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74] 김문경의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을 읽고...

pumpkinn 2012. 4. 28. 19:47

 

 

와우~!! 첫 페이지부터 탄성부터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거지?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지만, 음악 안에 묻어있는 신화와 역사, 철학, 시대적 배경 그리고 조미료처럼 뿌려진 사랑이야기까지 그려져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 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애타는  아쉬움을 느끼며 미친 듯이 열광하며 읽었다. 너무나 맛있어서 꼭꼭 씹어서 온전히 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가 소개하는 음악들을 하나하나 찾아 들으면서 그 안에 온전히 묻혀있고 싶었다, 아니 그 안에서 죽고 싶었다.

 

음악의 형식과 장르부터 작곡가의 삶의 배경, 지휘자에 관한 이야기, 같은 주제로 다르게 연주되는 그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음악은 어떻게 구분되어 있으면 이런저런 부분은 왜 현악기로 연주되었는지. 왜 합창으로 불러졌는지. 토카타가 그 부분에서 엉뚱하게 등장하는지 등등. 음악 전반에 걸쳐 하나하나 섬세한 부분까지 자신의 느낌까지 섞어서 비교 설명해주는 김문경의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도 박학한 지식에 나는 그저 경악할 뿐이었다.

 

나도 음악 없이는 못 산다고 외치는 사람 아닌가. 창피했다. 나는 무엇을 알아도 무엇하나 제대로 깊이 있게 전문지식을 갖고 아는 게 하. 나. 도. 없음에 한심스러웠다. 나는 좋으면 내 열망이 '즐거움' 안에서 충족되는 만큼만 공부한다. 딱 거기까지만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와 나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나의 성향 때문에 어떤 한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삶을 사는 이들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식성 다발성으로 여러 부분에 흥미는 많으나 햇빛을 한 곳으로 모아 불을 내는 돋보기처럼 그렇게 나의 흥미와 열정은 한 곳으로 열정적으로 모아지지 않는다. 초점이 닿기 전에 따뜻해졌다 싶으면 곧 다른 곳으로 분산되어버린다. 

 


 

이 책이 그토록 재밌었던 이유는 ‘클래식’은 정말 문외한인 내게 클래식이 얼마나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신화가 있고, 철학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삶이 있다며 살짝살짝 맛을 보여주며 내게 클래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마치 살짝 맛을 보여주고는 ‘나 잡아봐라~’하며 꼬리를 감추며 도망가는 얄미운 그녀처럼 그렇게 나를 두근거림 속에 미치게 했던 것이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그렇게 내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방인인 수많은 작곡가들과 지휘자들을 마치 지아들 이름 부르듯 불러대며 요리조리 사생활부터 기법에 이르기까지 주물럭대는 김문경. 그의 방대한 지식 속에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가.

 

새로운 분야를 안다는 것, 새로운 장르를 깊이 있게 배우게 된다는 것은 내겐 언제나 들뜸이고 흥분이고 즐거움이다. 더욱이 그것이 음악이라면 그 기쁨은 제곱이 아니라, 곱하기 Infinite 다. 게다가 보너스로 인제 이름 정도는 아는 척할 수 정도로 나의 지적 허영심을 가득 채워주었기에 또한 그렇게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은 다소 Old Fashion 한 제목과는 달리 이렇게 아주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내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감동을 넘어선 감동과 흥분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은 저자의 너무나도 흥미롭고 재밌는 설명과 함께 나를 깔깔 넘어가게 했던 신세대적인 표현들 속에 내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느껴졌던 ‘클래식’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지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냥 읽고 페이지를 넘어가는 형식이 아닌, 저자가 책 속에서 찹터별로 나누어 다룬 주제로 다룬 음악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읽었다. 김문경이 말한 부분이 어디쯤인지, 그가 그렇게 절절하게 느꼈던 부분이 어디쯤인지, 정말 그 웅장한 악기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는지 요정들의 춤으로 들렸는지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리뷰를 뭉뚱그려하지 않고 역시 챕터별로 정리했다. 순간순간 느낀 내 느낌을 온전히 옮겨적고 싶었기에.. 또 그래야만 했기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Classic #1 오르페우스 열전

 

에우리디체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사춘기 시절 들었던 바로 그 애절하고 슬픈 사랑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던 바로 그 이야기. 에우리디체는 혹시나 자기가 따라오는지 걱정되어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 때문에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며 죽게 되지만, 그때 에우리디체가 외친 한마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사랑해요 올페우스"

 

올페우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해 겁도 없이 죽음의 문턱에 왔느냐며 호통을 치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 앞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잃은 나는 심장이 없는 사람" 심장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며, 지옥이던 그보다 더한 곳이던 에우리디체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라며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며 결국 지옥의 뱃상을 감동시켜 죽음의 강을 건너며 결국 지옥의 왕으로부터 에우리디체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순간의 실수로 에우리디체는 다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다시는 에우리디체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올페우스. 애절하고 슬프다 못해 비극적인 사랑은 그렇게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 안에 함께하는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사랑이야기.

 

이 작품은 서로 다르게 해석이 되는데, 이태리의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독일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그리고 프랑스의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이 세 오페라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왜 그런 다른 분위기의 오르페오가 나왔는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을 엿보는 것은 또 다른 별미였다.

 

특히,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 영영 헤어지게 되는 장면이 각 작곡가의 구상에 따라 달라짐이 재밌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뒤를 돌아보고,  글룩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케의 바가지(?)에 못 이겨 뒤를 돌아보고, 오펜바흐의 오르페오는 주피터의 시샘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앞의 두 오르페오는 헤어짐을 슬퍼하는 사랑의 오르페오라면, 마지막 오펜바흐의 오르페오는 지옥으로 도로 떨어지는 에우리디케를 보면 하는 수 없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지옥까지 가긴 했지만 그렇게 영영 헤어지게 됨을 내심 좋아하는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오르페오를 그려내며 짜릿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2막 후반부에서 펼쳐지는 지옥의 무도회, 주름치마를 두른 여자 무용수들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춤인 캉캉의 신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남성 관객에게 더없이 흐뭇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P35) 

캉캉이 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지옥의 무도회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다행히 유튜브에 귀한 자료들이 올려져 있어 ‘읽으며’ ‘들으며’ ‘느낄’ 수 있어서 공부하는 재미, 완전 입체적인 공부의 희열을 안겨주는 짜릿한 시간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Classic #2 금지된 사랑

 

‘금지된 사랑’으로 이름 붙여진 2장에서는 역시나 ‘금지된 사랑’이 주제로 다루어진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쥴리엣',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소개되었다.

 

이 세 가지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하며 김문경은 이렇게 구분을 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풋풋한 십 대의 사랑이라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농염한 관능이 느껴지는 본격적인 성인들의 사랑이라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도 그쯤 되는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빼놓고는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그랬기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곡들이 어떤 유명한 음악가들에 의해서 어떤 형식으로 재현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재밌었지만, 음악가들의 삶과 사랑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그너가 그렇게 사랑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게는 귀를 솔깃하게 하는 흥미로움이었다. 더욱이 그 대상들이 어느 파티에서 만난 여인들도 소개로 만난 여인들도 아닌 바로 자신의 후원자의 부인이나, 자신의 곡을 지휘할 지휘자의 아내였다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내적 갈등과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로 바그너와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었던 자신의 후원자의 아내였던 마틸데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의 아픔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구나 싶었다. 그 절절한 사랑을 끝낼 수가 없어 무한 선율로 그리도 질질(?) 끌며 끝을 내지 못한 바그너의 애타는 마음. 현실에선 그럴 수 없어도 음악 속에서만이라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 읽는 나까지 애절해지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금지된 사랑’이 잔뜩 들어있는 2장에서는 새로운 사랑이야기들과 작곡가들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엿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던 부분이다. 앞으로는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가득하여 극장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 가수들의 시신들로 넘쳐나지 않기를...

 


 

크로이처 소나타 

 

Classic #3 소설 속에 흐르는 클래식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연인처럼 사모하기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엮인 쌍둥이 영혼 같은 관계. 그것이 바로 음악과 문학인 것이다. 그렇듯 소설 속에 흐르는 클래식이란 표현이 맞는 건지, 클래식 속에 존재하는 소설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 어떤 것이 소설이고 어떤 것이 음악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온전히 두 장르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음악은 문학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문학은 음악을 연인처럼 사모한다고나 할까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 그리고 토마스 만의 ‘키 작은 프리데만’을 통해 듣는 클래식은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우리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뜨리며 그렇게 자기네들 멋대로 우리의 감정을 휘둘러댄다.

 

중학교 때 권장 교양도서였던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 물론 그 당시 나는 대부분의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실 지긋해했던 것 같다. ‘강제’로 읽어야 했던 교양 도서 리스트는 많은 우리에게는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기피대상으로 느껴지게 했으니. 좀 더 일찍 책에 맛을 들이지 못한 내가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강제 교육을 시킨 학교의 시스템도 문제는 있다고 본다. (물론 어쨌거나 나 같은 반항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빠져 지낸 문학소녀들도 있었으니 개인차가 작용됨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어쨌거나 내용상으로 볼 때 그 당시 내가 읽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충격으로 느껴졌을 것 같은 느낌. 이 작품들을 대하면서 문학 작품을 많이 읽지 않은 나로서는 조금 부끄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 문학 작품들은 내 도서 리스트에 올려지고.

 

소설과 연결되어 있어선지 확실히 그 느낌은 더 강하게 다가왔고 더 깊이 느껴졌다. 전원 교향곡을 들으며 카라얀의 지휘가 저토록 아름답구나. 저렇게 깊이 온전히 자신도 하나의 음표가 되어 음악과 하나가 되는구나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전원 교향곡을 들은 건지 카라얀을 느낀 건지 그리고 그 맹인 소녀가 느꼈을 시냇물 소리를 함께 느끼려는 의지로 듣는 전원 교향곡은 마음에 평온함을 안겨주었고, 베토벤이 전원 교향곡을 썼다는 바로 그 시냇가와 나무와 새소리를 상상하며 듣는 느낌도 아주 특별했다..

 

전원 교향곡이 그랬는가 하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바이올린 연주로 들을 때는 톨스토이가 말하는 ‘영혼의 흥분제’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문자 그대로 느끼며, 나는 격렬한 감정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입 부분만 들었음에도 이토록 눈물이 그렁대는 감동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로엔그린과 ‘키 작은 프리데만’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며 보여준 작가의 섬세함과 예리함에 놀라움을 느끼며 들었던 로엔그린. 그나마 내가 조금 알고 있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저 먼 나라에’는 나를 감동 속에 허우적거리게 했다.

 

톨스토이는 왜 그는 자신은 지키지 못하면서 그렇게 엄한 규율을 삶에 적용시켰을까. 자신은 도박과 호객 행위로 그렇게 난잡한 삶을 살았으면서 그러한 행위를 혐오했다는 사실은 이해됨과 이해 안 됨의 경계선에 모호하게 나를 던져 놓았다. 그런 갈등 안에서 스스로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작가의 삶과 음악을 연결시켜 함께 느끼는 그 재미는 마치 Wonderland에 온 앨리스가 느꼈던 그 느낌에 비유되지 않을까. 문학과 음악 떨어뜨릴 수 없는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가 되어주는 그 존재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장이었다.

 


 

살로메

 

 

Classic #4 팜므파탈 이야기

 

이 네 번째 장에서 저자는 ‘카르멘’, ‘살로메’, ‘룰루’ 세명의 팜므파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카르멘은 비제의 오페라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이야기로, ‘사랑’과 ‘순수한 감정’을 핑계로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둥이 여자.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려진 엄마 헤로디아의 요구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헤로디아의 딸로 오스카 와일드의 터치로 아주 엽기적인 이고 광기 어린 팜므파탈로 재탄생한다.  

 

베르크의 ‘룰루’는 처음 들어보지만, 앞서 언급된 팜므파탈 중 가장 지독하고 질이 나쁜 구제불능 성 팜므파탈로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이 내 주위에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게 하는 저질스런 여성.

 

여기서 보여주듯이, 자기를 사랑한 남성들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고 갖고 놀며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여자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결말은 어떤 것일까. 역시 파멸일 뿐이었다. 카르멘은 자신을 목숨처럼 사랑한 호세의 손에 죽고,  살로메는 그녀의 엽기적인 행각을 보다 못한 헤롯 왕의 손에 죽게 되고, 룰루역시 그 주위에는 그녀를 사랑한 이들의 시신들이 즐비하며, 그녀 역시도 죽음을 맞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남녀 간의 사랑은 아무리 미화되어도 성욕이 핵심이라고.’ (P94) 

 

'결국 그런 것인가?'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거쳐 태어난 ‘살로메’는 정말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였다. 잘라진 세례 요한의 목에 키스하는 장면을 떠오르니 토할 것만 같았다. 마치 시리얼 킬러의 살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 내용을 읽다가 오늘 먹은 내용물을 확인할 뻔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엽기적인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왜 그런 살로메를 그려냈던 것일까. 김문경은 그런 야누스적인 ‘룰루’를 만든 베르크가 왜 그런 곡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지만,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심리상태와 정신적인 배경이 더 궁금했다. 

 

어쨌거나, 죽여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악마적인 소유욕은 사랑과 정반대 되는 악적인 요소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세례 요한은 한 평생을 광야에서 산 예언자인데, 어떻게 그의 피부가 그렇게 아라비아 정원의 흰 장미보다 더 하얄 수가 있는지 말이다. 물론 극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이긴 하지만, 사실감이 떨어지는 것 사실이다. 차라리 구릿빛 피부에 반했다고 하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당시에 그렇게 일곱 개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며 마지막엔 전라가 되는 퍼포먼스가 얼마나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지금 현세대에서 그랬어도 난리 부르스였을 텐데 그 시대엔 오죽했겠는가.

 

1905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살로메>의 초연은 스캔들에 가까웠다. 엘리트들이 모인 사교장이 관음증 환자들의 소굴로 면한 것 같은 분위기였으며, 시종일관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음악에 비평가들은 마치 악취를 맡은 듯 불쾌해했다.” (P90)

 

룰루는 대체 이런 여성이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카르멘 같은 여자는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여성형이고, 살로메도 마찬가지다. 물론 살로메는 정상적인 여성이 아닌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엽기 행각을 서슴지 않는 살인마의 심리 요소를 가진 여성일 게다.

 

비제를 제외하고 그 유명한 작가들이 왜 이런 이상한 주제로 곡을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다행히 베르크는 저자가 그 의문증을 풀어주었고, 슈트라우스는 내가 알아봐야 할 듯싶다. 어쨌든 왠지 카르멘을 제외하고는 다른 곡들은 찾아서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정말 내키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그 엽기적이고 파멸적인 주제들이 오페라로는 어떻게 어떤 분위기로 표현되었는지 궁금했기에 들어보았다..

 

카르멘 중에서 골라 본 하바네라에서의 아그네스 발차는 너무 귀엽고 섹시한 데다 장난기마저 가득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남자였더라도 빠지게 될 것 같은.

 

이 세 팜므파탈의 작품 중 가장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은 바로 '살로메'였다. 보면서 너무나도 섬뜩하고 무섭고 그러면서도 살로메의 파멸적인 사랑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잔인한 것.

 

나를 한 번이라도 바라보았더라면 나를 사랑했을 거라며 절규하는 살로메. 살로메의 눈빛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고백은 그 완벽한 연기에 전율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살로메는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연기력. 당신 입술에 키스를 했다며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슬픔을 느끼는 것인지.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정말 숨을 죽이게 만드는 대단한 퍼포먼스였다. 

 


 

<변신 이야기>

 

Classic #5 신화를 동경한 음악

 

 신화에는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평화와 전쟁, 삶과 죽음 등
시대를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이 가득 담겨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제로 가득한 신화를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라는 라틴어 서사시를 썼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라는 음악가에 의해 12곡의 교향곡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6곡 정도만이 악보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변신 이야기> 중에서 오보에 협주곡을 들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에서 설명해준 부분을 상상하면서 마치 전원 교향곡 분위기의 평온하면서도 경쾌함을 함께 느끼는 시간. 책이 안겨주는 행복이다. 오보에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피리도 아닌 것이 플루트도 아닌 것이 지친 영혼에 휴식을 너무 듣기 좋은 소리.

 

클래식은 한번 들으면 자꾸만 깊이 빠지게 되는 것 같다. 팝이나 가요처럼 쉽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진한 맛이 나는 느낌.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는 것. 작곡가의 삶에 대한 설명과 곡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난 후 느끼는 연주는 조금 깊이 다가온다고나 할까. 달콤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주피터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서는 우선 모차르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또한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어떤 곡들이 만들어졌는지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모차르트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는 고통을 느꼈는지를 아는 것은 내게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엿보면서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당시 영국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대단한 유명한 작곡가였 바흐의 막내아들 J. C. 바흐에게 모차르트가 교향곡과 협주곡 작곡법을 배웠다는 사실은 흥 로운 발견이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편을 읽으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특히 프랑스 작곡가 생상과의 대화를 읽다가 배꼽을 잡았다. 오페라를 관람하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언제까지 저렇게 갑니까?”하고 묻는 생상과 “끝까지 저렇게 갑니다”라고 대답한 드뷔시. 그러고 보면 초보중의 초보인 내가 클래식 음악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듣다가 잔다고 해서 뭐 그리 부끄러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저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음악가들도 저런 느낌을 받는 정도면 나 같은 사람이야 오죽하겠나. 

 

<목신의 오후>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현대 발레 곡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드뷔시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를 읽고 감동을 받아  만든 곡이다. 시의 어느 부분과 음악의 어느 파트를 연결하여 듣는지를 설명해주는 자상한 김문경. 매력 떵어리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Classic #6 복수의 아리아

 

제6장 복수의 아리아 편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파발로치가 가장 사랑했다는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가 소개되어있다.

 

마술피리는 저자가 말했듯이, 정신 사납게 이어지고, 대본도 악역과 선한역이 바뀌고 왔다 갔다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없게 한다지만 삶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항상 악역도 없고, 항상 착한 역도 없는 것. 선과 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때로는 착한 면이 나타났다가 어떨 때는 악에 사로잡혀 못된 부분이 드러나기도 하는. 그러기에 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마술피리>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표현대로 ‘이혼한 부부’상을 그려보면 그대로 이해가 된다. <가면무도회>는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다. <가면무도회>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의 살인사건을 다룬 것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정말인가 싶어서 검색했더니 정말 그는 암살을 당했다. 단지 그건 <가면무도회>에서와는 달리 사랑으로 인한 암살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에서의 암살이었다는 것이 달랐다. 

 

짧게 읽어본 그의 생애를 통해 느낀 그는 참으로 용맹하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스웨덴의 위상을 높였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구스타프 3세. 단지 아내인 소피아 막달리나와의 결혼만큼은 불행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관계만큼은 깨끗했던, 즉 그는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관계를 추구했다고 하니 참으로 멋진 남성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극에서는 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인 아멜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부하 레나토는 가면무도회에서 국왕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아내의 배반보다 자신의 충정과 우애를 온전히 바친 왕에 대한 배신이 더 컸던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는 언제나 그렇게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의리, 충성, 존경, 사랑. 늘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겠지.

 

내가 레나토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국왕을 탓하기보다는 아내를 탓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둘을 떠났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 무조건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걸까. 내 남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래서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나는 과연 손가락질을 하며, 질투에 불타서 그와 그녀를 욕하며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이에 대한 자세는 모두가 다를 것이고, 나 역시 상상 속의 나와 실제 속의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남편에게 사랑하는 운명의 여인이 나타났다면 나는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인생에는 공식이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물론 원칙은 있지만,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감성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지, 서로가 인정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옳은 답이 아닐까 싶다.

 

이어진 <엘렉트라>는 거의 <룰루>와 맞먹었다. 완전 사이코의 전형. 물론 엄마의 불륜과 그 엄마라는 여자와 정부가 작당해서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를 살해하는 것은 처절한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아빠 아가멤논이 타고 다니던 말도 사랑하던 개들도 모두 죽여서 죽은 아빠를 시중들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완전 광기를 넘어선 광기였고, 이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복수라기보다는 한 사이코가 벌이는 피의 향연 같은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저자는 <엘렉트라>를 감상한 이후에는 ‘푸치니의 <토스카>가 아이들 장난 같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감미롭게 느껴질 정도’ (P142)라니 그 웅장함이 어떠한지 감이 가고도 남는다. 

 


 

파우스트

 

 

Classic #7 파우스트에 매혹되다

 

음악과 문학의 만남.
그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결합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매혹의 대상으로 느껴졌고, 여러 장르의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슈베르트가 좋은 시를 보면 악상이 저절로 떠오른다고 고백했듯이, 안 그래도 감수성 풍부한 음악가들에게는 괴테의 작품들은 매력적인 음악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번 7장에서는 괴테의 작품인 ‘파우스트’에 대한 여러 음악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김문경은 슈베르트의 <물레 짓는 그레트헨>과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그리고 말러 교향곡 8번 2부가 바로 그들이다.

 

슈베르트가 이 오페라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가 17세라고 하는데, 저자가 말한 음악의 완벽성보다 나는 그가 이런 절절한 사랑을 음악으로 만든 나이가 그렇게 어렸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깊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온전히 사랑으로 승화된 사랑을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그 어린 나이에 표현을 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의 중요성에 대해 과소평가를 하는 것이
음악적 지성이 높고 고매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리스트의 작품에 대해 읽는 동안 그에 대한 평가의 글이 나의 시선을 잡았다. 시니컬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나는 리스트를 잘 모른다. 음악 수업 때 시험 출제 단골손님이었던 덕에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일 뿐. 

 

이 평을 읽는 순간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떠올랐다. 소위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그를 터부시 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자신은 이성적이고 문학에 조예가 깊게 보인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참 웃기는 짬뽕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우아하고 고매하고 싶어 리스트를 과소평가하는 이들이나 지성인 인척 하며 빠울로 꼬엘료를 통속 소설가라며 우습게 보는 작가들과 독자들이나. 내게는  참으로 닮은 모습이라 코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에 언급된 말러는 김문경이 너무나 좋아하고 깊이 연구한 음악가다. 그래서 더 솔깃해서 읽었던 부분이다. 김문경의 말러에 대한 평이 참 재밌고 귀엽다.

 

말러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향곡 8번에서 자신의 역량을 과잉으로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벽한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자신이 지닌 힘의 4분의 3만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완성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말러는 여운을 허용하지 않고 감상자를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넣는 성향이 있다.(P162)

 

혹시 말러는 ‘열정적이고 표현력이 강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내면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니까.

 

어쨌든 말러 교향곡 8번은 결과적으로 후기 낭만파 교향곡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러 교향곡 8번 그것은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황금빛 노을이 아니었을까’ 그랬을지도...


 

 

 

Classic #8 죽음에 대한 3가지 명상

 

죽음에 대한 3가지 명상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고였다. 미어지는 가슴. 잠시 큰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마지막에 쓰인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만든 말러의 이야기는 엄마인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형이 죽음으로 인해 첫째 아들이 된 말러. 맏형으로서 동생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는 것을 보며 그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트라우마로 다가왔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고 그에게서 딸아이까지 빼앗아 갔다. 그 섬세한 말러가 자신의 큰 딸아이가 그렇게 죽음을 맞았을 때의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영혼이 절규하며 피를 쏟아내는 통곡이 내게 들리는 듯했다. 

 

살아 숨 쉬는 것이 고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숨을 쉴 수 있도록 무언가에 미쳐있어야 했을지도. 잠시라도 그 형벌 같은 고통에서 벗어서 숨을 쉴 수 있는 무엇이 간절히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란 그에게 그런 안식처요 휴식처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말러가 평생 느꼈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로지 죽음으로서 그에게 평화와 안식을 안겨주었다.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생긴 매력적인 말러. 그에게서 느껴졌던 슬픈 분위기 바로 그가 대항할 수 없었던 ‘상실’이 안겨준 걷을 수 없는 그림자였던 듯.

 

슈베르트

 

 

이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장가 때문인가. 아름다운 음악가로 느껴졌던 슈베르트가 매독으로 인해 썩어 들어가는 몸으로 그렇게 처절한 몸부림으로 불안과 좌절에 시달린 음악을 썼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의 서정성은
정신세계의 치명적인 독성을 웃는 낯으로 가려보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그랬던 거구나. 우리는 그저 그렇게 무심결에 들으며 지나치는 그 아름다운 곡들이 그는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 속에 썼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고 난 후 아이폰을 보며 느꼈던 애착 반응.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온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만든 작품을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듯 아무런 느낌 없이 본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지는 마음. 앞으로 슈베르트의 곡을 들을 때는 평화로움보다 아름다움보다 고통이 먼저 느껴질 듯하다.

 

마지막으로 포레의 레퀴엠 이야기를 들으면서 ‘레퀴엠’이 음악에서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장례미사 음악이 포레 이전에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포레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삶을 전쟁처럼 산다. 그렇기 전쟁처럼 살지 않고 좀 더 느리게 속도를 줄이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려고 나름 노력한다.  어쩌면 그래서 ‘느림’에 대한 책들이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쓰나미처럼 휩쓸어가는 경쟁과 유행과 비교 속에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색깔을 내며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의 살아가는 삶이 그러한데 죽음만큼이라도 좀 평온하고 휴식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죽어서 이제야 휴식을 취하러 가는데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에라도 평화롭고 위로가 되는 음악을 깔아줘야 하지 않겠나. 무서워서 어깨가 움츠려 들게 하는 다른 곡들은 들어보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복잡한데 음악까지 들어가면서 움츠려들 거야 없지 않을까.

 

어쨌든 포레가 음악을 만들게 된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평온하고 쉼을 안겨주는 곡을 만들어준 그가 고마웠다. 모든 것은 나 보기 나름. 죽음도 무서운 악마의 선물이 아닌, 편안한 친구처럼 이 삶에서 저 삶으로 넘어갈 때 함께 해주는 동행으로 느껴지면 좋겠다.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Classic #9 음표로 새겨진 전쟁의 참상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던 슬픔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직접 전쟁을 목격하였던 쇼스타코비치나 운 좋게 미국으로 망명을 하여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동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쇤베르크,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에 죽음을 맞은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윈의 시와 더불어 라틴경전으로 레퀴엠을 만든 브리튼 모두 전쟁을 직접 겪고 안 겪고를 떠나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거나 목격했던 이들에게 있어 전쟁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내가 전쟁에 대해 그저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과 고통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국민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그 고통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모순적인 현실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같은 공간 속에 같은 일상을 나누고 있지만, 누구는 그저 일상이 주는 힘겨움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과 직결된 처절한 고통 속에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도록 차갑고 냉정한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하고는 있지만 각자의 슬픔은 각자의 몫으로 수용하며 감당해내야 하는 것인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온전히 스스로 겪어내야 하는 슬픔, 고통.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몸이 아파 군대에서 싸우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충성을 다해 국민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켜낸 쇼스타코비치. 하지만 그가 지은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의 전쟁 승리를 위한 음악이 아녔다는 그의 고백이 나에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언뜻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처절한 죽음을, 살상을,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어떻게 자신의 나라의 전쟁 승리만을 염원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 자체가 혐오스럽고 미친 광란의 횡포의 존재 바로 그 자체임을 알면서 말이다.

 

어쨌든, 예술가로서 히틀러가 들어오기 전 이미 스탈린의 손에 죽어간 수백만명의 국민들을 떠올리며, 아파하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쇼스타코비치의 그 고백이 내겐 깊은 공감 속에 위로와 함께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스탈린이 시작한 것을 히틀러가 마무리해주었음을. 처절한 아픔 속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실.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쇤베르크가 직접 쓴 가사를 읽으면서 어쩌면 쇤베르크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기회'라는 것을 가져보기도 전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을 보며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폭력적 행위에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내세워지지만
사람들은 이를 핑계로 자신의 악마적인 본능을 만족시킬 뿐이다.” 

 

볼테르의 말처럼 “명분이 어떠하든 모든 전쟁은 강조 짓일 뿐’인걸.. 그러면서도 우리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그렇게 합당한 강도짓을 웃으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슬픔인지...

 

이 9장을 통해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여사가 아우슈비츠에서 벽에 그려진 나비를 보며 느꼈을 슬픔이 느껴져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우리 인간은 전쟁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걸까.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저돌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전쟁으로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그런 무모하고 모순적인 미친 짓를 하는 것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Classic #10 독일 음악 속의 영웅들

 

 

10장 ‘독일 음악 속의 영웅들’은 “나는 총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마음으로 위대했던 자들이다.”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중 발췌한 구절로 ‘영웅’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무사나 군인들을 뜻하는 전쟁 영웅을 넘어서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영웅’을 의미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장에서는 ‘마음으로 위대했던 영웅’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영웅인지 꼭두각시인지 헷갈리는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그리고 자아도취에 빠진 공처가 영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가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음악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들이 만든 <영웅>이라는 주제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재밌다.

 

베토벤의 <영웅>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아주 재미가 쏠쏠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악보를 찢어버렸다는 이야기나, 악보에 ‘나폴레옹’이라고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귀족에게 음악이 헌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음을 맞자 그에 대한 곡을 이미 써놓았다고 고백하는 부분이나. 역사에 걸쭉한 자국을 남긴 이들에 같은 세대를 살며 어떠한 연유로 연결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겐 아주 커다란 흥미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바그너 부분을 읽다가 나는 아주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감상에 있어 4일이 소요되며 총 연주시간만 해도 16시간 정도 걸린다. 때문에 혹자는 이 작품을 철인 3종 경기를 뛰는 각오로 감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그너는 이렇듯 감상자에게 온전한 복종을 강요하는 작곡가이다. 어쩌면 클래식을 지루하게 느끼도록 일조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P215)

 

요 부분이 중요하다. ‘어쩌면 클래식을 지루하게 느끼도록 일조한 장본인” 내가 클래식을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핑계를 합당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주는 바로 요 부분. 한참을 웃었다. 하여간에 바그너는 좀 독특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성격도 강하고 카리스마틱 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 면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도 참으로 성격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아녔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음악을 듣는 감상자의 느낌까지도 컨트롤하고 싶었던 사람. 혹시 스티브 잡스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 아니었을까. 스티브 잡스도 그리 괴팍하고 열정적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직도 당신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하던 그런 감성적인 사랑을 했던 이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와이프에 대한 고백을 읽으면 내 가슴은 또 얼마나 그렇게 뛰었더랬는지. 멋진 별들이다.

 

리하라트 슈트라우스의 영웅 부분에서는 완전 반전이었다. 자기도취에 빠진 음악가의 모습이란. 왠지 내 손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화자찬으로 이어진 음악을 만들며 그는 정말 스스로가 그렇게 영웅처럼 느껴졌던 걸까. 어쩌면 현실에서의 공처가로서의 삶이 내면적으로는 영웅이고 싶었던 마음이 그렇게 음악으로 표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보면 그가 왠지 불쌍하고 왜소해 보이고 초라하고 불쌍하기마 저하다. 그 부인도 참 예의도 없지. 부부끼리 만나는데 자기는 피곤하다고 먼저 호텔로 돌아가다니. 그 멋진 말러 부부와 함께하는데 말이다. 그것도 열 발자국 떨어져 걸으라는 명령까지. 그렇게 말하는 와이프나, 그렇게 하는 남편이나. 그러고는 돌아와서 ‘그러기에 내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는 변명이나.

 

너무나도 카리스마가 넘치고 남성미가 넘쳐흐르는 남편과 살다 보니 피곤한 면도 많고 속으로 삭여야 되는 부분도 많아 부드럽고 온화한 남편였으면 싶을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남편이 이런 슈트라우스 같은 머저리 같은 남자였다면 정말 싫었을 것 같다. 부드럽게 감싸주고 보담아 주는 따스함과 더불어 남자는 자고로 남자다워야 하는 것. 갑자기 내 남편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래서 고마웠던 찹터였다. 

 


 

송나라 시대 피리를 불고 있는 궁정악사들.

 

Classic #11 나로 하여금 취하게 하라

 

김문경은 앞서 여러 가지 주제들에 얽힌 음악들을 보여주었다. 사랑, 전쟁, 복수, 신화, 팜므파탈, 소설 등등.. 그런 가운데 어떻게 ‘술’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번 11장의 주제는 바로 ‘술’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에 나오는 악마의 화신 이아고가 부르는 베르디의 ’ 건배의 노래’를 비롯하여, 말러가 이백의 시에 매료되어 지은 <대지의 노래>와 베르크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의 시를 뽑아 만든 아리아 <포도주>가 소개되었는데, 나의 온 관심을 끌은 것은 단연코 말러의 <대지의 노래>였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말러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가 장녀 마리아를 잃음과 함께 개인적으로 처절하게 힘든 상태에 읽은 이백의 시 [춘일취기언지]가 바로 그의 <대지의 노래>에 영감을 주고 배경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다. 그 오래전에 독일 음악가가 동양의 시인의 시에 위로를 받고 영감을 얻어 음악을 지었다니. 

 

김문경의 표현대로 서양의 보헤미안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질 줄 그 누가 상상했으랴. 그의 표현대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말러에게 동양의 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특히 동양적 허무주의와 자연친화적인 로맨티시즘, 그리고 호쾌한 시상을 지닌 이백의 시가 그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백의 시에서 넘쳐나는 술기운을 빌어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문경의 생각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내가 말러에게 점점 더 빠지게 되는 이유는 김문경처럼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구스타브 말러’라는 인간에 대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나를 또 한 가지, 문학과 철학에 대해 관심도 많아 그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가진 지성의 소유자 말러. 그러한 그의 학구적이고 지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이유나 동기야 어떻든 말러를 좋아하는 김문경의 깊이 있는 설명과 소개로 나 역시 그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궁금한 음악가 또 한 명 ‘바그너’ 그의 삶에 대해서도 읽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폭풍 같은 격정의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음악가. 음악가들의 삶을 엿보는 것은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 어떤 고통이 따랐던 역시 예술가들의 삶이란 내 눈엔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다. 고통을 넘어선 아름다움, 슬픔을 이겨내려는 모습 속에 비치는 아름다움, 내 안의 다른 나를 느끼고 싶은 아름다움, 문학과 함께하는 아름다움, 신화 속으로 데려가는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들의 아픔까지도.

 


 

Classic #12 백조의 노래

 

‘백조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장은 백조는 ‘죽을 때 딱 한 번 아름다운 목소리로 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작곡가 죽음을 앞두고 작곡한 마지막 작품을 일반적으로 ‘백조의 노래’라고 부른다는 저자의 설명에 가슴이 시렸다. 

 

슈베르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겨우 31살에. 그것도 매독에 썩어가는 몸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의 영혼을 쏟아부은 아름다운 작품들은 그 살아생전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죽은 뒤에 장례를 치를 돈도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만약 그의 작품들이 음악을 알지 못하는 문외한의 손에 넘겨져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면 어쩔 뻔했나. 그렇다면 그 요절한 천재는 그야말로 무명으로 죽었을 것이며, 우리는 그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엔 그런 천재들이 많이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후대에 빛을 볼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수많은 천재들.

 

나와 하루 차이로 생일이 비슷한 같은 물병자리 태생의 슈베르트.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졌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의 음악이 후대에 알려질 수 있도록 그이 작품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세상에 보여준 그 누군가가 말이다.

 

슈만을 사랑한 클라라,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클라라 슈만을 사랑한 브람스.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그래서 더욱 가슴 시리게 하는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사랑.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젊은 음악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세상에 길이 남길 음악가로 키워준 슈만도 너무 멋있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꼈을 텐데도 그렇게 순수하게 관계를 이어간 클라라 슈만도 너무 아름답고, 그녀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브람스. 이토록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저 두고두고 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클라라 슈만이 오른손을 다쳤을 때 이때다 싶어 그녀를 위해 바흐의 음악을 한 손으로 피아노 칠 수 있게 편곡까지 해준 브람스는  그녀가 죽은 얼마 후, 행여나 그녀가 외로울 새라 얼마지 않아 죽음에 길을 따라간다. 한 평생 자신이 바라보고 따라가던 삶의 의미였던 클라라가 없는 삶이 과연 브람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요즘처럼 그렇게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인스턴트 사랑이 난무한 세상에 과연 이런 사랑이 존재할까. 새삼 사랑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너무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너무 쉽게 사랑을 버리고 너무 쉽게 사랑을 떠나는 현대인들.

 

마지막 장에 이어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앞장에서 공처가인 슈트라우스의 모습이 너무 머저리 같다고 쓴 표현이 조금 미안했다. 그가 공처가던 아니던 그건 그들의 문제였고, 어떤 모습의 부부 관계였던 슈트라우스와 파울리네는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인데, 내가 그저 내 눈에 비친 작은 면 하나를 보고 그를 그렇게 매도한 것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는 그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설명을 들어선 지 가슴에 더욱 깊은 여운이 남아 그렇게 살랑거렸다...

 


 

약사 음악평론가 김문경

 

 

 

마치 이 책을 읽기 위해 존재했던 것 같은 그렇게 치열하게 읽고 리뷰를 쓰고 책에 언급된 음악을 들으며 보냈던 시간이었다. 정말 치열하게 임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흥분하고 열광하고 몰입했던 나 자신. 

 

이 책이 참 좋았던 것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클래식이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며, 어떤 음악들이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어 음악을 들으며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음악뿐만 아니라 작곡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보너스였다. 게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여러 음악가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나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또 분명하게 느꼈다. 나는 정말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을.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고통 속에 어떤 행복 속에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는지를 함께 느껴보는 것이 내게는 더없이 기쁨이고 흥분이고 즐거움이었다.

 

내가 더 이렇게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김문경의 음악과 작곡가에 대한 방대한 지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신세대다운 필치로 나를 꺼이꺼이 넘어가게 했던 그의 윗트와 유머러스한 비유 덕분이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던 마음.

 

김문경은 그냥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느낌’만을 나열하지 않는다. 시나 문학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악기를 어떤 분위기를 내기 위해 사용되었는지까지도 표현하고 설명해주기에 읽는 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음악일까, 어떤 부분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걸까 하고 말이다. 그의 느낌의 깊이와 음악과 문학과 철학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문경이 말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 많은 부분이 김문경과 말러가 참으로 닮은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무작정 음악을 좋아할게 아니라 그 음악을 만든 사람, 글을 쓴 사람의 삶도 알아보고 느껴보면 그들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나도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지식이 함께 하면 그 느낌을 더 풍요롭게 가질 수 있음을 배웠다. 긴 리뷰였다. 치열하게 읽고 느꼈던 책이었다. 그랬던 만큼 읽는 내내, 리뷰를 쓰는 내내, 음악을 찾으며 듣는 내내 참으로 짜릿한 행복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을 읽다가... - 초서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을 읽다가 초서 및 단상

P4 많은 이들이 공감하다시피 새로운 음악의 어지러운 흐름 속에서 사상과 감정을 찿아보기는 어렵다. 음악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은 약간의 감정은 있겠지만 많은 노래들이 차원 낮은 감성에 실려 앵무새처럼 반복될 뿐이다.

>> 완전 100%는 아니지만 90%이상은 공감한다. 왜냐면 대중 음악도 대중 음악 나름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팝, 깐소네, 샹송, 가요 중 정말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힘들고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노래들까지 싸잡아 차원 낮은 감성에 실려 앵무새처럼 반복될 뿐이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고 배고팠을 때도, 그리고 사랑의 고통 속에 죽음이 유혹처럼 느껴졌을 때도, 그리움에 쩔었을 때도 나와 함께 해주며 따뜻한 위로를 주었던 나의 음악들. 나는 의리때문에서라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요즘 나오는 많은 노래들이 앵무새의 반복되는 앙앙되는 소리보다 못한 노래가 많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적어도 10%는 남겨두고 싶다. 왜냐면 그래야 하니까. 또 사실이 그러기 때문에...


P5 오랜 세월 동안 사랑 받아온 고전음악에는 분명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살찍우는 힘이 있다. 말초신경을 온통 자극시킬 뿐 공허하고도 권태로울 따름인 요즈음의 음악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고전음악은 결코 딱딱한 교양이나 배부른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고통 속에서 맛보는 천국이요, 어둠 속에서 느끼는 한줄기 빛이며 전쟁터에서 마주치는 감동적인 전우애와도 같다. 나는 혼탁한 세상에서 상처 받은 영혼을 클래식 음악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나도 그렇게 느낀다. 고전 음악에는 분명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살찌우는 힘이 있음을.. 그래서 가까이하고 싶고 친해지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고귀한 그대는 참으로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당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가 맛있게 반찬을 이건 이래서 맛있고, 저건 저래서 맛있다며 만들어놓고 보여주고는 먹여주기까지 하니 이처럼 고마울때가... 나야 그저 맛있게 먹어만 주면 되는 것이다...


P6 클래식 음악은 결국 생의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희노애락을 그려낸 인생의 축도이다. 단순히 청각적 울림이 아닌 신화, 철학, 문학이 담겨 있고 때에 따라서는 사랑, 복수, 죽음 등 근원적 테마가 망라되어 있는 종합예술이기도 하다. 고전 음악 속에 담긴 인생의 여러단면을 통해 우리는 강렬한 감흥을 느끼는 한편 부수적으로 삶에 대한 통찰력과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시간이 흘러도 거의 변하지 않으며 인간의 영역은 시대에 관계없이 늘 어둡고 험하며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 절대 공감이다...


Classic #1 오르페우스 열전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신화

나는 생명이 없소. 나의 신부가 죽었으니

이제 나의 심장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지 않소

심장이 없는 사람이 어찌 살 수 있겠소?

-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대본 중 -

 

P17 음악의 신 아폴론과 현악기의 여신 칼리오페가 낳은 아들인 오르페우스는 노래로 세상을 평정한 인물이다.

>> 그냥 기억하고 싶어 초서에 옮겼다. 그리이스 신화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읽지만 읽어도 읽어도 신들의 이름을 기억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_-;;


P19 우리는 음악의 기틀을 닦은 작곡가에게 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이길 좋아한다. 바흐에게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따라다니고 하이든에게는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타이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오페라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아마도 이탈리아의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 그렇구나. 음악 시험 단골 손님이던 바흐와 하이든, 왜 헨델은 뺐을까..? ‘어머니여서인가..? ^^;;


P19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 전인 1607년에 초연된 오페라 <오르페오>의 발굴은 중요 유적발견에 맞먹는 대사건이라 하겠다.

>> 그당시에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었던 오페라였던게구나. 중요 유적발견에 맞먹는 대사건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오페라 <오르페오>. 그냥 스토리로만 보아도 감동 그 자체인 그것을 음악과 무대와 연기가 가미된 종합예술로 보는 그 감동이 얼마나 강렬했을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P20 <오르페오>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오페라의 창세기 혹은 [종의 기원]에 해당된다. 15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르네상스 음악이 점차 수명을 다해가고 바로크 음악으로 전환되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이 드라마틱한 표현에 아주 귀가 솔깃해졌다. 얼마나 위대한 탄생이면 감히 창세기에 비유되며 그야 말로 종의 기원에 비유되었을까..? ‘피렌체하면 메디치 가문으로 유명한 도시 아니던가..? 언젠가 이탈리아에 여행을 가면 꼭 피렌체를 들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20 바르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철학자이며 문학자였던 조반니 바르디)는 자신의 집을 피렌체의 문화적 엘리트들에게 개방하여 카메라타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작곡가 중 줄리오 카치니가 있었다. 카치니는 파헬벨의 <케논>과 더불어 오늘날 가요처럼 애호되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친숙하다.

>> .. 카치니가 그 당시 인물이구나. 그나마 몇 안되는 고전 음악가 중에서 아는 이름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다. ^^;; 특히, 카치니는 내게 아주 재밌는 경험을 안겨주었기에 더욱 정이 가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하루는 가게에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듣고 있는데, 돈을 내려던 손님이 갑자기 여기저기 두리번대더니 하는 말~ “지금 여기 누가 아파요..? 왠 비명 소리가~” ~ 완전 죽음이었다~ ^^;; 우리는 죽는다고 웃어대고.. 아주 아름다운 와이프와 예쁜 두 딸과 함께 온 멋진 아저씨. 그 아저씨의 재치있는 유머에 우리는 데굴데굴 굴렀던 것이다. 하루가 기분좋게 이어지는 느낌. 그 후로 그 애절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가 나오면 나는 그 손님이 떠올라 웃음이 터지곤 했던 기억... 이렇게 음악 속엔 늘 스토리가 함께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음악으로만 들을 수 없는 것 아닐까..?


P21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어떻게 오셨어요?” 같은 일상적인 대사들을 어떻게 노래로 소화할 것이냐에 관한 문제이다. 이를 긴 호흡으로 노래 부르면 우스은 코미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글구보니 그런게다. 혼자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어떻게 오셨어요~~~” 하면서 긴 호흡으로 오페라를 하듯이 그리 흉내를 내보니 얼마나 웃기던지... 정말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겠다 싶었다.. 하하하하~ ^^;;


P21 따라서 말하는 속도로 노래 부를 수 있는 창법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레치타티보라는 기법이 개발되었다. 레치타티보는 음고는 있으나 멜로디가 거의 없이 내뱉는 듯 노래를 부르는 창법으로서, 요즈음 대중음악으로 치자면 멜로디 랩과 유사하다.

>> 전문적인 음악 용어를 설명할 때 어떤 의민가 갸웃거릴라치면 곧바로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우리의 궁금증을 한번에 씻어주는 친절함까지 발휘한다. 레치타티보 = 멜로디 렙~!!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는..^^


P22 이제 모노디와 레치타티보 기법의 확립으로 최초의 오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1600년 초연된 페리의 오페라 <에우리디체>는 악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다. 최초의 오페라가 오르페우스 신화를 줄거리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고대 그리스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피렌체 작곡가들의 도전정신을 생각해볼 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P22 오늘날 감상용으로 적합한 오페라는 피렌체와 문화적으로 경쟁적이었던 만토바 지역의 궁정 악장 몬테베르디에 의해 이루어졌다.

P22 몬테베르디는 카치니와 페리보다 오페라에의 시도는 늦었지만 신음악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틈틈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07년 오페라 <오르페오>가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페리의 <에우리디케>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했지만 천재성과 독창성에 있어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구사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예술이라는 오페라의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P24 전응한 영과 공포의 신이여,

그들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이도

저 기슭으로 가지 못하리라.

나는 생명이 없소, 나의 신부가 죽었으니

이제 나의 심장은 더 이상 나와 함께있지 않소.,

심장이 없는 사람이 어찌 살 수 있겠소?

그녀를 찿기 위해 암흑의 길을 걸어 왔소.

그곳이 지옥이든 그보다 더한 곳이든.

아름다운 에우리디체가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네.

>> 눈물....


P25 오르페오를 맡은 테너는 염소가 우는 듯한 빠른 반복음과, 우스갯 소리로 바로크 R&B 창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어지러운 음표의 향연을 펼친다. 그래야 지옥의 뱃사공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 바로크 R&B창법~부분에서 그만 웃음이 빵~ 터졌다~ 지옥의 뱃사공을 감동시키기 위해 어지러운 음표의 바로크 R&B 창법으로 향연을 펼치는 오르페오. 갑자기 그 진지하고 절절한 장면이 패러디가 되며 코믹하게 그려지는 것은 뭐일까나...^^;; 내가 이 책에 미치도록 재밌다라고 느끼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런 표현들 때문...


P27 글룩을 흔히 오페라의 개혁가라고들 한다. 


P27 한악절에 26개의 다른 음을 들려준다는 팝 가수 머라이어 캐리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음표를 내는 이른바 성악의 아크로바트가 유행이었다. 또한 무대는 화려한 볼거리에 치중하여 극의 내용 전달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났다. 오페라는 끝없는 아리아 메들리에 진부한 장식을 덩어리로 전락해 갔다.

>> 예나 지금이나 무엇하나 인기가 뜨면 그것으로 우려먹는 것은 같았나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그런건지도..


P27 한편 글룩은 오페라의 본질이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자신의 소신을 유감없이 밝혔다. 글룩은 극 전체를 통해 드라마의 전달을 중시하였고 눈요기에 불과했던 합창과 발레를 극의 일부로 통합시켰다. 합창을 제외한 등장인물을 총 3명으로 간소화시켰으며 극의 핵심을 해치지 않도록 아리아를 소박하게 만들었다. 글룩의 시도는 성악가의 나르시시즘을 금하고 가수를 작곡가의 노동자로 만들었던 바그너의 개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마치 구약성경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던지는 모세의 십계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 와우~!!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마치 구약성경에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던지는 모세의 십계와도 같았다.’ 표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시도가 얼마나 커다란 개혁이었고, 도전이었는지 그대로 느껴졌다.


P28 첨단 테크닉이 난무하는 시대에 무슨 황성옛터같은 옛날 노래를 들고 나오느냐는 식이다. 헨델은 글룩은 우리집 요리사보다도 대위법을 몰라라고 비아냥거렸고 모짜르트도 글룩을 촌스러운 구식 작곡가로 여겼다.”

>> 첨단 테크닉이 난무하는 시대에 무슨 황성옛터같은... 오 마이 갓~!! 완전 죽음이었다~ 푸하하하하~ ^^;; 어쩜 비유를 이렇게 기가막히게 하는지~ 그들이 어떤 느낌으로 그리도 글룩을 구박(?)했는지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었다. ‘황성옛터세상에...하하하하하~ ^^;;


P28 기타주자들의 테크닉 자랑으로 전락한 록이 원시적인 힘을 다시 되찿은 것처럼 오페라도 글룩의 개혁 덕분에 극적인 힘을 탈환하게 된 것이다. 화려함이 대세인 시대에는 단순함이 오히려 진보적인 것이다.

P30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남편이 뒤를 돌아본 이유를 오르페오의 정열에 두는 반면 글룩의 오페라에서는 아내의 성화에 두고 있다. 오르페오는 시련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 에우리디체의 얼굴을 보고야 만다. 아내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는다. 오르페오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냐?’로 노래 부른다.

>> 역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더 순수하고 더 정열적이며, 더 가슴에 와닿는다. 자기를 바라보지도 않는다며 바가지 끓는 성화에 못이겨 뒤돌아보게 되는 글룩의 에우리디체보다는 말이다. 암튼.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은 바가지는 여러사람 삶을 힘들게한다. 오르페오는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를 구하러 갔건만...


P30 오르페오가 슬픔의 고통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아모르가 나타나 너의 사랑은 충분히 증명되었다라고 알린다. 에우리디체가 다시 일어나고 둘은 사랑의 신을 찬미하며 맺어진다. 끝맺음은 비극적인 결말을 그린 원작 신화와 매우 다르다. 오페라가 대관식 축하공연의 일부로 기획된 탓에 해피엔딩이 강요된 것이다.

>> 뭐 이런 웃기는 짬뽕같은 일이~ 각색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대관식 축하공연이기 때문에 해피 앤딩으로 대본을 바꾸다니.. 내겐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럴 수도 있는거구나...


P31 남텨가 재산과 사회적 신분을 위해 애정 없는 결혼을 하게 되고 점차 서로를 헐뜯으며 살아가는 세태가 부르주아 사회에 만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르페우스의 일편단심 사랑이야기가 총할 리 없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곡가 오펜바흐의 오페라 <지옥의 오프페>는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 놀라웠다. 지금 현대 시대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옛날에 벌써 프랑스에선 지금과 같은 사회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P32 <지옥의 오르페>는 신화 패러디 혹은 일종의 개그 오페라에 해당한다. (...) 이 작품은 파리 음악계의이른바 틈새시장을 제대로 공략했고 곧 작곡가를 재정적 위기에서 구출해준 효자상품이 되었다.

>> 하하하~!! ^^ 넘 웃겼다~ 시장평가까지 간단하게 끝내는 김문경~!! ^^ 머리와, 지식과, 윗트를 고루고루 갖춘 김문경. 어떤 사람인걸까..? 궁금해졌다...


P34 유리디스는 부부싸움 뒤 지옥의 신 플루톤에게 물려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오히려 이를 반기는 눈치다. 오르페는 아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자유여! 행복이여! 한없는 기쁨이여!”라고 탄성을 지른다.

>> 큭큭~ 세상에 남편이 얼마나 싫었으면, 유리디스는 지옥으로 끌려가면서도 반기는 눈치며, 또 남편 오르페는 아내가 없어진것을 기뻐하며 저리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일까..? 나도 근 20년을 부부로 살면서 그렇게 남편이 싫을 때가 있었기에 그 둘의 이야기가 넘 재밌게 느껴졌다. 오르페와 유리디스..정말 부부 클리닉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하는 그런 심각한 상태.. 하하하하하~ ^^


P34 무위도식하는 신들의 모습은 바로 궁정 귀족들의 행태를 꼬집은 것인데 오펜바흐 오페라는 일종의 정치 코미디도 되는 셈이다.

>> 우리 나라의 탈춤같은 것이었던 듯 싶다..양반들의 작태를 풍자하던...서민들의 외침...


P34 오르페는 내키지 않지만 여론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유리디스를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작곡가는 글룩의 유명한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를 인용하면서 넉살을 떤다. 주피터는 친히 지옥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이윽고 신들의 지옥행 단체여행이 시작된다.

>> 까르르르르륵~!! 우아우아우아~!! 정말 돌아가시겠다~ 완전 불후의 코미디작 아닌가~ 속으로는 좋아죽겠는데 이미지 관리상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냐?’ 엄살을 떨어야 하고, 주피터를 앞세워 신들의 지옥행 단체여행이 시작된다니... ~ 넘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하하하하~ ^^


P34 지옥에 도착한 주피터는 현장조사를 하기는커녕 유리디스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게 된다. 결국 그는 바람둥이 본성을 또 드러내고야 만다. 다나에와의 사랑에서는 바로 변신하고 레다와 사랑을 나눌 때는 백조로 변신하는 등 변신술에 능한 주피터는 이번에는 곤충인 파리로 변신하여 그녀를 유혹한다.

>> 하여간에~ 주피터두 참 한심하지~ 그 많고 많은 멋진 것들 중에 왜 하필이면 파리~


P35 주피터는 주위의 압력에 굴하여 결국 오르페에게 유리디스를 넘기게 된다. 물론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낡은 조건도 덧붙여서! 주피터는 남편이 뒤를 보지 않자 자신의 주특기인 벼락을 내리친다. 오르페는 순간 놀라 부부는 내심 기뻐하며 영영 헤어지게 된다.

>> 우아아아아~~~!! 아고 배야~!! 하하하하하하~ ~ 돌아가시겠다~ ^^;; 세상에~ 엉뚱하게 오르페는 뒤는 돌아볼 생각않고 열심히 앞으로 보며 가고 있는데, 그걸 본 주피터는 질투에 불타 벼락을 내려쳐 오르페는 놀래서 뒤를 바라보게 되고 두 부부는 소으로 마냥 기뻐하며 영영 헤어지게 된다... 이 얼마나 기발하고 놀라운 발상인지... ~ 정말 죽는줄 알았다~ 하하하하~


P35 지고지순한 부부애를 권태에 지친 부부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코믹하게 뒤트는 극작가의 재치는 실로 놀랍다.

>> 절대 동감이다~!! 놀랍고 또 놀랍다~!! 그리고 저자 김문경의 입담도~ ^^


P35 오펜바흐의 재치 있는 음악은 흥겨운 극에 더없이 어울린다. 이 오페라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2막 후반부에서 펼쳐지는 지옥의 무도회, 주름치마를 두른 여자 무용수들이 다리를 번쩍 번쩍 들어올리는 춤인 캉캉의 신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남성관객에게 더없이 흐뭇한 불거리가 아닐 수 없다.

>> 하하하~ ‘남성관객에게 더없이 흐뭇한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는 저자의 솔직한 남성적인 표현이 또 다시 나를 웃게 만든다.. ^^ 그나저나 캉캉이 바로 <지옥의 오르페>의 한 부분였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놀란만큼 내 무식이 드러나는 부분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캉캉의 본주소가 오르페였다는 것이 내게는 아주 재밌는 사실이었다.


Classic #2 금지된 사랑 안타까운 사랑의 멜로드라마

두 남녀가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 무엇이건, 둘이 이미 신이나 자연의 이름으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법과 관습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 쇼펜하우어 -

 

P39 금지된 것은 더욱 강렬한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하물며 그것이 금지된 사랑이라면 그 동경과 갈망이 어떠하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탐닉했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 혹은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음악으로 그려내는 것이 대단한 유행이었다. 오페라에서 근친간의 사랑과 불륜을 다룬 내용이 흔하게 등장하였고 금단의 사랑을 범한 연인들의 이야기가 많은 작곡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숱한 남녀가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만 했고 오페라 무대에는 연인들의 시신이 넘쳐났다.

>> 푸하하하하하~ 진지하고 심각하게 읽어내려오다가 오페라 무대에는 연인들의 시신이 넘쳐났다.” 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 증말~ 이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안겨주는 유머 가득한 표현을 어찌 저자는 마음대로 흘려낼 수 있는 것일까..? 부럽다~


P40 사랑이란 것은 정신적인 해일로 영혼이 휩쓸려진 상태이리라.

>> 오우~ 넘 맘에 드는 멋진 표현~!!


P41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두 남녀가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 무엇이건, 둘이 이미 신이나 자연의 이름 결합되어 있으므로 법과 관습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 ‘쇼펜하우어하면 안광복 선생님이 떠오른다. 스스로는 메이저급이고 싶었지만 실은 밤무대 수준의 가수에 가깝다라던 매정한 표현에 나는 얼마나 놀랬었는지.. 파티만 좋아하고 자식과 남편은 안중에도 없는 엄마를 둔 쇼펜하우어, 지지리 엄마복도 없더니 이렇게 주전 자리도 꿰차지 못하고 밤무대 가수로 전락되어 표현되는 쇼펜하우어. 어쨌거나, 그가 말한 두 념의 뜨거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공감이 가고 이해도 가는 부분이다. 장애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Bond가 강렬해지지 않나...


P41 겁 없는 십대의 짧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는 서양음악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프랑스의 낭만파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교향곡으로, 프랑스의 작곡가 구노는 오페라로,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환상서곡으로, 그리고 소련의 20세기 음악 작곡가 프로코피에프는 발레로 두 연인을 그렸다. 이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품인 베를리오즈 (1903-1869) <로미오와 쥴리엣>을 골라보았다.

>> 로미오와 쥴리엣이 그렇게 많은 쟝르로 표현되어졌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흥미로운 사실...^^


P42 베를리오즈는 홀연히 솟았다가 홀연히 사라진 그야말로 낭만파의 이단아였다. 그는 모든 주류에서 떨어진 진정한 자립주의자였으며 어떤 유파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작곡가가 직업적인 연주자로서 탁월한 건반주자였음에 반해 그는 피아노를 거의 다루지 못하는 편이었다. 대신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에서 최대한의 재능을 발휘하였으니, 귀신 같은 테크닉을 봉퓨한 파가니니가 바일론을 다루듯, 악마적인 연주로 유명한 리스트가 피아노를 다루듯 그렇게 오케스트라를 다루었다. 이로 인해 음악의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던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주도적인 위치로 격상되었다.

>> 아주 흥미롭고 재밌는 설명이다. 피아노를 못 다뤄도 악기를 못다뤄도 훌륭한 음악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는 악기는 못다뤘지만, 오케스트라는 귀신같이 악마처럼 다루었다. 얼마나 그렇게 멋지게 오케스트라를 다루었으면 그런 표현이 나왔을까..?


P43 여기에 소개하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극적 교향곡이란 타이틀을 지니고 있고 성악이 덧붙어 있지만 종교적 음악형식인 오라토리오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장면은 모두 기악으로 연주되고 성악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없다. 이 기묘한 하이브리드적인 장르에 대해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장르는 분명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성악이 자주 쓰이고 있지만 콘서트 오페라도 아니요 칸타타도 아니며 단지 합창이 딸린 교향곡이다.”

>> 음악 쟝르가 여럿 나오니 언뜻 무슨 말인지 외국어를 읽는 듯한 느낌..^^;; 해서 사전을 찿아보며 읽었더니 그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이 참을 수 없는 무쉭이여~ -_-;;


P45 현의 꿈결 같은 플래절렛(특정 배음위치에 왼손을 가볍게 대어 투명하고 높은 음을 내는 주법), 먼 데서 들리는 듯한 호른의 팡파르, 튜바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4대의 바순, 높게 반짝이는 앤틱 심벌즈 (음정이 있는 작은 심벌즈)의 울림은 도무지 이 세상의 음악 같지가 않다. 베를리오즈 음악의 매력은 역시 본능에 충실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극도로 감각적이고 비상한 작품이 오늘날 자주 연주되지 않고 있다니 매우 슬픈 일이다.

>> 이렇게 악기 하나하나 섬세하게 느끼며 작품을 듣는다는 것...역시 그 느낌의 깊이와 크기가 다를 것이다. 나도 그렇게 그저 전체적인 음악만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연주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내는 악기 하나하나를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려러면 어떤 악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부터 알아야겠지. 얼마나 많은 공부가 될까..?


P45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풋풋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경우에 비한다면 본격적인 성인들의 사랑이다. 관능의 로맨티시즘이 밤꽃나무 향기를 뿜어내며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이른바 19금 사랑 이야기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12세기부터 내려오던 전실을 바탕으로 작곡자가 손수 대본을 작성하여 곡을 붙인 장장 4시간짜리 오페라이다.

>>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오페라는 처음 들어봤다. 바그너의 작품이라니... 로미오와 줄리엣과 어떻게 느낌이 다를까...사뭇 궁금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십대의 겁나게 불타오르는 사랑이라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성인들의 농익은 사랑이라는데 음악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P46 약제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약을 경구로 투여하자마자 두 사람에게 바로 똑같이 약효가 발현되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며 게다가 단회 투여로 일평생 약효가 보장되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긴 원래 오페라에 등장하는 약치고 오늘날 의학적 차원에서 볼 때 제대로된 약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약이란 것을 무슨 마법 같은 것으로 알았나 보다.

>>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그 속에 푹 빠져 보며 현실인지 영화인지 꿈 속에서 헤메고 있다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으며 깨몽~!!”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글이었다. 두 사람에게 바로 똑같이 약효가 발현되는 점이 신기하고, 단회 투여로 평생 약효가 보장되고..어흑~ 그러니까 영화고 드라마고 오페라가 아닌감~!! 암튼~ 저자의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약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부분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


P47 그의 주검 앞에서 이졸데는 마지막 아리아 사랑의 죽음을 부르며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P47 독일의 소설가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리베이스]를 열심히 읽은 독자라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의 노이로제에서 비롯된 산물이라는 구절이 떠오를 것이다.

>> 대체 모르는게 뭔겨..? 음악, 철학, 역사, 신화에 이어 문학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는 김문경. 정말 갈수록 그의 해박한 지식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을 따름이다.


P48 바그너와 마틸데의 사랑은 일종의 플라토닉 러브였다. 아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더 기가 막이는 일이었으니, 흔히 남자는 여자의 육체가 다른 이의 손에 맡겨진 것을 용서할 수 없고 여자는 남자의 영혼이 다른 이에게 잠식당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 그치.. 여자는 남자의 영혼이 다른 이에게 잠식 당하는 것이 더욱 큰 슬픔이지... 바그너가 참 인기가 많았었나부다... 아마도 매력이 넘치는 음악가였던 듯.. 많은 여자들이 그만 보면 반해 버렸으니 말이다...


P48 작곡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고스란히 오페라 주인공에게 투영함으로써 가슴을 짓누르는 괴로움을 지고의 황홀경으로 승화시켰다.

>>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렇게 절절하기에 더욱 뜨겁고 더욱 불탔겠지...


P48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악용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트리스탄 화음이요, 또 하나는 무한선율이다. ‘전주곡에서 첼로의 부름에 응답하는 트리스탄 화음은 사랑의 슬픈 운명이 음악적으로 형상화된 고통의 불협화음이다. 그리고 무한선율은 화성적으로 종지를 최대한 회피하여 음악을 끝없이 이어지게 하는 작법을 의미한다. 글을 맺지 않고 마침표 없이 계속 이어나가 A4용지 한 장을 채웠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스타일이 바로 무한 선율인 것이다.

>> 무한선율이란 이런 것이구나. A4 용지와의 비교 살명으로 그 의미가 확실히 와닿았다.


P49 니체가 저서 [니체 대 바그너]에서 무한선율에 대해 남긴 말을 인용해본다. 그는 바그너 열병을 너무너 심하게 앓은 나머지 나중에는 바그너 형체가 생성되어 버린 사람이다. 니체의 말대로 무한선율이 추구하는 것은 리듬을 상실한 화성의 뭉게구름과 같은 것이다. 끝없는 에스페레시보 (표정이 풍부하게)이자 아우스드륵 (에스프레시보의 독일어)의 위대한 최면술인 것이다.

>> 얼마나 바그너를 좋아했으면 그렇게 바그너 항생체까지 생겼을까나..^^ 어쨋든, 오래오래 질질(?) 끌면서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을 끓어내고 그럼에도 끝내기가 아쉬워 계속 뭉기적거리는 바그너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사랑 그렇게 음악 속에서라도 이루며 함께 오래 그렇게 있고 싶었던 거겠지...


P51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분명 위대한 작품이고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꼭 한 번은 접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곡이다. 엄청난 곡 길이 때문에 선뜻 추천하기가 주저되지만 연주 소요시간 20분 정도의 전주곡사랑의 죽음만이라도 들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두 곡은 따로 독립되어 필하모닉 콘서트 무대에 올려지기도 하는데 이것만 들어도 오페라의 에센스는 충분히 즐긴 셈이다.

>> ‘사랑의 죽음을 찿아들었다. 애절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정열적이고 불타오르는 눈빛과 함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의 절절한 연기로 그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김문경 덕분에 내 눈과 귀가 호사를 누리고 있는 요즘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어디 이런 오페라가 있는 줄이나 알았겠는가..? -_-;; 암튼 조금 클래식과  가까워지는 느낌.. 행복하다...^^


P51 마테를링크가 1892년에 지은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드뷔시에 의해 오페라로, 포레와 시벨리우스에 의해 연극의 부수음악으로, 그리고 쇤베르크에 의해 단악장 교향시로 형상화 되었다.


P53 한 편의 감각적인 샴푸 CF를 보는 듯한 이 장면은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 하하하하~ ^^ 한 편의 감각적인 샴푸 CF~ 증말 돌아가시겠다~ 하하하하~ ^^ 진지하게 나가다가 이렇게 엉뚱한 표현으로 웃음을 빵터뜨리게 하는 것은 아마도 김문경의 특기인 듯. 겨우 2장까지 밖에 안읽었는데 중간중간 얼마나 웃었는지.. 나를 이렇게 진지함으로 푹 빠지게 하다고 생각지 않은 부분에서 엉뚱한 표현들로 예기치 않게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작가를 나는 또 한명 알고 있다. 시모노 나나미. 얼마나 진지하게 영웅담과 전쟁 승리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갑자기 벼락 맞아 죽었다~!!’로 찹터를 끝내는 시모노 나나미. 김문경에게서 나나미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암튼, 앞으로 감각적인 샴푸 CF’가 나오면 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떠오를 것이고, 더불어 김문경이 떠올라 또 그렇게 한바탕 웃음이 터질 것 같다.. ^^ 아주 재밌는 대목이었다..^^


P55 베를린의 캬바레에서 편곡자 겸 지휘자로 일하던 중 이 작품을 R 슈트라우스에게 보여주었다. 이 곡에 감명 받은 슈트라우스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쇤베르크로 하여금 리스트 기금에 혜택을 받게 해주었고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덕분에 쇤베르크는 1년 만에 캬바레 일을 그만두게 된다.

>>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르게 전환될 수도 있는게다. 만약 쇤베르크가 슈트라우스가 아닌 마음이 맑지 못한 다른 음악가나, 또는 그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는 음악가를 만났으면, 그의 펠레에스와 멜리장드는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거니와, 쇤베르크 역시 캬바레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을게다. 아니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어둠 속에서 일하며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슈트라우스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의 재능을 파악하고 아까운 음악가가 그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공부할 수 있도록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리스트 장학금을 받게 해주고, 작곡을 가르칠수 있도록 좋은 직장까지 마련해주고.. 이런 은인이 어딨단 말인가..? 그로인해 쇤베르크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었을지도 모르는 우리 후대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모두가 그냥 그 하나로 끝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삶이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이어져 후세까지 전염되는 것. 그러고보면 그 연결고리를 아주 감성적으로 다루었던 미치 엘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함께하는 주위 사람을 더 소중한 눈으로 바라보게 했던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던 책...


P55 재능이 있는 자는 어느 누구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길을 찿아가도록 되어있는 듯하다.

>> 배움이나 전공의 길을 말하는 특정 부분에서는 옳은 말이다. 나는 누가 가르쳐줘야 아는 것을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알게되는 것 같다.  

하지만 삶의 기회라는 전제를 두고 볼때는 다르다. 글쎄, 전적으로 100% 동의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인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물론 재능도 있어야 하고 본인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살다보니 정말 이라는 것이 선물처럼 주어져야 함을 알기 때문에.

좋은 사람 만나는 것도 운이고, 갑자기 누가 그만 아파서 못하게 되어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운이고,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훌륭한 작곡가 눈에 띄는 것도 운이고, 전환점이 되는 삶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기회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삶의 선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P55 전곡은 하나의 악장으로 되어있지만 세부적으로 나누면 소나타 형식의 제시부, 스케르초, 아다지오, 재현부와 피날레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쇤베르크는 초기에 4악장이 1곡으로 연결된 이른바 ‘4 in 1’ 형태의 구성을 좋아했다.

Classic #3 소설 속에 흐르는 클래식 문학 작품을 통해 다시 보는 명곡들

성욕이라는 것은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하더라도 역시 해롭고 악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회에서처럼 그것을 장려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을 상대로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 톨스토이 <크로이처 소나타 >-

 

P59 음악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동반자 관계이다. 문학이 음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며 반대로 소설이 음악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기도 한다.

>> 동감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엮이 쌍둥이 영혼같은 관계. 그것이 바로 음악과 문학인 것이다.


P59 19세기 낭만주의 사조에서 만연했던 음악과 문학의 교류도 결국은 두 예술이 서로를 갈망할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겟다. 음악은 문학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문학은 연인처럼 사모한다고나 할까.

>> ‘음악은 문학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문학은 연인처럼 사모한다고나 할까저자의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렇게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연인처럼 사모하기에 둘은 그렇게도 떨어질 수가 없는게다..


P60 소설을 통해 음미해보는 음악은 음악 그 자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하며 문학성의 근원인 철학의 명제까지 제시해준다.


P60 악함을 알지 못하는 선함, 추함을 모르는 아름다움은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언제 붕괴돌지 모르는 위태로운 구조물과도 같다.

>> 공감이며 동감이다. 그래서 세상을 모르는 사제들나 수도자들을 보호하기가 그리도 힘든 것 아니겠나. 그래서 우리는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를 드려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P60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 (1869-1951)는 소설 [전원 교향악]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지 위에 쌓아 올린 행복이 얼마나 쉽사리 허물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P63 베토벤 교향곡 6 <전원>은 흔히 운명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교향곡 5 C 단조와 쌍둥이 작품이다. 창작연대가 거의 동일한 두 작품은 실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암흑에서 광명으로란 모토를 지닌 5번은 투쟁적이고 과격한 인상인 반면, 대자연을 담은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6번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 운명 ‘5과 전원 ‘6이 쌍둥이 작품이라는 사실이 정말 운명처럼 느껴졌다. 선과 악, 양과 음처럼  투쟁적이고 과격한 분위기의 운명과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은 전원이 같은 시기에 태어난 쌍둥이 작품은 어쩌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양면성이 작품으로 그대로 표현되어진 건 아닐런지.. (에고..한 수 두기는..^^;;) 어쨌거나 내게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나를 붙잡는 무엇이 있음이 느껴졌다...


P63 <전원>의 곡 전체를 통해 전원 생활에 대한 베토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으며, 특히 시냇가의 정경이란 부제가 있는 2악장은 그중에서도 백미이다.


P64 2악장은 곡 전체를 통해 시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베토벤은 시냇물을 표현하기 위해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 그리고 악음기를 단 2대의 독주 첼로를 배정하여 3도의 음형으로 흐르게 하였다. 시냇물으리 물줄기를 따라 사랑스러운 주제가 흐르고 이는 새소리를 연상시키는 음구로 장식된다.

>> 이렇게 어떤 악기가 어떤 분위기의 어떤 소리를 어떤 부분에서 내게 되는지까지 꿰뚫고 있는 저자의 음악 지식은 대체 어디까지인지.. 그에게 한계는 있기라도 한건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P65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중 [크로이처 소나타]만큼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은 드물다.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출판도 되기 전에 필사본으로 널리 읽히는 등 지대한 관심 속에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P66 [크로이처 소나타] 가 독자들로부터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 까닭은 다소 선정적인 주제와 잔인한 묘사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른바 지독한 참회와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집약되는 톨스토이 작품 전반의 주제의식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톨스토이즘의 노골적인 선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육욕이 소멸될 때 인류는 결국 멸망하게 되지만 계율은 실현되어 사람과 사람간의 진정한 소통이 완성된다는 것이 소솔의 모토로, 주인공의 입을 통해 결혼이란 그에게 있어 순진무구한 처녀를 난봉꾼에게 팔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종의 인신매매를 합법적으로 위장한 것에 불과하며 밀월여행은 남녀가 양친의 허락을 받고 공공연하게 벌이는 음란한 행위인 것이다.

>> 그런데 그가 그렇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정작 톨스토이 부인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나. ‘스스로 실천할 수 없는 원칙을 가진 선지자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외친 금욕과 참회로 점철된 톨스토이즘을 왜 그는 고수를 했던걸까..? 그게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변화가 일은 걸까..? 아니면 톨스토이 스스로 난봉꾼이었기에 스스로를 보며 그리 느꼈던건지.. 그것이 옳지 않은 행동임을 알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참회와 금욕으로 족쇄를 글로나마 채우고 싶었던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는 그나, 스스로 추구하는 것을 지키지 못하는 정신적 멘토를 추종하는 추종자들이나...


P68 프랑스의 문필가 로망 롤랑은 그의 저서에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베토벤에 대한 애증을 설파하고 있다고 쓴 바 있다. 톨스토이는 베토벤 음악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철저히 굴복 당한 체험을 한 후 음악이란 최면술이 아무에게나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아내가 정부와 합주한 곡인 <크로이처 소나타>는 죄악의 씨앗을 심어준 타락의 출발점을 상징한다. 톨스토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 음악이 때때로 위험한 존재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 물론 음악이 때때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여기서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음악이 베토벤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욕으로 난무한 뒷골목의 랩이나, 청소년들을 마약과 술로 정신 못차리게 하는 특정적인 롹이라던가.. 또는 우울증에 걸리게 하는 뉴 에이지 음악은 심리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기에 이 부분에 인정을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의 음악에 자신의 영혼이 푹 빠져 버렸다고 해서 그 음악을 위험한 존재로 표혆한다는 것은 내가 굳이 이 짧은 표현으로 말하지 않아도 어불성설이라는 것.

결국 그렇게 말하는 톨스토이는 자신의 약점을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정당하지 못한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오우~ 내가 감히 톨스토이를 비판하다니~ 흐미~ ^^;;)


P69 음악은 영혼을 고양시키지도 억압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극할 뿐입니다. 뭐라고 말할까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망각하게 하고 자기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크로이처 소나타>가 자극적인 곡이란 점에는 확실히 공감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중 이 곡만큼 서로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끊임없이 흥분 상태로 몰아가는 곡도 없을 것이다. 빗대어 표현하자면 “2중주를 빙자한 이종 격투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 이렇게 설명을 듣고 들어서 그런지, 정말 둘이 감정이 고조되어 흥분된 격렬한 감정이 느껴짐을 느꼈다. 그렇게 감정이 최고조에 다르다보니 급기야 눈물마저 떨어지고.. 정말 대단한 곡이었다.. 기돈과 마르따의 숨막히는 연주.. 정말 굉장했다.. 와우~


P69 이 곡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FM 라디오를 통해서였는데, ‘무슨 곡이 이렇게 정신 사나울까라고 불평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 하하하~ ^^ 저자의 표현이 너무 솔직해서 또 웃음이 나왔다. 갈수록 마음에 드는 김문경~ ^^


P70 토마스 만(1875-1955)은 흔히 ‘20세기 초반의 가장 위대한 독일 소설가로 지칭된다. [마의 산], [닥터 파우스트], [토니오 크뢰거], [베니스에서의 죽음]등 그의 대표작에서 탐미적인 문체를 통해 고뇌하는 많은 인간상을 접할 수 있다.

>> 문학 지식 또한 한깊음하는 김문경...


P70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말러의 교향곡 8번 초연에 참석하여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각곡가에게 자신의 소설 [대공전하]를 선물로 보내면서 당신이 제게 주신 감동에 비하면 보잘 것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참 고우면서도 멋드러진 감성을 지닌 작가다. 얼마나 훈훈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인가.. 세기의 문학의 대가가 음악의 대가에게 보내는 찬사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이 감동스럽기마저 하다.


P71 이렇듯 토마스 만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말러와의 일화로 친숙하나 그의 예술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기실 바그너였다. 그는 세상 어느 것도 바그너의 작품만큼 내 안에 잠재된 예술적 충동을 강렬하게 자극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의 예술에 푹 빠져있었다.

>> 바그너가 참 많은 문학가와 철학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듯 하다. 토마스 만이 그렇게 바그너에게 빠졌었듯이, 니체는 바그너 항생체가 생길 정도였다고 하니, 바그너가 숭고하고 고고한 영혼들에게 미친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한 듯하다.


P71 토마스 만은 소설에서 바그너 음악극의 중요한 음악형식인 라이트모티브 (특정 인물과 사물을 담고 있는 짧은 주제)기술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바그너의 오페라를 자신의 창작세계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작품의 성립과 전개 과정이 <니벨룽의 반지?와 놀랍도록 닮았고 단편 [트리스탄]은 동명의 오페라를 소재로 한 일종의 몽타주이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소설 [키 작은 프리데만씨]는 오페라 <로엔그린>의 패러디에 해당된다.


P74 게르다 부인은 바그너 음악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현기증과 도취, 동경과 고뇌는 바그너 예술의 파토스 (작품에 나타난 정서적 성질)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토마스 만은 프리데만을 통해 예술이란 것이 삶에 있어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가 지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운 선율처럼 위험한 것은 없으며 우리가 이를 좋아하게 된다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극도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독과 연결되는 법이다.

>> 그래 맞다. 극도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독과 연결되는 법이다.


Classic #4팜므 파탈 이야기 남자들을 파탄에 빠뜨리는 3 3색의 여인상

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에서 가장 이기적이다. 때문에 상처 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 니체 [바그너의 경우] -

 

P79 팜므 파탈 (Femme Fatal).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치명적인 여인이며 흔히 요부라고도 한다. 풍부한 성적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끝내 죽음으로 이끄는 잔혹한 여인상이라고나 할까. 성서 속의 데릴라, 신화의 메두사,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등이 대표적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에 속한다.

>> 콕 찝어서 표현해주었다. 데릴라도 메두사도 실제로 보지 못했으나 정당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내생각엔 샤론 스톤이 가장 으뜸가는 팜므 파탈이 아닐런지... 하하하~ ^^


P80 이 당당한 여주인공을 다룬 장르는 소설, 오페라, 영화, 발레, 뮤지컬에서 바이올린 및 피아노의 쇼피스까지 방대하여 그야말로 원 소스 멀티 유즈 (One Source Multy Use).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카르멘>의 원작은 메리메의 소설이지만 전세계적으로 카르멘 열풍을 불러 일으킨 것은 결국 프랑스 작곡가 비제 <Georges Bizet, 1838-1875>의 오페라였다.

>> one Source Multy Use~!! 하하하~ 하여간에 윗트 넘치는 표현이다.. ^^ 그렇게 요리조리 다양하게 힛트를 내주는 힛트상품이 어디 쉬운가. 그런 의미에서 카르멘은 이만저만 효자 작품이 아닌게다. 김문경 버젼으로 설명을 해봤다.. ^^


P81 <카르멘>은 초연 때에는 이른바 저주 받은 걸작에 속했다. 브람스, 구노, 푸치니, 차이콥스키, 니체가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 오페라가 첫무대에서 그토록 냉담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오늘날 시점에서 보면 기이한 일이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당시 파리 사람들은 최소한 예술 속에서는 사랑이 고상하게 그려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현실에서는 아녀도 적어도 예술 속에서만큼이라도 고귀하고 순수하게 그려지기를 바라는 마음..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나 역시 사랑은 순수해야 하고 고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물론 예술 안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P83 <카르멘>을 리얼리즘 오페라라고 하는 이유도 인간의 성적욕망과 질투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사랑의 잔인한 측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카르멘의 사랑을 바그너식의 헌신적인 사랑에 반대되는 개념인 자연으로 환원된 사랑으로 정의한다.

P83 이는 고귀한 처녀의 사랑이 아닙니다! 젠타의 감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운명으로서의 사랑, 재앙으로서의 사랑, 냉담하고 순결하고 잔인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자연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투쟁, 그 밑바닥에 성에 대한 증오가 들어 있는 사랑! 나는 사랑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비극적 장난이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되고 그렇게 공포스럽게 표현된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 니체가 아마 살로메를 보았으면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되고 그렇게 공포스럽게 표현된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 같다. 물론 내 느낌이 모두의 느낌이라고 결코 말할 수는 없지만, ‘나야말로 살로메처럼 그렇게 강렬하고 잔인하고 섬뜩하며 그렇게 공포스럽게 표현된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고 굳이 니체에게 딴지를 걸어본다.


P84 니체의 저서 [바그너의 경우]중에서 콘스탄트의 격언을 인용해본다. “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에서 가장 이기적이다. 때문에 상처 받게 되면 가장 관대하지 못하다.” 오페라 <카르멘>을 이보다 잘 함축할 수 있을까. 대개의 경우 사랑에 배신 당했을 때 사랑한 만큼 증오하게 되어있다면 호세는 아마도 카르멘을 죽을 만큼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다.

>> ‘카르멘을 죽을 만큼 사랑했다. ‘라는 김문경의 해석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죽을 만큼카르멘을 사랑했다면 본인이 죽어야지 카르멘을 죽여서는 안되었다고 나는 감히 반박하고 싶다. ‘파멸은 결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파멸시키고 죽음으로 이끄는 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기에 호세가 까르멘을 향한 그 사랑은 죽을만큼 사랑한게 아니라 죽을 만큼 갖고 싶었던것이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갖고 싶었고, 내 곁에만 두고 싶었고 나만을 위해 존재해주기를 바랬던 극단적인 이기심.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사랑은 절대 파멸을 가져오지 않는다. 어둠으로 둘러싼 파멸 속에 갇혀있는 이를 빛 속으로  인도하며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며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을..


P84 비제는 카르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서 집시 음계를 사용하였다. 그녀가 자유로운 보헤미안이라는 것을 알리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 동감이다. 집시 음계를 사용했다는 것. 자유로운 영혼 카르멘과 그녀의 강렬한 이미지에 꼭 맞아 떨어지지 않나...


P85 독일 후기낭만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1949)의 오페라 <살로메>는 요즘 말로 하자면 X등급 외설, 폭력 영화쯤 된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심할 수도 있다. 이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이 일곱 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으면서 마지막에는 전라가 되는 대목인 일곱 베일의 춤이 가장 유명하다. 스트립쇼에 다름아닌 이 장면이 술집도 아닌 오페라 극장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이 된다.

>> 그러게 말이다. 술집이나 볼 수 있는 퍼포먼스가 오페라 극장에서 펼쳐졌으니, 지금 현대 시대라 하더라도 쉽게 용납이 안되고 인터넷에 핫뉴스로 올려져 네티즌들의 악플공격을 받을 만한 일이 그 옛날에 벌어졌으니 그 충격이 정말 얼마나 컸을지 그림이 그려지고도 남는다..


P86 은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참수된 머리를 바라보면서 과일을 깨물 듯이 네 입술을 깨물어줄거야!”라고 외치는 여주인공 살로메의 대사는 참으로 엽기적이다,

>> 완전 엽기를 떠나 거의 씨리어 킬러의 심리 구조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넘 섬뜩하다..


P86 카르멘의 사랑이 본능에 충실한 솔직함이라면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살로메의 사랑은 변태적인 취향에 속한다.

>> 동감이다. 살로메의 변태적인 사랑에 비하면 카르멘의 사랑은 순간의 열정을 온 몸과 영혼을 태우는 순수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겠다.


P86 사실 살로메는 성서 속에서는 그저 헤롯 왕과 내연의 관계에 있던 헤로디아의 딸로만 지칭될 뿐이다. 헤롯의 생일을 맞아 딸이 왕 앞에서 춤을 추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온다. 즉 극의 주도권이 딸보다는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희대의 악녀로 만든 것은 탐미주의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였다.

>> 성경 속에 나오는 스토리로 신자라면 익숙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 손을 거치면서 전혀 새로운 악녀로 재탄생하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라 붙인 이름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강한 개성이 느껴지는 살로메라는 발음에서 풍기는 뉴앙스가 그렇게 요녀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이며 질투의 화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엽기적인 상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잘려진 세례 요한의 목에 키스를 하고 입술에 키스를 하는 살로메. 작품을 보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엽기적이고 섬뜩하고 공포스러워서. 살로메 역을 맡은 여가수의 분장이나 표정도 그랬고, 어찌나 살벌하고 싸이코패틱한 분위기로 연기를 잘하는지, 다른 살로메가 가능할까...싶었다... 게다가 헤롯 연기를 맡은 남자 가수도 어찌난 연기가 완벽한지. 암튼 내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고 작품이었다.


P88 R. 슈트라우스는 오스카 와일드 희곡의 독일어 버전에 곡을 붙여 희대의 19금 오페라를 만들었다.

>> 그랬구나...


P89 <살로메>는 모든 악기가 어마어마한 개수의 음표를 휩쓸듯이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그렇게 음표를 휩쓸듯이연주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P89 R. 슈트라우스의 친구이자 음악적 경쟁자였던 구스타프 말러는 이 작품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살로메> R. 슈트라우스의 최대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 얼마나 멋있는 관계인지.. 친구이면서 음악적 경쟁자. 친구의 훌륭한 작품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하며 애정을 갖는 말러. 정말 멋지고 또 멋진 남자들의 우정이다... 정말 그 슈트라우스에 그 말러다.

슈트라우스도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레장드>를 보고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하고 쇤베르크를 캬바레에서 꺼내주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리스트 장학금까지 받게 해주지 않았나. 어디 그뿐인가? 음악 학원에 취직까지 시켜주며 작곡을 가르치게 해준 너무나도 고마운 은인인게다. 이렇게 성품이 깊은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듯. 넘 멋진 남자들의 세계다.


P90 1905년 드레스덴애서 열린 <살로메>의 초연은 스캔들에 가까웠다. 엘리트들이 모인 사교장이 관음증 환자들의 소굴로 변한 것 같은 분위기였으며, 시종일관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음악에 비평가들은 마치 악취를 맡은 듯 불쾌해했다.

>> 그러고도 남았을게다. 그 자유로운 분위기의 프랑스에서 선보인 <카르멘>도 고귀한 사랑이 그려지지 않은 관계로 그리 악평을 받았는데, 관념적이고 보수적인 독일의 드레스덴의 엘리트 들이 모인 극장에서 그런 스트립쇼 수준의 작품이 선보였으니  그들이 느꼈을 충격은 얼만큼 컸을지..

 아마도 그들은 구역질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작품 자체가 엽기적인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소화가 안되는데 게다가 7개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으며 스트립쇼를 끝내고는 전라를 선보이다니 말이다. 암튼 괴짜들이다. 용기가 대단한 것 같다. 아마도 천재들이나 거장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용기인 것 같다. 누가 뭐래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그것에 온전히 몰입하며 빠져드는 것... 내겐 부러운 부분이다...


P90 그러한 아우성 속에서도 이 오페라는 짭잘한 수입을 올려 R. 슈트라우스는 바이애른 주의 가르미슈에 근사한 별장을 지을 수 있었다. ‘벗기는 장사가 남는 장사란 공식은 100여 년 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 하하하~ 돌아가시겠다~!! 역시 한 틈을 놓치지 않는다~ 큭큭~ ^^


P90 알반 베르크 (Alban Berg 1885-1935) 작곡가에 대해 생소한 독자들이 많을 터이니 약간의해설을 붙이고자 한다. 그는 독일 20세기 음악의 대부 쇤베르크의 제자이며 또 다른 제자 베베른과 함께 신(new)빈악파로 불린다. 신빈악파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과거의 빈악파이었던 점에 빗대어 지칭하는 용어이다.

P91 베르크가 만년에 작곡한 오페라 <룰루>의 히로인은 한마디로 괴물이다. 사랑의 신 에로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야누스처럼 하나의 몸에 깃든 결합체라 할 수 있다. 에로스는 삶의 충동이며 타나토스는 죽음의 충동이다.

P91 19세기에 이르러 예술가들은 두 개념을 점점 같은 것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둘 모두 자아를 상실시킨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 혹은 사랑의 격랑으로 말미암은 희생, 이 얼마나 달콤한 아이러니이지 매력적인 소재인가. 20세기의 울트라급 팜므 파탈인 룰루의 독성은 사랑과 죽음의 완벽한 하모니에서 출발한다.


P93 이 오페라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베데킨트의 희곡 [땅의 정령], [판도라의 상자]의 모토는 성욕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며 기성 도덕의 자제력은 성욕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이다. 룰루의 희생자들은 그녀가 부도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사랑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그녀의 매력 앞에 모든 것이 속수무책이다.

>> 남자들이야 성욕에 못이겨서 지들이 좋아서 그런다치더라도, 그들 곁을 지키는 여자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그 남자들이 싱글이라는 가정아래 보더라도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이요 오빠요 동생인데, 우리 가족 중의 누군가가 그런 파멸과 파괴적인 사랑을 가져오는 요부에게 빠져 죽음의 길로 빠져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암튼, 이런 여성이 내 주위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히구...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여자가 바로 이런 사랑을 빙자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갖고 놀며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들이다. 그런 여자들은 주위에서 종종 보았다. ‘파멸까지 이게 하진 않았어도 얼마나 깊은 고통속으로 몰아넣는지를.... 절대로 누군가의 감정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 결국에 파멸로 빠지는 것은 본인일테니. 삶의 법칙이다. 내가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 자연의 법칙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 위의 세 팜므 파탈들도 결국 죽음으로 끝남을 보여주지 않나.. 그런 것이다.. 삶이란...


P93 베르크가 <룰루>를 작곡한 동기는 그의 의식을 뒤흔든 성적혼란과 갈등에서 출발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 어렸을때부터 그의 경험과 그 역시도 여성 편력이 심했으며 그에 더하여 레즈비언 누이의 방탕한 생활도 그의 정신 세계에 한 몫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환경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의 삶에서 이런 파격적인 작품이 나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P94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남녀간의 사랑은 아무리 미화되어도 성욕이 핵심이라고.

>> 그런가..? 글쎄.. 그럴지도.. 아닐수도... 모두 나름아닌가...? 너무 동물적인 표현아닌가..?


P94 오페라 <룰루>의 음악은 어떤가? 한마디로 굉음과 비명의 닥다구니가 따로 없다.

>> 큭큭~ 표현이 넘 끝내준다~ ‘굉음과 비명의 닥다구니라니... 돌아가시겠다~ ^^;;


P95 1론도는 룰루의 연인 알바의 캐릭터를 그린 곡이다. 실빈악파의 현대음악은 난해하다고들 하는데 이 말은 가끔 틀린 말이다. 이런 부류의 음악은 이해할 필요가 없는, 그저 흘러나오는 음에 몸을 맡기면 되는 음악이다. 아바도는 이 곡을 침실용 음악처럼 감미롭게 다루는데 필자의 귀에는 음고가 바뀐 재즈처럼 들린다. 섹스폰은 스탄 겟츠의 연주처럼 달콤하고, 악음기를 낀 트럼펫은 마일즈 데이비즈의 여누처럼 쿨하며, 비브라폰은 밀튼 잭슨의 영롱한 플레이를 닮았다.

>> 저자는 마치 음악의 광대한 쟝르와 영역을 지맘대로 드나들면 주물럭대는 느낌이다.


Classic #5 신화를 동경한 음악 창작의 샘, 그리스, 로마신화

, 님프들의 모습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만 있다면,

이렇게도 선연하니,

그녀들의 아련한 살빛, 깊은 잠에 휩싸여 졸고 있는

대기 속에 하늘하늘 떠오른다.\내가 꿈에 취한 것일까>

                                         - 말라르메 [목신의 오후] -

 

P100 신화에는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평화와 전쟁, 삶과 죽음 등 시대를 초월한 인간심리의 비밀이 가득 담겨있다. 또한 신화는 성경과 함께 서구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를 제공하기도 한다.

>>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가 요약해서 적어놓아 속이 시원했다.. ^^


P100 디터스도르프 (Carl von Dittersdorf 1739-1799)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들은 디터스도르프를 대부분 알고 있다. 그가 120곡정도의 교향곡을 작곡한 다작가라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해도 아마도 이 작곡가의 콘트라베이스 협주곡은 솜씨 좋게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이 많은 교향악단의 베이스 오디션 곡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터스도르프의 콘트라베이스 협주곡만 잘 연주해도 밥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 클래식에 문외한인 내가 디터스도르프라는 낯설은 음악가의 이름을 모르는거야 당연하지만, 그의 콭트라베이스 협주곡만 잘 연주해도 밥 먹고 살 수 있을정도라는 말에 그의 위력이 느껴졌다.


P101 [변신이야기]는 원래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라틴어 서사시(15)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화, 전설 속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변신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있어 하나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읽혀지고 있다. 여기에는 거의 모든 형태의 사랑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인간 심리의 다양한 측면이 펼쳐져 있어 서양의 문학과 정신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헬레니즘 문화에 있어 성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15권에 이르는 대서사시를 음악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내겐 너무나 큰 놀라움이었다. 서사시를 읽고 느낀 그 느낌을 음표로 옮기는 작업도 작업이지만, 그 배경이며 소리며 분위를 모두 음으로 표현하며 듣는이에게 전달하는 작업. 신비 그 자체 아닌가...


P110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타르트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최고의 브랜드이다. 우리는 그를 음악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영화로 보고 초콜릿으로 먹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의 이미지는 작곡가를 초월하는 하나의 경이인 것이다.


P110 천국에서 팩스를 받고 작곡한 듯한 그의 작품들은 양적으로 압도적이며 그 품질 또한 극한의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모차르트는 신이 우리에게 준 무한한 축복이며 숭고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이다.

>> 하하하~ 천국에서 팩스를 받고 작곡한 듯한 작품들..하하하~^^ 하여간에 이 통통튀는 표현이란~ ^^ 


P110 모차르트는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걸작을 남겼는데 하이든이 교향곡과 현악 4중주에 주로 매진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모차르트의 교향곡들은 18세기 교향곡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싹으로 돋아났지만 만년에는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P111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던 아버지 레오폴드는 자녀의 영재 교육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으면 딸 난네를과 아들 모차르트의 재능을 만방에 알리고자 대대적인 유럽 순회 연주를 가졌다. 모차르트의 소년기는 여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세에 이르는 기간 중에 적어도 7년은 여행 중에 있었다. 당시 모챠르트 가족은 말하자면 18세기의 잭슨 파이브였던 것이다.

>> 18세의 잭슨 파이브~ 까르르르륵~ ^^;; 하여간에 이 깜찍한 표현이란~ 정말 웃겨서 돌아가시겠다~ 하하하하~ ^^

암튼. 모짜르트의 재능이 그렇게 천재적으로 타고난  재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타고난 재능이 온전히 삶 안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아빠 레오폴도는 모짜르트에게 든든하면서도 엄격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연주회를 할 수 있었고, 그럼으로 많은 연습을 할 수 있었고, 또한 훌륭하고 위대한 많은 음악가와 거장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는 삶이 그에게 안겨준 축복에 감사를 했어야 했겠지만, 그 무엇보다 그런 아빠가 자신의 아빠였음에 가장 큰 감사를 해야 했을게다.


P111 런던에서는 바흐의 막내아들인 J.C. 바흐로부터 교향곡과 협주곡 작곡법을 배우게 되었다. J.C.바흐는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명성 때문에 오늘날 거의 잊혀진 작곡가이지만 당시 영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되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바흐의 아들 J.C.바흐도 역시 훌륭한 작곡가였다는 사실은 내게는 놀라운 사실이었고, 또한 그가 모짜르트의 교향곡과 작곡법을 가르쳤다는 사시은 어떤 운명의 우연처럼 느껴졌다. 역시 뛰어난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들끼리 어울려지기 마련인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우연처럼 이어진다해도 그들은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것 같단 느낌. 이런 느낌은 파인만을 읽으면서 강하게 들었던 느낌이었다.


P111 이때 모차르트가 작곡한 첫 교향곡이 9세일 때 초였되었는데 이 작품은 10분 남짓 되는 짧은 곡으로 연주회 막 올리기 작품이나 청중의 소음제거 곡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당시 교향곡이란 장르는 오늘날처럼 콘서트의 메인 요리가 아니라 가벼운 전채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 옛날엔 교향곡이 그런 용도로 쓰였구나.. 그래도 연주회 막 올리기 작품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청중의 소음제거 곡이라는 역할은 참 서글프게 들렸다. 오늘 날엔 그렇게 우아하게 콘서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니, 역시 모든 것엔 어둠과 빛이 존재하는 듯...


P112 이탈리아 여행 중 14세의 모짜르트는 르네상스 시절 작곡가 알레그리의 9성부 합창곡 <미제레레>를 단 한번 듣고 악보로 받아 적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 와우~!! 역시 천재~!! 절대 음감을 가진 모짜르트~!! 정말 너무나도 대단한 음악가라고 말하는 것 조차 그에게는 초라한 표현같기만 하다..


P112 모짜르트가 여행 중에 작곡한 교향곡은 주로 여행지의 스타일에 맞추어져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3악장의 서곡 풍으로 작곡하고 빈에서는 3악장에 미뉴에트를 넣어 4악장제로 다듬고 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고 있는 식이다.

>> 나의 어설픈 견해로는, 그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 있다는 차원에서가 아닌 자연스럽게 그렇게 작곡되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풍부한 감성과 천재적 재능을 지닌 음악가이고, 그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이탈리아 음악품에, 빈에서는 빈의 음악풍에 빠져들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 아니었을까..? 그렇고보니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식대로, 빈에서는 빈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형식의 음악을 작곡한 것은 당연한 것. 그렇게 감성적이고 예민하고 섬세한 모짜르트가 로마법을 따르기 위해 로마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엔 이해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생각. 그래서 저자의 생각에 딴지를 슬쩍 걸어보았다. ^^;;


P115 모차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 K551에는 <주피터>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모차르트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지만 곡이 지니는 불멸의 가치를 생각해볼 때 교향곡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표제이다. 그가 오래 살아서 더 많은 교향곡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이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이 교향곡은 완벽하다.

>> 얼마나 대단한 곡이길래..? 내가 들어본다고 해서 완벽한지 안한지 구분조차 못하겠지만, 그 느낌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진 못했어도 마지막 Finale 부분을 들으며 그가 말한 곡의 느낌이 어떤지 조금 맛볼 수 있었다. 정말 굉장했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라도 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


P115 주피터는 로마 신화의 유피테르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며 그리스 신화에 있어 제우스에 해당한다. 주피터는 올림포스 산에서 기상 현상을 지배하는 신으로 천둥, 번개를 치는 신으로도 불리운다. 로마시대에는 승리의 수호신이자 정의와 덕을 다스리는 신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P116 모차르트는 결코 딱딱한 방식으로 곡을 짓지 않는다. 대위법의 명수 바흐는 여기서부터 수학이 시작된다식으로 푸가를 만드는 반면 모차르트는 바로크의 푸가 형식과 고전파의 우아함이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한다. 즉 모차르트는 초심자와 마니아 모두를 만족시키는 음악을 만든 것이다. 주피터처럼 무한한 감동의 벼락을 내리치는 이 천재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 하하하하하~ *~!!*경롓~!!*  (경의를 표하는 펌킨탱이~ ^^)


P117 드뷔시는 원래 바그너 마니아였어요, 20대에 바그너 음악의 마력에 완전히 압도되어 바그너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를 순례하곤 했지요.

>> 이 책을 통해서 느낀 것은 의외로 많은 음악가들이 바그너를 깊이 존경하고, 그를 따라 배우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바그너가 훌륭한 음악가였구나... 느껴졌다..


P118 드뷔시는 윤곽이 뚜렷한 음색을 선호하지 않았어요. 약음기를 낀 현악기의 벨벳 같은 소리, 플로트의 신비로운 저음, 달콤한 오보에의 속삭임, 약음기를 낀 호른의 코맹맹이 소리, 미풍같은 하프의 사랑거림 이런 것이 드뷔시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음색이지요, 농담 삼아 기관지 천식이 있는 가냘픈 목소리라고도 하는 그 음색 말이에요.

P119 일단 화성에 대한 감각이 독일 작곡가들과 완전히 틀려요, 독일 음악가들은 화성을 철학이자 시나리오로 보았어요, 음악을 고조시키고 이완시켜 음악에 줄거리를 부여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드뷔시는 화성을 단지 색채와 음향으로 보았어요, 뭐랄까, 그저 음악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빛이랄까..

P119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야 말로 드뷔시 예술의 결정체가 아닐까요, 비록 짧은 곡이지만 이 곡에는 드뷔시 음악의 DNA가 모두 들어있지요.

>> 그렇구나...


P120 꼭 쇤베르크나 베베른처럼 외계인 같은 음악을 해야만 현대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12음음악은 골로치자면 완전히 비문인 것 같아요, 그냥 알파벳 26자를 겹치지 않게 일렬로 나열한 문장 같지요, 그런데 드뷔시 음악은 말은 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처럼 느껴지지요.

>> 하하하하하~ 또 나를 돌아가시게하는 김문경~!! ^^;; 말은 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같은 드뷔시~ 하하하하하하~ 정말 돌아가시겠다~ ^^;;

나는 지금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듣고 있다. 나른한 느낌도 들고, 요정들의 표정이 느껴지기도 하고 도망가는 느낌도 들고 (글을 읽고 난 다음이라 내가 억지고 갖다 붙이려는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분위기에 푹 빠져지지는 않으나 일단은 느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 ^^;;


P120 프랑스의 작곡가 생상이 그 오페를 관람하다가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그랬다지요, “언제까지 저렇게 갑니까?” 그랬더니 드뷔시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끝까지 저렇습니다.”

>> 우아아앙~!! 완전 죽음이었다~!! 푸하하하하하~ ^^;; “언제까지 저렇게 갑니까?” “끝까지 저렇습니다~!!” 큭큭~!! 물어본 생상도 대답하는 드뷔시도 얼마나 머쓱했을까 싶다. ~ 읽다가 죽는줄 알았다 넘 웃겨서~ 하하하하하~ ^^;;


P121 드뷔시의 걸작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음악이 오수의 백일몽처럼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보여준 작품이다. 재즈로 말하자면 나긋나긋한 보사노바아 몽롱한 빌 에반스이 분위기에 까까운 편이라 할 수 있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프랑스의 상징파 시안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에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그려낸 것이다.

P121 목신은 그리스 신화의 판 Pan을 뜻하며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존재이다.

P122 판은 갈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 시링크스란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이것이 펜파이프 혹은 팬플루트의 기원이라고 한다.

P123 여기서는 곡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시의 일부분만을 발췌하여 인용하고자 한다. 먼저 플루트의 정므을 사용한 신비로운 선율이 곡의 문을 연다. 판의 악기 시링크스의 소리인 것이다. 여기서 플루트라는 악기는 음악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음악의 목적이 된다. 이 선율은 플루트 이외에 다른 어떤 악기로도 대체할 수 없다. 본디 플루트의 저음이란 것이 배음도 적고 소리도 약하여 음향학적으로 약점이 많은 소리이기 때문에 작곡가는 무반주 혹은 아주 조용하고 섬세한 반주만을 사용하고 있다. 음악의 분위기는 님프들을 겁탈한 판의 독백이 담긴 시의 도입부와 깊에 밀착되어있다.

Classic #6복수의 아리아 짜릿하고 달콤하고 씁쓸한 복수의 맛

복수는 지금까지 지옥에서 요리된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 월터 스코트 -

 

P129 영국의 낭만파 시인이자 소설가인 월터 스코트는 복수는 지금까지 지옥에서 요리된 음식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했다.

>> ‘복수를 너무도 잘 설명한 표현이었다. 복수가 안겨주는 짜릿함과 통쾌함과 함께 씁쓸함과 허망함이 함께 주어지며 결국 복수를 한 스스로도 파멸되는 그야말로 지옥의 향연이 아닐 수 없는게다.

그렇다고 매번 당하고만 있을까..? 그렇게 휘둘르는 대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걸까..? 난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복수의 제물이 되어서도 안되고 복수의 타당한 이유를 제공하는 희생양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삶을 온전히 누려야 할 기회를 가져야 하고 또 그래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까..? 내가 더 잘되는 것. 보란 듯이 더 잘되어 멋지게 성장하여 그들이 내게 했던, 내 가족에게 했던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게다. 물론 어떤 일을 당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은 그럼으로 악의 씨가 자라기도 전에 그 근원인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것이 가장 복수다운 복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는 돌고 돌아 걷잡을 수 없는 싸이클을 만들어 낼 뿐인게다.


P129 복수는 본질적으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집착보다는 잔인한 복수를 통해 희생을 즐기려는 가학심리가 우선하게 마련이다.

>> 공감한다. 순간의 짜릿함~ 통쾌함을 느껴보고 싶은 가학 심리..


P130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역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묘한 자극을 안겨다 준다.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같은 영화에서 짜릿한 감흥을느끼는 이유도 우리가 복수의 쾌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리라.

>> 그럴게다. 대리만족도 곁들여..


P130 최근 가족 뮤지컬처럼 상연되고 있는 <마술 피리>는 모차르트 오페라 예술의 집대성이다. 선과 악, 초현실과 현실, 엄숙한 코랄과 세속적인 민요 가락, 소프라노의 가장 높은 음과 베이스의 가장 길고 낮은 소리 등 모든 요소가 한 데 뒤섞여 있다.

>> ‘밤의 여왕의 아리아밖에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으나, 그 아리아만 들어봐도 얼마나 대단한지 감은 잡을 수 있었다.


P130 특히 이 곡은 우리나라의 경우 팝 오페라를 선보였던 키메라 덕분에 더욱 잘 알려져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오페라 가수를 흉내낼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클래식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 하하하하~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어서 얼마나 웃음이 나왔던지, 사실 나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어떤 음악인지 몰랐다.. ^^;; 그런데 들어보니 아하~ 이 음악이었구나~” 싶을만큼 많이 들어본 곡이었던게다.. ^^ 그러니 얼마나 많이 알려진 곡인가..^^ 아마도 적어도 이 곡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P131 모차라트는 이 노래에서 성악을 악기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가리켜 콜로라투라 (Coloratura) 스타일이라고 한다. 대중음악으로 말하자면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가 스캣으로 악기 흉내를 내거나 경음악 소프라노 다니엘 리카리가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에서 장식적으로 노래 부르는 스타일을 연상하면 된다. 물론 클래식의 콜로라투라는 이들보다 훨씬 화려하고 높은 음을 낸다는 점이 다르다.

>> 콜로라투라... 성악을 악기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다루는 것을 두고 하는 말..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는 그 무엇에도 비기질 못한다..^^

내가 고등학교때 한때 푹 빠져 들었던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의 다니엘 리카리를 뜻하지 않게 여기서 만나게 되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렇게 미친듯이 좋아하다가 한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고, 문득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어 그 때의 기억들이 둥둥 떠오를때 참으로 묘한 기분에 빠져들곤 한다. 스스로가 이해가 안되는게다. 그렇게 좋아해놓고.. 그렇게 사랑해놓고.. 이렇게 잊을 수가 있는걸까..? 싶은.. 허망감 같은 감정... 그리고 반가운 감정... 그래서 또다시 떠오르는 그리움... 그런 것들....


P135 대부분의 오페라는 프리마 돈나가 죽어가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반대로 테너가 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베르디의 <가면 무도회>의 경우가 그 예이다. <가면 무도회>는 대중적으로 그다지 유명한 오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테너 오페라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테너들은 이 작품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한다. 소프라노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퍽 부러웠나 보다.

>> 하하하하~ ^^;; 하여간에 김문경 때문에 웃겨 돌아가시겠다~ ^^;; 진지하게 읽어내려가다가 이렇게 생각지 않게 웃음 빵터지게 만드는 그의 매력~!! 정말 돌아가시겠다~!! ^^

상상을 해보라 얼마나 멋지겠나..? 그렇게 죽어가며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 또는 그렇게 절절하게 아리아를 부르다가 마지막에 죽는 장면... .. 그얘기가 그 얘기지만 살푼 그 분위기는 다르다. 어쨌든, 그것은 누구에게나 로망처럼 느껴지는 장면 아닐까..?

내가 여고시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런 나를 병문안 오는 꿈 속의 멋진 남학생... 뭐 이런 상상은 우리 때 절대적인 로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건강하여 감기 한번 걸려본 적이 없고, 또 내가 아파서 입원은 커녕 다 죽어간다 할지라도 병문안 와줄 남자 친구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상상 속의 희망사항으로만 끝났던 행복한 상상.. 바로 그런거 아닐까..? 하하하하~^^ 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발상인지.. 쓰고나니 손이 다 오그라든다...큭큭~ ^^;;


P135 원래 이 작품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의 살해사건을 다룬 것이다.

>> 정말 매력적인 주제였다. 그 살해 사건의 원인이 사랑때문이었다니 (가면 무도회의 내용으로 보아) 이 얼마나 호기심 자극하는 사건이란 말인가..? 나는 정말이었을까..? 너무나도 궁금하여 여기 저기 뒤져봤더니, 암살 당한 것은 맞는 사실이나, 그것이 사랑때문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에서 였음을 알았다. 왠지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 이유가 사랑이었기를 바랬던 것일까..? 어쨌거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한 지혜로운 국왕이었으며, 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아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펴며 국가의 힘을 길러 내정 간섭을 하던 러시아와 맞써 싸운 훌륭한 국왕이었음에, 그의 시해 사건이 더욱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어느나라나 이완용같은 넘은 있는 듯.


P136 <가면 무도회>는 사랑의 이중창이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통상적인 아틸리아 오페라라면 남녀가 사랑을 노래하는 장면으로 5분이면 충분하지만 이 작품은 두 배의 길이를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가면 무도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탈리아 버전이라고도 한다. 그들의 사랑이 이토록 간절하고 애틋할진대 아내의 사랑을 잃은 레나토의 슬픔은 오죽하겠는가. 짓밟힌 사랑만큼 비참한 것은 없으니, 만인이 인정하는 위대한 영웅도 깨어진 사랑의 슬픔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참 가슴 아픈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두 남자 중에 한 명이 못된 넘이거나 비교가 안되는 후진 남자라면 가슴이 이리 아프지도 않을게다. 여자의 선택에 합당한 이유가 되어주니까. 하지만 두 훌륭한 남자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그 상황은 달라진다. 둘의 사랑도 애절하고, 그 사랑을 빼앗긴 남자의 마음도 절절하니 이해가 가고.. 또 그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가슴이 말하는 사랑을 쫓아가는 여인의 마음을 보며 손가락질 하기 보다는 그 슬픔과 행복에 공감이 가고...

그게 삶 아니겠나.. 무엇하나 뚜렷하니 정답이 보여지지 않는 것... 누가 장발장을 욕할 수 있나 말이다.. 훔쳤다는 사실은 당연히 벌받아하는 것이도 나쁜 것이지만, 그 뒤의 배경을 보면 단순히 우리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나는 그들을 벽에 몰아세우지 못한다. 물론 정절을 따지며 윤리를 따지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나이 50이 되고 보니 삶이란 그렇게 수학 방정식처럼 분명한게 아니라는 것, 특히 감정이 연결되는 영역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을 조금은 알만큼 삶을 알게 된 것 같다.. 모두가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잘 산 삶인 것인게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P137 대부분의 사람은 연적보다는 사랑의 언약을 파기한 연인을 향해 복수심을 품게 마련이다. 오셀로도 그랬고 [크로이처 소나타]의 주인공 포즈드느이세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나토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아내보다 국왕엗 ogo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이는 레나토가 국왕 구스타프와 강한 신의로 엮어져 있었으므로 깨어진 믿음이 사랑ㅂ돠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정말 멋진 남자들의 세계다. 신의와 충성과 우정으로 맺어진 남자들의 관계. 레나토의 절망적인 배신감을 이해할 수 있다. 암 이해하고 말고. 가족보다 충성을 더 중요시했을 그 당시. 자신의 충의를 온전히 갖다바친 국왕이 자신의 사랑을 훔쳤다는 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아픔보다 신의를 저버린 한 남자에게 느낀 배신감이 훨씬 더 크고 아팠을 것이다.


P138 <가면 무도회>는 베르디가 중기 3부작인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한 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전환한 당시에 쓴 작품이다.


P138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반대되는 현상을 말한다. 동성인 어머니를 미워하고 이성인 아버지의 사랑을 구하려는 여성의 심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연극이든 오페라든 엘렉트라는 너덜너덜한 넝마옷에 서슬 퍼런 도끼눈으로 그려지곤 한다.

>> 엘렉트라가 그런 내용이구나. 나는 영화를 보았기에 그런 내용인가 했더랬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것도 있었구나.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는 들어봤지만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몰랐던 사실이다.  하긴 이쪽이 있으면 다른 쪽도 있는거지. 당연한걸게다..


P139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원작인 엘렉트라이야기는 트로이 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토로이를 차기 위해 조직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엘렉트라의 아버지 아가멤논 왕이었다. 10년 동안의 진저리 나는 전쟁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뤼템네스트라오와 그녀의 정부 에게스트에게 살해된다. 본디 아버지에게 남다른 애착이 있었던 엘렉트라에게 어머니의 살인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피의 복수뿐이었다.

>> 엘렉트라가 복수심을 갖게된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고, 나라도 죽이고 싶었을 것 같다. 그냥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이혼을 한 것도, 도망을 간 것도 아니고 두리 작당을 해서 죽인다는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그렇게 아빠를 사랑한 엘렉트라가 그 둘을 죽이겠다고 복수심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못해 정당해보이기까지 하는게다.. 그런데 그 피의 복수가 도를 넘어 완전 피의 향연이되고 지옥의 향연으로 이어지니 내겐 사이코의 연쇄살인 분위기로 느껴졌다.


P140 한때 당신의 발을 핥아주던, 당신과 사냥하던, 당신이 음식 조각을 던져주던

당신의 개들도 죽이겟습니다.

그것들은 당신께 시중들게 하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 바로 이부분이 나를 경악케 했다. 정부와 작당을 해서 아빠를 죽인 엄마와 그 정부를 죽이겠다는 마음까지는 알겠는데, 아가멤논이 사랑하던 개들과 말들도 죽여서 죽은 아빠의 영혼을 시중을 들게 하겠다니 이건 완전 미친 짓이고 광란의 피의 저주인게다.. 얼마나 섬뜩하던지...


P140 그리고 우리, 당신의 피, 당신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당신의 딸들.

우리 셋은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붉은 누각처럼 공기 중에 매달려

그 피의 증기가 햇볕으로 마르면 우리는 춤을 추겠습니다.

당신의피, 당신의 무덤 둘레에서

>> 완전 싸이코의 광란의 춤이다.. 속이 니글 거려서 토할것 만 같았다. 피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듯한 느낌...


P141 복수의 엑스터시를 언어로 다 할 수 없기에, 니체가 육체는 대지를 긍정하는 위대한 의식이라 말했던 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들린 듯한 광란의 춤은 죽음으로 연결된다. 엘렉트라는 춤추다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여동생의 절규 속에 막이 내린다.

>> 이 얼마나 섬뜩한 장면인지.. 미친듯이 춤을 추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장면은 정말 소름끼친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P141 원작에는 엘렉트라가 복수를 끝내고 동생 오레스테스를 보살피던 각별한 친구 필레데스와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대본을 맡았던, 언어의 마술사 호프만슈탈은 결론을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야말로 그의 훌륭한 문학성을 드러내는 위대한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엘렉트라는 복수에의 의지가 충족된 순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 어떻게 그렇게 피바다로 난리 부르스를 추고 난 다음 동생의 친구와 결혼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는지 나는 소포클레스의 순진한 마인드가 이해가 안갔다. 둘만 죽인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빠와 연걸된 엄마와 정부와 연결된 모든 것 뿐만이 아닌 동물들까지 다 죽인 백정같은 여자가 어떻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 정말 소포클레스의 마인드가 의아스러웠다.

그런 반면 호프만슈탈은 엘렉트라의 결말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정말 가장 적절하고 멋진 결론이 아닐 수 없는게다. 그의 말대로 복수에의 의지가 충족된 순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엘렉트라가 죽음을 맞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또한 그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복수가 보여주는 파멸의 절정. 죽음. 그리고 그녀에 대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사랑한 아빠를 잃고 엄마에게 배신 당한 사랑 (딸로서) 그리고 자신이 행한 모든 살상들의 기억을 안고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이야 말로 그녀에겐 따뜻한 위로였고 휴식이었고 안식처가 되어주는 유일한 그것인게다. 그러기에 나는 엘렉트라의 가엾고 상처받은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죽음으로 끝을 맺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142 R. 슈트라우스는 <알프스 교향곡>에서 오케스트라를 통하여 알프스 정상의 상쾌한 공기를 실감나게 그리기도 하고, <엘렉트라>에서는 이렇게 선명한 핏빛 선홍색을 뿜게 할 줄도 아는 관현악의 명수였다. 이 오페라를 감상한 이휴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크>가 아이들 장난 같고, 난폭하기 그지 없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감미롭게 느껴질 정도이다.

>> 흐미...

 

Classic #7 파우스트에 매혹되다 파우스트를 그린 낭만음악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 천상에서 실현된다.

형동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는 이룩된다.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

- 괴테 [파우스트] -

 

P147 음악과 문학의 만남, 그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결합이다.

>> 그러게 말이다. ^^


P147 특히 낭만주의 시대에서 두드러지는 환상과 초자연적인 세계는 두 예술의 겨합으로 무한한 권능을 얻었다. 당시 예쑬은 종합적으로 구상되는 경향이 강하였고 그 중심에는 독일 최대의 문호인 괴테가 자리하고 있었다. IQ 200은 될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 천재는 희고그 소설, , 과학, 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괴테는 신으로부터 받은 재능이 엄쳤는지도 음악에도 손을 댔지만 음악분야에서만큼은 전문 작곡가들이 그의 시대정신을 대신 구현하였다.

>> ‘괴테하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 나를 열광시키고 흥분시켰던 괴테.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그에게 열광했던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느껴졌던 괴테. 그의 훌륭한 재능을 모두 제쳐놓고서도 그의 열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성품과 인간됨에 푹 빠져 괴테 안에서 허우적거리던 시간이 떠올라 내 입가에는 또 그렇게 미소가 지어지는게다.

그를 통해 미술 작품을 보는 법을 배웠다. 물론 지금도 문외한 수준에서 벗어나진 못하지만, 전처럼 좋다~ 멋지다~’에서 끝나고 스쳐지나가는 내가 아니라, 작품의 터치를 느껴보고 섬세함을 느껴보며 분위기를 그대로 느껴보려는 노력이 내 안에 생긴 것만으로도 나는 괴테가 그리 고마울 수 없는게다. 어쨌든,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재능 부족으로 화가를 포기해야 했던 괴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예술 작품과 평생을 함께 했던 것. 그런 그의 작품이 많은 유명한 음악들의 사랑을 받으며 훌륭한 작품으로 또 우리를 그렇게 매혹시키고 있는게다. 얼마나 멋진가...

그들 말고도 괴테를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여기에도 한 명 있음을 알고 있는지...^^


 P147 일찍이 베토벤이 괴테를 흠모하여 희곡 [에그몬트]에 곡을 붙이기도 했으나 [파우스트]만큼 작곡가들을 매혹시킨 작품은 없었다. [파우스트]의 세 주인공인 파우스트,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는 낭만주의라는 빛을 구성하는 3원색에 해당된다.


P148 과학과 예술을 결합하여 인간의 경지를 초월하려는 파우스트의 불굴의 의지는 낭만주의 작곡가의 자화상이다.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한 영원한 여성 그레트헨의 순결한 사랑은 바그너 오페라의 일반적인 코드이자 모토가 되었다. “남자들은 영원한 여성을 너무 좋아한다라는 니체의 비아냥거림은 바그너에게 특히 들어맞는 것이다.

>> 하하하하하~ “‘남자들은 영원한 여성을 너무 좋아한다라는 니체의 비아냥거림은 바그너에게 특히 들어맞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이 넘 웃겼다. 니체가 그렇게 바그너를 비아냥 거렸듯이, 김문경도 그렇게 바그너를 비아냥대는 듯한 느낌..^^ 하긴 정신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을 떠나서 그렇게 자기의 후원자의 아내며, 자기의 곡을 지휘할 지휘자의 아내와 모두 사랑에 빠졌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만도 하다..^^


P148 그리고 작품 전체에 마성을 드리우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음험한 힘은 베를리오즈, 리스트. 말러처럼 그로테스크한 예술의 대가들이 추구한 미덕이기도 하다. [퍼유수투]가 낭만파 음악의 젖줄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하다.

P149 그녀의 고통과 번뇌가, 어린 슈베르트의 영혼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가곡 <물레 짓는 그레트헨>은 많은 음악학자가 동의하듯 슈베르트의 서정적 요소와 연극적인 요소가 하나로 결합된 작품이다


P152 <물레 짓는 그레트헨> 17세 소년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를 보인다.

>> 내가 더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것이 어린 소년이 만든 것으로 빼어난 완성도를 지녀서가 아니라 그 곡을 지은 나이가 바로 겨우 17세였다는 것이다. 17살에 어찌 그리 절절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내겐 더 놀라운 사실이었다..


P152 슈베르트의 수많은 가곡 중 괴테의 시에 붙여진 곡들이 다수 명곡인 사실에서 좋은 문학에 좋은 음악이 잉태됨을 실감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훗날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하였다. “좋은 시가 있다면 작곡은 아주 수월해진다네. 멜로디가 이미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게 되어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되지, 반면 나쁜 시를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네. 겨우겨우 작곡을 할 수는 있겠지만 결과는 항상 그저 그렇게 되지.”

>> 그렇지. 훌륭한 문학 작품에서만이 훌륭한 음악 작품이 나올 수 있지. 뿌리가 건강치 못한 나무에서 어떻게 싱싱한 열매를 맺을 수 가 있을까..? 이건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과 같은 맥락인게다.


P154 초기 낭만파의 음악계는 여러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첨단 음악을 표방하는 베를리오즈, 리스트파, 그리고 기존의 절대음악을 고수하는 멘델스존, 슈만 파, 이렇게 양강 구도가 눈에 띄는 이 즈음에 [파우스트]는 공교롭게도 양쪽 모두의 공통 소재가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의 파멸>,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을 남겼다.


P156 마성은 신성의 검은 메타포일뿐 낭만주의 작곡가에게 악마와 신은 결코 별개의 관념이 아니었다.

>> 그런 것 같다. 양면성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준 표현이었다.


P159 낭만파가 서서히 황혼을 향해 갈 무렵 [파우스트]의 로망을 한계점까지 이르게 한 이는 구스타프 말러였다. 그의 교향곡 8번 제 2부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정경을 텍스트로 하고 있으며, 성각가들이 각각의 배역을 갖고 있어 장르상으로 종교합창곡인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P160 바이올린으로 제시되는 영광의 성모 테마는 천상의 벨 칸토 선율로, 여체의 곡선처럼 부드러운 라인을 그린다. 여기에 은은하게 깔리는 하모니엄(풍금)의 화음과 하프의 분산화음은 성모의 후광을 상징한다.

>> 음악의 소절마다 부분마다 나오는 악기의 연주를 또는 노래를 들으며 성모의 후광까지 느끼는 그는 대체 어떤 감성을 지닌 사람일까..? 음악 선율로 후광까지 연결시키는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P161 무엇보다 감동적인 부분은 속삭이는 듯 시작하는 신비의 합창부터 마지막 대단원까지이다. 그 어떤 작곡가도 이렇게 놀라운 황홀경의 쓰나미를 창조하지는 못했으리라. 이 대목에서 음악은 한낱 음악일 뿐이다라는 조소 어린 넋두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제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지고의 예술이 되고, 예술은 최상의 연금술은 하나의 철학을 이루고 종교의 경지로 승화된다.

>> 황홀경의 쓰나미.. 이런 표현이 어떻게 나오는걸까..? 어떤 분위기이길래 황홀경의 쓰나미라는 표현이 붙여진걸까...


P162 말러에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향곡 8번에서 자신의 역량을 과잉으로 솓아 부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벽한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자신이 지닌 힘의 4분의 3만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완성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말러는 여운을 허용하지 않고 감상자를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넣는 성향이 있다.

 

Classic #8 죽음에 대한 3가지 명상 죽음의 철학, 죽음의 음악

인간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오직 한 가지,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뿐이다. 보다 나은 삶을 살수록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사라지고 좀더 자연스럽게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톨스토이 [인생의 길]

 

P167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명상록]


P167 언젠가는 나의 존재가 완전히 이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고하고 혹은 신앙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 그럴지도 모른다. ‘그토록 열정적으로라는 표현까지 어울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신앙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P168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로 운을 떼고자 한다. 중학생 시절 나는 슈베르트의 작품 중 독성이 강한 음악에 유달리 탐닉했던 적이 있다. 음악선생님은 교육적 차원에서인지 음악시간마다 해맑은 선율의 <송어>를 반복적으로 틀었지만, 집에 가서는 홀로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를 커다란 볼륨으로 들으며 정신의 해방감을 맛보았다. 생각해보라, 맑은 물가에 뛰어 노는 송어라니, 그런 나이브한 전원시가 파시즘으로 얼룩진 1980년대 당시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10대 소년에게 설득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런 나에게 <죽음과 소녀>는 독을 독으로 치료하는 일종의 동종요법과 같은 곡이었다.

>> 놀라웠다.  중학생인 김문경은 그 어린 나이에 송어가 아닌 죽음과 소녀를 들으며 정신의 해방감을 맛보았다니.. 그야말로 피똥도 안마른 고 조그만 머리 속엔 어떤 생각들이 들어있었을까..? 여간 궁금한게 아니었다. 독으로 독을 치료할 만큼 그는 깊은 정신적인 시대적 아픔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어쨌거나 김문경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슈베르트가 물레 짓는 그레트헨 17세에 작곡했다는 사실에 놀랄일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싶었다. 내가 정신적으로 미숙아였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나온 나의 상상이었으니...


P171 슈베르트가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상이 특징인 작곡가라고? 천만에, 슈베르트는 매독에 의해 썩어 들어가는 육신으로 불안과 좌절에 시달렸던 사람이다. 그의 서정성은 정신세계의 치명적인 독성을 웃는 낯으로 가려보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죽음과 소녀>를 듣고 난 뒤 불현듯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혹자의 말대로 슈베르트는 독베레트라고.

>>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슈베르트가 독베르트라고.. 그가 매독에 썩어가는 몸을 부여잡고 고통 속에 그 아름다운 작품을 썼음을.. 그의 서정성은 정신세계의 치명적인 독성을 웃는 낯으로 가려보려는 몸부림이었다니.. 너무나도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P173 서양음악 가운데 죽음의 명제를 가장 성스럽게 다루는 장르는 역시 레퀴엠이다. ‘레퀴엠이란 장례미사에 연주되는 음악을 가리킨다. 일반 미사의 순서를 따르되 라틴어 정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형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레퀴엠(입당송) – 키리에 (자비를 베푸소서) – 디에스 이레 (진노의 날) – 오퍼토리움 (봉헌송) – 상투스 (거룩하시다) – 아뉴스 데이 (천주의 어린양) – 룩스 에테르나 (영원한 빛) – 리베라 메 (구원하소서)

>> 레퀴엠이 어떤 쟝르인지를 분명하게 배우게 되어 넘 즐거웠고, 또한 그 구성되는 순서도 알게 되어 나의 지적 굶주림에 배가 불렀다.


P173 이는 본디 망자를 축복하는 음악이거늘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 베르디의 <레퀴엠>은 무자비한 심판을 부르짖는 진노의 날을 통해 오히려 공포심을 야기한다.

P175 프랑스의 작곡가 포레 (Gabriel Faure 1845-1924)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휴식과 안식으로서 그려냈다. 음악은 상당히 편안하며 어떤 때는 아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한 평생 을 살면서 행복할 때도 있고 힘들때도 있고 즐겁고 기쁠 때도 있지만 고통 속에 숨 쉬는 것조차 고문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것. 그렇게 파도 속에 휩쓸려 다니면서도 나의 소명을 다하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무섭고 두려움을 안겨주며 벌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곡보다는 인제 편히 쉬라며, 수고했다며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주는 음악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We desserve it~!!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작곡가들의 곡은 들어보지도 않았지만, 포레의 곡이 좋다. 우리의 영혼이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평온하고 안락한 축복으로 표현해주는 그의 레퀴엠이 말이다.


P177 포레의 <레퀴엠>은 죽음을 평온하고 안락한 축복으로 표현하고 있다.

>> 나도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레퀴엠>에 대한 포레의 해석에 나는 절대 공감이다.


P178 죽음은 니체의 말대로 본디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비이성적 존재인 자연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거늘,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는 시스템에 의해 자연사가 아닌 연장된 인위사를 맞고 있는 것이다. 안락사의 인정 여부가 세계적인 이슈로 자주 거론되는 것도 죽음에 관한 새로운 개념정립을 요구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겟다. 니체가 던진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P181 학자들은 동생 에른스트의ㅏ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말러의 열망이 <탄식의 노래>를 탄생시켰다고 해석한다. 말러가 자신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작에 이런 섬뜩한 가사를 부인 이유는 어린 시절 목격한 형제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 말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살짝 엿보면서 왜 말러의 모습에서 그렇게 슬픈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8명의 형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며 자라야 했던 말러. 그가 사춘기에 맞은 너무나도 사랑했던 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P182 1907년 말러는 자신의 장녀를 디프테리아로 잃고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어린 시절 형제들의 죽음을 차례로 목격한 그가 자신의 자녀마저 죽게되자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의 병을 얻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말러는 이후 자식의 죽음에 내내 삼심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 1명의 형과 7명의 동생을 하나하나 먼저 떠나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인제는 사랑하는 딸 아이마저 먼저 떠나보냈던 말러. 저자의 표현 그대로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의 병을 얻게 되었을 수 밖에 었었을 말러. 미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그 고통과 슬픔을 그렇게라도.. 잠시라도 잊고 싶지 않았을까..? 눈물이 나서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도 엄마니까.. 나도 그렇게 사랑하는 딸 아이가 둘이나 있으니까... ‘만약..’이라는 가정조차도 상상하고 싶지 않음 바로 그것...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 아닌가...

그 섬세한 말러이기에 그 상처의 무게는 더욱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을것이고, 그 삶의 십자가의 무게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을 것...


P184 죽음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죽음이 찿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내일이나 밤 혹은 겨울에 대해서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않을까? 인간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오직 한 가지,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분이다. 보다 나은 삶을 살수록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사라지고 좀더 자연스럽게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동감이다.

 

Classic #9 음표로 새겨진 전쟁의 참상 인류의 비극적 자화상

죽음은 총알을 내뱉었고 탄환으로 재채기하였다.

그가 하늘을 향해 노래할 때 우리는 합창하였다.

죽음이 낫으로 우리를 베어 나갈 때에도 우리는 휘파람을 불었다.

, 죽음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 윌프레드 오웬 -

 

P187 유럽의 클래식 음악계는 이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사실상 몰락을 맞이햇다. 신빈악파 작곡가 베베른은 미국 병사의 오발탄에 맞아 숨졌고 쇤베르크, 바일, 코른골트, 바르토크, 힌데미트 등 많은 작곡가가 나치의 눈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마저 불가능했던 유태인 작곡가들은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 나는 듣도보도 못한 이름의 작곡가들이지만, 그렇게 망명을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망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다른 유태인 작곡가들은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음악 역사상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그게 어디 음악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전쟁. 전쟁이 없는 세대에 태어났음을 감사하지만,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있음에 그들만큼 느낀다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으나 그 두려움과 공포와 사랑하는 이들을 눈앞에서 잃는 이들의 절규가 내 귀에서 들리는 듯하다.


P188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은 작곡가의 창작세계에 특이한 체험을 안겨다 주었는데, 이런 정황 속에서 작곡된 곡에서는 그 공포스런 망령의 그림자가 어김없이 드러난다. 음악 속의 전쟁은 그야말로 귀로 듣는 지옥도이다.

>> 읽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럽다.


P188 쇼스타코비치는 참호를 파는 등 가벼운 임무를 수행하면서 소련 민중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예술가의 역할에 충실했다. 쇼스타코비치가 소방수 복장을 하고 호스를 든 채 음악원 지붕에 서 있는 사진은 연합군의 상징이 되어쏙, 헬맷을 쓴 작곡가의 모습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로 쓰이기도 했다.

>> 학생 때 단체로 관람했던 영화 ‘25가 떠올랐다.


P189 <레닌그라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악보수송으로도 화제를 낳았다. 악보를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가져와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1942 7월 미국에서 초연을 하는 등 이 곡은 서방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 음악을 만들면서부터 초연까지의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다. 그 작곡가의 삶까지도..


P189 그 해 8월에는 나치의 점령하에 있는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이른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단원들은 다른 곳으로 후송된 상태였고 레닌그라드 방송교향악단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추위와 곤궁으로 단원 중 생존자가 14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은퇴한 연주가와 음악교육을 받은 병사들을 모두 차출하여 오케스트라를 급조시켰다. 음악이 이토록 애국심을 자극하는 도구가 된 적이 이전에 또 있었을까 싶다.

>> 마치 한편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장면이다. 영화 피아노가 떠르기도...너무나도 감동적으로 보았던 영화...


P190 쇼스타코비치는 이제 교향곡 7번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더욱 확고히 구축함과 동시에 인민의 영웅이 된 것이다. 과거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벡베스 부인>의 퇴폐성 때문에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숙청과 죽음의 공포에 몰렸던 작곡가는 사회주의 음악이상에 타협한 듯한 교향곡 5번을 통해 위기에서 탈출한 바 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통해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 사실 이 부분에서 조금 쇼스타코비치의 작곡 뒷면에 깔린 감성 부분이 이해가 안갔더랬다. 물론 애국적인 곡을 짓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은 얼마나 많은 국민을 죽였나. 히틀러가 쳐들어오기 전에 이미 많은 생명을 앗아간 독재자의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곡을 만들었다는 부분이 이해가 안갔던 것이다. 그는 순수를 추구하는 음악가가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뒤의 글을 읽고 이해가 갔다..


P191침공주제는 독일군의 침입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주제를 쓰고 있을 때 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또 다른 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파시즘은 가증스러운 것이지만 독일의 파시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파시즘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건 똑같이 가증스럽다. 요즘 사람들은 히틀러가 우리를 괴롭히기 이전에 모든 것이 좋았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시점이 평화롭고 목가적인 시절인 양 회상한다. 히틀러가 범죄자란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스탈린도 다를 바 없다. 히틀러 덕분에 나는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영원토록 마음 속에서 떨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도 그에 못지 않게 고통을 받았다. 고문, 총살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히틀러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 소련에는 그런 사람들이 이미 수백만이나 존재했다. 교향곡 7번을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 부르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곡은 독일군에게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그리고 있지 않다. 스탈린이 파괴해놓고 히틀러가 그냥 마무리만 했던 레닌그라드에 관한 음악인 것이다.

>> 이 긴 고백을 초서에 그대로 옮겨적은 것은 바로 내가 그에게 가졌던 의문을 풀어주었던, 그래서 동감하고 공감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예술가였고, 그의 <레닌그라드>는 히틀러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고문과 총살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수백만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느꼈던 스탈린에 대한 반항. 아니, 스탈린 과 히틀러 뿐만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고 파멸시키는 그 모든 것에 대항하여 쓴 작품이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내 상상이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레닌그라드>를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의미로 지은 것이 아닌, 바로 <인간의 존엄성>가 파괴됨을 슬퍼하며 그것에 대항하며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던게다. 그래서 내겐 너무나도 감사하게 느껴졌던 고백이었다.


P193 작곡전공 학생들은 이 부분 (침공 테마)을 가리켜 우스갯 소리로 흔히 완전히 공으로 먹으려 한다고 꼬집는다. 워드 작업에 빗대어 말하자면 카ㅣ 앤드 페이스트를 그것도 단축키인 ‘CTRL + C’ ‘CTRL = V’로 반복하는 식이다. 당시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벨라 바르토크는 라디오로 이 부분을 듣고 어찌나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작품 <관현안을 위한 협주곡> 4악장 속에서 그 멜로디를 졸렬하게 패러디하기도 했다.

>> 반복되는 부분을 워드 작업의 단축키로 비유 설명하는 그의 재치에 또 한번 웃었다. ^^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으면 패러디 작품까지..^^ 그러한 모든 것을 알고 이렇게 줄줄 읊는 그의 해박한 지식에 또 한번 놀라고.. ^^


P198 트럼펫으로 연주되는 공포의 팡파르로 시작하는 이 곡은 관현악과 나레이터를 위한 작품으로, 12음기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가사는 쇤베르크가 직접 썼는데 대부분의 텍스트는 영어로 구성되어 있다. 가끔 독일군 병사의 말이 독일어로 표현되고 마지막 이스라엘 민중들의 합창이 히브리어로 노래되어 전체적으로는 3개 국어가 등장한다.

>> 쇤베르크가 직접 가사를 썼다니. 참으로 놀랍다. 그것도 3개국어로 된 곡을...


P198 남성합창: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하느님은 유일하니 마음과 영으로 온 힘으로 주님을 사랑할지어다. 내가 오늘 너에게 지시하는 것을 너희는 마음에 담아두고 아이들에게 가르칠지어다. 집에 앉아 있거나 길을 가거나 눕거나 서거나 아이들에게 이를 이야기할지어다.

>> ‘이스라엘에 들어라.’는 바로 우리 성경 대학 스승님이셨던 그라시아 수녀님께서 우리가 잠꼬대로 할 정도로 이 이스라엘 정신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새기고 나날이 기억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줘야한다고 강조하셨던 바로 그부분이었다. 아마도할 수만 있다면 아마 타투로 우리 피부에도 새기길 원하셨을게다. 그랬던 바로 그 성경 구절이 아우슈비츠 독가스실에서 죽어가며 합창으로 불렀던 바로 그 노래가 바로 이 성서말씀이었다는 사실에 울컥하며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몰고간 상황을 탓하며 하느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스라엘아 들어라~!! 하며 자손들이 결코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마지막 그 순간에도 그것을 노래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놀라움이고 충격이었고 깨달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지켰다는 사실. 멋진 국민이 아닐 수 없다.


P198 현대 음악 작곡가들은 수십 년이 지나면 자신들의 음악도 말러와 음악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미술은 추상적인 작품에서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음악은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12음기법은 우리 뇌 속에 그러한 음악을 받아들일 수용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 현대 음악가들의 착각~ ^^ 그렇게 착각이라도 하고 싶은 것 아닐까..? 예수님도 자기 고을에서는 인정을 못받았다고 말하며, 내 음악은 지금 현세대에선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후세대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착각.. ^^ 갑자기 최인철 교수가 떠올랐다. ‘프레임에서 이 비유로 나를 얼만 웃겼더랬던지..^^


P199 죽음은 총알을 내뱉었고 탄환으로 재채기하였다.

그가 하늘을 향해 노래할 때 우리는 합창하였다.

죽음이 낫으로 우리를 베어 나갈 때에도 우리는 휘파람을 불었다.

, 죽음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P199 전쟁에 대한 차가운 혐오, 삶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담긴 이 반전시는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웬의 작품이다. 1 차 세계대전 때 종군한 그는 전쟁 종식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인 1918 25세의 나이로 탄환에 맞아 숨졌다. 그의 시가 그토록 처연한 감동을 주는 것은 시인이 전쟁을 온몸으로 느끼고 고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그러게... ‘처연한 감동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 꽂혔다. 25세의 아름다운 나이에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의 이슬로 사라진 오웬. 시인에게 비쳐진 전쟁은 얼마나 더 처참하고 허무했을까...


P200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가리켜 성당복을 입은 베르디의 최신 오페라라 평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오페라 작곡가라 할 수 있는 브리튼이 작곡한 <전쟁 레퀴엠>에도 적용된다.

P202 이 작품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라틴어 가사와 오웬의 영어 가사가 절묘하게 배치되어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 요즘엔 팝에도 이런 스타일의 음악이 유행하고 있다. 영어권 가수와 브라질 가수, 또는 스페인어권 가수가 각자 자기 언어로 주거니받거니 부르는 노래. 환상 그자체다. 절묘한 하모니로 나를 깊은 감동의 폭풍속으로 데려가곤 한다.


P204 비록 세계대전은 막을 내렷으나 이제는 지구상 도처에서 내전과 테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인류는 여전히 전쟁의 몸살을 앓고 있다. 인간은 진정 스스로 평화롭게 공존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모든 폭력적 행위에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내세워지지만 사람들은 이를 핑계로 자신의 악마적인 본능을 만족시킬 뿐이다. 명분이 어떠하든 모든 전쟁은 강도 짓일 뿐이라고 말한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전쟁의 본질을 잘 알았던 사람이라고 하겠다.

P204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쟁은 인류가 낳은 최대의 죄악이자 미친 짓이다. 다시는 전쟁을 표현한 혹은 전쟁을 고발하는 음악 작품이 창작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아멘....

 

Classic #10 독일 음악 속의 영웅들 호른의 도도한 울림과 웅혼한 인간정신-

나는 총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마음으로 위대했던 자들이다.

- 로망 롤랑 [베토벤의 생애] -

 

P207 오래 전부터 영웅이라 하면 무사나 호걸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좁은 뜻으로서의 영웅에 불과하며 어디까지나 전쟁 영웅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 그러게 우리 마음 안에는 영웅이란 그런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조금 더 보태자면, 나라를 구하거나 또는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슈퍼캔이나 배트맨 같은...


P207 영국의 역사가 토머시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에 의하면 영웅이란 존재가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인 오딘에서 예수나 마호메트까지, 혹은 종교개혁가 루터에서 문필가 셰익스피어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영웅은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성실성,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로, 사람들이 숭배할 만한 고결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를 의미한다.

>> 절대 동감이다.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성실성,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인물로, 사람들이 숭배할 만한 고결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너무 분명한 해석이라 더도덜도 달을 토가 없다.


P211 음악을 많이 듣고 이해의 폭을 넓힌 뒤에야 <영웅>의 제1주제가 그 제차로 완성된 형태가 아닌 발전의 여지를 남겨놓은 일종의 밀가루 반죽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팡파르처럼 도, , 솔 세가지 음만 사용한 이유도 알고 보니 주제를 금관악기로 용이하게 연주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제가 금관으로 연주되면 현이나 목관으로 연주할 때보다 훨씬 호전적인 기상을 품게 된다.

>> 저자의 음악의 깊이는 내가 잴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떻게 저런 느낌을 가질 수 있는거지..? 어떻게 저런 느낌을 콕 찝어서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거지..? 음악뿐만 아니라 글의 표현력도 나의 기를 막히게 하는게다. 갑자기 그동안 나는 뭐했나..하는 생각도 들고....^^;; 히유...


P212 제시부로 돌입하는 부분에서 초연 리허설 당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이 부분은 바이올린이 딸림 7화음을 연주하는 도중 갑자기 호른이 으뜸화음의 주제를 성급하게 도입한다. 두 화음이 부딪쳐 잘못 연주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제자 페르난디스 리스가 이를 지적하여 호른이 마디수를 잘못 샜다고 말했다가 베토벤에게 뺨을 맞을 뻔했다고 한다.

>> 까르르르르륵~ ^^;;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상상 속에 장면이 그려지고.. 넘 웃겨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하하~ ^^;; 불쌍한 페르난디스. 괜히 한마디 했다가 귀빰망이를 맞을뻔 했네... 베토벤도 성질하고는...하하하하하~ ^^


P213 3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이다. 스케르초는 본디 해학이나 농담의 의미를 품고 있으며 베토벤이 미뉴에트 대신 마든 새로운 형식이다.

>> 글이라면 몰라도 음악에도 해학이나 농담의 의미를 담다니.. 신기하다.. 스케르초가 그렇다고...


P214 <영웅> 교향곡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통찰력으로 많은 걸작을 작곡했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음악이 숭배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로망 롤랑은 [베토벤의 생애]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총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마음으로 위대했던 자들이다.”

>> 절대 동감이다~!! 베토벤과 더불어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괴테와 파인만은 내게 영웅이다..


P215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오페라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블록버스터 작품이다. 문학으로 말하자면 나관중의 [삼국지]나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급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니벨룽의 반지>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이렇게 4개의 부속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고, 감상에 있어 4일이 소요되며 총 연주시간만 해도 16시간 정도 걸린다. 때문에 혹자는 이 작품을 철인 3종 경기를 뛰는 각오로 감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그너는 이렇듯 감상자에게 온전한 복종을 강요하는 작곡가이다. 어쩌면 클래힉을 지루하게 느끼도록 일조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 하하하하하~ 내가 클래식을 지루하다 느끼고 친하지 못한 것에 합당한 이유를 부여해준 바그너가 왜려 고맙기까지 하다. 하하하하~ 결국 제가 클래식을 안 좋아했던 것은요~ 제 잘못이 아니구요~ 바그너 때문잉에요~” 하며 발뺌할 수 있는 당당한 이유가 되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말이다. 하하하~ ^^

그냥 듣기만 해도 4일이란 시간이 걸리는데, 대체 그 곡을 작곡하는데는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었을까..? 갑자기 그게 궁금하다. 세상에...


P217 바그너는 단순히 작곡가의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하나의 현상이요 심지어 질환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때문에 음악 애호가가 바그너에 대해 갖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하나는 그의 음악을 늘 끼고 사는 바그너 중독자이거나 아니면 이름만 들어도 표정을 찌푸리는 알레르기 환자, 바그너에 대해 대단한 악의를 가진 인물을 또 하나 들자면 톨스토이가 있다. 그의 비판은 바그너를 다룬 서적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음악가는 바로 구스타브 말러바그너이다. 구스타브 말러는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그의 여린 감성과 학구적인 지식이 안겨주는 지적 분위기. 그리고 바그너는 그의 사랑이야기와 더불어 감상자들까지도 통제하려는 그의 남성적인 카리스마와 열정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게다. [괴테와의 대화]에서도 종종 등장했던 바그너. 니체가 바그너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싶어 교보에 주문을 했다.

암튼. 바그너는 단순히 작곡가의 이름에 그치지 않는 하나의 현상이나 질환이라는 저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질뿐이다. 그의 음악을 잘은 모르지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


P219 비평가 발터 베터는 논문 [베토벤과 동시대의 군사적, 정치적 사건]에서 베토벤의 <영웅> R.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베토벤은 교향곡 <영웅>에서 영웅의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감지했다. 이 곡은 결코 자아를 찬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곡되지 않았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변질되었다. 예를 들어 R.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는 작곡가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을 칭송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 완전 부끄러운 비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내면적인 생각까지 모두 캐치하는 무서운 감상자들..


P220영웅의 업적부분에서는 R. 슈트라우스가 그간 작곡한 교향시와 오페라의 주제들이 대거 등장하여 작곡가의 나르시시즘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작곡자 자신은 그 같은 부제들을 직접 붙이지 않았다. 초연 후 다른 사람들이 붙인 것인데 표제가 곡상과 워낙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다.

>> 하하하하하~ 이 같은 사실을 슈트라우스가 들었다면 마치 속내를 들켜버린 듯한 느낌이었을 것 같다. ^^ 그러면 그는 부끄러운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그러든지 말든지..’하는 시니컬한 표정을 지었을까..? ^^


P221 슈트라우스가 지친모습을 들어와 내 곁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아내는 때때로 성미가 고약하지.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 아니겠소?”

>> ~ 성질도 좋다~!! 열걸음 떨어져 가랜다고 멀리 떨어져 걷고서는 기어이 호텔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왠지 이런 슈트라우스의 모습은 내게 이해심 많고 마음 넓은 멋진 남편의 모습이 아닌 여자에게 쩔쩔매며 제발 떠나지만 마..’ 내지는 제발 버리지만 마...’하고 매달리는 머저리같은 남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히구...


P222 <영웅의 생애>는 관현악을 비르투오조 스타일로 다루는 슈트라우스의 특성이 극한까지 발휘된 작품이다. 비록 교향시 <죽음과 정화> <짜라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이는 음악적 진지함은 부족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관현악법과  뛰어난 묘사력 덕분에 필하모닉 콘섵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살아남았다. 지휘자들은 이곡을 지휘하며 나르시시즘에 도취되곤 한다. 뽐내기 좋아하는 호른주자도 이 곡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영웅=호른이란 독일 음악의 공식을 계승하듯 호른의 활약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 나는 들으면서도 어디쯤에서 화려한 것이고, 어디쯤에서 각 악기들이 뛰어난 묘사력을 발휘하는지 감도 잡지 못했지만, 적어도 <영웅의 생애>라는 곡이 슈트라우스의 자아도취적인 작품이며 화려하고 또한 각 악기의 특성을 잘 살려냈으며, 뛰어난 묘사력을 지녔기에 사랑받는 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도 내게는 배움이 안겨주는 기쁨을 맛보았다.

 

Classic #11 나로 하여금 취하게 하라! – 클래식 음악 속 술노래-

과음 상태에서 한 모금 더 마시면 바보가 되고 두 모금 더 마시면 미친 놈이 된다. 그리고 세 모금 더 마시면 술독에 빠진다.”

- 세익스피어 [십이야] -

 

P225 고대로부터 술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음료로 인식되어 왔다. 바위 위에 떨어진 과일이 발효된 액체를 인간이 우연히 마시고 기분이 좋아 즐거워하며 신을 찬미하게 된 것이 그 근원이라 하겠다.

>> .. 술의 기원이 그렇게 되는거였구나... ^^


P226 오페라에는 유명한 술노래가 많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샴페인의 노래, 베르디 <라 트라미아타> 중 축배의 노래, 마스카니 <캬발레리아 루스티카나>중 권주가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늘 술이 있게 마련이고, 주인공은 권주가를 부르면서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쾌락과 행복을 구가한다.

>> 그렇게 을 주제로한 노래가 많구나..^^ 기분좋게 마시면 즐거운 술.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술을 마실 줄 알고, 술을 아는 것은 때때로 우아하고 멋있게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와인..


P227 “Beva...beva...” 하면서 반음계로 떨어지는 부분은 청각만으로도 이아고의 악마성에 몸서리치게 만든다.

>> 대체 얼마나 음산하고 스산했으면 듣기만해도 몸서리가 쳐지는걸까..? 괜히 내가 다 몸서리가 쳐진다.. 흐미...


P227 우리는 정의감에 들뜬 나머지 순진한 카시오가 비열한 이아고에게 이용당했다고 결론짓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먹인 것은 어쩌면 이아고가 아니라 바로 술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 공감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우리의 잘못을 짊어줄 합당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나의 양심이 편하니까. 그래야 나 스스로가 나를 용서하고 나를 용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우리는 곧 그 모든 것의 저 밑바닥엔 그 뒤에 숨어있는 진정한 죄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지며 앞으로 한발 내딛으며 그러한 고통이 성장으로 이어지며 우리는 성숙해지는거다.

나는 여기에서 카시오가 그 지경이 되도록 술을 먹은 것인 이아고도 아니오 술도 아니오 바로 절제감 없는 카시오 본인 때문이었다고 저자에게 딴지를 걸고 싶다.


P227 무엇보다도 [십이야]에 등장하는 술 이야기가 압권이다. “과음 상태에서 한 모금 마시면 바보가 되고 두 모금 더 마시면 미친 놈이 된다. 그리고 세 모금 더 마시면 술독에 빠진다.” 분명 머리로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술이 적정량 이상 들어가면 결국 술이 사람을 마시는 형국이 벌어지게 된다.

>> 그럴게다..


P228 시인 조지훈은 사람의 주정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을 알 수 있으니 주정도 일종의 교양이다라고 말했다.

>> 하하하~ ^^ 너무나도 멋들어진 표현이다. 주정도 일종의 교양이다.. ^^ .. 멋지게 주정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 아주 교양스러블하게 말이다...하하하~ ^^


P228 허무한 이승,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을 어찌 수고하며 삶을 괴롭히랴.

>> ~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오는걸까~ 이런 표현력을 내가 지닐 수만 있다면.....


P229 이백의 [춘일취기언지]는 그가 좋아하는 모티브인 달, , 도교, 자연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시이다. 700년대의 당나라 시인이 창작한 시가 20세기 초 서양의 보헤미안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질 줄 그 누가 상상했으랴. 작가 한스 베트케가 당시를 독일어로 옮겨 엮은 시집 [중국의 피리]는 말러의 연금술에 의해 교향곡 <대지의 노래>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 정말 너무나도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같은 시대 사람들도 아니고 같은 동양 사람들도 아닌 이백과 말러. 동서양의 차이도 시대의 차이도 예술가들에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어찌됐던 점점 말러에게 빠지고 있는 나를 느낀다.. 넘 멋지지 않은가..? 음악 뿐만이 아니라 문학 작품과 철학에도 박학한 지식을 가졌던 지적인 음악가... 생긴것도 엄청나더구만...^^


P229춘일취기언지는 이백의 오언고시로, 말러의 <대지의 노래> 5악장 봄에 술 취한 사내텍스트의 바탕이 되었다. [중국의 피리] 7개의 시를 골라 뽑아서 작곡한 <대지의 노래?에서 4개의 시가 이백의 작품이라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전생과 이생이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이어진 동양의 시인과 서양의 음악가와의 연... 넘 멋지지 않은가...? 영화를 만들어도 아주 멋질 것 같은데....


P229 말러는 원래 문학과 철학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젊은 날에는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이끌렸고 괴테와 실러의 작품을 애독하였다.

>>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 그리고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말러. 엄격하고 철저했던 칸트와 염세적인 쇼페하우어에 매료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술에 대한 절제력이 이해가 갔고, 그가 쇼펜하우어에 빠졌던 것은 그의 삶으로 볼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괴테와 실러의 작품을 애독하였다니, 괴테와 실러는 아주 친한 친구가 아녔던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괴테를 말러가 좋아했다는 사실에 흐뭇했다. 하긴 괴테를 알고서는 어찌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삶 속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완벽했던 남자가 바로 괴테였다. 어쨌든 말러와 괴테. 멋진 환상적인 조합이다...


P230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말러에게 동양의 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특히 동양적 허무주의와 자연친화적인 로맨티시즘 그리고 호쾌한 시상을 지닌 이백의 시가 그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P231 이백에게 있어 술의 의미는 풍류의 근원이자 현실에서의 도피를 도와주는 일종의 해방구이다. 말러는 맥주 1잔 정도에 가끔 와인을 마시는 등 술에 매우 엄격한 편이었지만, 이백의 시에서 넘쳐나는 술기운을 빌어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P232 신 빈악파 작곡가 베르크는 만년에 데카당스한 작가들의 작품에 몰입했다. 성욕을 통해 기성의 도덕사회를 비판한 베데킨트의 희곡에서 오페라 <룰루>를 탄생시켰고, 기존의 미적 관념에 역겨움을 드러낸 시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연주회용 아리아 <포도주>를 내놓았다.

>> <룰루>는 정말 괴로웠다. 무서웠다. 그 잔인함과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아서 한참동안 속이 안좋았다. 그가 왜 그런 작품을 썼었는지 이해가 간다. 그렇게 데카당스한 작가들의 작품 속에 묻혀 살았으니 <룰루>같은 작품이 나올만도 했다.


P232 [악의 꽃]. 이 모순적인 제목이 보들레르의 시상을 놀랍도록 간명하게 압축하고 있다. 원죄와 고통을 수반하는 과 아름다움과 윤리를 상징하는 ’, 근원적인 의미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단어가 묶임으로써 추악함 속에서 증류된 아름다움이란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 것이다.

>> ‘의 의미와 그 둘을 연결시키며 악의 꽃이라는 제목이 주는 깊은 의미를 설명해준 부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P233술의 혼은 술을 의인화시켜 그의 모습과 탄생과정 그리고 사람의 목구멍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기분을 노래하고 있다.

>> 술을 의인화 시켜서 술이 사람의 목구멍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노래하다니. 하하하하~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 터라 넘 재밌게 느껴졌다. ^^


 P233 벨로디에는 12음을 골고루 사용하는 기법인 12음렬이 사용되는데 불쾌한 소음을 듣게 될까 지레 겁을 낼 필요는 없다. 노래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6개의 음 D – E- F – G – A - B플랫이 D 단조의 온음계에서 나온것이어서 약하게 나마 조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이 사람의 목으로 넘어가면서 기분 좋은 상태가 되는 부분에는 탱고식의 간주가 삽입된다. 색소폰, 피아노 등 재즈적인 악기를 사용하고 있고 독특한 리듬으로 탱고 분위기를 자아낸다. 술의 최음제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것이다.

>> 김문경은 그냥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느낌만을 나열하지 않는다. 시나 문학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악기를 어떤 분위기를 내기 위해 사용되었는지까지도 표현하고 설명해주기에 읽는 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음악일까.. 어떤 부분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걸까..하고 말이다.. 그의 느낌의 깊이와 음악과 문학과 철학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문경이 말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 많은 부분이 김문경과 말러가 참으로 닮은 것이다.


P235 보들레르하면 시체 위에 우글거리는 구더기같은 기괴한 악취미를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술노래만큼은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시어로 수놓아져 있다. 보들레르의 탐미적인 언어와 베르크의 몽환적인 음악에 벌써 술기운이 돈다.


P238 아름다운 창법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멜로디가 별로 없다. 곡 전체가 야릇한 주정이요 일종의 횡설수설인 것이다.

>> 하하하하~ ^^;;


P238 어쩌면 보들레르가 표현하고자 했던 환각의 세계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술에 취하면 정신도 기억도 혼미해지지 않던가.

>> 그러게 말이다.. ^^

 

Classic #12 백조의 노래 대작곡가의 마지막 절창

사람이 짐승과 같나니.

짐승이 죽는 것처럼 사람도 죽나니,

모두가 한가지 생명이로다.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 구약성서 전도서

 

P241 백조는 죽을 때 딱 한 번 아름다운 목소리로 운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작곡가가 죽음을 앞두고 작곡한 마지막 작품을 일반적으로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고 있다. 백조의 노래에는 작곡가의 삶의 궤적이 슬쓸하게 그려짐과 동시에 다가올 죽음에의 예감이 드러나있다.

>> 첨에 나는 백조의 눈물백조의 호수로 착각했다. 어쨌거나 백조의 눈물에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니 마음에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느낌이었다. 그럼 작곡가들은 어떤 작품들을 남겼을까..?


P241 라 로슈푸코는 일찍이 태양과 죽음은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죽음을 체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본능적으로 죽음 앞에서 늘 소심하며 끊임없이 초조해함과 아울러 두려워한다.

>> 나는 어릴 때 안경을 벗고 태양을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쓸데없는 연습(?)을 한 적이 있다. 이유는 바로 과학 선생님이 우리는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다는 것에 기인했는데, 정말로 바라볼 수 없는건지 스스로 실험해보고 싶었던게다. 참으로 엉뚱한 실습이었는데, 재밌는 것은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내 눈이 혹시나 탈까봐 안경을 벗고 바라봤더랬다. 왜냐면 내 안경은 돋보기였기 때문이었는데, 돋보기로 태양열을 모아 종이를 태우던 것이 떠올라 행여나 내 눈이 탈까봐였다는 사실. 재밌는 기억이다. ^^

어쨌든 바라보는데 성공은 했지만 (나름의 시도) 바라보고 난 다음엔 내 앞이 하얘져서 앞이 잘 안보였던 기억이난다.


P242 모챠르트, 슈베르트, 멘델스존. 세 작곡가의 공통점을 나열해보면 모두 물병자리 (모차르트 1 27, 슈베르트 1 31, 멘델스존은 2 3)이고, 천재이며, 요절했다는 것이다.

>> 물병자리~ ^^ 오호~ 엄청스레 반가웠다~ ^^ 왜냐~?? 나도 물병자리거든~ ^___^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들과 생일도 비슷하고 별자리도 같다니.. 이런 타고난 공통분모가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할까..^^ 단 다른게 있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천재가 아니며, 감사하게도 요절하지 않았다는 것. ^^

천재가 아녀도 좋다. 사랑하는 우리 루도비꼬와 커갈수록 더욱 사랑이 깊어지고 이뻐죽겠는 우리 두 딸래미들, 애리와 리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아름다운 동화이야기처럼 끝을 맺고 싶은게다.

물병자리에 태어난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인 듯 하면서도 마냥 한없이 빠져드는 감성을 지닌 모순적인 성향을 가졌다. 또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감력이 뛰어나니 무엇을 보고 들어도 이해가 빠르기도 하고, 사진을 찍듯이 그 감성이 그대로 가슴에 들어오니 그 벅차고 넘치는 감정을 쏟아부어야 할 곳이 필요한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음악으로 그림으로 문학작품으로 쏟아붓는게 아닌가 싶다. 아쉽게도 내게는 이런저런 재능도 없어 맨날 넋두리 수준이요 수다떠는 수준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블로그라는 공간을 만들어놓고는 내 안의 감정을 쏟아붓고 있는게 아닌가...

암튼, 그 유명한 음악가들이 나와 같은 물병자리라는 것, 비슷한 날이 생일을 치룬다는 것은 내게는 참으로 흐뭇한 발견이었다. 마치 그렇게 나도 한다리 껴서 예술가가 된 듯한 그런 느낌..^___^


P242 이들 중 슈베르트가 가장 젊은 나이인 31세에 세상을 떠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삶을 살앗다고 볼 수 있다.

>> 31세에 요절이라니.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인정을 받기도 전에 그렇게 장례 치를 돈도 없이 삶을 떠나다니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래도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후세에서라도 그의 작품은 빛을 보았고 이토록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P242 슈베르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해인 1828, 그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놀라운 창작열을 발휘하였다. 실내악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현악 5중주, 모차르트의 3대 교향곡에 비교되는 3대 피아노 소나타 (D. 958, D. 959, D.960) 등을 속속 작곡해냈다.

>> 어쩜 자기에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했던걸까..?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것처럼...


P243 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됴시의 영화 도플갱어덕분에 이 단어가 대중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독일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플 Dopple은 영어로 ‘Dubble’ 이고 갱어 Ginger는 영어로 ‘Goer’의 의미이다. 즉 자기의 분신이 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 ‘도플갱어가 나는 첨에 한자어인줄 알았다. 하하하하~ ^^;; 이 무쉭을 우짜문 좋아~ ^^;; 그런데 언젠가 인터넷 기사에 도플갱어에 대한 뜻 풀이가 나왔는데 독일어라는 설명을 듣고 혼자 얼마나 웃었더랬는지...^^ ‘도플갱어꼭 사자성어같은 분위기 아닌가..^^ 모르는게 죄인감~ ^^;;


P244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도플갱어는 트롭본의 화음을 연상시키는 극히 단순한 반주처리와 표현주의적인 레치타티보 스타일의 가창이 시대를 앞서간다. 슈베르트 당대의 관념으로 가곡은 본질적으로 멜로디를 의미햇다. 말하듯이 톡톡 햍는 래치타티보 스타일은 오페라에서나 쓰이는 것이었는데 슈베르트는 이를 과감하게 가곡에 적용한 것이다. 곡상의 진보성을 감안한다면 레치타티보 형식을 선호한 후대의 독일가곡 작곡가 후고 볼프가 썻다고 해도 믿을 수 있으리라.

>> 그렇게 슈베르트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음이 여기서도 나타나는게다. 그러니 그 시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워낙 앞서 있었으니 그 시대의 감성이 그것을 따라가기가 어려웠을지도...


P245 오늘날 도플갱어 현상은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착시로 해석되고 있다. 도플갱어를 본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해 죽는다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 흐미~ 무셔~


P246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70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경의 전도서 제1장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하는 전도서는 구약성경 가운데에서도 허무주의적인 색채가 가장 강하다. 일생의 생존이 결국 덧없다는 것을 느끼는 데 꼭 나이 칠십을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하하하하~ ^^;; 또 이렇게 나를 웃기는 김문경. ‘전도서가 그렇게 허무주의적인 색체가 강하구나..’ ‘김문경은 성경까지도 완전히 꽉 잡고 있구나...’하며 감탄하며 읽어내려오다가 일생의 생존이 결국 덧없다는 것을 느끼는 데 꼭 나이 칠십을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부분에서 그만 빵~ 터졌다~ ^^

그러게.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느끼는데 꼭 나이 칠십을 채울 필요는 없는 것. 하지만 기왕이면 인생이 덧없다고 느끼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생은 살만한 것이라고 느끼고 싶다 나는..


P248 젊은 날 작곡한 <마켈로네 가곡집>의 에로스는 이제 성스러운 사랑인 아가페로 변용되어 브람스의 최후의 유언이자 신앙 고백이 되고 만다.

>> 이 얼마나 숭고한 사랑의 승화인지...


P248 클라라는 <4개의 엄숙한 노래>가 완성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 역시 그로부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 가슴이 미어졌다. 평생을 사랑한 그녀 클라라 슈만. 그녀를 향한 사랑은 오로지 플라토닉 러브였으며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도 브람스는 사랑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게 하는 것 같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 뒤를 따르는 브람스. 그를 살아 숨쉬게 하는 산소였고, 그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주었으며, 음악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던 그의 사랑이 떠난 삶에 무슨 미련이 있겠고,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브람스의 영혼도 이미 이세상에 속하지 않았을게다.. 너무나도 가슴아픈 사랑... 이곳보다 더 좋은 그곳에서 둘의 사랑이 이루어졌기를...


P249리하르트슈르타우스가 결합된 그의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작곡한 음악의 면면을 보면 겉은 리하르트바그너처럼 웅장하지만 속은 왈츠왕 요한 슈트라우스처럼 쾌할한 편이었다.

>> 이름과 그의 작품이 안겨주는 분위기를 이렇게 해석하는 김문경이 참 재치있어보였다. ^^ 그리고 음악을 듣고 평가하는 그의 능력은 내겐 마치 신의 경지에 이른듯 느껴지고.. 음악적 해석은 물론, 작품에 쓰여진 테크닉이며, 어떤 분위기를 내기 위해 어떤 악기가 쓰여진 것까지 그것 뿐인가. 작곡가의 삶에 얽힌 이야기, 일화들. 그들의 삶에 대한 부분까지 꿰뚫고 있는 그의 박학함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

 

 

* 책에 소개된 음악가들과 작품들을 엑셀로 정리해보았다.

음악가 연 대 작품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1567, 05, 15 - 1643, 11, 29 오르페오
글룩 Christoph W. Gluck 1714, 07, 02 - 1787, 11, 15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오펜바흐 Jacque Offenbach 1819, 06, 20 - 1880, 10, 05 지옥의 오르페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 12, 11 - 1869, 03, 08 로미오와 쥴리엣
바그너 Richard Wanger 1813, 05, 22 - 1883, 02, 13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 그린
지그프리트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 1874, 09, 13 - 1951, 07, 13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바르샤바의 생존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 - 1827, 03, 26 교향곡 6번 <전원>
크로이처 소나타
교향곡 3번 <영웅>
비제 George Bizet 1838, 10, 25 - 1875, 06, 03 카르멘
R.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1864, 06, 11 - 1949, 09, 08 살로메
엘렉트라
영웅의 생애
4개의 마지막 노래
베르크  Alban Berg 1885, 02, 09 - 1935, 12, 24 룰루
포도주
디터스도르프 Carl Ditters von Dittersdorf 1739, 11, 02 - 1799, 10, 24 변신이야기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 01, 27 - 1791, 12. 05 교향곡 41번 <주피터>
마술피리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1862, 08, 22 - 1918, 03, 25 목신의 오후 전주곡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 10, 10 - 1901, 01, 27 가면 무도회
<오델로>중 '건배의 노래'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 01, 31 - 1828, 11, 19 물레 짓는 그리트헨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백조의 노래
리스트 Franz von Liszt 1811, 10, 22 - 1886, 06, 31 파우스트 교향곡
말러 Gustave Mahler 1860, 07, 07 - 1911, 05, 18 교향곡 8번 제2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대지의 노래> 중  '봄에 취한 사내'
포레 Gabriel Faure 1845, 05, 12 - 1924, 11, 04 레퀴엠
쇼스타코비치 Dimitri Schostakovich 1906, 09, 25 - 1975, 08, 09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브리튼 Benjamin Britten 1913, 11, 22 - 1976, 12, 04 전쟁 레퀴엠
브람스 Johannes Brahams 1833, 05, 07 - 1897, 04, 03 4개의 엄숙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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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Claudio Monteverdi의 아름다운 아리아 SÍ DOLCE È´L TORMENTO...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우스'를 찿다가 우연히 마주친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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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잘 모르는 나까지도 눈물 흘리게 했던 곡....

아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리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기어코 올리고야 말았다...

 

Thomas Cooley, tenor

Elisabeth Reed, cello

David Tayler, theor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