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58]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고 / 박철 옮김

pumpkinn 2021. 9. 24. 09:39

구스타프 도레의 세르반테스 삽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어린 시절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기에 굳이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에 대한 정의를 빌려올 필요도 없이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대표적인 고전 작품 중의 하나다.

 

너무나 익숙해서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하는 ‘일상’처럼, 오랜 시간 내 책장에 꽂혀 있었음에도 너무 익숙해져서 내 시선에 잡히지 않았던 <돈키호테>가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색채를 띄면서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작가 김영하 때문이었다. 김영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설과 현실을 착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돈키호테’와 ‘마담 보바리’에 대한 언급을 자주 했는데 그렇게 자주 듣다 보니 어느덧 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결국엔 책을 꺼내들 게 되었던 게다.

 

 

 

책을 펴자 특이하게도 서문에 앞서 이 책의 인쇄 판매에 대한 상세한 법적 절차의 내용과 함께 국왕의 칙허장까지 함께 올려져 있었다. 그 옛날에 이렇게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 책이 출판되었다니. 심지어 원본에서 벗어나는 오류가 없다는 오류 검증서까지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돈키호테는 첫 페이지부터 나의 흥미를 자극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못생긴 데다 도무지 귀여운 맛이라고는 없는 자식을 가지 아버지가 그 자식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그만 자식의 결점을 조금도 보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재능과 장점으로 생각해서, 자기 친구들에게 똑똑하고 잘난 것으로 얘기를 하는 경우도 혹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돈키호테의 아비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의 의붓아비에 지나지 않는 만큼,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대들에게 내가 낳은 이 녀석의 결점들을 용서해 주십사고, 좀 봐주십사고, 남들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원하지도 않겠다.” (P9)

 

세상에는 돈키호테의 아비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의붓아버지라며, 아들의 결점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어찌나 애틋하게 다가오던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못난 아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져 짠한 마음이 일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마치 미리 주사를 놓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리뷰 하나를 써도 내 새끼 같은 느낌이 드는데, 하물며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쓴 장편 소설은 말해 뭐할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을 지어내는 데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만, 지금 그대가 읽고 있는 이 서론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서론을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무얼 써야 할지 몰라 펜을 내동댕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종이를 앞에 놓고, 펜을 귀에 꽂고, 팔꿈치를 책상에 괴고, 손은 뺨에다 받치고, 무얼 쓸까 하고 속을 썩이고 있는데….” (P10)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불리며 성서에 비유까지 되는 역작을 쓴 세르반데스가 이랬는데, 그저 인터넷 공간에 리뷰나 끄적거리는 나야 오죽하겠나, 위로가 느껴졌다. 이렇게 세르반테스가 서문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상황에 찾아온 친구와 나누는 대화 부분은 단연코 압권이었다. 이 재밌고 유쾌한 서문을 읽으며 본 내용을 읽기도 전에 나는 온전히 매료되었다. 

 

특히, 주석을 다는 부분에 대한 내용은 어찌나 유머러스하면서도 논리적인지 읽다가 깔깔 웃음이 터졌다. 작가들의 고민 세계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논문을 쓰면서 출처 올리는 것 때문에 골치 아팠던 경험이 있어 세르반테스가 주석 다는 일에 그리 골머리 썩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 더 재밌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암튼,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자면, 돈키호테는 라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 시골 귀족으로 ‘착한 알론소 키아노’라 불리는 사람으로 너무나 기사소설을 좋아한 나머지 자신이 우상처럼 좋아하는 아마디스나 팔메린 같은 편력기사 중의 한 명이라 착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스로에게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중세의 복장을 하고, 허접한 투구와 낡은 창과 비쩍 마른 말을 구하고는 그 볼품없는 말에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자칭 ‘슬픈 얼굴의 기사’ 돈키호테의 모험에 함께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말이기에 그 명성에 걸맞는 것으로 운율까지 맞춰 신중하게 고른 이름이다.

 

허접하긴 해도 대충 편력기사로서의 기본적인 형색을 갖추고 나니 하나가 빠진 느낌이 드는 돈키호테. 모든 편력기사가 그러하듯 밤을 지새우며 애틋한 사랑을 보내야 하는 대상을 아직 정하지 않은 것이다.

 

마침 마을 근처에 시골 처녀 농부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알돈사 로렌소였다. 그녀는 돈키호테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돈키호테는 혼자 그렇게 마음속의 연인으로 삼기로 결정하고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렇게 우리의 슬픈 얼굴의 기사 돈키호테에게 연민의 정을 보낼 대상이 정해진다. 

 

마음만큼 흡족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편력기사로서의 구색이 갖춰지니 모험을 떠나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모험을 나서다가 하마터면 이제 막 시작한 계획을 그만둘 뻔한다. 자신이 정식 기사가 아님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았음이다. 그런다고 멈출 우리의 돈키호테가 아니다. 길을 가다 눈에 띈 주막은 돈키호테에게는 성으로 보였고, 주막집 주인은 성주님으로 보였으니. 온갖 해프닝과 우여곡절 끝에 주막집 주인은 성주님 행세를 하며 돈키호테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하는 의식을 치러 준다. 이렇게 온전히 편력 기사로서의 모든 자격을 갖춘 돈키호테는 본격적인 모험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대망의 꿈을 안고 시작한 돈키호테의 모험은 시작부터 평탄치 않다. 상인들 일행을 만난 돈키호테는 그들에게 다짜고짜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라만차의 여제, 둘시네아 델 도보소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은 없다고 맹세하라고 강요하는 통에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기묘한 행색을 한 미치광이의 헛소리에 결국 싸움은 벌어지고, 돈키호테는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 드러눕는다. 그런 그를 마음씨 착한 농부가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간다. 기사로서의 그의 첫 번째 출장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우리의 돈키호테가 아니다. 그는 조카딸과 오랜 친구인 신부와 이발사 등 주위 사람들의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출장을 떠나게 된다. 이번에는 그나마 조금 갖고 있던 재산을 팔고, 머리가 조금 아둔한 이웃집 농부를 섬의 영주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구슬리고 구슬려서 종자까지 데리고는 대망의 2차 출정을 떠나는 것이다. 그 유명한 돈키호테가 거인이라 착각하며 풍차와 싸우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 2차 출정에서 경험하는 모험 이야기가 돈키호테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스토리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세르반테스

 

 

모든 상황을 자신이 읽은 소설 속의 상황으로 착각하여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엉뚱하게 넘치는 기사도 정신 때문에 어이없이 당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때마다 경을 치르게 되는 불쌍한 산초를 보며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웃음이 먼저 터진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거인의 머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몹시 불행 진다는 것뿐입니다. 제가 약속받은 백작 지위와 그 영지는 물에 녹아내리는 소금처럼 물거품이 되어버리겠지요. 잠들어 있었던 주인보다 깨어 있던 산초가 더욱 불행했다.” (P495)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했다. 돈키호테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초는 점점 주인을 닮아가는 듯하다. 난도질을 하여 쏟아진 포도주를 보고는 있지도 않은 거인의 머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약속받은 영지를 받지 못할 것에 슬픔에 젖어 있는 산초의 모습에 웃음이 빵 터졌다. 

 

안장을 마구라 하고, 길가던 이발사로부터 빼앗은 대야를 투구라고 우기며 싸우는 돈키호테는 정말이지 가관이다. 매번 당하는 주막집 주인은 또 어떻고. 자신의 주인님의 못 말리는 무모한 행동 때문에 늘 희생자가 되는 산초의 투덜거림이 묻어있는 조언은  평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혜로워서 오히려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계속 이렇게 에피소드는 이어지고 나중에 신부와 친구 이발사가 다른 등장인물들과 함께 연극을 하며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워낙 재밌는 스토리들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 마치 옛날이야기를 읽듯 그렇게 후루룩 읽혔다. 물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배꼽 잡는 재밌는 모험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뿐만 아니라 소설 속의 또 다른 소설이 펼쳐지듯 여러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르셀라와 그리소스토모 이야기, 카르데니오와 루신다 이야기, 도로테아와 페르난도 이야기, 클라라와 목동으로 변신한 루이스 청년 이야기 등등은 코믹한 모험담 사이에서 마치 하이틴 로맨스를 읽듯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보여줌으로써 맛갈스런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 외로, 터어키의 이름 짓는 풍습도 재밌었지만, 특히,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바로 안셀모가 아름다운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기 위해 친구에게 아내를 유혹해달라며 무모한 부탁을 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였는데, 그 심리묘사가 참으로 탁월했다. 

 

 

이름 속에 숨겨진 의미

 

재밌는 것은 세르반테스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의 이름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붙여지었다고 한다. 지었다. 우리가 스페인어권의 독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이름이나 지명에 숨겨져 있는 의미까지 이해하기엔 쉽지 않겠으나, 그 의미를 알고 나면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몇몇을 살펴보자면….

 

우선, 종자 산초 판사의 이름이 재밌다. 스페인어로는 Sancho Panza로 ‘Panza’는 ‘배불뚝이’를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배가 많이 나온 뚱뚱한 사람을 표현할 때 쓰인다.

 

그런가 하면, 돈키호테가 스스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대상 둘시네아 델 토보소의 이름도 그 숨겨진 의미가 심상치 않다. Dulcinea del Teboso, 즉 토보소의 둘시네아인데, 스페인어로 Dulcinea는 Dulce는 달콤한, Sweet을 의미하는데, 속칭 창녀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고 한다.

 

또한, ‘라만차’는 스페인어로 La Mancha인데, La는 정관사 The에 해당하고, Mancha는 명사로 ‘더럽다’, ‘오염됐다’ 또는 ‘얼룩졌다’의 의미다. 얼굴에 피어난 기미도 Mancha라고 표현한다. 라만차라는 지방엔 유태인이 살았기 때문에 순수 혈통의 지역이 아니라는 의미로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오염된 지방을 의미한다고.

 

이렇듯 세르반테스는 곳곳에 이름 하나하나에도 장치를 숨겨놓으며 복선을 깔아놓았다. 몇 안 되는 단어의 의미로도 재미가 풍성해지는데, 돈키호테 전체에 걸쳐 숨겨져 있는 복선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도 대단한 재미일 것이다.

 

편력기사와 귀부인

 

모든 편력기사들은 연모하는 귀부인을 한 명씩 갖고(?) 있는데, 재밌는 것은 그 연모의 대상이 뒤는 귀부인은 자신이 그 대상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이 귀부인은 ‘성모 마리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를 흠모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존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편력기사의 내면화된 여성성에 대해 흥미로운 글이 있어 빌려왔다.

“편력기사는 신성한 여성성을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 봉사하는 종으로 여기며 성모 마리아가 가진 분별력으로 세상의 상황을 판단한다. 나르시시즘이나 편견, 사태 판단의 왜곡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공정한 기사로서 명예를 금과옥조로 삼는다고 한다. (…) 편력기사들은 중세적 개념에서 성모 마리아를 숭상하는 헌신적 태도를 통해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종교적, 사회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사랑 없는 정의는 합리적이지만 파괴적일 수 있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유연하지만 경계를 허물어뜨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출처: 최민식의 정신분석, 나를 찾아가는 여행> 중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

 

“그 세르반테스란 작가는 나하고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인데, 그 친구는 시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 친구가 지은 책은 기발한 생각들이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 시작만 해놓고 결론이 없단 말이죠. 혹시 고칠 곳을 고치면 지금은 안 되지만 장치 우리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선생의 방에 놓아두세요.” (P89)

 

시작만 해놓고 결론이 없다며 셀프디스 하는 세르반테스의 빈정거림에 웃음이 난다. ‘시보다는 불행에 더 익숙한 세르반테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과연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547년 9월 29일, 몰락한 이달고 집안의 뿌리를 둔 이발사이자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세르반테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고통은 그의 삶 전체에 걸쳐 연이어 일어난다. 스페인 순수 혈통을 중시하던 당시의 스페인 상황은, 의사나 변호사 같은 직업은 개종한 유태인들이 맡아서 했기에 보수도 적었고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세르반테스의 유년시절은 가난과 비참함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어쩌면 세르반테스가 ‘La Mancha’라는 지역명을 쓴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르반테스의 학력은 불분명하지만 저명한 인문학자인 Lopez de Hoyos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빚 때문에 1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다녔고, 군에 자원입대해 터키군에 맞서 싸우기도 하는데, 이때 열병에 걸리고, 또한 총상을 입고 왼손이 불구가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그러다 튀르크 해적의 습격으로 노예 신분으로 5년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천신만고 끝에 풀려나는데, 그때가 33세였다. 그 후 황제가 써준 표창장을 갖고 제대하면서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알제 해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또 5년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몸 값이 지불되어 풀려나고 이런저런 직책을 맡으나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일로 파문과 감옥행을 다시 이어가게 된다. 그중에는 어이없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기도 하니, 세르반테스의 생애는 참으로 고달픈 삶은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돈키호테의 삶과 닮았다.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세비야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돈이 필요해서 쓰게 된 소설이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유럽을 휩쓴 소설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인기를 끌지만, 판권을 미리 팔았기에 정작 그에게 떨어진 돈은 소액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돈키호테 소설이 인기를 끌자, 엉뚱하게도 1614년 다른 작가가 속편을 내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부랴부랴 돈키호테 2편을 집필하며 1615년에 출간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해 당뇨병과 간경변으로 1616년 4월 22일 삶을 마감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세르반테스. 그에게 연이어 일어난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사건들은 영화라고 해도 억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시 보다 불행에 더 익숙한 세르반테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부인할 수 없는 씁쓸하면서도 싸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삶만 힘들었을까. <돈키호테>도 수난의 시대를 겪는다. <돈키호테>는 1640년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 후 다시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약 300년이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때론 멀쩡하다가 미치광이가 되어 떠벌리는 돈키호테 이야기는 당시 스페인의 정치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말하고 싶었던 세르반테스를 대변하고 있었기에 잘못하면 또다시 감옥에 갇힐 수 있으니, 미치광이가 헛소리하는 것이라며 자신이 숨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지만, 정치계나 종교계는 불편했을 것이다. 그 당시 사회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옮긴이, 박철 교수

 

 

옮긴이에 대한 감사

 

돈키호테는 1915년에 ‘둔기호 전기’라는 이름으로 육당 최남선 선생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의외로 오래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음에 조금 놀라웠다.

 

내가 읽은 버전은 <돈키호테>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 비센테 가오스의 스페인어판 <돈키호테>를 박철 교수가 번역하여 출간한 판본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외국 도서를 우리 나라말로 읽으며 깊은 감동을 느끼거나, 원본의 윗트 넘치고 유머러스한 문장에 재미를 한껏 느끼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번역가의 역할이 크기에 깊은 감사가 느껴진다. 

 

돈키호테 스럽게 예스러운 말투 속에서도 빛나는 유머와 시니컬한 풍자에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읽었고, 그때마다 맛깔스럽게 옮겨준 번역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함께 했다.

 

박철 교수의 돈키호테를 읽으며 감사가 깊이 느껴졌던 것은, 긴 장편 소설을 쓰다 보면 세르반테스 자신도 헷갈렸던 듯, 그런 부분을 조목조목 주석을 달아가며 정정해주고 설명해주는 옮긴이의 섬세함과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을까.

 

“이해하기 쉬운 번역과 역주로 인해 독자들이 진정한 작품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P731)

 

네, 바로 그랬습니다!! 
꼭 전해드리고 싶다.

 

 

리뷰를 마치며…

 

누가 뭐라던 끝까지 자신의 꿈을 향해 돌진했던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하늘만 바라보는 주인에게 때때로 발을 딛고 서있는 땅을 바라보게 하는 현실주의자 산초. 함께 모험 여행을 하며 조금씩 닮아가는 그들을 보며, 우리에겐 돈키호테와 산초가 함께 존재할 때 우리의 삶은 삶다워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한쪽으로 치우쳤던 삶은 균형을 잡아가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내는 것이라는 생각.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내가 많이 웃었던 이유는 그 안에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책과 현실의 혼동은 어띠 돈키호테와 보봐리 부인만 그랬을까.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는 나나에게 푹 빠져 흉내를 내고 다니느라 '침묵' 하며 보냈던 대학 시절, 조앤리 책을 읽고는 즐기지도 않는 와인과 치즈를 사들고 집에 들어오던 기억.  하이틴 로맨스에 푹 빠져 돈키호테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이름을 짓고 가슴에 묻어놓았듯, 앤 햄프슨 작가의 주인공 이름을 노트에 그려놓고 가슴 설레 하던 기억, 심지어 나나 무스꾸리가 좋아서 단발머리에 검은테 안경과 굵은 반지를 가운데 손가락에 끼고 다녔던 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오버랩되면서 눈물 그렁대는 그리움과 함께 그렇게 깔깔대며 읽었다.

 

재미없고 힘들게 느껴지는 오늘의 일상 속에 있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으며, 나의 즐거움을 찾으며, 조금 느린 걸음이라도 또 하나의 꿈을 향해 가는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고 즐거워지겠지. 나이가 들어도 꿈을 잃지 않는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며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