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이야기

안데르센의 '미운오리 새끼'에 대한 단상

pumpkinn 2017. 4. 5. 07:39




안데르센의 삶에 대해 알고 난 후 '미운 오리 새끼'를 읽으니


무척 슬프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의 '미운 오리 새끼'는 내게 희망을 안겨주고 꿈을 꾸게 하며,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도 어쩌면 나는 백조일지 모르니 포기하지 말라며 용기를 안겨주던 책이었다.


누에고치가 허물을 벗는 고통을 이겨내고 나비가 되듯이,


나는 지금 백조가 되기 위해 잠시 고통을 겪는 것이고 훈련 중이라고 말이다.


 


재밌게도 그렇게 나는 절대적으로 ‘오리’가 아닌 ‘백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나는 ‘미운 오리 새끼’여야 했다.


백조가 되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참으로 많이 찾아다녔고 헤매고 다녔더랬다.


그렇게 내겐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미운오리 새끼’였다.


이렇듯 나만의 스토리가 묻어있기에


‘미운 오리 새끼’는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작가의 삶을 알고 다시 읽는 ‘미운 오리 새끼’는 달랐다.


슬펐다. 처절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른 오리들에게 맞고 암탉의 부리에 쪼이고,


닭 키우는 처녀의 발에 채이고 겨울철에 떠돌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


 


안데르센이 얼마나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 콜린의 세상에 함께하고 싶었는지가 느껴져


너무 안쓰러웠다.


고통을 당해도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에게 받는 고통이 차라리 낫다는 것..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한국 생활이나 외국 생활이나 살아가면서 한번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민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어차피 당할 거라면 같은 한국 사람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브라질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덜 속상하고 덜 억울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그들이 갑이고 내가 을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


멀리 타국까지 와서 서로 믿고 지내는 같은 나라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더 깊은 상처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어쩌면 안데르센도 그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신분의 차이는 그토록 집착이었고 슬픔이었을까…?


가져보지 못한 자는, 있어보지 못한 자는,


그것을 놓을 수 없다.


왜냐면, 우리는 가져보지 못한 것을 놓을 수는 없다.


가져본 자 만이 놓을 수 있고, 있어본 자만이 놓을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콜린의 형제이기를 갈망해도 동경으로만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그 옆에라도 묻히고 싶었던 안데르센은 애잔함을 안겨주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동화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삶…


왜 어린이를 위한 글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


.

 


Pato Fu의 Uma Canção pra Viver Mais..






Pato Fu의 Uma Canção pra Viver Mais 다른 버젼..

너무 아름다워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