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남편과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연말 휴가 때는 아순시온을 다녀오자는 남편의 말에 어린애처럼 들뜨기까지 했다.
기억 소환, 추억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졸업식도 못한 채 한국을 떠나 이십 대 중반까지 보낸 그곳에서의 생활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나의 이십 대를 온전히 쏟아부었던 아순시온에서의 생활
한창 친구가 좋았던 시절, 사랑하는 친구들을 떠나 낯선 남미로 떠나왔던 그때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참으로 많이 울었고 참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도전과 시도로 포기하지 않는 치열함을 배웠던 시간들.
타협 없는 잔인한 삶의 레슨을 받으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독하게 훈련받았던 날들.
내가 지금의 나일수 있도록 많은 배움을 안겨준 곳이 파라과이였다.
그래선가. 그곳에서의 생활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남편과 함께 떠났던 여행은, 그 시절의 그리움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었다.
우리 모두 그 낯설고 투박한 삶 속에 적응하느라 많은 고통과 아픔으로 견뎌내야 했지만, 우리에겐 우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그리고 낭만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함께 하는지...
이번 여행에서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은
- 파라과이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만나면 가곤 했던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예쁜 카페들
-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위로가 되어주었던 강가의 우체국
- 말도 못 하면서 죽어라 공부하여 들어갔던 아순시온 국립대학교(UNA)
- 친구들이 목메 그리울 때면 혼자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곤 했던 아름다운 Espanha 길
- 아빠가 하셨던 크리스토레이 학교 코너에 있던 슈퍼마켓과 내가 살던 곳이었다.
까페
내가 한국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은 내가 파라과이에 도착하고 나서도 3~4년쯤 후였다. 우연하게 엄마 아는 분의 딸을 통해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를 통해 다른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그때까지는 파라과이 친구들 밖에 없었다. 그룹 작업이 많다 보니 함께 공부하고 대학생활을 즐기던 나라 한국 친구들에 대한 특별한 아쉬움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 한국 친구들을 만나게 되자 그 느낌은 정말 달랐다.
파라과이 대학 친구들과 만나서도 재밌었지만, 이상하게 한국 친구들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되새김질하듯 그 즐거움은 깊은 여운을 안겨주었다. 같은 문화,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일요일뿐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성당에 다녔기에 그 당시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나는 미사 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성당 밖에서 기다려 친구들과 만나곤 했다.
우리가 늘 순회공연처럼 돌았던 곳은 까페였다.
기껏 만나서 하는 거라고 이 까페 저 까페를 순례하듯 돌며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먼저 Oliva 길에 있는 Café San Marco에서 만나 Té com Leche Completo (차에 우유를 탄 음료. 빵이 같이 곁들여 나온다)를 마시고, Palma길에 있는 다빈치로 옮겨 Pizza Napolitana (Salsa Golf에 Palmito가 올려져 있는 내가 참 좋아하던 피자였다)를 먹고는 Imagen이나 Zodiac에 가서 다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집에 오는 게 우리의 하루였다.
매 주를 똑같이 그 까페들을 돌면서도 우린 지치지도 않았다.
나는 특히나 올드팝송이 나오는 다빈치를 좋아했는데, 매주 매주 그곳엘 가니 그곳 직원들과도 잘 알았고, 내가 좋아하는 곡을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주기도 했던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내가 아순시온을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곳들을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남편과 Centro에 있는 호텔 과라니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녔던 모든 까페들을 걸어서 가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짐을 풀자마자 조금 쉬었으면 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어린 시절 그때의 컬러풀하던 거리가 회색빛을 띄고 있음에 슬픔을 느끼며 길을 걸었다.
금요일에 도착했고 아직 일하는 시간인데도 붐비며 젊음이 넘치던 그때의 그 길은 온데간데 가고 없었다. 길을 걸으며 익숙했던 그곳들을 열심히 찾는 내 시선에 잡히지 않았다.
빅토리아 극장도 없어졌고, 간판만 떨어질 듯 붙어있었다.
올드팝이 흘러나오던 내가 가장 좋아했던 까페 다빈치는 빌딩전체가 폐허건물인양 닫혀있었다.
빌딩 꼭대기에 있던 친구들과 자주 갔던 zodiac 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San Marco는 La Vienesa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다행히도 아직 그 자리에 까페의 모습을 띄고 있어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우체국
한창 친구가 좋았던 시절,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떨어져 매일매일을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날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위로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그 편지들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가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우체국 가는 길은 어찌나 행복하고 들떴는지.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그리도 설레었을까.
가는 길은 또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Centro에 내려서 호텔 과라니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구경하며 강가 쪽으로 공원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고풍의 건축물들이 서있고 그중의 하나가 우체국이었다.
강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끼고 있는 우체국은 어찌나 우아하던지. 첨엔 마치 무슨 미술관에라도 온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프런트에서 우체국에 대해 물어보니 이미 오래전에 닫혔을 거란다. 마음 한편에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실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 우체국이었는데.. 그래도 가서 건물이라도 보자고 남편과 함께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기억을 더듬어 공원을 가로질러 강가 쪽으로 계속 내려갔다. 내 기억 속의 우체국은 그곳에 없었다. 고풍의 건물 앞에 있는 경찰에게 물어봤더니,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공원 건너편에 있는 저 건물이 우체국이라며 가르쳐 주는 게 아닌가.
설마설마하며 그곳을 뛰듯이 걸어가는데, 그 앞에 우체국 팻말이 붙어 있었다. 입구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는데,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니 환하게 웃으며 ‘물론이죠’ 하신다.
들어가니 정원이 나오고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젊은 두 여성이 우편물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나왔다. 우체국은 아직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의 모습은 바뀌어 있었지만, 그때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겨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친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추억의 까페들이 모두 없어져 휑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과이 여행이 슬프지 않았던 것은 내게 가장 큰 의미를 지니던 우체국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도 그리웠던 우체국을 찾았고, 그곳엘 가본 것만으로도 나의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아순시온 국립 대학교
내가 다니던 아순시온 국립대학교 Politecnica는 산로렌소라는 대학도시에 있었다. 내가 다니던 Politecnica학과 건물에 가는 길 오른쪽엔 경영대학 건물이 있었고, 경영학과 건물 오른쪽으로는 터가 넓었던 농과 대학이 있었다.
우리 학과 건물로 가기 위해서는 경영대학 옆 길을 따라 한참을 들판(?)을 따라 들어가야 우리 건물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늘 다니던 길도 없어져 너무 낯선 모습이었다. 마음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내가 Politecnica 과를 들어갔던 것은 그 과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유일하게 대학에 붙을 수 있는 과였기 때문이었다. 영어도 아니고 생전 배운 적도 없는 스페니쉬로 공부해서 어느 세월에 대학 시험을 볼 수 있는 실력을 키울까. 입시 과목이 거의 모두가 수학인 Politecinica만이 내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놀랍게도 파라과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육 수준이 월등한 한국의 고등학교 졸업장임에도 불구하고, 인정이 되지 않았다. 대학 입시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Examen de la Ubicación이라는 검정고시를 쳐야만 했다. 그렇게 자격증을 땄고, 대학 입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했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았다. 그때는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나의 목표였는데, 사실, 내 수학 실력이 뛰어났기에 합격한 것이 아니라, 파라과이의 수학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자수하여 광명찾자!)
당연하게도 수업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Cursillo(대학 입시반)에서 공부를 함께했던 친구들이 있어 재밌게 다녔다. 수업 과목이 어디 수학 뿐인가? 당연히 이론도 있으니 버거울 수 밖에. 스페니쉬도 잘하지 못하는 동양애는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늘 시선의 집중을 받았던 시절. 그때부터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스페니쉬를 못한다고 주눅 들지는 않았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이 스페니쉬를 못하는 건 당연하거 아닌가.
"너희는 한국말 못 하잖아."
그러니 기죽지 말자며 고개 쳐들고 온갖 잘난 척은 다하고 다녔던 시절, 재밌는 사건들이 많았던 날들이었다.

에스빠냐 길
에스빠냐 길을 내가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길을 따라 길게 펼쳐져있는 가로수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 난 커서(?) 멋지게 될 거라며 꿈으로 꽁꽁 나를 싸맸던 날들. 그 멋짐이 오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음이 공허하거나 친구가 그리울 때면 나는 30번 파란색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상상 속의 멋진 나의 미래를 그려보면서 말이다.
나의 멍 때림과 Paseo(드라이브)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때 생긴 습관이 아닌가 싶다.
남편 역시 파라과이에서 청년시기를 보냈기에 많은 추억이 있고 우리는 할 이야기도 많았다. 겹치는 공간도 있었고, 내가 모르는 곳도 있지만, 남편은 우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볼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었다.


아빠 슈퍼마켓
센트로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다 보고 나니 예전에 아빠가 하시던 슈퍼마켓에 가보고 싶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바로 슈퍼 옆이었다. 날씨도 더운데 우리는 Colón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조금 먼 거리긴 했지만, 걷고 싶었다. 이유는 아빠가 하셨던 슈퍼에 들러 그곳에서 콜라를 마시며 예전에 우리 아빠가 하셨던 곳이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음이다.
그렇게 무더운 날씨를 뚫고 꼴론길을 쭉 따라올라 Ygatimi 대로를 돌아 크리스토레이 학교를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브라질의 Bandeirante 쯤 명문 고등학교다. 학교는 증축을 해서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당연하겠지. 세월이 얼만데...
반 블록만 더 가면 인제 우리 집이 나온다. 기대 속에 도착했는데, 아빠가 하시던 슈퍼는 없어지고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슈퍼 앞에 있던 짓궂은 개구쟁이 소녀 소냐네 집은 모양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있는데, 우리 슈퍼는 없어졌고, 우리 집도 없어졌다. 길 건너편에 있던 병원도 없어졌다.
그나마 병원 길 건너에 있었던 우리 집 회계사 아저씨집이 그대로 있어 반가웠다.
집안을 들여다보니 그 아름다웠던 정원은 관리를 하지 않아 숲처럼 변해 있었다.
그 자상했던 회계사 아저씨는 아직 살아계실까? 아저씨의 딸이자 나와 같은 대학 동기였던 매력적인 까르멘과 예쁘고 깍쟁이였던 하껠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까르멘은 우리 반 1등이었던 호르헤와 결혼했었는데, 어디서 살고 있을까? 아직 그곳에 살지는 않겠지?




그곳에서의 생활을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그곳은 내게 삶의 훈련장이었기 때문이다.
철없는 나를 사람 되라고 훈련시켜준 곳이었다.
능력이 있어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그곳에서 배웠다.
또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님을 절절히 배운 곳도 그곳이었다.
나와 다른 이를 존중하는 법도 거기에서 배웠다.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끝을 맺는 끈기를 배운 곳도 그곳이다.
당연하겠지만 35년 만에 가본 그곳은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그래도 가고 싶었던 곳을 모두 돌아보며 그때의 장소를 가보았던 여행.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해야 할 숙제를 하나 끝낸 듯한 느낌이다.
삶의 가장 찬란했던 나이에 살았던 나라, 파라과이.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많이 배우고, 많은 훈련을 했던 나라.
그리고 말로 모르는 나를 보듬어 주며 함께 했던 친구들,
특히, 잊을 수없는 우리 스터디 그룹 친구들.
Norma, Cristina, Carmen, Jorge, & Artur Hellman
내겐 늘 아름답고 고마운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
서랍 속에 고이 간직했던 나의 낡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던 여행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어느 순간을 기억 속에서 꺼내보고 싶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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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내가 좋아하며 많이 들었던 곡...
Yolanda
Pablo Milanes가 아내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곡
Pablo Milanes와 Silvio Rodriguez의 목소리로 들어본다.
Yolanda
Esto no puede ser no más que una canción
Quisiera fuera una declaración de amor
Romántica sin reparar en formas tales
Que ponga un freno a lo que siento ahora a raudales
Te amo
Te amo
(Eternamente te amo)
Si me faltaras no voy a morirme
Si he de morir quiero que sea contigo
Mi soledad se siente acompañada
Por eso a veces sé que necesito
Tu mano
Tu mano
(Eternamente tu mano)
Cuando te vi sabía que era cierto
Este temor de hallarme descubierto
Tú me desnudas con siete razones
Me abres el pecho siempre que me colmas
De amores
De amores
Eternamente de amores
Si alguna vez me siento derrotado
Renuncio a ver el sol cada mañana
Rezando el credo que me has enseñado
Miro a tu cara y digo en la ventana
Yolanda
Yolanda
Eternamente, Yolanda
Yolanda
Eternamente, Yolanda
Eternamente, Yol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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