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in De Botton

[독서리뷰 2] How Marcel Proust can Change Your Life, 1997

pumpkinn 2011. 5. 12. 00:41

2010년 7월 1일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Valentin-Louis-Eugene-Georges Proust)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리뷰

 

리뷰를 시작하며...

솔개 언니들의 포스트 와우 축제 도서인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손에 들었을 때는 와우4기 당시 새로운 책을 잡을 때마다 느꼈던 나도 알 수 없던 설레임이나 어떤 큰 기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다음 달 축제 도서인 이 책을 먼저 끝내놓아야 내가 지난 몇 달을 바라보며 짝사랑했던 괴테와의 대화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의무적으로 집어 들었던 것. 그래야 한 달 내내 괴테에 푹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냥 이렇게 별 큰 설렘 없이 집어 들은 책으로 인해 내가 그리도 행복한 아침을 보내게 되리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더랬다.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나의 상상을 넘어선 즐거움이었고, 새벽마다 알랭 드 보통의 눈으로 보여지는 프루스트와의 데이트는 마치 생각지 않은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부러 그리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마치 괴테를 읽기 전에 프루스트를 읽어야 했던 것 같은 느낌. 여기에 운명이란 식상해보이기까지 한 의미를 갖다 붙여도 좋을 듯싶고.. ^^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프루스트는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뭐 이런거... ^___^

 

책을 읽으며...

처음 이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언뜻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고, 현란한 단어들의 향연처럼 많은 부연 설명이 붙어있는 글들은 지름길이 아닌 부러 돌아가는 느낌이었고 좀 더 명확한 뜻을 느끼기 위해 같은 문단을 여러 번 읽기도 했지만, 곧 문체에 익숙해졌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나는 점점 프루스트에게 빠져들었다. (아니면 알랭 드 보통에게 빠져든건지.. 어쨌거나 난 그렇게 빠져들었다..^^;;)

 

나는 사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누군지 잘 몰랐다. 그저 프루스트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다는 정도. 또한 이 책이 프루스트라는 작가에 대한 책인지조차도 몰랐다. 당연히, 나는 프루스트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으며 알베르틴이 누군지 모르며 마리 끌레르를 즐겨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사랑스런 그녀 케이트 맥기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내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며 프루스트가 누군지 알베르틴이 누군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에 일종의 반짝거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 프루스트 & 엄마

프루스트에 대해 키워드 별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너무나도 가엾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정신적인 안정도 못 누리면서 심한 육체적인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는지.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고 제 끼니에 식사를 하고 햇빛도 받고 운동도 하면서 생활을 했다면, 그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거나 또는 덜 겪어도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러면서 그 뒤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생각은 이 모두 어머니의 그릇된 애정표현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삶이 더 나아지면 바로 그것이 엄마를 괴롭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다시 아프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P72) 라는 프루스트의 고백처럼 어머니는 그가 전적으로 당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라기를 의지적으로 바란거야 아니겠지만, 늘 마르셀이 그녀 곁에 있어줄 수 있고 그녀로 하여금 그를 케어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간호사-환자 관계의 절름발이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책을 읽어갈수록 마르셀이 너무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엄마의 탓으로 돌릴 수야 없지만, 안그래도 섬세했던 마르셀 프루스트. 그의 삶에 엄마의 역할이 무척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프루스트가 가브리엘 드 로슈푸코에게 해준 조언은 마치 내게 한 충고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나는 로슈푸코처럼 장황한 소설을 쓰지도 않았고 소설을 쓸 생각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늘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언어의 풍요로움을 망각시키는 나의 단어 사용에 안그래도 챙피하고 부끄럽고 또 속상하고 있는 중에 읽은 이 대목은 정말 이불 밑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에 이어지는 알랭 드 보통의 설명이 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프루스트가 왜 너무 자주 사용되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결국, 달은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것 아니던가? 노을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 상투어란 바로 좋은 표현이기 때문이 인기 있는 것 아닌가.?”라는 그의 덧붙임 설명~ 정말 돌아가시고 싶었다~ -_-;;

 

* 프루스트 & 친구

프루스트의 우정에 대한 생각과 친구에 대한 그의 애정과 배려는 참으로 나를 놀라게 했고, 어쩜 그래서 그는 더 몸이 약해졌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렇게 관계 속에 쏟아붓는 정성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그들을 대했는지, 그의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는가..? 자문해보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공감적 경청을 하는 그에게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지적인 사람이긴 했으나 그는 친구들에게 같이 지적이기를 요구하지 않았고,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상대방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며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프루스트. 어떻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우리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프루스트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그가 온전히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함께 그 순간을 나누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했을지 안봐도 그 모습이 그려지고도 남는다. 우리는 그래서 심리치료사를 찾고 심리 상담을 하는 것 아니던가. 누군가 온전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기에. 그렇게 말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치유가 되는 현대인의 마음 병. 어쩜 프루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심리 치료사가 되어 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는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멋진 친구였고 충실한 친구였고 신실한 친구였다. 누구라도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열망마저 갖게 하는...

 

* 프루스트 & 버지니아 울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부분이다. 프루스트의 책을 감히 읽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그녀. 책을 읽다가 절망하는 그녀.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 그녀. 그녀의 절망과 절규가 마치 나의 그것처럼 느껴져와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는데 또다시 코끝이 시큰거려진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 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 숨을 쉴 수밖에 없군요” (P254)

그녀가 로저 프라이에게 쓴 편지다. 하마터면 세기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침묵케 할 뻔 했던 프루스트. 대체 그의 책이 어땠길래 버지니아를 이렇게 절망 속으로 빠뜨렸을까..? 프루스트로 인해 자살 충동까지 느꼈던 그녀. 어쩜, 훗날 그녀가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 것 그 깊은 곳 어디 쯤에는 프루스트라는 이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억지스런 상상마저 들었다.

 

* 프루스트

그는 참으로 여러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이었고, 참 다양한 분위기를 가진 작가였다. 책을 통해 느껴지는 그는 아주 병약해서 때때로 신경질적이고 짜증스럽고 어리광투성인 응석받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함께 하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 그래서 상대방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아주 배려깊고 재밌는 친구.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 너도나도 서로 다투어 그들로 하여금 프루스트와 함께 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게 했던 멋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섬세하고도 날카롭고 완벽한 문체로 하마터면 세기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침묵하게 할 뻔한 무서운 작가였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그를 직접 만났다면, 그래서 그를 나의 친구로 함께 했다면 나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해서 나는 프루스트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끄집어 내어 어떤 분위기로 써내려갔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심지어..‘프루스트하다’ , ‘프루스트적 순간같은 표현까지 등장하게 했던 프루스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프루스트적 순간을 맞으며 프루스트해지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리뷰를 마치며...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별 매력적이지 않은 제목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보다 그냥 원제로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두었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프루스트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 프루스트의 삶과 생각과 추구했던 것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의 책을 인용해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으니.. 제목이 붕 뜬다는 느낌이 느껴졌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생각. 암튼, 프루스트의 생각 하나한, 행동 하나하나를 해부하듯 파헤치고 분석하며 그가 의도했던 표현의 의미까지 일일이 해석해주는 알랭 드 보통의 능력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그 아빠의 그 아들이 아니라, 그 프루스트에 그 알랭 드 보통처럼 느껴졌던 책.

 

읽으면서 나를 더불어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철저한 분석력과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관찰력이었다. 프루스트의 삶과 그의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함께 비교분석하며 심지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까지 그는 현미경을 놓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해부를 하며 구석구석 파헤치고 보여주며 심지어 중간중간 보충 설명을 곁들이며 보여준 철저한 분석에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참 집요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었다. 또한 부분부분 순간순간 느끼게 해주는 그의 시선에 따른 심리적 분석. 그의 심리묘사나 심리분석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날카로워서 마치 살얼음을 걷는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읽는 내내 진지했고, 읽는 내내 신기했으며, 읽는 내내 궁금했다. 프루스트에 대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꼭 읽어보고 싶다. 지난 며칠 매일 새벽마다 함께 했던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과의 데이트는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짜릿한 행복을 안겨주었고, 나의 지적 욕구를 자극시켜주었다. 매력적인 두 남자와의 데이트가 마침내 끝났다. 왠지 아쉬울 것 같다. 하지만 그 아쉬움도 잠시, 인제 새로운 데이트가 시작된다. 요한 페터 에커만과 괴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세기의 거장 괴테와 그와 함께한 매력적인 청년 요한 페터 에커만의 데이트.. 인제 새로운 만남을 위해 떠나야 할 시간..

 

프루스트.. 알랭 드 보통...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과 함께 했던 시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 안녕...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다가 - 초서

 

P13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삶은 갑자기 놀라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 우리의 삶 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연애, 연구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에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끝없이 미루는 우리의 게으름은 이것들을 숨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루기를 영원히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이 생기면, 삶은 다시 얼마나 아름다워질까요!

 

>>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란 너무나도 뜬금없이 무모한 믿음아래 얼마나 많은 것을 미루는가? 나 역시도 그들 중의 하나다.

 

 

 


 

P13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갑자기 생기는 삶에 대한 애착은, 우리가 흥미 잃은 것은 목적이 보이지 않는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일상적인 형태라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돌이킬 수 없도록 음울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습관적인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게 보이는 존재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수많은 시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절대 공감~!!

 

 

 


 

P35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여주인공에게 부여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읽을 수 없다는 프루스트의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 말은, 바로 앞에서 보았듯 밝게 눈웃음을 지으며 검은색 폴로 모자를 쓰고 발베크를 걷는 알베르틴이, 프루스트는 읽어 본 적이 없으며 힘든 하루 일과 후에는 조지 앨리엇이나 <<마리 끌레르>>를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내 여자친구 케이트와 매우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습관에 품격을 부여한다.

 

>> 하하하하~!! ^^ 맞다맞다~!! ^^ 책의 주인공과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비슷하다고 상상해 보는 것. 사실 굳이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자꾸만 끼워 맞추는 우리 모습을 발견한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더욱 소설 속의 그 장면 속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바라보는 제3자가 되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이런 섬세한 표현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P36케이트: 그녀는 알베르틴이 누군지 모른다라고 설명이 붙어있는 케이트 맥기버 사진을 보고..

 

>> 하하하하~ 자신의 여자친구의 사진을 책에 떡~허니 올려놓은 알랭 드 보통이 너무나도 재밌게 느껴졌다. 보통 부인이나 가족사진도 올려놓지 않는데, 얼마 후 헤어질지도 모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여자 친구 사진을 올려놓은 그가 참 참신하게 느껴졌다.^^ 역시 어떤 사회적 시선에 얽매있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너무나도 좋았다. ^^

 

사진을 올려놓은 그에게서 느낄 수 있듯이, 알랭 드 보통은 현재를 사는 사람이지 과거미래를 사는 사람이 아님이 느껴진다. 만약 그가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을 생각했다면 사진 올릴 생각은 조심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어쩜 문화적인 차이일 수도 있겠고..

넘 순수하고 순진해 보이는 웃음을 띄는 케이트. 어쩜 케이트가 알베르틴을 몰라도, 마리 끌레르만 읽어도 알랭 드 보통이 그런 그녀가 그렇게도 사랑스러운 것은 어쩜 그녀의 이런 편안함과 순수한 미소 때문이 아녔을까..하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암튼. 난 지금까지 애인의 사진을 올려놓은 작가는 본 적이 없다. 하하하~ ^^

 

 

 


 

P39 프루스트나 호메로스를 오랫동안 접하게 되면, 무섭도록 낯설게 보였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집처럼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는 유익함이 생긴다. 이것은 우리가 동물원의 문을 열어, 덫에 걸린 트로이 전쟁이나 포부르 생제르맹의 인물들, 유리클레이아텔레마코스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거나 한번도 우리에게 팩스를 보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근거 없는 편협한 의심을 가지고 다퉜던 인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진지하게 읽어내려오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갑자기 웬 팩스? 전혀 관계성 없어보이는 비유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갖다 붙이며 표현하느 알랭의 엉뚱함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만 웃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하하하~^^

 

 

 


 

P42 우리의 정신은 의식 위에 떠다니는 특정한 물체들을 포착하도록 새로이 조정된 레이더와 같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 후에,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에 우크라이나의 방송국이나 소형 콜택시 회사의 야간통신에서 나오는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우리의 정신은 의식 위에 떠다니는 특정 물체를 포착하는 레이더.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으로 섬세한 표현이다. 그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감성이란...

 

 

 


 

P43 프루스트의 남동생인 로베르가 썼듯이, “슬픈 일은, 사람들이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지 중 하나에 새롭게 깁스를 하거나 결핵균이 발견되어 침대에 눕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프루스트가 쓴 무장의 길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인용된 제 5권의 문장 하나는, 표준적인 크기의 글자로 한 줄로 배열된다면 4미터가 조금 안 되며 포도주병 바닥을 17번 감을 수 있다.

 

>> 푸하하하하하~ 아고 배야~!! 로베르나 알랭 드 보통이나~ 세상에~ ^^;; 거의 4미터나 되며 포도주병 바닥을 17번 감을 수 있다고 정확한 수치로 설명한 알랭도 넘 웃기고, 다리가 부러지거나 아파 드러눕지 않는 이상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다는 프루스트의 동생 로베르의 표현도 배꼽잡게 하고. 세상에. 제목은 무지 많이 들어봤구만, 책 내용이 대체 어떻길래 이렇게들 난리 부르쓴건지.. 괜히 더 읽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P45 이 소설의 처음 부분을 간략하고도 당혹스럽게 흝어 본 후에 윔블로는 친해하는 친구여, 내가 우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썼다. “하지만 왜 한 장에 30페이지나 들이면서 그가 잠이 들기 전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는지를 서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 까르르르륵~^^;; 아고 배야~!! ^^;; 나는 윔블로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장장 30페이지에 걸쳐 쓰여있는 그가 잠이 들기 전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는지에 대한 표현을 읽으며 당혹스러워하고 황당해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져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렇게 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중한 표현이란…^;;

 

 

 


 

P46이해할 수 업는 사건 전개 속에 빠져 수도 없이 괴로움을 겪고,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 무언가에 짜증스럽게 안달한 후에도, 칠백하고도 십이 페이지나 되는 이 원고의 끝에서는 이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단 하나의 실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쓴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게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건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감상을 말했다.

 

>> 하하하하하하~ 넘 웃겨서 돌아가시겠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러한 웃지못할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책이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다.. 하하하하~

 

 

 


 

P47 지난 3년간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존경하는 마르셀 프루스트 선생님, 일부러 어렵게 하지 마시고, 당신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게 두 줄로 말해주세요.”

 

>> 내 생각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제목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모두들 그 책을 읽으면 책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길을 찾다가 시간을 잃어버리니.. 거참.. 암튼, 무척 궁금해지는 책이다. 한번 도전해 볼만한 듯..^^

 

 

 


 

P55 우리는 나이가 듦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근심하게 하고 항상 불안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죽인다는 것이다라고 프루스트는 썼다.

 

>> 이게 무슨 뜻인가 여러 번을 읽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근심하게 하고 항상 불안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죽인다.. 참 의미심장한 표현인 것 같다.

 

 

 


 

P57 예술작품의 위대함은 겉으로 보이는 소재의 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전적으로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프루스트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이며, 우리는 파스칼의 [팡세 Pansee]에서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 그의 말에 동감한다. 평범한 내가 볼 때는 그야 말로 너무나도 평범해서 시선조차 끌지 못하던 것이 예술가의 시선에 뜨이면 그것은 아름다운 시로, 음악으로 연극으로 표현되어 나오니 어쩌 프루스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팡세]에서 만큼이나 비누 광고에서도 귀중한 발견을 할 수 있다는 프루스트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P58 우리는 영적인 공간을 얼마나 멀리까지 방황할 수 있겠는가!

 

>> 표현이 얼마나 멋드러졌는지.. ‘상상이란 표현을 어떻게 저렇게 분위기있게 표현을 했는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초서에 옮겼다. 내 머리에서 이런 표현이 나와준다면.. 작가가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어흑~

 

 

 


 

P61 친구인 모리스 뒤플레는 마르셀이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즐겨 읽었던 것은 기차 시간표였다고 말했다.

 

>> 참 재밌는, 연구대상인 프루스트다. 그의 영혼이 영적인 공간을 얼마나 먼 곳까지 방황을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나 잠이 안올 때 기차표를 읽는 이는 이 지구에 프루스트 한 명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차표를 보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상상 속의 이야기를 그려냈을까..? 참 재밌는 사람이다.

 

 

 


 

P63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 N’ allez pas trop vite”는 아마 프루스트주의적 슬로건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 빨리 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더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 나는 느림의 미학이 어디서부터 어느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졌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파고 들어가면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닐까 싶다. 너무 빨리하지 마세요를 외치며 단순히 한 문장으로 끝날 일상의 결과를 그 주위를 둘러보며 많은 것을 음미하고 의미를 두게 되는 안테나와 주파수를 맞추게 되는 것.. 그래서 늘 평범하기만 했던 적어도 우리에겐 그렇게 비쳐졌던 우리의 삶이 갑자기 재밌어지고, 새롭게 느껴지며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 바로 프루스트적인 매혹적인 일상을 사는 법이 아닐까 싶다. 비록 프루스트는 온갖 병의 고통 속에 시달리긴 했지만서도, 나름 그 일상 속에 순간순간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P72 마르셀은, 어머니가 자신이 자신이 건강하고 소변을 잘 누기보다 아프고 의존적이길 더 바란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진실은, 내 삶이 더 나아지면 바로 그것이 엄마를 괴롭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다시 아프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이것은 그와 간호사-환자의 관계를 맺으려는 왜곡된 욕망을 가진 프루스트 부인에 대한, 드물고도 큰 의미가 담긴 분노의 폭발이었다.

 

>> 참 비극적인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왜 프루스트 엄마는 마르셀에게 그랬을까..? 왜 그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아들이기보다는 영육간으로 약해서 자신에게 의존하는 아들이길 바랬을까..? 내가 볼 때 프루스트의 이런 정상적이지 못한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  많은 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된게 아닌가 싶다. 내가 볼 때 프루스트 어머니가 심리 치료를 받아야하지 않았나 싶다. 어쩜 부모에게 인정받고 자라지 못했거나, 기대치기 너무나도 높았기에 그에 못미치는 자신이 스스로가 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느꼈기에 자식이 자신을 의존하게 함을써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닐지.. 암튼 내 머리 속엔 별의 별 상상이 다 오고갔다. 건강하지 못한 엄마와 아들 관계.. 연구대상이다..(진지하게..)

 

 

 


 

P84슬플 때는 따뜻한 자신의 침대에 누워 모든 노력과 투쟁을 멈추고, 심지어 담요 아래 머리를 묻고서 가을바람 속의 나뭇가지들처럼 슬픔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때로 그러고 싶을 때도 있고, 많은 세월 그렇게 지내기도 했으니까.. 프루스트의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안다..

 

 

 


 

P84어떤 인간에게도 없는, 남들을 분개시키는 능력을 가진 무생물체가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

 

>> 하하하~ 그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얼마나 못치고 소음으로 들리게 했으면, 프루스트가 이렇게 애꿎은 피아노를 미워했을까..^^;;

 

 

 


 

P87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통고할 때마다 그는 서슴없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6년 동안 줄곧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규칙성을 가지고 이 사실을 공표했다. 그는 자신의 평시 상태를 카페인, 아스피린, 천식, 협심증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며 일주일 중 엿새 동안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 16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규칙성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통보.. 아무리 존경받는 작가라 할지라도, 이런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녔을 것 같다. 나라면..? 어쩜 못견뎠을지도 모르겠다. 멀리하고 싶은 사람 1호 정도 되지 않았을까..? 끝없이 아프고 불평하고 신음하면서 할 것은 다하는 사람. 마치 3살짜리 애기 같은 응석받이 심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만 봐달라고 자기에게만 온전히 관심을 가져달라고 온몸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외쳐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짙게 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루스트를 꼬집은 어떤 비평가의 눈에도 같은 모습으로 비쳐졌기에 그런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암튼 아직 그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할 수는 없으나 죽음에 관한 글을 읽은 내 느낌은 이렇다.

 

 

 


 

P87 그의 주식 중개인인 리오넬 오세르는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은 아무도 감히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는 비록 50살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당신은 내가 당신을 처음에 만났던 상태 그대로입니다. 바로 응석받이 아이지요, , 나는 당신이, A+B-C 따위의 공식을 꺼내면서 당신이 응석받이이기는커녕 언제나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병약한 아이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 탓보다는 당신 탓이지요라고 대담하게 말했다. 오세르는 그가 항상 아팠다고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커튼을 닫고 언제나 침대에만 누워서 건강의 두 가지 구성요소인 태양과 신선한 공기를 거부한 결과이므로, 스스로 초래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 이 주장의 수사법적인 설득력이 어떠했든, 프루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해에는 죽는 데 성공하였다.

 

>>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가 다해주었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결국 내가 짧은 글을 통해 가졌던 느낌은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마르셀이 자신의 현실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정직하게 말해준 그는 어쩜 마르셀을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진실된 친구가 아녔나 싶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은 그 다음해에 죽는데 성공한다..’ 라는 표현이 참 씁쓸함을 안겨준다. 왠지는 모르지만, 마르셀은 자신의 모든 행동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또한 동시에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사람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P88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똑 같은 바이러스라도 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눕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단지 점심 후에 약간 나른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이 긁힌 고통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엄살부리지 말라고 비난하는 대신에 택할 수 있는 것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 생채기를 우리가 큰 칼에 맞은 것만큼이나 아프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단순히 우리가 비슷하게 다쳤었다면 겪었을 고통을 근거로 다른 사람이 정말 아픈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알랭의 이 의견에 절대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우리는 설사 같은 시간에 똑같이 똑 같은 방법과 크기로 다쳤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와 상황에 대한 느낌은 다르다. 그러기에 그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실은 모순인 것이다.

마르셀이 과장을 했던 것일까..? 설사 남들에겐 과장처럼 보였어도 실제적으로 본인은 그만큼의 느낌을 (고통이던 아픔이던) 느꼈던 건 아닐까..? 참 복잡한 문제다.

 

 

 


 

P92 사실 프루스트의 견해에 따르자면 우리는 문제가 있기 전까지는, 즉 우리가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

 

>> 공감되는 부분이다. 내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고통을 겪기 전엔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가 그렇긴 하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표현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아닌가..

 

 

 


 

P92 매일 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즉시 잠에 들어서 깨어 일어나는 순간까지 죽은 듯이 자는 사람은, 반드시 위대한 발견일 것까지는 없지만, 분명히 수면에 관한 작은 관찰조차도 꿈꿔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약간의 불면증은 우리가 잠에 대해 감사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없지 않다.

 

>> 그렇다.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이들은 위대한 발견일 것까지야 없지만, 분명히 수면에 대한 작은 관찰, 내지는 잘 자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우리는 삶 속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것엔 어떠한 의문도 관심도 가지기가 힘들다. 그러기에 때때로 고통은 깨달음을 안겨주는 좋은 스승이란 것이 그래서 은총이 된다는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 같다.

 

 

 


 

P92 물론 고통 없이도 우리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지만, 프루스트가 계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때에만 철저한 탐구심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 그리고 고통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다. 생각은 고통의 기원을 이해하고, 그것의 여러 특성들을 포착하고, 그 존재를 체념하고 인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P93 그는 개인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선생을 통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통해서 고통스럽게 얻는 것이다. 그는 고통스럽게 얻는 지혜가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P93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젊었을 적의 한때, 나중에 회고할 때 너무 불쾌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자신의 기억에서 기꺼이 지워버리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후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모든 어리석고 불건전한 삶을 통해서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 중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한에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P94 지혜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우리 대신 가줄 수 없는 여정을 통해서, 누구도 우리대신 해줄 수 없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94 왜 그들은 지혜를 발견할 수 없는가? 왜 고통스런 여정이 진정한 지혜를 얻는 데 그렇게 불가결한 것인가? 엘스티르가 명확한 이유를 대지는 않았지만, 그가 개인이 겪는 고통의 정도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의 관계에 관해 정의했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정신이란 마치 괴로운 사건 없이는 괴로운 진리를 담길 거부하는 예민한 기관과도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 고뇌는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우리가 행복했다면 회피했을 일종의 체조와 같은 것을 하게 한다. 사실, 우리의 정신적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선시된다면 그것이 갖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만족보다는 불행이,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으리라는 것이다.

 

 

 


 

P95 행복할 때 무지한 것은 아마도 그저 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자동차가 잘 움직이고 있는데 그 복잡한 내부 기능에 대해서 배워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헌신을 맹세했는데 인간이 왜 배신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까닭이 있는가? 우리가 항상 존중을 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회생활에서의 굴욕감에 대해 탐구하겠는가? 오직 고뇌에 빠졌을 때만 우리는 괴로운 진리를 직시하려는 프루스트적인 동기를 가지게 되고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처럼 이불 밑에서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 왜 우리 인간은 고뇌를 통해 괴로운 진리를 얻게 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알랭의 비유 설명이 참 흥미로웠다. 그의 글을 읽으면 느끼는 거지만 (기껏 불안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있는 그것들을 섬세한 눈으로 끄집어내어 아주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의 능력이다. 그가 공항에서 일상에 대한 글의 일부를 읽고 공항엘 갔을 때 확실히 공항이 나에게 안겨준 느낌은 달랐다. 그의 섬세함은 그의 외적인 분위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암튼, 고뇌를 통해 우리가 삶을 다시 통찰하게 되고 깊이 생각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을 분명한 그림으로 그려주었으니, 역시 훌륭한 작가다.. 싶었다..

 

 

 


 

P95 이것이 프루스트가 의사에게 회의적이었던 까닭을 설명해 준다. 프루스트의 지식이론에 따르면 의사들은 이상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지식이 일차적으로 자신의 육체가 겪는 고통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데도 신체의 작동을 이해하고 있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수년간 의대를 다녔을 뿐이다.

 

>> 나도 늘 같은 의문을 가졌다. 그들의 지식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들은 내가 느끼는 아픔을 그들이 겪어보지도 않았음에도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있을까 하는 것. 그것이 참 신기했다. ‘느끼는것이 아니라 머리로 알고있는 것이긴 해도. 아마 비유적인 상황으로 그 느낌에 대해 배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암튼 내게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P99 어떻게 하면 대작을 쓰지 않으면서도 뭔가를 배울 수 있을까? 설사 걸작을 창조하고 싶은 야심이 없더라도 어떻게 하면 좀더 훌륭하게 고통을 겪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행복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훨씬 더 큰 지혜는 제대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불행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데 있는 듯하다. 불행이 끈덕지게 재발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불행에 대해 실현가능한 대책을 개발하는 것이 행복에 대한 어떠한 유토피아적 탐구보다도 분명히 가치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이나 그 대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P100 그러한 삶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프루스트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 과제란 현실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얻는 것을 말한다. 고통이란 놀라운 것이다. (…) 이러한 불쾌한 사태의 원인이 찾는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극적으로 구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회복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이해는 우리만 특별히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하는 한편, 우리가 겪는 고통의 범위를 인식하게 하고 고통의 이면에 존재하는 씁쓸한 논리를 알게 한다.

 

P100 하지만 너무나 자주 고통은 생각으로 바뀌지 못하고, 우리에게 더 나은 현실 감각을 부여하는 대신에 우리가 아무런 새로운 것도 배울 수 없게 하며, 차라리 처음부터 고통을 겪지 않았을 때보다도 헛된 생각을 더 많이 하고 긴요한 생각들은 더 적게 하는 헛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 그러게 말이다. 너무 자주 고통은 생각으로 바뀌지 못하고, 생각으로 바뀌지 못한 고통은 배움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그렇게 고통 그 자체로 남게 되는 것이다. 슬픈 사실이다.

 

 

 


 

P103 왜 베르뒤랭 부인은 몹시 괴로워하는가?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는 사람들보다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것들 것 단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재미없는 것이라고 영원히 비난하기만 한다면,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왜곡될 것이다.

 

P104 비록 우리는 가끔씩 사람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지만,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우리의 의문을 긴급히 충족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야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진정한 삶을 위장하고 숨기는지 발견하게 되기 쉽다.

 

P115 교훈은? 예상치 못했던 상처를 주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안경을 닦는 것 이상의 행동으로 대처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회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설사 프루스트가 경고 했듯이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삶이 어떤지 발견했을 때, 즉 현상 세계밑의 실재 세계를 발견했을 때 외부는 평범하지만 안쪽은 숨겨진 보물들, 고문실 또는 해골들로 가득한 집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가 놀라게 될지라도 말이다.

 

>> 즉 현상 세계 밑의 실재 세계를 발견했을 때 외부는 평범하지만 안쪽은 숨겨진 보물들, 고문실 또느 해골들로 가득한 집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가 놀라게 될그것들이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닐까? 나 역시도 그런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나만의 삶의 이야기가 있고, 다른 누구도 그럴 것이라는 것. 그것이 사소한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런 나만의 공간, 가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닐까..?

 

 

 


 

P117 교훈은? 우리가 앓는 기침, 알레르기, 사회적 결례 및 정서적 배신 속에서 암호화된 형태로 주어지는 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가 가장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리고 완두콩, 재미없는 사람들, 시간과 날씨 탓을 하는 사람들의 감사할 줄 모르는 태도를 피하는 것.

 

P119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불쾌하게 느끼는지 살펴보면 그들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루스트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나타낼 때 쓰는 특정한 표현들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 (…) 고작하는 반응이라는게 폭우에 대해서는 장대 같은 비가 온다’, 쌀쌀한 날씨에 대해서는 오리도 춥겠다’. 그리고 꽉 막힌 사람에 대해서는 바구니처럼 꽉 막혔다인 사람들 때문에 그는 고통을 느꼈다.

 

>> 프루스트가 삶 속에서 만나지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들이 어줍잖은 영어로 인사를 하기 때문에, 지중해를, 영국을, 프랑스 군인들을 제대로 그 이름대로 부르지 않기 때문에, 또는 상상력의 부족으로 짧게 밖에 표현할 줄 모르는 그들 때문에.. 그는 고통을 느꼈다. 그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정열도 많았다 싶다. 그 아픈 와중에 다른 이들의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도 불편함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프루스트. 암만 봐도 참으로 재밌는 사람이다.

 

 

 


 

P121 그것은 사물이나 사태에 대해 적합한 말을 찾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교훈이었다. 이 노력이 지독히도 헛될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느끼고 남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구절이나 콧노래를 찾아보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듣고, ‘, , 이라고 콧노래를 부르고,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고 근사한데라고 할 뿐이다. 이 소리들은 경험한 것을 해명하려고 하지만, 그 빈약한 표현들은 우리가 경험해 온 것을 우리와 우리의 대화자가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마치 서리가 낀 창문을 통해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인상의 외부에 머무르면서, 그것과 피상적으로 관계 맺으며. 모든 엄밀한 거리를 둔 채로 있는 것이다.

 

P123당신의 소설에는 몇 가지 훌륭하고 장엄한 장면들이 그려집니다라고 프루스트는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좀더 독창적으로 그려져있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해질녙에 하늘이 불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너무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고, 어슴푸레한 달빛은 시시하고 둔감한 표현입니다.”

 

>> 프루스트가 가븨엘 드 로슈푸코에게 해준 조언은 마치 내게 한 충고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나는 로슈푸코처럼 장황한 소설을 쓰지도 않았고 소설을 쓸 생각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늘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언어의 풍요로움을 망각시키는 나의 단어 사용에 안그래도 챙피하고 부끄럽고 또 속상하고 있는 중에 읽은 이 대목은 정말 이불 밑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에 이어지는 알랭 드 보통의 설명이 더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리는 여기서 프루스트가 왜 너무 자주 사용되는 구절을 사요하는 것에 반대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결국, 달은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것 아니던가? 노을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 상투어란 바로 좋은 표현이기 때문이 인기 있는 것 아닌가.?”라는 그의 덧붙임 설명~ 정말 돌아가시고 싶었다~ -_-;;

 

 

 


 

P123 상투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어떤 수준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처음에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P125 설사 우리에게 프루스트의 직유법이 가진 매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반드시 우리 스스로 쉽게 창안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이 주는 순수한 인상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느낄 수도 있지만, 정작 우리가 달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하려고 하게 되면, 우리는 신선하기보다는 진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기 쉽다. 우리는 우리의 달에 대한 묘사가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묘사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

 

>> 어쩜 그렇게 내 느낌 내 마음을 꼭 찝어 표현해주었는지.. 읽으면서 내가 바로 그렇기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어서 넘 시원하기도 했다. 나도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즉 다르게 묘사하고 싶으나 나는 묘사를 신선한 표현으로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사실 내 느낌을 표현할 때마다 괴롭다. 기껏해야 절절함이나 간절함하고 싶은..’ 정도로 표현되는 나의 열정과 열망들..

프루스트의 달에 대한 표현을 보면서 세상에~어떻게 이런 표현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뭐 멀리 프루스트에게까지 갈 필요 없다. 가까이(? 그니까 우리 시대의.. ^^) 알랭 드 보통만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도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느끼게 하는 표현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뱉어내는 그가 가끔씩은 얄미운 나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인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게 웬 자격지심..-_-;;) 암튼. 책을 많이 읽어도 늘지 않는 나의 표현의 한계는 종종 나를 갑갑하게 한다.

 

 

 


 

P130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자신만의 음색을 창조해야 하듯이…… 형편없이 쓰는 독창적 작가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 쓰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 아마 이게 약점일 수는 있지만 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창적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했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들은 잘 쓸 수 있습니다. 정확함과 완벽한 문체가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착오를 겪은 후에야 독창성의 이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독창성과 같은 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P135 따라서 만약 상투어로 말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틀에 박힌 표현들이 포착하거나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비, , 햇빛. 감정이 세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 속에는 그런 틀에 박힌 상투적인 표현들로 표현되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비, , 햇빛,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한계적인 상투적인 표현 안에 가두어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어떻게표현하는 것이냐는 것.. 나도 상투적인 표현을 쓰고 싶지 않고, 좀 더 그 섬세함을 그대로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표현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표현할지를 모르겠는 것.. 아마 나 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나의 표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쓰리고 답답한 일인지..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한계가 없는 표현의 자유를 누릴 만큼의 문학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아마 프루스트는 몰랐던 듯싶다. 아니 알랭 드 보통이 몰랐던 것일까..?

 

 

 


 

P137 우리의 애정에는 보다 심오한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 웃음이 나왔다. ^^ 그래서 네가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 라는 표현이 생긴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겉으로 보여지고 드러나는 그 무엇에 플러스 알파를 붙여 심오한 무엇. 운명으로 이어지는 무엇이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

 

 

 


 

P140 현실 자체와는 매우 다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현실 자체로 받아들이는 표현 형태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는 습관.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현실 개념은 매우 자주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설명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실제의 현실과 차이가 있다. 세계에 대한 상투적인 묘사들 속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P143 교훈은? 삶이 상투적이라기보다는 낯선 실체라는 것, 황금방울새들도 가끔씩은 어미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풀루플루, 미쑤, 또는 가여운 작은 늑대라고 부를 만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

 

>> 하하하하~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에게서 찝어낸 교훈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하하~^^

 

 

 


 

P147그는 가장 훌륭한 청자였다. 절친한 동료들 사이에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항상 겸손하고 정중하게 배려하였고 대화 주제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화의 소재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찾았다. (…) 그는 당신이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대신에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 조르주 드 로리

 

P147 그는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볼 때 즐거워했고 그 자신도 웃었다.” – 조르주 드 로리

 

>>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는 프루스트다. 늘 약한 몸으로 끊임없는 불만을 터뜨렸는가 하면, 다른 이들에게 한없는 배려를 했고 그들의 웃음이 자신의 웃음이고, 그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으로 느꼈던 것 같은 프루스트. 지적인 사람이면서도 그는 다양한 친구들을 가졌고, 그 친구들이 지적여야 한다고 생각한적이 없었던 사람.

 

그는 물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느 그릇에 담아도 그 그릇 모양새로 변하면서도 자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는 물처럼.. 자신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성격을 잘 맞추고 그들의 관심사에 자신을 온전히 몰입시키면서도 자신의 품위와 인격을 지켜내는 사람..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문득.. 그를 연구하고 싶어하는 심리학자는 없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독특한 심리세계가 심리학자들에겐 유혹적이었을 것 같았다..

 

 

 


 

P148말로 표현할 수 없다. 프루스트와의 대화는 매우 인상적이고, 매혹적이다” – 마르셀 플랑테비뉴

 

 

 


 

P148저녁 식사 동안 그는 각각의 소님 곁으로 접시를 들고 가서 먹었다. 그는 한 사람 옆에서는 수프를 먹고, 다른 사람 옆에서는 생선 한 마리 또는 반 마리를 먹었으며,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같이 했다. 과일을 먹을 때쯤에는 이미 그가 식탁을 한 바퀴 돌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친절과 호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느 누구라도 불만을 품지 않았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개별적으로 정중함을 표시할 뿐 아니라 자신의 통찰력으로 모두가 상쾌한 분위기에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사실 그 결과는 매우 훌륭해서,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 가브리엘 드 라 로슈푸코

 

>> 그가 응석받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대목이다. 물론 그런 구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는 그에게 친구로 불려지는 이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는 정성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의 아픈 몸으로, 그래서 약해진 정신과 육체로 그런 정성을 쏟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깊은 정성을 쏟는 것. 역시 그는 삶에, 사람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배려 깊다하더라도 이렇게 저녁 식사동안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와 돌아가며 앉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단연코 프루스트가 처음이다. 대단한 정성이다. 그래서 그가 더 약했던 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에너지 소모가 되었을까..? 정말 대단한 프루스트다.

 

 

 


 

P151 친교란 얄팍한 노력이다.

“…… 본질적이고 소통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유일한 부분을 피상적인 자아를 위해 희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친교란 결국은……

우리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지 않게 하려는 거짓말|이상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무정한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남들과의 교제를 싫어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 그러나 프루스트는 친교를 지극히 찬양하는 주장들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 중에서 주된 것은, 친구가 우리에게 가장 심오한 자아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고, 따라서 당연히 어떠한 신비스러운 자기 암시도 없이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P15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수준으로 쓸 수는 있지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부분적으로 이것은 순간순간 흐름이 끊기면서 활동하는 정신의 특성 때문이다. 정신은 걸핏하면 줄거리를 놓치거나 딴 데로 새며, 활동하지 않거나 진부한 생각을 하는 중간중간에만, 즉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이 아닌 중간중간에만 긴요한 생각들을 발생시킨다. 그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아직 사태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마치 우리가 공허하고 유치한 표현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묘사하듯이 말이다. 대화의 리듬은 휴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존재는 계속 응답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이 어리석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그 흐름을 또는 흐름의 깨짐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놀랍기만 하다..

 

 

 


 

P155 대조적으로, 책은 산발적으로만 활동하는 우리 정신의 정수이자 가장 활력 있는 표현의 기록이고, 원래는 수년간 지속되었지만 중간 중간 단절되었던 착상의 순간들의 응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저자를 만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쓴 책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들의 책이 책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남은 시간적 한계에 종속된 상태에서 그 사람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 “자신들이 쓴 책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들의 책이 책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하하하하~ ~ 넘 웃겼다~ 세상에 우짜자고 이런 표현을~ ^^;; 하지만 책만큼 훌륭한 작가를 우리 주위에 많이 볼 수 있지 않나.. 내가 가까이 알고 있는 분만해도 두 분이다. 이희석 선생님과 선생님의 선생님이신 구본형 선생님..(물론 구본형 선생님을 가까이 알지는 못하나, 그래서 한 다리 건너 안다는 것은 내겐 무척 가까운 측인셈이다.. 하하하~ ^^;;)

 

 

 


 

P155 더구나, 대화는 우리가 처음에 한 말을 고칠 수 있는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이것은 뭐라고 한 마디 말하기 전에는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습성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반면에 글쓰기는 정정이 가능할 뿐 아니라 상당 부분 수정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정을 하는 동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생각들 빈약하고 분명치 않았던 생각의 실마리들 은 풍부해지고 섬세해진다. 그에 따라, 생각들은 그것들이 요구하는 논리적, 미학적 질서에 따라서 한 페이지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참을성 있는 동반자조차도 화를 내게 하지 않고는 수정이나 부연을 하는 데 한계가 있는 대화가 초래하는 왜곡과 대조한다.

 

P157 출판사에는 불행하게도, 그가 악필로 휘갈겨 쓴 원고를 활자화하도록 넘겨주었다고 수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악필에서 명확하고 균일한 활자들로 바뀐 출판사의 교정쇄는 그에게 훨씬 더 많은 오류와 생략을 드러내줄 뿐이었다. 그것을 프루스트는 읽을 수 없는 거품 같은 글씨로 수정했는데, 가끔씩은 쓸 수 있는 모든 여백을 가득 채운 글이 양쪽 종이가 붙어 있는 책 가운데 부분까지 흘러넘칠 정도였다.

 

>> 거품 같은 글씨.. 하하하하~ 그 알랭 드 보통의 묘사능력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거품 같은 글씨.. 넘 맘에 드는 표현이다.. ^^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지 넘 궁금하다..

 

 

 


 

P164 (“내가 진정 슬플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사랑하고 사라을 받는 것이다”). [우정을 해치는 생각들]이라는 제목을 단 글에서 프루스트는 일상적인 정서적 편집증 환자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일련의 불안감에 대해 고백하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잊혀질 것이라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가 무뚝뚝하지는 않았나?” “그들이 우리를 좋아했으라?”라는 생각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프루스트가 모든 만남에서 가장 우선시했던 것이 남들이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고 좋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 손금쟁이가 실직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 뛰어났던 그의 심리학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적합한 단어, 미소 또는 꽃을 찾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수의 친구를 얻었고, 그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그에게 헌신적이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내 친구 마르셀 프루스트] (모리스 뒤플레 저), [마르셀 프루스트와 나의 우정] (페르낭 그레그 저),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 (마리 노르들링거 저)와 같은 제목을 단, 그를 찬양하는 한 무더기의 책들을 써냈다.

 

>> 친구들에게 참으로 헌신적이었던 프루스트. 그래서 사랑을 얻었던 프루스트. 그리고 그를 사랑한 많은 친구들. 그렇게 여러 친구들이 프루스트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와의 우정을 추억하는 책을 썼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프루스트 때때로 자신을 장악하고 있는 병 때문에 많은 고통 속에 시달렸으나, 친구들을 온 마음을 사랑하고 또한 그렇게 친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프루스트는 참 행복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한 추억을 담아내기 위해 책까지 쓰게 하는 친구.. 정말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깊이 느껴져 왔다.

 

 

 


 

P165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내용과 타인의 관심사가 쉽게 일치하는 것이 친교라고 가정한다. 이보다는 덜 낙관적이었던 프루스트는 불일치의 가능성을 인식하였고, 질문을 하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지루하게 하느니 항상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결심했다. (…)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말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

 

>> 결심은 쉽지만 실천은 어디 쉬운 일인가..?? 더욱이 자신의 관심사와 무관한 이야기들을 들들어줘 할 때 우리는 때때로 심한 절망감까지 느끼게 됨을 볼 떄, 프루스트는 단지 듣는것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경청함으로써 사랑하는 친구의 관심사를 스스로도 좋아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 정말 나는 관심 없는 이야기를 대화하는 내내 들어야 할 때 고역이라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진정 친구를 사랑했고, 그랬기에 그러한 시간조차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대단한 위인이다.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P166 그에게 친교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관심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온정과 애착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프루스트가 지적인 사람치고는 놀랍게도 공공연한 지적 교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P166 파리 침대에 틀어박혀 있던 프루스트는. 잘못이라고는 데카르트를 읽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는 젊은이들과 휴가를 함께 보낸다는 생각에 왜 불만을 터뜨려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내 지신 안에서 지적인 작업을 합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들이 친절하고 신실하기만 하다면, 그들이 지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 잘못이라고는 데카르트를 읽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는 젊은이들과 휴가를 함께 보낸다는 생각에 왜 불만을 터뜨려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하하하하~ 알랭 드 보통의 시니컬한 유머에 유쾌한 웃음이 터졌고, 그와 함께 파리 아파트의 자기 침대에 앉아 그 편지를 읽으며 아주 진지한 자세로 쉬프로를 이해하려고 끙끙대는 프루스트가 그려져 너무나도 웃음이 났다. ^^ 점점 프루스트가 좋아지고 있다.

 

자신은 지적인 사람이지만, 자신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지적수준의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이 친절하고 신실하기만을 바랬다. 어쩜 그런 열린 마인드를 가졌기에 그렇게 다양한 스타일의 수 많은 친구를 자신의 친구로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죽고 난 후 수 많은 친구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와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움을 쏟아낸 것을 보아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자신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프루스트. 성품이 깊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얼마나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얄팍한 지식을 읊어대며 마치 자신이 그 분야의 전문가인양 떠들어대며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자신이 조금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을 기준으로 얼마나 많은 관계를 깔대기로 걸러내는가..? 늘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성으로 들어주고 관심을 보이며 함께 하던 프루스트. 과연 누가 이런 프루스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대단한 사람이다. 대체 이 정열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무리 건강해도 이렇게 사람에게 쏟아붓는 열정은 사람을 금방 지치게 하는데, 그 허약한 몸으로 이렇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친구들과 사람들을 대했다는 것이 내게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P167 지적인 대화를 할 때에도 프루스트가 우선시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개인적인 지적 관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성을 쏟는 것이었다. 그의 지적 공손함에 대해, 친구이자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라는 또 한 권의 회고록을 쓴 마르셀 폴랑테비뉴는 프루스트의 관심사는 결코 지루하거나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도 않았다고 평했다. 프루스트는 말 중간중간에 자주 아마도”, “어쩌면또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집어넣었다. 플랑테비뉴에 따르면 그것은 남의 마음을 듣고 싶어하는 프푸스트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일 거야라는 생각이 그에게 숨겨져 있었다. 그렇다고 플랑테비튜가 이에 대해 불평을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환영했다. 특히 프루스트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말이다.

 

 

 


 

P168 우리는 속되게는 척한다’. ‘지루하다’. ‘재미있다고 부를 수 있는 것들과 더불어 약간 지나치게 의식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들끼리 프루스트하다라는 동사를 만들어냈다.

 

>> ‘프루스트하다하하하~ 비록 이 표현이 냉소적인 비아냥거림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내겐 참 재밌는 매력적인 표현으로 다가왔다. 거의 거시기하다와 맞먹는 표현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황산벌 영화로 인해 한때 우리 사이에 유행됐던 거시기하다어쩜 페르낭 그레그가 프루스트 하다라는 표현도 그렇게 코믹하게 쓰였을 것 같다.

 

 

 


 

P174 모든 우정은 명백히 어느 정도는 신실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는 데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정이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서 추구되는, 애정과 솔직한 표현이라는 두 가지 상습적으로 충돌하는 목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프루스트가 이러한 이중의 목적을 한계점까지 밀고 나가 친교에 대한 고유한 접근법을 개발했던 것은 그가 특별히 솔직하고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접근법은 애정의 추구와 진실의 추구가 간혹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는 친교의 목적을 훨씬 더 좁게 파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친교는 로르와 즐겁게 교류하기 위한 것이지, 몰리에르에게 그가 재미없다고 말하고 안나 드 노아이유에게 그녀가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개념이 프루스트를 훨씬 더 좋지 못한 친구로 만들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애정과 진실의 이 근본적인 분리는 그를 더 좋은, 더 충직한, 더 매력적인 친구이자 더 정직한, 더 심오한, 더 감정적이지 않은 사상가롤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 정말이지 알랭 드 보통의 표현대로 역설적이지만프루스트의 애정의 추구와 진실의 추구가 간혹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친구의 잘못된 행위를 보면서 잘했다고 표현하는 류의 잘못된 우정 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프루스트의 이런 애정과 진실의 근본적인 불리는 그를 더 좋은, 더 충직한, 더 매력적인 친구이자 더 정직한, 더 심오한, 더 감정적이지 않은 사상가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알랭의 결론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다. 프루스트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참으로 묘한.. 신비스런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편안하면서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그를 나의 친구로 두고 싶은 리스트 윗부분에 차지할 것 같은 사람이면서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그만의 묘한 매력을 지닌 그래서 더 그에게 다가가고 싶게 하고 알고 싶게 하는 그런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느껴진다.

 

암튼. 여기서 몰리에르이름을 발견하고 참 반가웠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매료 시켰던 몰리에르. (물론 그의 책을 읽었던 건 아니다.) 연극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몰리에르, 결국 그의 바램처럼 연극을 하다 무대위에서 죽음을 맞은 그의 열정적이고 그의 정열적인 삶이 나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해서 내가 이민을 떠나올 때 미대 지망생이었던 내 친구는 나에게 몰리에르 초상화를 데생으로 그려서 선물을 주었다. 참 행복한 기억..

 

 

 


 

P178 이러한 불편한 생각들은, 다른 곳, 즉 그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사람들과 나누기에는 너무나 상처가 되는 통찰을 위해 고안된 사적 공간에서 더 잘 사용될 수 있다. 결코 보낸 적이 없는 편지가 그러한 장소이며, 소설은 또 다른 장소이다.

 

>>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행동도 차원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상대방을 아프게 할까봐..? 또는 그렇게 말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약해서..? 어쨌거나 좋다. 아니면 용기내어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달콤한 말로 포장된 우정이 더 중요하기에..? 가식적으로보일 수 있는 행동, 이중 성격자 처럼 보일 수 있는 처사도 어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행동할 때 공감(?)속에 합당화 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물론 나도 상대 친구가 아프거나 말거나 진실을 말하는 부류의 친구는 아니다. 기왕이면 기분좋고 즐겁게 이야기하고 넘어가는 것. 자칫 진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비난이 되어질 수 있는 것. 나는 조언이나 진실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 쏘아대는 비판이나 비난보다는 그냥 따뜻하게 감싸주고 이해하고 그의 눈으로 보며 함께 공감하는 그런 친구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친구를 나의 친구로 갖고 싶다. 부탁하지도 않은 조언을 내게 해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 자신. 나의 그릇이 작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조언이라는 부탁하지도 않은 선물을 받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단 내가 존경하는 분으로부터의 조언은 정말 겸손하게 받는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내 삶 안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P180 프루스트는 우정을 경멸하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런 경멸하는 자들이 우정이라는 유대관계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역설적인 표현이었지만, 프루스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왠지 이표현을 보면서 마키아벨리가 떠올랐다. 그는 군주론에서 잔인한 군주의 모습을 표현헀지만 그것은 군주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국가 수호자의 모습이었을 뿐 그도 법이 지배하는 민주적인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다는 부분에서 왠지 모를 짠한 아픔이 느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랑과 이상이 함께 공존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꿈꿨던 마키아벨리. 우정을 경멸하는 자가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 프루스트. 어딘가 모르게 프루스트와 마키아벨리가 닮은 듯 했다.

 

 

 


 

P181 그들은 전투적으로 진리와 애정을 동시에 추구하기보다는 분멸 있게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두 가지 목적을 분할하여, 국회와 소설을, 로르 아이망과 도에트 드 크레시를, 보내는 편지와 쓸 필요는 있지만 숨겨두는 편지를 현명하게 분리시킨다.

 

>> 이렇게 보내진 편지와 보내지 않고 숨겨둔 편지 사이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알랭 드 보통이 참으로 놀랍게 느껴졌다. ^^;; 정말 프루스트는 이런 심오한 뜻을 가지고 편지를 안보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안겨줄까 봐, 또는 혹은 상대방이 이 편지로 인해서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하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모든 행동에 자신의 삶의 가치와 믜미를 부여했던 것일까.. 그냥 궁금해졌다. 프루스트에게 폭 빠진 알랭 드 보통의 눈에 그렇게 해석되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 하하하하~ ^^

 

 

 


 

P187 평범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렇게 화려하게 묘사되었다는 것,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삶이 이렇게 흥미를 돋운다는 것, 그리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연에 위대한 예술이 있다는 것에 그가 압도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P189 그가 논문을 거절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이때는 1895년이었고, 맹귀에는 프루스트가 언젠가는 프루스트가 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 맹귀에는 프루스트가 언젠가는 프루스트가 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재밌는 표현이다. 1895년의 프루스트가 많은 시간이 흐른 언젠가다른 프루스트가 되었던 것은 아닐 터, 결국 우리는 내가 가진 고정관념의 틀 안에 사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작품을 보기 때문에 소중하고 귀한 것을 놓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만약 맹귀에가 프루스트가 1895년의 프루스트가 아닌 언젠가는 프루스트가 될그 프루스트로써 그에게 같은 글을 보냈다면 그렇게 독자들이 흥미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논문을 거절했을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 프루스트의 작품을 다른 눈으로, 적어도 열린 마음으로 읽었으리라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맹귀에가 거부하지 않았다면, <<주간평론>>의 독자들은 미에 관한 자신의 관념을 유익하게 재평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소금 접시, 그릇들, 사과들과 새롭고도 어쩌면 더 가치 있는 관계를 맺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알랭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P189 그러나 프루스트는 모든 것에 똑 같은 가치를 부여하라고 강권한 게 아니었으며, 더 흥미롭게도, 모든 거셍 올바른 가치를 부여하라고 권했을 터이다. 이는 좋은 삶이란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헛되이 다른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했다.

 

P194 화자의 유년기는 인생의 다른 떄와 마찬가지로 그이 마음속에서 상당히 흐릿하게 기억되었고, 그때에 대한 그의 기억 중에는 특별히 매혹적이거나 관심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이것은 유년기에 실제로 매혹적인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가 잊어버렸다는 것일 뿐이다. – 그리고 마들렌이 블러일으킨 것은 바로 이 기억이다. 어렸을 적 이후로 그이 입술을 넘어가 본 적이 없던, 따라서 나중의 경험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케이크 한 조각이 기이한 생리적 현상으로 인해 콩브레 시절로 그를 되돌려놓고 풍부하고 친밀한 과거에 대한 기억의 흐름 속으로 그를 안내하게 된 것이다. 즉시 유년기는 그의 기억보다 더욱 아름다운 시절로 나타난다. (…) 그러면서 그는 이 기억들이 지닌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소설 속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환기시키는 기억들로서,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은 프루스트의 감수성과 감각적 직접성을 매우 비슷하게 재현한, 확장되었으면서도 절제된 하나의 온전한 프루스트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런 흐릿한 기억 한 조각을 주워담아 선명한 지난 날의 추억을 떠올려지게 되는 과정을 표현한 알랭. 그는 마치 그의 눈에 비쳐지는 모든 것에 거미줄을 쳐놓고 일상의 아주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케취해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 같다.

프루스트적 순간이란 표현에 미소가 지어진다. 참으로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낸 작가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가 아닌, 그를 보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P195 어떤 순간에는 삶이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도 삶이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삶의 흔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에 대해 아무것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매우 다른 이미지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 때문에 우리는 삶을 멸시하는 것이다.

 

P196 이 빈약한 이미지들은 당신의 장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따라서 이후 그것의 현실적 모습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사실 프루스트는 자발적이고 지적인 노력을 통해 기억을 불러일으키려고 할 때보다 마들렌, 오랫동안 잊었단 냄새, 또는 낡은 장갑 같은 것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뙬 때, 과정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들이 더 잘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196 자발적인 기억, 지성과 눈으로 하는 기억은 오직 나쁜 화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봄이 살아 있는 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와 닮지 않은, 부정확한 과거의 그림만을 우리에게 줄 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도취시켰던, 오랫동안 잊었던 냄새를 맡게 되지 않고서는, 또는 비슷하게,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물을 터뜨리게 하는 낡은 장갑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고서는..

 

>> 왠지.. 그냥 슬퍼졌다...

 

 

 


 

P197 프루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훞륭한 봄의 그림이란 어떤 것일지 알게 되었다. 아마 그는, 비자발적으로 생겨난 기억이 과거의 진정한 모습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봄의 진정한 모습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

나쁜 화가들도 훌륭한 데생 화가로서 그림을 잘 그리고, 싹트는 이파리를 멋지게 그리며, 뿌리를 충실히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봄의 특별한 매력이 숨어 이쓴ㄴ, 손으로 붙잡기 힘든 봄의 진정한 요소들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예들 들면, 그들은 꽃핀 나무의 가장자리에 있는 분홍빛의 경계선, 들판에 펼쳐진 빛 속의 혼란과 햇볕, 개 짖는 소리의 비틀림, 또는 시골길 위에 핀 꽃들의 연약하고 일시적인 모습 같은 것을 그리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 이러한 것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세부적인 작은 것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봄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열정의 유일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 사실 내가 가장 무지한 분야중의 하나는 바로 그림이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리 깊은 관심이 있지도 않다. 내가 음악에 미치는 것 같은 열정이 그림에는 없다. 해서 음악을 찾느라 밤은 새는 경우는 있어도, 그림을 보느라 밤을 새는 경우는 결코 없다.

사실 궁금했다. 좋은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사실 난 잘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알랭의 설명으로 그림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훌륭한 그림과 그냥 그린 그림 사이의 차이를..

 

 

 


 

P198 이와 비슷하게, 비자발적인 기억과 자발적인 기억의 차이는 극히 미세하지만 결정적이다. 추억 속의 차와 마들렌을 맛보기 전에도 화자에게 유년의 기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때 프랑스의 어디로 휴가를 갔는지, 그 강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느 친척의 집에 머물렀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억들엔 훌륭한 화가의 필치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그것들은 오후의 콩브레 중앙광장에 떨어지는 빛에 대한 감각, 레오니 아줌마의 침실 냄새, 비본 강둑의 축축한 공기, 점심을 알리는 정원의 종소리와 신선한 아스파라거스의 향이다. 이러한 세부적인 것들은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것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음미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P199 프루스트의 에세이 속의 청년은 자신의 세계와는 닮지 않은 세계를 그린 베로네제, 모네, 반다이크만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부엌에도 흥미로운 것이 있다고 깨닫는 데 절실히 필요했던 사르댕이 그의 미술사 지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족했던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눈 뜨게 해주는 위대한 화가의 노고가 얼마나 크든, 여러 도움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우리를 둘러싸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사악한 의도를 지닌 것도 아니고 보통은 위대한 예술적 기교로 치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과 아름다움의 영역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암시한다.

 

P202 이 실망감은, 잘못된 기대를 하고 집을 떠날 위험성과 더불어, 우리가 주위를 감상할 때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울부짖는 바닷새와 절벽의 그림은 신비로운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휴가 목적지의 실태와 600년이나 차이가 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P202 비록 화자가 처해 있는 환경과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적 관념 사이에 특별히 극심한 괴리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불일치는 현대적 삶의 한 특징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세계는 기술과 건축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아직 적절한 이미지로 변환되지 못한 풍경과 사물들로 가득 찰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제는 잃어버린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다.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였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일찍이 풍부하게 그렸던 것이므로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반면, 고유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이미지들이 아직 없는 현대적 삶에 대해서는 혐오하게 될 위험이 있다.

 

P205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낡았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사치스럽다.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세계를 똑바로 평가하라고 촉구하면서 수수한 광경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해 계속 환기시킨다. 샤르댕은 소금 그릇과 단지의 아름다움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마들렌은 평범한 부르주아 유년기의 기억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화자를 기쁘게 하며, 엘스티르는 무명옷이나 항구보다 더 웅장한 것은 그리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그러한 수수함은 아름다움에 특유한 것이다.

 

 

 


 

P206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실로 지나치게 낭만적인 상상력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 위선이 그녀의 입을 막지 않는다면 그녀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말할 것이다. “뭐지요 램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가 저게 다인가요?”

 

>> 하하하하하~ ^^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보다 순진하고 순수해서 왜려 사랑스런 느낌마저 든다. 하하하하~ ^^

 

 

 


 

P212 교양과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단순한 경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을 겉으로 보이는 범주에 기초하여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P213 누군가가 지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지만, 일단 그가 지적인 사람의 통념적 이미지에 부합함을 복 그가 받은 정규 교육, 사실에 대한 지식, 그리고 대학 학위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지적인 사람이라고 재빨리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 맞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리고 챙피하지만, 나 역시도 때때로 그런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P216 교훈: 직함이 별로 근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철자법을 틀리거나 제정기 프랑스의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 있어도 고치려고 하지 말 것.

 

>> 하하하하~^^ 알랭 드 보통의 윗트 가득한 결론~ ^^ ~!! 알았슴돠~!!

 

 

 


 

P218 Q: 그는 사랑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는가?

A: 그렇지 않다. 그러나 특별히 사랑만 영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항상 주변에 있는 어떤 것 또는 누군가와 서로 이해해주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 공감한다. ‘영원이라는 것은 어쩜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P224 무언가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물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것을 결핍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감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고, 우리가 그것을 결핍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교훈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마도 그래서 젊었을 때보다 나이를 들은 다음 다가온 기회나 배움에 더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 날 당연한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그래서 우리가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흘러보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기에, 새롭게 다가온 기회는 단순한 기회가 아니라 정말 소중한 기회이고, 그렇게 내게 다가온 삶은 그저 일상의 연장선이 아니라 소중한 의미를 지닌 새로운 삶으로 재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지난 날 겪은 이런 상실감과 허무감은 우리가 이렇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탈당하기 전엔 그 소중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프루스트의 말이 참 공감이 갔다.

 

 

 


 

P225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일지라도, 상대편이 그 매력에 전심으로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저녁식사를 퇴짜 놓는 것은 그러한 인센티브의 가장 완벽한 형태로서, 그것은 바다 위에서 40일을 지내게 하는 것과 맞먹는 것이다.

 

>> 하하하~ 넘 웃겼다~ 프루스트의 비교가 너무나도 재밌었다. 저녁식사 퇴짜를 놓는 것은 바다 위에서 40일을 지내게 하는 것과 맞먹는다는 프루스트의 비교가 너무나도 재밌었다.

 

 

 


 

P226 그녀의 욕망이 충족되는 시간은 양재사의 재봉질 속도에 달려 있을만큼 빠르다.

 

>> 하하하하~ 어떻게 이런 표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걸까..?? ^^

 

 

 


 

 

P226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처럼가난은 부유함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며, 여성들에게 그들이 형편이 안 되어 살 수 없는 옷들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을 선사한다. 옷들에 대한 욕망은 그 옷들에 대하여 진정하고 상세하고 철저한 지식을 갖게 해 준다.

 

>> 그럴까..? 여기선 조금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물론 가난이 더 인센티브를 안겨주고 더 열정을 갖게 해준다는 부분에선 절대 공감이다. 왜냐면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가 풍요롭게 가질 수 있는 상황보다 훨씬 더 간절함으로 다가서게 하는 매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을 예로 들어 더 철저한 지식을 갖게 해준다는 부분에선 조금 고개가 갸우뚱거려 진다. 내가 옷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런건가..? 내 주위를 보아도 옷을 더 잘 살수 있고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거나 여유를 가진 분들이 옷에 대한 지식이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깊은 지식을 갖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쩜 이건 내가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내가 속해 있고 내 취향을 기반으로 극히 일부분을 보고 느낀 관점에서 오는 주장일 수도 있겠다.

 

 

 


 

P226 프루스트는 알베르틴을, 어떤 특정한 그림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키운 후에 드레스덴을 방문하는 한 학생에 비유한다. 반면에 공작부인은 어떠한 소망이나 지식도 없이 여행하고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당혹과 지루함과 피로감밖에 경험하지 않는 부유한 여행객과 같다.

 

 

 


 

P227 원할 때 바로 드레스덴에 갈 수 있거나 카탈로그를 보고 나서 바로 옷을 살 수 있다는 게 부자의 좋은 점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재산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렇게 빨리 충족시키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들은 드레스덴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그곳으로 가는 기차에 오라 탈 수 있고, 옷을 보자마자 그것을 옷장 속에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덜 혜택받은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느,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이러한 시간적 간격은 겉으로는 못마땅한 일이지만, 셀 수 없이 막대한 이득을 준다. 사람들이 드레스덴의 그림들, 모자들, 실내복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시간이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알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 ~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의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는지 알겠다. 나는 단순히 철저한 지식이란 표현에 관점을 맞춰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던 건데, 무엇을 뜻한 건지 이제 이해가 간다. 깊이 공감한다.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경험할 기회가 없을 때 우리는 그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종종 (아니 대부분) 놓치곤 만다. 그래서 그 기쁨은 순간의 쾌락으로 전락하게 되고,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쾌락은 습관적인 유혹으로 바뀌면서 더더욱 그 가치를 상실하게 하고 마는 것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처럼, 순간의 기쁨을 주었던 장난감은 곧 아이의 관심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P227 그는 혼전 성관계에 반대했는가?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랑하기 전의 성관계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같이 자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것은 프루스트가 얼마나 사랑이란 감정을 소중하게 여겼는지가 느껴진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 때문에 우리에겐 살짝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만 (물론 한국도 요즘은 많이 변한 것 같다. 우리 때와는 다르다) 사랑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리 세월이 변한다해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며,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다. 또한 평생의 배우자를 위해 자신을 지키는 것.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고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를지도 모른다. 결국 견해차이긴 하겠지만 사랑은 아름답고 순수한 그 자체이어야 하며, 시대가 변해도 사랑이란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감정 자체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P229 만약 창녀들이…… 우리를 거의 매혹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이 다른 여자들보다 덜 아름다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준비상태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이미 그들이 정확히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P238 프루스트와 러스킨의 만남은 독서가 주는 이익을 보여주었다. “내 눈앞에서 우주는 갑자기 무한한 가치를 얻게 되었다고 프루스트는 이후에 설명했다. 그것은 러스킨의 눈으로 볼 때 우주가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받은 인상을 말로 바꾸는 데 러스킨이 천재였기 때문이다. 러스킨은, 프루스트도 느꼈을 수 있지만 스스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표현했다. 그는 자신이 기껏해야 반쯤 의식했을 경험들이 러스킨의 언어 속에서 고양되고 아름답게 조합되는 것을 발견했다.

 

>> 내가 알랭 드 보통이나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바로 그 느낌이다. (물론 그 외의 많은 작가들의 표현이 그렇다.) 나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 당신들이 받은 자연과 사물과 삶에 대한 인상들이 말로 어떻게 그렇게 표현되어 나오는지.. 읽을 때마다 더욱 분명하게 다가오는 나의 표현력의 한계에 갑갑해짐을 느끼곤 한다.

 

 

 


 

P243 평범한 사람들은, 훌륭한 책이 우리를 인도하돍 두면 우리의 판단능력에서 독립성이 일부 박탈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러스킨이 무엇을 느끼든 당신한테 무슨 상관인가? 스로 느껴라.” 이러한 견해느, 정신적인 수련을 인정하는, 그리고 그에 의해 이해능력과 정서적 능력이 무한하게 향상되며 비판적 감수성은 결코 마비되지 않는다고 느끼느 사람들이라면 받아들이지 않는 심리적 오류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재창조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이 심오한 노력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가의 생각과 함께하는 우리의 생각 그 자체이다.

 

P244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대가가 느꼈던 것을 자신 속에 다시 그려 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때문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 설사 우리를 돕는 것이 다른 작가의 생각일지라도,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가이다, 따라서 학자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연구하는 작가들이 그들의 책 속에 우리 자신의 관심사를 충분히 담고 있다고, 그리고 번역이나 주석같이 그것들을 이해하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정신적으로 주요한 부분을 이해하고 계발할 수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P246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엻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P246 우리 속 깊은 곳에 있지만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집의 문을 마법의 열쇠로 열어주는 한, 우리의 삶에서 독서의 역할은 유익한 것이다. 반면에 독서가 정신에 자신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해진다. 그러면 진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사고의 본질적인 진보 및 우리의 진실한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준비된 꿀처럼 책갈피 사이에 놓여 있고, 도서관의 책장에서 꺼내서 보는 수고만 하면 되며, 몸과 마음이 완벽히 평온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을 보면 되는,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P252 프루스트 읽기는 버지니아 울크를 거의 침묵시킬 뻔했다. 그녀느 그이 소ㅓㄹ을 사랑했지만, 너무 많이 사랑했던 것이다. 그 책에는 잘못된 것이 충분히 많지 않았다. 이전에 쓰인 책들 중에서 완벽히 만족할 수 있는 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작가가 된다는 발터 벤야민의 설명을 따른,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버지니아에게 적어도 한동안 어려웠던 일은 그녀 자신이 그런 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너무나도 놀라웠다. 프루스트를 읽음으로서 그 재능있고 매력적인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침묵할 뻔 헀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순간 오한이 느껴졌다. 버지니아가 침묵했음 우짤 뻔 했나 싶은..

 

 

 


 

P254 그녀는 그 소설을 실과 풀로 묶여 있는 수박 장의 종이뭉치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늪인 것처럼 지칭했다.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면서 물가에서 떨고 있어요. 내가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아마 다시는 위로 올라올 수 없을 거라는 끔찍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도 그녀는 뛰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시작되었다. 그녀는 로저 프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루스트는 내 자신의 표현 욕구를 너무 자극해서, 문장 하나도 쉽게 쓸 수 없어요. ‘, 내가 그렇게 쓸 수 있다면하고 나는 외치죠. 그렇게 쓸 수 있다고 느끼고 펜을 잡게 되지만 나는 그렇게 쓸 수 없어요.”

 

>> 버지니아가 프루스트로 인해 이렇듯 절망감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의 책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너무나도 놀라웠다. 그렇게도 프루스트는 완벽했었나.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더욱 읽고 싶어진다. 프루스트의 동생은 다리나 뿌러져서 병원에 입원이나 해야 어쩔 수 없이 들려지는 책이지만, 그나마도 그 길이에 경악하게 된다고 했던, 어느 아름다운 미국 독자는 3년을 이 책 속에 빠져 있었어도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며 편지까지 보냈던 이 책이 버지니아를 그렇게 절망 속에 빠지게 했다는 사실. 그녀의 깊은 이해력도 놀라웠고, 바로 그 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버지니아를 그렇게 절망 속으로 빠지게 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P254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 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쉴 수 밖에 없군요.”

 

>> 이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버지니아의 고통에 젖은 슬픔이 마치 내 것인 양 그렇게 나를 눈물 흘리게 했던 이 구절. 이 느낌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그렇게도 선명하게 내 가슴 안에 찍혀버린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작가도 이런 느낌 속에 절망하는데, 나야 오죽할까.. 감히 그 옆에 나의 느낌을 싣는 것 조차 조심스럽기만 하다..

버지니아를 떠올리면 실제 그녀 모습보다 니콜 키드맨이 먼저 떠오른다. 얼마나 그 역을 잘 소화시켰는지. 니콜 키드맨이 아니면 버지니아 역을 제대로 해낼 수 없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P255 이러한 한숨에도 불구하고 울프는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쓸 것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쓴 후에 그녀는 상당히 괜찮은 뭔가를 써냈다는 생각에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졌다. “이번에는 내가 뭔가 성취한 게 아닐까?”라고 그녀는 일기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지금 흠뻑 빠져 있느 프루스트와 비교하면 어떻든 아무것도 아니다. 프루스트의 정수는 최고의 감수성과 최고의 집중력을 결합시켰다는 데 있다. 그는 나비의 그림자의 마지막 곁까지도 추적한다. 그는 현만큼이나 질기고 나비의 피부만큼이나 섬세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나에게 영햐을 줄 뿐 아니라 내 자신이 쓴 모든 문장들에 내가 화를 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P256저녁식사 후에 프루스트를 들고 읽다가 내려놓았다. 최악의 순간이다. 자살충동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는 듯하다. 모든 것이 진부하고 가치 없어 보인다.”

 

>> 그 예민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버지니아 울프에게 프루스트는 얼마나 괴로운 고문이었을까 싶다. 순간 혹시 그녀의 자살 그 깊은 부분엔 프루스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게 된다. 괜히 슬퍼진다. 그녀가 느꼈을 자괴감, 자신은 도저히 쓸 수 없을 것에 대한 무기력감. 좌절감.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공간을 스스로 인정할때까지 겪어내야 했던 고통이 너무나도 미어지는 아픔으로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P262 그림의 미는 그 안에 그려진 것들에 달려 있지 않다.

 

P267 프루스트가 그곳을 바라본 태도보다 그가 성장한 곳에 특권을 부여하기 떄문에, 우리의 순례는 우상숭배적이 된다. 이것은 뚱뚱한 미쉐린 광고 캐릭터가 조장하는 착각이다. 왜냐하면 관광의 가치는 대상 자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질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리고 프루스트가 성장한 도시를 본질적으로 별 3개로 하거나, 프루스트가 한번도 자신의 르노자동차에 주유한 적이 없으며 푸르빌에 가까운 엘프 주유소를 본질적으로 별 0개로 만드는 것은 없음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268 우리는 밀레가 …… <>을 통해 보여준 들판을 가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클로드 모네가 우리를 센 강의 양안에 위치한 지베르니로, 아침 안개 속에서 분별할 수 없는 그 강의 구비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밀레나 모네가 그 근처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머물게 되고 다른 것보다 그 길, 그 정원, 그 들판, 그 강의 굽이를 그리게 된 것은 가족이나 지인의 우연히 거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 속에 천재가 포착할 수 있었던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고유하고 독창적으로, 그들이 그렸을 수도 있는 모든 풍경의 유순하고 무관심한 표면 윌르 방황할 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방문해야 할 것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니다. 프루스트에 대한 참된 경의란 그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을 통해서 그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엄청난 슬픔에 빠질 수 있다. 어떤 장소가 흥미로운지 아닌지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발견했던 바로 그 장소나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느낄 때, 수천 개의 다른 풍경과 경험의 영역은 흥미롭게 될 가능성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모네는 지구의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며, 프루스트의 소설은 그것이 아무리 길지라도 인간 경험의 작은 부분을 구성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선을 끄는 예술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얻는 대신에 그것이 바라보는 대상을 단순히 추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술가들이 다루지 않았던 세계의 부분들을 정당히 평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사람은 프루스트가 전혀 맛을 본 적이 없는 후식, 그가 전혀 묘사한 적이 없는 옷, 그가 다루지 않은 미묘한 사랑, 그가 방문하지 않은 도시들에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예술적 진리와 관심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인식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P270 (독서를) 학문 분과로 만드는 것은 단지 자극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 삶의 문턱 위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정신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정신적 삶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P270 심지어 가장 훌륭한 책들조차도 결국에는 내팽개쳐야만 하게 마련이다.

 

>> 하하하하~ ^^;; 난 절대 못내팽개친다~ 읽은 시간이 미치도록 아깝게 만든 책이 아닌 이상에는 절대 못내팽개친다~ 하하하하~ ^^

 

 

* 작가 알랭 드 보통에 대하여: http://cafe.daum.net/wowproject2/OJ85/3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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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난 축제와 글들과 함께...

수도 없이 여러 버전의 캐논을 올렸더랬다..

연주되는 악기마다.. 연주되는 버전마다.. 그 느낌이 다르고 독특하고..

 

마치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그렇게 새로운 느낌.. 새로운 분위기로 다가오는 아주 신비한 음악.. 캐논...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이 맘에 들어했음 좋겠다..

그들을 위해 특별히 고른 음악..

 

Canon...

오늘은 Celtic Sound로 들어본다..

 

역시.. 소름끼치는 전율...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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