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77]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 이윤기 옮김

pumpkinn 2012. 5. 31. 10:10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분위기를 온전히 따라가기가 벅찼다. 그의 화려한 문체와 온갖 풍경에 대한 살아있는 듯한 섬세한 묘사를 그대로 대충 지나칠 수가 없어 그대로 하나하나 느껴보고자 하니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풍랑 하나 하늘의 구름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문장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나’라고 불리는 1인칭 주인공이 헤어진 친구를 그리며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시점에 느닷없이 나타난 한 남자. 불쑥 나타나 대뜸 맛있는 수프도 끓일 줄 안다며 다짜고짜 자신을 고용하라며 끼어든 ‘조르바’와 함께하며 겪게 되는 이야기. ‘나’와 ‘조르바’는 크레타 섬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책 나부랭이 끼고 다니는 책벌레의 삶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삶을 통해 자신을 찾고자 하는 ‘나’란 인물과 온 세상을 떠돌며 ‘삶’을 온몸과 영혼으로 체험하며 살아온 조르바가 함께하는 삶을 그린 이야기다. 그 안에는 묘한 그리움을 안겨주는 마담 오르탕스도 나오고, 동물적인 매력을 지닌 과부도 나오고, 그리고 세속의 보통사람보다 더 세속적인 수도승 이야기도 맛갈스럽게 한 자리를 꿰어 찬다. 조르바와 ‘두목’이 되어버린 ‘나’는 사업에 실패하게 되고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는 이렇듯 제법 심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읽으면서 독특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영혼’을 두고 맹세하는 그리스인들의 습관, 이야기하는 동안 시시때때로 퍼부어지는 축복과 저주였다. 그리고 여자에게 뭔 억한 감정이 그리도 많은지 ‘화냥년’으로 표현하는 조르바의 표현이 몹시도 불쾌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은 적응을 한다는 것. 난 곧 ‘여자=화냥년’이란 등식을 조르바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나로 하여금 많이 생각하게 했던 점은 바로 하느님과 악마를 같이 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하느님과 악마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 보는 시각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것임을 조르바는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삶 속에 끼어드는 신의 존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내게는 아주 재밌(?)으면서도 심오하게 느껴졌다. 놀랍게도 그러한 그의 표현에 그대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는 사실이다. 조르바가 느끼는 하느님과 악마의 모습이 이해가 갔던 때문일 게다.
조르바를 읽으면서 첨엔 그 거칠고 투박하고 깎이지 않은 원석 같은 그의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의 페이지가 그 분량을 더해감에 따라 점점 그에게 빠져들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책 나부랭이' 끼고 다니며 배운 삶이 아니었다. 온전히, 문자 그대로 ‘온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부딪히며 싸우고 받아들이는 조르바. 조금의 변명의 군더더기도 없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에는 감히 토도 달 수 없는 근엄함과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조르바처럼 매 순간 온 열정을 다하며 살고 싶다는 내 안에 꿈틀거리는 바람은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껴지게 했다. 난 언제까지 그렇게 ‘바라기만’하고 있을 것인지.
비록 그가 입에 담기조차도 낯이 벌게지게 하는 ‘화냥년’이라는 단어로 여자를 표현하긴 하지만, 오르탕스 부인을 그녀가 가장 화려했던 그때의 당당함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그의 배려와 따뜻함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자가 여자처럼 느껴질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해 줄 줄 아는 멋진 신사였다. 자신만의 진정한 카나바로인 조르바를 사랑한 오르탕스 부인은 그 행복을 더 느끼고 싶어 죽음마저도 거부하지만, 죽음만큼 운명의 신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또 있을까. 죽음은 그녀를 데려가고 만다. 그리고 과부를 살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맞서는 조르바. 그러한 그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욕망과 본능은 동물적인 그 무엇을 넘어선 삶의 진정한 모습을 맞닥뜨려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초월된 상태로 느껴진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조르바. 삶을 피보다 더 진하게 사랑했으며 그 누구보다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조르바에게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지..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그럼 잘 자게.> (- 중략 -) <조르바, 자네 지금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P395)


그는 마치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것뿐인 양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무엇에 온전히 자신을 몽땅 바쳐버린다. 그렇게 매 순간을 그는 온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 쏟아붓는 것이다. 오르탕스 부인이 죽은 후 바닷가에서 조르바와 두목이 나누는 대화는 내 가슴을 그대로 치고 들어와 머릿속을 맴맴 돌며 한참을 머물렀다.

‘알렉시스야, 내 너에게 비밀을 하나 일러 주마, 지금은 너무 어려 무슨 뜻인지 모를 테지만 자라면 알게 될 것이야. 잘 들어 둬라.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야, 조심하거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P403)


가슴에 뜨거움이 치고 올라왔다. 눈에 물기가 고였다. 이 터어키 할아버지의 축복과 함께 알려준 지혜를 조르바는 가슴에 담고 삶 안에서 매 순간 기억했을 것이다.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다’는 말은 내게 따뜻한 위로였고 축복으로 들렸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 가슴 안에 품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매 순간 가슴 안의 속삭임과 나의 행동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꺼져 가는 불 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P403)


그랬다. 치열한 삶과 경험에서 오는 지혜 속에는 강렬하지만 결코 차갑거나 무겁지 않은 따뜻함이 묻어난다. 그러면서 얼마나 파워풀한 에너지로 전해져 오는지. 하지만 경험도 없이 그저 머리에서 나오는 말들은 카잔차키스의 표현 그대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그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음으로 색깔도 향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무런 느낌도 강렬함도 느껴지지 않는 거다.
두목과의 사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후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성공도 실패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마도 그가 성공을 했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조르바에게는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성공으로부터도 실패로부터도 자유로운 조르바와 함께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고 삶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두목을 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발장단을 맞추며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조르바 역을 돌아가신 아빠와 내가 몹시도 좋아하는 배우 안쏘니 퀸이 맡아했고, 바로 이 바닷가에서 춤추는 장면을 안쏘니 퀸이 그대로 연출했다는 글을 읽고 나는 얼마나 흥분을 했더랬는지. 조르바가 실지 인물이라는 것도 내게는 충격이었고 감동이었으며 그의 딸이 살아있다는 글을 대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내가 아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행동가였고 활동적인 작가였지 책 나부랭이 옆에 끼고 가만 책상 앞에 앉아 삶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두목’을 마치 정신적인 갈등과 방황 속에 고통을 겪기는 하나 마치 신선놀음이나 하는 샌님처럼 표현한 것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조르바가 실제 인물이었듯이, 책 속의 두목은 ‘카잔차키스’로 느껴졌고, 책 속의 두목과 실제의 카잔차키스는 서로 반대되는 성향으로 느껴졌기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어쩌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더 많은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르바(안소니 퀸)가 두목과의 사업이 실패된 후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장면...


조르바(안소니 퀸)가 두목과의 사업이 실패된 후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보는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을 왈칵 쏟아졌는지 모르겠다. 남자들의 세계는 언제나 나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우리는 때때로 동경을 느끼곤 한다. 그중의 하나가 나에겐 '남자들의 세계'다. 만약에 만약에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책을 덮은 후 내 안에는 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조르바처럼 자신의 삶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만끽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물론 그런 시간이 내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오래전 일이라 인제 그 기억마저 가물하다. 조르바가 죽음을 맞는 순간의 모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고 당당하게 서서 검은 천사를 맞이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나도 생생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조르바를 덮은 후 그 여운은 오랜 시간 내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기운으로 그렇게 나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너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대하고 있는지..?’ ‘너는 왜 너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살고 있는지..?’ ‘대체 너는 왜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에 매달려 있으며 자유롭지 못한 지..?’ 그 큰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조용하면서도 엄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리스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지만, 인제는 그 가보고 싶은 이유가 달라졌다.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싶고, 아테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인제는 그렇게 크레타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묻혀있는 바로 그 크레타 섬에 가서 꼭 그의 무덤에 가보고 싶다. 나도 가서 그렇게 소주 한 잔 부으며 그와 만나보고 싶다. 소주가 없다면 콜라라도 한 컵 들이키며 그와 만나보고 싶다.
읽으면서 배꼽을 잡으며 떼굴떼굴 구르기도 했고, 그의 거침없이 내뱉는 진실에 가슴 뜨끔해하며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또한 조르바의 눈물에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울고 웃으며 보냈던 시간. 읽는 동안 삶이 좀 더 가까이 느껴졌고, 좀 더 깊이 느껴졌더랬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읽는 동안 뜨겁게 행복했다.

덧붙이는 느낌 하나...
더 많은 이야기가 내 안에 있지만 느낌만 가득할 뿐 정리 안 되는 감정들을 글로 표현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이럴 때면 내 안에 그득하게 가득 찬 느낌들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속상하기만 하다. 감동이 크면 클수록 느낌이 깊으면 깊을수록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벅거리게 되는 거다.. 그랬던 책이 지난날 몇 권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그에 이름이 올려지는 순간이다. 느낌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산적인 자극도 함께 안겨준 책이었다. 그래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더 고마웠고, 조르바가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조르바는 그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인간이었다.나도 이젠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맞는 그 순간이 아니기를....

기억 속의 이야기 하나...
‘그리스인 조르바’대학생 시절, 사춘기도 아닌 나이에 하이틴 로맨스에 푹 빠져 지냈다. 그 당시의 나는 소설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선을 오가며 그렇게 할로 퀸 문고에 푹 빠져 지냈다. 특히 그중에서도 내가 단연코 좋아했던 작가는 앤 햄프슨이었는데, 그렇게 나를 황홀한 착각 속에 빠지게 한 앤 햄프슨의 소설 속의 주인공은 꼭 그리스인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는 고집쟁이 노처녀와 그리스 남자의 사랑이야기. 그래서 나는 그리스 남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줄 알았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 자신도 모르는 나의 매력을 발견하고 느끼게 해 줄 멋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굳게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약도 없는 엉뚱한 상상 속에 빠져 꿈속에 헤맸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내 안에 숨겨진 매력'을 발견해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의 황홀한 상상과는 달리 오랜 시간을 '나 홀로 사랑'에 줄곧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그렇게 나를 오랜 시간 가슴앓이를 앓게 했던 그 친구는 지금 나의 사랑하는 두 딸들의 아빠가 되어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 이러했던 나의 스토리를 아시는 황 신부님께서는 남편을 조르바 라 부르신다. 그런 고로 나는 지금 그 멋진(?) 조르바와 살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볼 때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야 했던 것은 거의 ‘운명적이었다’라고 표현한다면 억지스러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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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감동 속에 보았던 영화 Gladiator의 Theme...

Now We are Free...

 

음...

갑자기 울컥한다...

 

Now we are free....

조르바는 그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나도 이젠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맞는 그 순간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