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함께

재미나는 김정환 요한 신부님의 '한국천주교 역사' 강의를 듣고...

pumpkinn 2015. 5. 5. 12:25

강의 중이신 김정환 요한 신부님...

어찌나 맛갈스럽게 강의를 하시는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강의에 빠져있었다..



2015 5 3일 일요일


브라질 한인 공동체는 50주년을 맞아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되새기고자 50년 역사를 책으로 내면서 한국의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님으로 계시는 김정환 요한 신부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이번에 50주년 행사를 기념하여 신부님께서 브라질에 방문하셨다.

이렇게 귀한 신부님들께서 오시게 되면 절대 그냥 못 보내드리는 게 우리 성당의 관습이다. 하하하~^^ , 우리 브라질 신자들을 위해 강의를 하셔야 한다는 것. ^^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배움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 어려움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쫓아 다녀야 들을 수 있는 훌륭한 신부님들의 귀한 강의를 우리들은 가만 앉아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는 게다. 참 복도 많은 우리~ ^____^ *히죽~!!*


지금까지 많은 강의를 많이 들었지만,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 대한 전문적인 강의는 처음이라 기대가 컸다. 요 몇 년 사이로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그리스 역사, 영국 역사 등등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긴 터라 아주 절묘한 타이밍으로 다가온 기회. 앗싸~!! 대박이다~!! 그런데,이럴 때는 재정이 늘 걸림돌이다. 큭큭~^^;; 아쉬운대로 우선 급한 것만 후닥닥닥~ 끝내고 빛의 속도로 날아가 앉았다. 하지만 이미 강의는 시작되어있었고~ 끄응~-_-;;


먼저 앞서 하신 강의의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못 들은 강의를 아쉬워하지말자 위로하고는 강의속으로 빠져들었다. 강의 주된 내용은 한국 천주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누구를 시초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박해 속에 우리 선조들이 당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강의 내용


복습하는 차원에서 잠깐 요약하자면, 조선 시대에 서울에서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 북경에 이르는 사행로는 세계로 열려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동지사는 매년 파견되는 사신을 일컫는데, 늘 겨울에 떠났던 것은 압록강이 얼어야 강을 건너 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그때 가야 중국 황제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 게다. 그런데 이 동지사들이 떠날 때에는 그들만 가는게 아니라 여러 상인들도 함께 떠났고, 바로 신세계 서적들이 그들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서적들 중의 하나가 <천주실의>였다.


한편, 그 당시 조선에는 유학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천주실의 내용이 유학과 참 잘 맞아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라는 것은, 곧 부모님께 효와 군주에게 충을 강조하는 유학과 맞아 떨어져 천주 실의가 쉽게 수용이 되었다는 이야긴데, 그렇게 서학을 접한 학자 중에 이벽이 아버지가 동지사로 임명되어 함께 중국으로 떠나게되는 이승훈에게 천주교에 대해 더 잘 알아오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가능하면 세례까지 받고 오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우리 충실한 친구 이승훈은 그렇게 부탁을 외면치 않고 가서 신부님을 만나 뵙고 이런저런 천주교에 대한 여러 교리를 배우고 심지어 세례까지 받고 오게되는데, 너무 재밌는 것은 서로 이야기가 안통하니 글로 대화 (필담)을 했다는 것이다. 서양 신부님들께서 한문으로 대화를 나누셨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한국에서 3년을 한문 공부를 했어도 잘 알지 못하는데, 외국 신부님께서 한문으로 대화를 나누실 정도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암튼. 그렇게 해서 1784년 이승훈은 한국 카톨릭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하여간에 한국은 여러 가지로 유별난 나라다. 선교사가 있어도 제대로 신앙을 뿌리내리게 하기가 힘든데, 선교사도 없이 지들끼리 책 한 권 달랑 읽고는 배우고 연구하고 심지어 사람까지 보내서 세례 받게 하고. 쉽게 불타오르고, 쉽게 가라앉는 냄비 근성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근성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한 행보가 아닌가 싶다. 단지 쉽게 가라앉는 성격의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 어쩌면 박해가 있어서 더 아쉽고 귀하고 간절하게 느껴졌던 건 아닌건지하는 생각이 살짝 스쳐지나 가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무시한 거 아닙니다. 걍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는 야그입니다. ^^;;)


그렇게 선교사를 놀래키고는 이승훈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웃겼던 것은 신자 수가 자꾸만 늘어나자 자기들끼리 각 지역마다 리더를 뽑아서 신부로 앉혀놓고는 미사를 집전했다는 것이다. 역시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 원활한 활동과 관리를 위해 필요했던 체제지만 얼마나 순진하고 천진한 발상이었는지. 이를 가성직제도라고 부른다는데, 나중에 리더 중에 유항검이라는 분이 교리서를 숙독하던 중에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아시고는 기겁을 하셨다는데, 그 부분을 읽는 순간에 얼마나 놀라 까무러치셨을까? 놀라서 뒤로 넘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질 정도였다. ^^ 그렇게 하여 성직자를 파견해달라고 똑똑하고 건강한 윤유일 바오로를 1789년에 중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했고, 또한 선교사들과 필담을 나눌 수 있고 잘 배워올 수 있기 위해서는 똑똑한 청년이어야 했으니, 그가 바로 윤유일 바오로였다.


윤유일이 두번째 중국으로 파견되었을 때 구베야 주교는 제사 금지령이 내리는데, 그게 바로 박해의 시초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에게 효를 강조하는 유교 사상이 강한 그 당시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천하 불효자식으로 찍혔을 건 당연한 거고, 또한 한국인들 특유의 덧붙여 불어나는 말들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 냈던 것. 이렇게 해서 첫 순교자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산 사건이다. 처음에는 그저 전국적인 사안이 아니라 지역적인 사건으로 국한되지만 한국의 첫 순교자가 생기게 된 사건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11년 후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어명에 따른 국가적인 박해였다.


신유박해를 비롯하여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을 일컬어 한국 교회의 4대 박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이 4대 박해동안 돌아가셨다. 박해 요인에는 사실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외래 종교가 싫은 사상/종교적 요인이 있었고, 하느님을 부모님이나 나라의 임금보다 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적 요인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절대 용납이 될 수 없었던 사회적 요인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야당인 남인들에 의해 들어온 신앙이다보니 당쟁 속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지는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박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1836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인 마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고, 모방 신부는 입국 즉시 신학생을 선발하게 된다. 이때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을 선발하여 중국 마카오로 보내게 되는데, 최방제는 병으로 그곳에서 사망하게 되고, 최양업과 김대건은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사실 공부는 최양업이 더 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최양업은 공부를 잘하는 학자 스타일이었고, 김대건은 활동적인 스타일이었기에 신앙의 길을 구축하기 위해 김대건이 선발로 보내졌던 것은 주교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셨기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지금의 1.5세대처럼 한국 상황에 많이 어수룩하고, 또한 한국어를 많이 잊었던 상태였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이 그렇게 온갖 고통을 겪으며 힘들게 도착한 조선에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된 이유였고, 그렇게 순교하시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안쓰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 모든 역사에는 하느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안다


어쨌든, 그러한 처절한 압박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보면, 다시 한번 내 신앙의 현주소를 되돌아보게 된다. 고백 성사 한번 보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그때 상황들은 매 순간이 바로 삶이고, 죽음이고 부활이었던 셈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한국도 일본도 그렇게 천주교가 박해를 받아야 했을까 싶고...




김대건 신부님 활동도




마치며...


김정환 요한 신부님께서 어찌나 강의를 맛깔스럽고 재미나게 하시는지, 그 구수한 말씀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강의에 빠져들었더랬다. 신부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까봐 이쯤에서 그만둔다고 하셨는데, 사실 그건 신부님 생각이시지, 정말 눈물 나도록 속상하고 아쉬웠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실게다. 더 길게 하셔도 됐는데... 하긴 시차 적응도 안되신 상태에서 한국에서 도착하시자마자 긴 강의를 하셨다는 자체가 무리긴 하셨을 게다. 게다가 몸도 안 좋으시고


우리가 역사 강의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닌 곳에 살기에 늘 배움에 대한 갈증은 가실 줄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당신께서는 힘드신데 우리 욕심만 부리게 된다는.. ^^;;


박해는 끝났는데, 콧물은 계속된다는 말씀에 얼마나 웃었는지. 피로로 콧물 감기에 걸리신 듯했다. 아이구야~  암튼, 역사를 연구하시는 신부님을 뵈니 안 그래도 여진천 신부님이 떠올랐는데, 강의 소책자 뒤에 쓰여있는 참고 자료 부분에서 여진천 신부님의 성함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 오늘 역사 편찬 팀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는 동안여진천 신부님에 대해 여쭤볼까 하다가 대화의 흐름이 깨질 까봐 그만 두었다. 여신부님은 어찌 지내고 계신지 안부 이멜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황사영 백서에 관한 논문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한문이 많아서 읽기가 어려웠던 신부님의 논문. 이제는 도전해보리라. 서양 신부님들도 하셨구만~ ^^;;



지나가는 한 마디~ ^^


이번 강의를 통해 느낀 것은, 내가 내 것으로 만들어 알고 있을 때 이렇게 자연스런 강의가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가 아는 것을 시와 때에 맞게 꺼내어 보여주는 것. 나도 내가 지금 배우고 공부하고 있는 것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언젠가 내게 기회가 주어질 때 자연스럽게 재밌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스타일의 강의를 하고 싶다는 바램을 살짝 가져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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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by 소마 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