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61]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를 읽고

pumpkinn 2022. 1. 2. 05:09

 

리뷰를 쓰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나, 기억력이 짧은 나는 읽은 책들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내 장기 기억 속에 남기고 싶어 리뷰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을 기록하진 못하지만, 웬만하면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리뷰를 쓰기가 참 어려운 책들이 있다. 책 내용이 어려워서도 두꺼워서도 아니다. 이해가 어려우면 해설 강의를 듣거나 공부를 해서라도 쓴다. 물론, 아무런 느낌이 없어서 쓰지 않고 통과하는 책들이 있기는 하나, 그런 이유를 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어 하나하나 행간의 여백까지도 마치 사진으로 찍히듯 그 느낌이 그대로 내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감동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책들. 내 영혼을 촉촉히 적시고 심장을 두드려 그 안에 파묻히고 싶게 만드는 책들. 그런 책들을 읽고 나면 느낌이 너무 깊어서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랬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고,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가 그랬다. 그리고 류시화의 책이 내겐 그런 책이다. 물론, 그 밖에 언급되지 않은 여러 책들이 있다.

 

류시화의 책을 읽다보면 그 모든 문장들이 글들이 이야기들이 나와 하나가 되어 내 감성에, 내 피부에 그대로 착 달라붙어 떨어져서 바라볼 수 없는 그런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평범한 듯 일상적인 언어로 그려내는 그의 군더더기 없이 투명하고 아름다운 글들을 어쭙잖은 나의 표현으로 그려내자니 책에 대한 모욕인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렇다고 류시화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오자니 리뷰가 아니라 초서 노트가 될 노릇이다.

 

그의 책을 씹어 먹어버리면 그의 문장이 내 안에 녹아내릴 수 있을까? 류시화의 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로 기록하기 어려운 이유다. 쓰다가 절망하게 되니까. 자괴감이란 이럴 때 느껴지는 것일 게다.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가 절망했던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잡아내는 프루스트를 보면서 그녀가 느꼈던 절망은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 잘 그려져 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 숨을 쉴 수밖에 없군요”

 

그녀의 절망감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감히 버지니아 울프에 비유라니. -_-;;)

 

류시화는 헤밍웨이의 산문집 <우울한 도시의 축제>가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줄 마저 칠 수가 없었다고.

그의 책을 읽고는 또 그렇게 내게 다가온 이 느낌을 어쩌질 못하고 며칠을 끙끙거리다 이렇게 긴 서론으로 리뷰를 시작하고 있다.

 

 

 

류시화의 산문집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다. 짤막하면서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켜주는 스토리들, 때로는 그것들은 우화이기도 하고 신화이기도 하고, 인도나 티베트에서 겪은 체험담이기도 하다. 

 

엄격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행여나 듣고 있는 상대의 마음이 다칠까 이런저런 비유로 따뜻한 목소리로, “나도 그랬어, 괜찮아. 삶이란 그런거야 ”하며 보듬어 주는 듯한 느낌이다. 가만히 듣는 가운데 내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한다. 그래선지 읽다 보면 자꾸만 울먹거리게 된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우리는 얼마나 쉽게 절망하며 포기하는지. 신은 우리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쉼표를 찍어주었는데, 우리는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견뎌내고 나면, 좀 더 훈련하고 단련하고 나면 그 순간은 지나가고 그것이 내가 통과해야 했던 관문이지, 그것이 마지막 정거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때때로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린 곧잘 중간에서 내리곤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한동안 입에 달고 다녔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침표’를 찍지 않겠다는 나름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돌아보면 내가 상처라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았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관과 이어져 있었다. (...) “삶이 우리를 밖으로부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상처’가 아닐까? 상처 없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관계 속에 이렇게 저렇게 만나는 상처들, 또는 스스로 만들어 안기는 상처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참으로 따뜻하면서도 깨달음을 안겨준다. 

 

수잔 제퍼슨이 떠올랐다. 그녀는 <도전하라,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에서 우리가 삶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 배워내지 못하면, 삶은 계속적으로 시련의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온전히 배워낼 때까지 말이다. 분명 그랬다. 나는 제대로 배워내지 못한 삶의 레슨을 배워내느라  삶의 꾸짖음을 톡톡히 겪어내야 했다.

 

상처는 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다. 고통과 상처를 겪으며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우리. 스스로 의식했던 못했던 비로소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나면 우리가 변해야 할 부분을 인지하게 되고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좀 더 성숙한 우리가 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지난날의 모든 고통이 돌아보니 축복이었다고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일 게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관과 이어져 있었다.” 류시화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콕 찔렸다. 편견이나 판단에서 조금 자유로운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나의 숨은 실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종 어느 한순간, 누군가의 불편한 행동이나 받아들이지 못하겠는 어느 한 면을 보고는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하곤 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레이블을 턱 붙여 놓고는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좀 더 여유로워지고 넉넉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나이가 들면서 좀 더 그런 성향이 짙어짐이 느껴진다. 

 

말로는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상대방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딸들에게는 그럴싸하게 표현을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마음의 저울을 매 순간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전체적인 그림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이 오만함. 얼굴이 화끈거렸다. 

 

 

‘작가는 이상적인 집필실을 갖기를 소망한다.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적당한 빛이 들고, 글 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가 갖춰져 있는, 월세와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장소가 그것이다.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과 차를 나눌 여유가 공간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화초를 심을 뜰이 있거나 산책로 있는 산까지 근처에 있다면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 마치 집필 환경은 글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깨닫기 위해 전 제산을 쏟아부은 바보 같다” 

 

류시화 작가의 작업실에 관한 스토리를 읽다가 웃음이 터졌다. 학창 시절의 내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류시화에게 집필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면, 내게는 시험 때의 이상적인 공부방이 그랬다.

 

나 역시도 그 또래들 답게 학창 시절에 성적에 목숨 거는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공부를 하는 건 아닌 벼락공부 스타일. 그러니 시험 때만 되면 남들이 보기엔 무슨 박사학위라도 따나 싶을 정도로 호들갑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알차게(?) 시험공부 계획을 세운다. 그러고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바로 청소다. 구석구석 방청소를 하고 책상을 정리한다. 

 

생전 안 하던 청소를 왜 꼭 시험 때만 되면 그리 해댔는지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물론, 나름의 합당한 이유는 있다. 공부에 정진(?^^;;) 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선 주변 환경이 깨끗하고 말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평소에 해 놓으면 좋을 것을 왜 꼭  시험 때 그리 난리 부르슨지. 

살짝 거짓말 좀 보태서, 내가 청소를 하면 엄마는 '시험이구나' 아셨을 정도다.

 

정성스럽게 청소를 하고는 이제 공부할 시간. 공부를 하겠다고 책상에 앉으면 졸음이 온다. 안 하던 청소를 하느라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덕에 졸리기 시작하는 게다. 그렇게 나는 쏟아지는 잠을 재물로 바쳐야 했다.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은 그랬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방도 책상도 엉망이어도 공부를 할 수 있음을 배웠다. 풀타임 아르바이트와 풀타임 학교 수업으로 시간에 쫓기던 유학 시절, 모든 리포트 초고는 버스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저 내 엉덩이 하나 붙일 곳만 있으면 책 한 권 얹어 놓을 곳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함을 경험했다.

 

정말 쓰고 싶은 것이 있고 몰입할 수 있다면 장소는 상관없다” 격하게 공감하는 바다. 

 

 

 

마치며..

 

찹터 하나하나 그대로 다 옮겨오고 싶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무릎을 찔러가며 그중 몇 가지만을 리뷰에 올렸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며,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우리 계획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며 어떤 것이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느냐며 따듯한 위로를 보내는 류시화. 

 

영혼은 스스로 고난이 필요한 시기를 알고, 상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를 내면으로 데려가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며 도닥여주는 류시화. 독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한 권의 책이 출간되면 저는 언제나 여행을 떠납니다. 상인처럼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이번에도 인도로 향합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면 구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늘호수로 떠나며 에필로그에 남긴 류시화의 인사다. 나는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을까? 나도 영리한 앵무새의 부탁을 하고 싶다. 

 

“너희들이 싱그러운 나무들 위를 날고 즐겁게 꽃향기를 맡을 때마다 새장 속의 나를 꼭 기억해 주면 좋겠어”

 

나도 앵무새처럼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거겠지.

 

류시화를 보면 온 몸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자신이 하는 선택에 따라오는 ‘사회적 후유증(책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고 그는 ‘떠남’에 주저하지 않는다.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 울리는 소리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떠난다. 자유로운 영혼이다. 나에게 ‘용기’가 필요한 주저함에 그는 ‘행동’으로 답한다. 

 

그를 보면 자연스레 내 모습은 그 실체를 드러낸다. 다른 이들에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비치는 내가 실은 그저 ‘그런 척’ 하는, 아니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은’ 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만의 따뜻한 언어로 전해준 가슴을 치고 들어온 많은 메시지들. 올해만큼은 꼭 그렇게 살아보겠다며 두 주먹 불끈 쥐고 허공에 질러대는 허망한 다짐은 던져버리고 가장 가슴을 치고 들어온 메시지 하나 가슴에 담아 만트라처럼 되뇌며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보자는 야무진 결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