다.


성경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성찰의 부분을 메디타티오(Meditatio, 묵상)이라고 불렀고, 성찰한 것에 대해 응답하는 의지의 자발적 움직임은 오라티오 (Oratio, 정감적 기도)라고 불렀다, 이러한 성찰과 의지의 활동이 점점 단순화되면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의 쉼 상태로 옮아가는데, 이것이 콘템플라티오가 뜻하는 것이다. 묵상과 응담, 그리고 관상의 이 세 가지 행위들이 한 기도 속에서 모두 나타나기도 하였다.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P192)


이렇듯 이 세가지 기도는 서로 얽혀있었고, 이 세가지 기도를 모두 지칭하는 정신 기도라는 용어는 존재하지도 않았더랬다.

그런데 12세기경 개념이나 정의와 분류 같은 정밀한 분석이 탄생되면서, 하나로 어우러져있던 세가지 기도는 서로 분류가 되었고, 14~15세기에 이르러 흑사병과 100년 전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윤리와 영성이 전반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16세기로 들어서면서 정신 기도는 생각이 위주인 논리적 묵상, 의지의 행위가 강조되는 정감적 기도, 하느님의 은총의 주입이 우세한 관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 논리적 묵상과 정감적 기도와 관상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기도 속에서 발견되는 다른 행위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지향과 방법과 목표를 가지며 구별되는 기도가 되었다는 게다.


이렇게 당시에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관상기도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에 의해 그 시대에 맞는 형태로 부활되는데,  

1. 기억력 논리적 기도

2. 이해력 정감적 기도

3. 의욕력 오감을 사용하는 기도 세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영성수련에서 사용하는 관상이란 말은 전통적인 의미의 관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힘들게 이냐시오 서인에 의해 제자리로 겨우 찿은 관상 기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예수회 총장 신부에 의해 논리적 묵상으로 한정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적 이유는 있었지만, 무척 아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예수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되는데, 종교개혁 이후에 세워진 수도원들은 예수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보니 예수회의 기도 방법인 논리적 묵상 기도 방법을 따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정적주의반정적주의, 또는 얀선주의같은 이단들의 잇단 출현으로 카톨릭교는 홍역을 앓게되면서, 관상기도는 성인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 또는 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는 인식이 보편적 생각을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우기, 이미 죽어버린 전통적 가르침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관상 기도를 열망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통을 겪은 관상기도가 다시 새로운 주목을 받는 데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다른 영성 지도자들의 온전한 가르침이 역사적, 신학적 연구에 의해 재발견된 것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동양에서 밀려온 도전 때문이었다는 것.

기도에 대한 충분한 배경 설명과 역사를 들은 후 우리의 핵심 주제인 향심 기도 설명으로 이어졌는데, 관상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것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성 훈련이다.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는 아니다. 기도긴 하지만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독서와 향심 기도의 차이점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독서와 향심기도의 차이점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과 통공, 친교,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포괄적인 방법인데,  그 내용은 먼저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자발적 기도로 이어지고 마침내 하느님의 쉼으로 넘어가는 것. 이 세가지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 이것이 바로 렉시오 디비나이다.


향심기도, 하느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데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그 즉시 하느님과의 통공수준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자신의 자신의 지향을 선택하고 의도적으로 침묵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을 끊임없이 열어드리고 내어 맡긴다는 것. 그래서 생각들이 일어날때 부드럽게 그 단어로 돌아간다.


향심기도는 우리를 준비시킴으로써 관상 기도로 들어가게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늼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향심기도의 원천이다. 향심 기도 중 떠오르는 모든 생각, 또는 환시, 환상, 환청 그 모든 것을 초연하게 보낸다. 그리고 그럴때엔 성령께 청한 거룩한 단어 (3음절까지) 로 대체하여 그 생각을 흘려보내도록 한다.



향심 기도에 임하는 방법


- 20분 동안 편한 자세를 취하고,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기도시간에 임한다.

-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것은 생각들로부터 떠나는 행위다.

- 하느님이 현존하시면서 내게 당신을 내어주실것이기에, 그분께 내자신을 내어드리겠다. 그분의 활동에 동의하겠다라는 지향을 둔다.

- 향심기도는 지향하는 훈련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온전히 내 자신을 내어드리겠다,   온전히 맡기겠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느낌


이렇게 우리는 향심 기도 방법까지 배우고 향심 기도를 20분간 실습을 하며 오늘의 프로그램을 끝냈는데, 읽고 쓰고 느낌을 적거나 나누는 방법은 내겐 익숙하지만, 생각을 비우는 것은 내겐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향심 기도를 배우겠다고 시작한 이유도 사실 그런 내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기도 속에 깊이 빠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의문은 늘 한가지다.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어떻게 생각을 비우냐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대체시키며 그 생각들을 초연하게 옆으로 부드럽게 밀어넣으며 마음을 고요함에 머물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내 머릿속에 옹달샘처럼 마구 마구 솟아오르는 생각들을 거룩한 단어로 대체 시켜도 나는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을 비우자고 마음 먹는 그것 역시도 생각하고 있음이요, 생각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내 머릿속에서 생각을 어떻게 비워내냐는 것이다. 물론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면, 한마디로 관상으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생각의 無의 상태가 되는 것일테지만, 지금 내게 있어서의 어려운 난문은 바로 생각의 비움이다.


물론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훈련을 하는 것이고, 향심기도를 배우는 것임을 떠올리고 보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생각의 비우지 못함을 걱정할게 아니라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에 임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할 일이다.

2시간이 살짝 넘는 시간이었지만 너무나도 재밌고 맛갈스럽게 진행된 강의라 끝나는게 아쉽기마저 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이번 일주일 동안 충실히 연습에 임해야 겠다. 우선은 아침 저녁 20분 기도를 빠지지 말고 하자. 모르면 스승이 가르쳐주는대로 따라가보는 것,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매일매일 잊지 않고 향심 기도에 임할 수 있도록 깨어있는 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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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프로그램은 신부님께서 성경책 다음으로 좋아하신다며 낭송해주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기도로 마무리 되었다.

아름답고 용기와 비젼을 심어주는 기도문, 함께 올려본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마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임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하면  모두를 얻느니라

임을 모시는 이 아쉬울 무엇이 없나니,

임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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