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으로

어린 시절 동두천에서의 기억...

pumpkinn 2012. 10. 29. 09:45

 

 

 

국민학교 2학년때 우리는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야했다.

그래야 했던 이유는 아빠의 사업 실패...

 

사실 아빠는 우리 모두를 데리고 먼저 대구로 내려가셨으나...

우리가 간 곳의 분위기가 너무 열악했던 터라...

우리들이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 같단 생각에서였는지...

이틀 후 아빠는 짐트럭을 불러 오셨고....

우리는 다시 모든 짐을 싸들고 동두천으로 가셨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당에 왔다갔다 하는 돼지가 무서워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덜덜 떨던 내 모습...

 

엄마와 아빠는 그 어린 올망졸망한 4남매(그당시)를 데리고 막막하셨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남매는 그저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재밌기만 했다..

 

우리가 동두천에 도착하여 짐을 내린 곳은 길 건너에 미군 부대가 보이는 집이었다..

멋진 양옥집에서 살다가 다세대 가구가 모여 사는 부엌 하나에 달랑 작은 방 하나 달린 곳..

화장실을 가기 위해선 우리 집(?)에서 나와 모두가 함께 쓰는 마당이 있었는데...

그 마당에는 커다란 꽃밭과 채소밭이 있었다.  그 사이로 난 길을 지나야 화장실을 갈 수 있었는데...

깊 옆으로 피어있는 꽃들에 거미줄이 쳐져있으면 무서워서 그 길을 지나가질 못해 늘 엄마를 부르곤 했다..

엄마가 손 잡고 같이 가주면 무섭지가 않았다...

 

엄마...

엄마는 가정부를 둘씩이나 두셨던 사모님에서 쪽방 신세로 떨어지셨지만...

나는 엄마가 걱정하시거나 불평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렇게 웃음이 많으시고 긍정적인 성격인 엄마셨기에...

그런 삶에서조차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우리를 밝게 키우실 수 있었던건 아닐까...

내가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 바로 그부분이다...

 

항상 웃고있는 모습 때문인지...

나를 아는 분들이 고생을 안하고 자란 것 같다는 말을 들을때면... (물론 고생 많았고, 힘든 일 많았지만..)

엄마가 고맙기만 하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게 키워주신 엄마가...

 

 

동두천으로 내려가기 전, 그당시 내가 다녔던 곳이 매원 국민학교였었다...

(그래서 와우 8기에 박현수님이 매원고등학교 선생님이라 소개 하셨을 때 무척 반가웠다.

혹시나 같은 학교인가 싶어서..)

우리 학교 안에는 스케이트장이 있었었고..

토요일이면 특별활동으로 빙상부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배웠더랬다.

그리고 종종 동대문 스케이트장으로 가 우리는 피겨 스케이팅 무용 동작을 배우곤 했다..

(혹시 나도 제2의 연아가 될 수..? ^^;;)

 

네모와 동그라미가 사선으로 겹쳐 그려져있는 학교 마크...

학교 교복을 비롯하여 공책, 가방, 그리고 심지어 연필까지 학교 마크가 찍혀있었다...

어린 우리는 그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동두천으로 이사한 후 우리는 동보 국민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을 갔는데...

우리는 서울에서처럼 교복을 입었고, 늘 들고 다니던 학교 가방에, 노트에, 연필에...

그렇게 학교엘 갔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

 

시골 학교라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어떤 아이들인지 보러오셨다...

숫기가 없는 나에게 그러한 모든 것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고...

또한, 친구들의 놀림과 왕따 속에 학교 가는게 싫어졌다...

 

그당시 덩치도 컸고, 뚱뚱하고..

돋보기 안경까지 쓴 나...

예뻤으면 왕따를 당하지 않았었을까..?’

어렸을 때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해보곤 했다.

 

뚱뚱하고 못생긴 것이 부잣집 딸래미 티낸다고 갖고 다니는 모든 것에 학교 마크가 찍혀있고...

색연필이랑 크레파스도 갯수가 다른 케이스로 들구 다닌다는 것...

선생님의 관심을 많이 받는다는 것...

(아빠가 사업 실패로 내려온 것을 아셨기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는 선생님의 마음..)

그 모든 것이 왕따의 이유가 되었다...

 

단지 내가 서울에서 온 전학생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졌으나...

어렸던 나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몰랐고, 그저 학교 가는게 싫기만 했다...

 

교복이야 다른 옷을 입으면 되었지만...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마크가 찍혀있지 않은 가방을 들고 싶었고...

학교 마크가 찍혀있지 않은 공책과 연필을 갖고 싶었다...

우선은 눈에 보이는 그것부터 바뀌었음 했다..그러면 왕따를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와서 엄마에게 가방과 공책을 새로 사달라고 떼쓰는 오빠와 나...

하지만 엄마는 그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셨음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런 우리를 보며 엄마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엄마가 좀처런 가방을 새로 사주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하루는 오빠와 나랑 집에 돌아오는데, 오빠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는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연필 깎는 칼로 가방에 상처를 내고...

연필과 볼펜으로 가방에 온 천지 낙서를 다 했다...

 

그러구선 엄마께 보여드렸다...

가방이 이렇게너무 망가져서 쓸수가 없다고.. 그래서 새 가방이 필요하다고...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솔직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아픔이고 고통이다.

인제 나에게도 딸이 있으니까..

 

우리의 그 못된 행실을 엄마가 모르셨을까마는...

엄마는 우리에게 말없이 가방을 사 주셨다...

마치 마크가 찍히지 않은 가방을 들고 다니면,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거란 생각...

 

하지만, 가방도 바뀌고, 공책도 바뀌었는데...

나는 여전이 왕따였다...

내가 교실에 들어가면, 부반장이었던 친구는 친구 하나를 팔짱끼고 구석으로 데려가..

나를 쳐다보며 속닥거렸다.

그러면 친구들 하나 둘 모여 나를 힐끔힐끔쳐다보며 무언가를 얘기를 했다..

 

늘 그렇게 나는 혼자였다...

그러다가 어쩌다 변덕이 나서 내게 웃어주면...

나는 참 행복했던 것 같다.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구나..’하는 착각...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의 눈에는 들어오셨던걸까...?

하루는 우리 둘을 부르셨다...

그러고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것은 그 친구와 내가 우리 반에서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될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때 선생님은 대표라는 표현을 쓰셨다..

 

우리 둘이 반의 대표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내야 하고, 혹시 친구들이 말썽을 피우거나 말을 안들으면...

둘이 상의해서 해결을 하고, 혹시 그것이 안되면 선생님께 알려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둘이 아주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하셨다.

왜냐면 서로 함께 도와주어야 하니까...

그리고 이것은 우리끼리의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된다는 것...

 

그때 우리는 겨우 2학년이었다...

선생님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그런 임무(?)를 주셨는지...

선생님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릴 만한 지혜가 없었다...

 

선생님과 우리만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 아주 굉장한 무엇이었고...

단지 우리는 반에서 중대한 임무를 맡았기에 우리 둘이 잘 지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반 친구들을 잘 보살펴(?)야 하고 싸울때도 우리가 중재 해야 한다는 것...

우린 그런 의무감에 불탔더랬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만 가득이었다...

 

성향상 주로 그 친구가 앞에 나서 해결하고, 나는 뒤에 있었지만...

그 후로 우리는 정말 사이좋게 지냈다. 한번도 싸우지 않았고...

그 친구는 한번도 나를 왕따시키지 않았다...

 

그 친구가 나와 함께 사이좋게 지내니 다른 친구들도 내게 다가왔다...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부반장이었던 그 친구는 아마도 반의 대장급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을까..?

우리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잃으시고 직장을 구하러 다니시던 아빠는...

8군에 어카운턴트로 취직이 되셨던게다...

 

그렇게 나의 짧은 동두천에서의 생활은 끝이났다...

반장 홍 수진.. 부반장 김 성연.. 회장 김 종필...

놀랍게도 기억력이 나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친구들 이름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경써주시고 배려해주신 따뜻한 우리 윤성호 선생님...

성함은 남자같은데 여자 선생님이셨다..

아직 얼굴도 기억이 난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그렇게 사랑으로 대해주시던 선생님을 못잊어...

보고싶다며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곤 하던 기억이 있다..

정작 통화가 되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선생님 말씀에 ..,,”하다가 끝나던 전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되고보니, 선생님이 얼마나 지혜롭게 그 상황을 이끌어주셨는지....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관계 속에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부분이다...

 

가끔씩 선생님이 매점에서 점심을 드시다가...

(학교 뒤에 선생님들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곳이 있었다..)

행여 내가 지나가는 것이라도 보시면..

꼭 불러서 같이 먹자고 하시던 선생님...

그때 먹은 도라지 나물처럼 맛있는 도라지 무침을 먹어본 적이 없다...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큰 상처로 남을 수 있었던 그때의 기억들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이 모두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음을....

 

사랑하는 윤성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디서든 건강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

.

 

Susan Jackson의 Ever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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