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62] 불꽃같은 사랑과 파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pumpkinn 2022. 3. 2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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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첫 문장의 느낌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나를 비롯하여 내 주위에 있는 행복해 보이는 이들과 불행해 보이는 이들의 그림이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갔다. 물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도 불행도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은 찰나로, 불행은 영원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피식 시니컬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쨌거나 이 방대한 분량의 <안나 카레니나>를 한 구절의 명료한 요약으로 시작하다니, 역시 톨스토이다. 


스테판 & 다리아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 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토리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가 가정교사였던 프랑스 여인과 관계를 가지면서 아내인 돌리와 갈등을 겪게 되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불륜을 알고 화를 내는 부인에게 미소로 답하고 자신의 잘못을 객관적으로는 알지만, 아내의 눈을 좀 더 솜씨 있게 속일 수 없었던 것을 후회하는 철없는 남편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능력도 있고 머리도 좋지만 이성보다는 그 순간의 감성에 따르는 성향의 소유자다.

 

특별한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다수가 지지하는 의견을 따르며 자유주의적 주장을 존중하고 있는 것에 어떤 이유라도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다 현명한 것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생활양식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이승의 생활이 아주 즐거운데 구태여 저승에 대한 두렵고 과장된 말이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지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테판은 현실 적응에 특화되어 있는 재밌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스테판은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거드름을 피우는 귀족은 아니다. 누구나에게 격의 없이 대하고 편하게 대하며, 거리를 지켜줄 줄 알며 삶을 즐기는 남자이기도 하다. 경제관념이 없어 덕분에 속이 깊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인 돌리가 고생을 하지만, 어쨌든, 자기 혼자서는 이 삶이 즐거운, 나름 행복한 남자다. 

 

안나 카레니나의 오빠인 스테판은 우리가 속한 사회적 관념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많아 보이는 인물이지만, 내게는 미워할 수 없는 재밌는 인물로 다가왔다. 그저 철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성숙하지 못한 어른 아이라고나 할까. 같이 사는 부인은 피곤할 수 있겠으나, 사회에서는 매력적인 남성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안나와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이혼의 위기에 있을 때도 알렉세이를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그를 예우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스테판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사는 반면, 다리아는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숙한 인격과 남편과 아이들이 삶의 우선이 되는 여성. 근대사회가 바라는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도 그런 여성상을 강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라면 다리아처럼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을 수 있었을까?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참 싫어한다. 남편과 자식에게 아내라는, 엄마라는 역할을 하는 것은 ‘희생’이라는 표현보다는 당연한 의무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하면서 ‘희생’이라며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남편과 아이들에게만 쏟아부으며 정작 '나'는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결코 아니다. 나의 꿈이나 바램을 저버리고 나를 죽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안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내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가족들을 위해서도 건강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에너지 원천이 되는 것.

 

내가 행복해야 남편도 아이들도 행복하고, 가족에게 더 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나이 들어서 보상심리가 터지는 악순환,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물론 얼마큼 가족에게 시간을 쏟고 또 얼마큼의 시간을 나에게 시간을 쏟을 것인지 균형은 필요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행착오도 분명 있지만 서로 맞추고 배려하며 서로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며 응원한다면 좀 더 성숙한 가족관계가 되지 않겠나. 가족 구성원의 누군가(대체적으로 엄마)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생산적이고 건강한 관계, 내가 추구하는 가족의 그림이다. 

 

어쩌면 그래서 다리아가 그런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가족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겠으나 내게는 좀 갑갑함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이들이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다 커서 자신의 품을 떠났을 때 그녀는 과연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잘 키운 자식들을 보며 느끼는 행복감과 충만감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그와 함께 따라오는 공허감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을까. 쓰고 보니 오지랖이다. 각자의 삶에서 추구하는 행복의 기준과 가치는 모두 다른데 말이다. 

 


 

카레닌과 안나
 

 

안나 카레니나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

 

안나는 스테판 아르카디이치의 여동생으로 아름답고 지적이며 발랄하고 교양이 넘치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19세기 러시아의 상류 사회가 그렇듯이, 안나는 어린 나이에 집안 어른들이 맺어준 나이가 많은 고위 관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과 결혼한다. 사랑이 넘치는 삶은 아니나, 그 당시 러시아의 상류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하하며 카레닌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오빠 스테판과 새언니 다리아가 이혼의 위기에 있을 때 다리아에게 위로가 되어준 것도 시누이인 안나였다. 오빠의 행동을 새언니에게 이해시켜주려는 것이 아닌, 바로 새언니의 마음을 읽어주고 함께해 주는 안나에게 돌리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안나의 따뜻하고 고운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다리아는 훗날, 안나가 브론스키와 떠났을 때 유일하게 안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며 걱정하고 위로해 주는 인물이다.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역시 안나와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다. 안나와의 결혼은 자신의 지위가 걸린 강요된 결혼이었다. 하지만 사무적이긴 하나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해내며 안나와의 결혼 생활을 그런대로 잘 지켜온다. 

 

알렉세이는 모든 것이 자신이 세운 규율 안에서 움직이는 남자다. 심지어 안나가 브론스키와 만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체면 때문에 사교계에서 아름다운 부인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화도 내지 않고 모른 척, 점잖은 척을 한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분야의 책도 열심히 읽는다. 화제가 되는 책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읽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남성이다. 그 역시 모든 것은 자신이 정한 시간에 이루어진다.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에 대한 알렉세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몹시 불편했다. 

“난 불행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녀도 그 사내도 행복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절절이 사랑하는 이의 배신 앞에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되는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알렉세이 알렉산드로 비츠는 오로지 타인의 시선,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명예와 위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로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 것에 급급한 남자다. 그런 남자에게 과연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명예에 흠이 가는 것에만 집착하며 그녀를 합당한 방법으로 벌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며 안나가 알렉세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 그 마음이 행동이 이해가 됐다. 

 

가정을 둔 아녀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 그 자체를 합당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평생을 가식적인 형식에 갇혀 사는  남자와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지옥이 아닐까.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 감정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알렉세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숨이 막혀왔는데, 나중에 알렉세이의 성장 배경을 읽으면서 알렉세이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더욱이 알렉세이가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자기 딸처럼 돌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엄한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한 사랑이 스며있음에 마음이 아팠다. 

 

반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브론스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나중엔 알 것 같았다. 카레닌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랑하는 아들 세르쥐아를 버리고 택한 남자에게서 낳은 딸아이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암튼, 알렉세이는 책 속에서 가장 외롭고 고독한 캐릭터로 연민이 느껴지게 하는 인물이었다. 

 


 

브론스키와 안나

 

안나 카레니나 &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사교계의 호프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브론스키 백작은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갖는 생각은 분명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능한 것이라고 느껴보지도 않은 사회적 형식이라는 것. 그런 그였기에 무도회에서 키티와 춤을 추고, 키티집을 방문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러한 행위가 키티에게 하는 행위가 결혼하려는 의사 없이 처녀를 유혹하는 행위임은 알지 못했다. 그처럼 화려하고 젊은 남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브론스키가 안나 카레니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오랜 구애를 한다. 얼마나 카레니나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톨스토이에 의해 그려지는 브론스키는 남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성격의 남성이다. 

막대한 재화를 가지고 훌륭한 교양과 재능과 온갖 종류의 성공과 명예와 영달에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것들을 모조리 무시해버리고 온갖 인생의 이해 가운데서도 연대와 동료들의 이해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1-P343)”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고 연대에서 상관으로부터 부하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브론스키였기에 그가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며 걱정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사랑'을 얻기 위해 브론스키가 포기하고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크고 많았기 때문이다. 

 

안나는 고위관리의 아내로 상류층의 귀족부인으로서의 뜨거운 사회적 시선을 감내하며 사랑하는 세르쥐아도 뒤로하고 브론스키와 사랑의 밀월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열정적이고 뜨겁고 행복한 시간은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심어진 죄책감과 사회적 고립에서 오는 외로움과 세르쥐아에 대한 그리움 등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행여 브론스키의 마음이 식을까 두려워 낮에는 일로 밤에는 모르핀으로 잠을 청하는 안나. 브론스키가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줄 알면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도록 자기 옆으로 데려오려 하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보며 내가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지며 편집증으로 나타난다. 

 

여자 남자를 떠나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자신의 그물망 속에 가두려 하는 것만큼 끔찍한 형벌이 있을까. 하물며 구속받고 싶어 하지 않는 남자들의 심리적 본능을 볼 때 이미 파멸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론스키의 행동 하나하나, 모든 상황을 자신의 상상 속에서 그려낸 그림으로 그려나가며 브론스키를 숨 막히게 하는 안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그녀는 결심한다.

 

“나는 그이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자”

 

복수와 증오의 화신이 되어 브론스키를 벌하기 위해 급기야 안나느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하여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 세르쥐아까지 버리고 택한 선택이라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그토록 사랑한 브론스키를 벌하고자 삶을 놓아버리다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뛰어든 순간에 몸을 일으켜 뛰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지독한 이기심, 복수하기 위한 죽음, 그토록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일 수 있을까. 그녀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환경과 사회적 시선 속에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한 자신감도 점점 잃어가고, 점점 바닥을 내려치고 있는 자존감으로 정상적인 심리상태는 아니었음을 안다. 하지만, 그녀를 파멸로 이끌고 간 것은 그녀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이었다. 

 

“하느님,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녀의 마지막 외침에 가슴에 통증이 일며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 순간에 본래의 안나로 돌아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그녀. 그녀가 견뎌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어땠을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브론스키를 벌하고 모든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안나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브론스키는 폐인이 되다시피 했고, 전장으로 향하고, 안나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을 옭아매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안나 자신이었다. 


 

레빈과 키티
 

 

키티 쉬체르바쓰키 & 콘스탄틴 드미트 리치 레빈

 

레빈은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의 친구로 곱슬곱슬한 턱수염에 체격이 건장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소년처럼 순진함을 갖고 있으며 부유한 집안의 청년이다. 조실부모했기에 쉬체르바쓰키 집안의 분위기를 동경하며 그 집안의 세 아가씨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어쩐지 자매들 중의 한 사람에게 꼭 반해야 될 것만 같이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딱히 어느 누구도 점찍지 못하고 돌리는 친구 스테판에게 나탈리는 외교관 리보프에게 시집을 간터라 키티가 자신의 ‘사랑에 빠져야만 하는’ 대상으로 느끼는 순진무구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당시 러시아의 농노제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으며 주인들이 농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에 불편함을 가지며 그 시스템을 바꾸고자 실제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키티는 쉬체르바쓰키 집안의 막내딸로, 어렸을 때 레빈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으나 사교계에 데뷔하며 브론스키의 관심을 받으며 그에게 살짝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브론스키가 키티에게 구혼을 할 거라고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브론스키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키티를 쉬운 마음으로 대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즐거운 상황에 충실하게 임했고, 자신의 행동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몰랐을 뿐이다.

 

그렇게 키티의 결혼 문제로 불거지는 상황은 마치 ‘오만과 편견’을 보는 듯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러시아나 영국이나 나라를 불문하고 모두 닮은꼴인 듯. 

 

요즘엔 세상의 풍습이 많이 바뀌어 어머니의 의무가 더욱 어려워졌다며 생각이 많은 공작부인의 모습에서 예나 지금이나 딸을 가지 부모의 마음은 비슷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1-P99)

 

잘 자랄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몸과 마음과 영혼이 반듯하고 건강한 성인이 되도록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겠으나, 딸의 운명을 부모가 ‘결혼’이라는 제도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굳이 식상한 표현을 하지 않아도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건강한 사고를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 결정을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그 역시도 청년 이전까지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겠지만, 성년이 되면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은 온전히 본인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물론 부모의 마음으로 볼때 쉽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실수도 할 것이고, 그 실수를 통해 삶의 레슨을 배우며 성숙해지고 성장하는 우리가 됨을 삶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온전히 부모가 결정해주는 프랑스식과 딸의 자유를 존중하는 영국식만 있다면 나는 영국식을 택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 역시 내 몫인 것. 적어도 부모의 선택에 따랐음을 후회하며 살지는 않을 것 아닌가. 부모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식들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잘 키우고 기도하는 수 밖에.

 

어쨌든, 러시아에서도 중매쟁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하긴, 그 ‘역할’만 두고 보면 어느 나라에선 없었을까. 

 

소설에 나오는 세 유형의 부부 중 당연하겠지만 키티와 레빈 부부가 가장 보편적인 부부 유형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속이 깊고 성숙한 키티와 아내를 사랑하며 종종 폭발하기도 하지만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점점 ‘결혼’이라는 프레임에 적응해 나가는 레빈을 보며 보통 부부의 삶이 느껴졌다. 

 

고지식하면서도 순수한 레빈과 키티와의 신혼 생활을 읽다가 곳곳에서 웃음이 쿡쿡 터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랑하고 들떠서 이뤄진 키티와의 신혼 초기의 생활은 그가 생각한 만큼 꿈속의 핑크빛 생활이 아니었다. 

 

부분 부분 보여주는 레빈과 키티와의 부부싸움은 여성과 남성의 근본적인 차이를 아주 명료하게 보여준다. 나의 신혼 생활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10년 동안 친구였던 남편과 결혼했음에도 서로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에 삐끄덕 거리던 신혼 생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고서야 남자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둘이 토닥거리며 살아가는 레빈과 키티의 모습,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모습, 그런 가운데 함께 성장해가는 부부의 모습은 참 예뻤다. 

 

재밌게도 톨스토이는 제2부와 3부에서 많은 부분을 ‘레빈’에 할애했는데, ‘레빈’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옮겨놓고자 했던 것 같다. 안나 카레니나는 죽었지만 소설은 끝나지 않고 레빈의 삶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나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무엇을 나는 발견한 것일지, 또 죽음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레빈.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3-P522)

 

치열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성찰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레빈을 보며 ‘행동하는 인간’의 표상 파우스트가 떠올랐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보통 사람인 우리들이 갖고 있는 찌질한 모습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레빈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치열하게 임하며 삶 속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할 때 우리는 성숙해지고 좀 더 나은 인간으로 향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빈’이라는 이름도 자신의 이름 ‘레프’에서 따왔다는 것을 보면 레빈 안에 자신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며…

 

흔히들 톨스토이를 빼놓고는 19세기 유럽 문학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작가’라는 타이틀보다는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더 걸맞게 느껴지는 레프 톨스토이. 그는 이미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첫 장편소설’이라며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안나 카레니나>에 모든 것을 다 써넣었고 아무것도 달리 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고백할 만큼, 그는 이 소설의 집필에 매달릴 당시에 그는 일기를 쓰지 못할 정도로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것.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원형을 푸쉬킨의 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가르퉁에게서 가져왔는데, 비록 성격이나 생애는 창작이고 외모적인 면만을 따왔다지만 니나의 원형이 푸쉬킨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마치 영화 같은 스토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장편소설을 최초로 위대한 예술적 의의를 지목했고, 논문을 통해 “<안나 카레니나>는 예술작품으로서 완전 무결하다”고 쓰며 칭송하지만, 정작 톨스토이는 이 논문을 무시하고 넘겼으면 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로 먼저 보았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내가 정말이지 좋아하는 영국 배우 키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로 보았다. <오만과 편견>에서 상대역으로 나왔던 그 매력적인 매튜 맥퍼딘이 철 없는 오빠 스테판 아르카디이지 역으로 나온 것이 재밌었다.

 

책을 읽으면서 각 인물 캐스팅이 탁월해 감탄하며 읽었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 역은 키라 나이틀리가 아니면 상상이 되지 않을만큼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여주었고, 키티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여야 했으며, 레빈 역시 순수한 영혼의 미소를 지닌 ‘어바웃 타임’의 도널 글리슨이어야 했다. 브론스키 역의 아론 존슨도 좋았다.

 

다만 주드 로가 카레닌 역을 맡은 것이 좀 아쉬웠다. 주드 로가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많은 영화에서 멋진 플레이보이로 매력을 발산하던 주드 로가 엄격하고 이성적이며 카레닌으로 나오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은 내 생각.

 

이렇게 길고 길었던 <안나 카레니나>가 끝났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 책을 읽고 금방 리뷰를 쓰지 못했다. 숲이 보이기 보다는 그 안에 있는 수 많은 나무들이 서로 튀어나와 정리가 힘들었다. 책을 덮고 한 달이 지난 지금에야 리뷰를 쓸 용기를 내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그대로의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은 아니예요

 

돌리가 안나에게 했던 가슴에 치고 온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사랑'을 착각하곤 한다. 내가 원하는 프레임 안에 원하는 그림의 사랑을 넣어놓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래놓고 원하는 그림대로 나오지 않으면 슬퍼하고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그러고는 상대방이 변했다고 바뀌었다며 사랑이 식었다고 고통 속에 빠진다. 사실 그 모두 내가 그려놓은 그림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니었음을 알지 못함에서 온, 스스로 자처한 고통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서로에게 많은 고통이 수반되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노부부가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워보이는 게 아닐까. 그 모든 것을 함께 이겨내고 지켜온 사랑이니.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