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in De Botton

[독서리뷰 1] 불안- Status Anxiety, 2004

pumpkinn 2011. 5. 11. 10:41

2010년 04월 22일

 

 

이 온화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는 남성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알랭 드 보통은 머리가 길었을 때 보다 살짝 벗겨진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알랭 드 보통에 대하여

 

알랭 드 보통, 이름이 참 독특하여 나의 관심을 끌었던 작가. 그의 사진을 보면서 참 맑은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어떤 그림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불안’이라는 제목을 들여다보게 했을까 궁금했다.

 

알랭 드 보통은 1969년생으로 12 2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계보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95년에 발표한 처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로 유명 작가로 발돋음하게 되며, The Romantic Movement, Kiss & Tell에 이르기까지 발표하는 소설마다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뒤이어 발표된 The Art of Travel을 출간하여 문단으로부터의 찬사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책 표지에 쓰여있는 그의 소개다. ^^

 

나는 이런 그의 보편적인 소개보다는 그의 삶이 알고 싶었다. 그는 어떤 의미를 추구 하며 사는 작가고, 어떤 생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인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며 그에 대한 기사나 글을 찾는 중에 발견한 인터뷰 기사중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평범한 사람의 일상과 감정을 아주 세심하게 포착해서 작품을 써왔는데, 그런 미세한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알랭은 “아마 그건 내가 개인적인 성향의 작가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일기를 쓰는 것의 연장이다. 작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고, 어떤 이들은 극적인 사건을 창조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개인적인 과’다.

 

바로 그의 책에서 느낀 그였다. 그의 그런 순수함이 좋았다. 어떤 교감이 이뤄지는 듯한 느낌. 그는 그냥 그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일기처럼 글을 써 나간다. 구 본형 선생님은 습작하듯 글을 쓰신다고 했다. 이런 순수함이 난 좋다. 그런 개인적인 과가 난 좋은게다.

 

그는 작가로서 아주 재밌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는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의 일주일 간 글을 쓰고, 그의 눈에 비쳐진 공항에서의 경험을 엣세이로 묶어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이름으로 책으로 엮었다. 그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은 그의 일주일의 생활은 우리가 그냥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부분까지도 짚어내며 한 권의 멋진 엣세이집을 탄생 시킨 것. 히드로 공항 소유주의 독특한 제안과 알랭 드 보통의 재밌는 시도가 참 마음에 들기도 하고.

 

‘불안’을 번역한 정영목의 알랭 드 보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그의 말로 알랭 드보통에 대한 이야기를 맺고 싶다.

“그러고 보면 알랭 드 보통의 관심은 언제나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이었다. 사랑 이야기도, 여행 이야기도 늘 일상에서 출발해서 일상으로 돌아오고, 철학이나 문학적인 사유를 할 때도 일상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적 관계가 그의 사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점은 모두 함께 경험하는 일상적 삶, 어찌보면 뻔하고 진부한 그 생활이 그의 사색의 회로를 통과하고 나면 왠지 낯설고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이전에 나온 책들에서 경험했던 바이며, 이 점은 이번 책에서도 변함이 없다. 게다가 이번 주제 역시 우리 모두 한 마디씩은 할 이야기가 있는 ‘사회생활’.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불안이라니 더욱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먼저 읽은 독자로서 옮긴이는 그 기대가 충족되었다고, 때로는 정말 감탄했다고, 그리고 그의 시야가 넓어진 것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쁠 따름이다.

 

 

 

 

 

'불안을 읽고 - 리뷰...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읽기 전부터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었다. 왜냐면 선생님을 비롯하여 와우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연이어져 나왔던 책이었기에, 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사실 ‘불안’이라는 책 보다는 알랭 드 보통이 더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때 앞 표지에 두 개의 침대가 있고, 살짝 머리가 벗겨진 맑고 차분하게 생긴 남자가 그 위로 앉아있는 사진이 참 색다른 느낌이었다. 어쩜 이 사진 속의 주인공이 ‘알랭 드 보통’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는데, 그가 바로 알랭이어서 참 재밌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의 불안에 대한 치밀한 해부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단순히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또는 막연히 느껴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 또는 이루지 못할 꿈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치밀하게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왜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샅샅이 파헤치며 마치 “당신이 느끼는 불안은 바로 이것입니다”하며 손바닥에 얹어 내 눈앞에 보여주는 듯 했다.

 

그는 많은 위인들의 입을 빌려 다양한 예와 함께 우리의 삶 안에서 느끼는 일상 속의 빈곤과 부의 차이을 보여주었고, 사회적 지위의 격차와 부던 빈곤이던 그것을 지지하고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며 흠모하는 수많은 정치가, 소설가, 시인, 철학자, 그리고 그로 인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여성’들에 대해 언급하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모두 사회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던 여성의 지위에 대항해 반항했던 여성들이었다. 암튼. 그는 그 모든 것을 ‘불안’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했고, 그 실체를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택할 때 그것이 가져다 주는 영향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헤미안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책 안에서 보여주는 신화 이야기나 책의 줄거리는 마치 책 안의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 많은 소설가, 시인, 정치가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그때그때 자리에 맞춰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놓았는지 그 현란한 터치에 놀랍기도 했지만, 그의 수 많은 분야를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과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섬세한 글의 텃치는 경이롭기까지 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느낀 것은 바로 ‘상대적 빈곤’이었다. 루소가 말했듯이,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자꾸만 ‘경쟁’이란 모호한 단어 속에 우리를 끼어들게 만들고 비교를 하게 하며, ‘좀 더’ 나은, ‘좀 더’ 좋은, ‘좀 더’ 많은 등등의 more and more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게다.  알랭 드 보통은 여러 작가와 철학자의 표현을 통해 상대적 빈곤으로 인한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가 허무한 것을 쫒게 만들고 허상을 꿈꾸게하며, 내가 가진 것 보다는 가지지 않은 것에 눈을 돌리며 불안을 자초하는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았다.

 

자신만의 꿈과 자유를 누리며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를 삶 속에서 누리겠다고 외치며 부르주아지들을 무조건적으로 반박하던 보헤미안들.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지만 어쩜 그들 역시도 사회적 거울의 기본적인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 같은 이상을 추구하던 공동체가 와해되고, 또한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삶, 낮아지는 자존감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포기하는 죽음까지 택하는 그들이고 보면, 추구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떠나,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하느냐 아니냐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것이다. 가난도 좋고 부도 좋다. 모자람도 좋고 넘침도 좋다.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부르주아지도 좋고 보헤미안도 좋다. 그 모든 것에 균형이 잡힐 때 우리는 ‘불안’이라는 것에서 벗어 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고 나의 사랑하는 딸들의 학비도 대주지 못하고 그들의 꿈을 이루는 뒷배경이 되어주지 못하는 엄마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돈만 쫓아 사느라 노을의 아름다움도 사랑의 달콤함도 고통도 못 느끼는 육체뿐인 동물이고 싶지 않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삶을 꿈꾼다. 그리고 보헤미안적인 자유로운 영혼이고도 싶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환경 속에 보헤미안의 영혼으로 그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영혼에 감동이 이는 울림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면서 때로 살짝 궁핍할 수는 있지만, 인간으로 부여받은 긍지와 품위를 잃고 싶지 않으며, 내게 주어진 삶을 행복한 색채로 그려내고 싶다.

 

불안을 읽다가 초서

 

P9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람들(소크라테스나 예수)은 다르겠지만,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참 자유롭다고 기막힌 착각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들을 보면 의아스러웠더랬다. 내가 그런 행복한 착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나의 삶이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의 모든 관심은 바로 에게 몰입되어 있었기에 주위의 시선을 미처 의식할 여유도 없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착각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나의 교만이었다.

 

삶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가 배워야 할 레슨을 주는 것 같다.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삶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시간이 그렇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듯. Life Lesson은 내가 눈을 감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고, 나는 그 레슨을 때론 즐겁게, 때론 고통 속에 그렇게 배워 나갈 것이다. 나의 자존감. 내가 싫든 좋든 사회 안에서 불안을 느끼거나 만족을 느끼거나 하는 많은 부부은 바로 그 기준이 사회적 거울에 있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을 배웠다. 하지만 나의 앞으로의 배움 과정은 그렇지만그 안에서 나는 내 자신을 잃지 않고 내가 흔들릴때마다 바로 일어서며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며 그 갈등과 혼동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조화와 균형 속에 나만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P21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 농담에 즐거워하면, 우리는 나에게 남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된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면, 나에게 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피하거나 직업을 밝혔을 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 애석하게도 삶의 많은 부분에서 나 역시도 그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우리의 성향이나 기질 또는 잘하는 것 못하는 것 그 모두 남의 기준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그것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이 순간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P22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 정말 그런건 아닐까...?


 

P22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는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 와우~ ^^;; 읽다가 푸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 어떻게 이우리의 심리를 이리도 천연덕스러운 재치로 풀어나갔는지.. 그와 함께 엿보이는 그의 시니컬함..^^ 이래서 선생님과 와우들이 그에게 그리도 빠졌었나.. 싶었다..

 

그의 표현 속에 위로도 됐다.. 나만 그러는거 아니구나..^^;;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는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그러게 그럴 때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어들곤 한다. 하하하하~ ^^


 

P28속물근성 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구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 (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 단어의 출생(?) 환경이 참 재밌다. ^^


 

P45 닉슨 옆에 앉아 있던 흐푸시초프는 격분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아니야! Nyet Nyet!”  그리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지막이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가서 니 할미하고나 붙어먹어라.”

 

>> 세상에~ 얼마나 화가 났으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했을까..?? 읽다가 푸하하~ 터져버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하~ ^^


 

P47 타자기는 1867년에 발명되었다 (타자로 친 첫 원고는 1889년 마크 트웨인의 <<미시시피 강변 생활 Life on the Mississippi>> 이었다.)

 

>> 마크 트웨인의 소설이 타자로 친 첫 원고였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우리가 처음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 겪는 어려움처럼 타자 역시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익숙치 않은 타자로 원고를 내었다니.. 마크 트웨인은 그만큼 시대에 발 맞춰가는 사람이 아녔나 싶다.


 

P56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상대적 빈곤...


 

P58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키 작은 사람이라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 살면, 키 때문에 쓸데없이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가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삶을 누리고 산다해도 그들로 인해 받는 고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고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나은 모습을 보일 때 그때 우리가 치졸하다고 같다 붙이는 여러 감정들이 우리를 장악해 버리는 것이다. 상대적 빈곤도 관계의 거리에 따라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P59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를 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 하하하하~ 넘 재밌다~ ^^ 그의 의견에 공감을 안 하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도 부류의 다름은 있는 것 같다. 가까워도 그의 성공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친구도 있고, 나보다 낫건 못하건 관심도 가지 않는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모두 함께 한 시간 동안 서로에게 느껴진 신뢰나 정직도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이 아닌가 싶다.


 

P59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 절대 공감이다.


 

P64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개인은 사회의 탄생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직 자신의 유이을 위해 이 사회에 합류한 것이고, 보호를 대가로 타고난 권리를 내주기로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십 녀 뒤 존 로크가 <<통치론 Two Treatise of Government>> 에서 되풀이하게 된 지적의 맹아적인 형태였다.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신은 아담에게 이 땅을 다스릴 개인적 지배권을 준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그 권리를 주어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게 했다. 통치자들은 민중의 도구이며 전체의 이익을 추구할 때만 복종을 받을 수 있다. 놀라운 근대적 사고가 탄생한 것이다. 정부는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사람에게 번영과 행복을 누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때에만 정당성을 얻는다는 주장이었다.


 

P68 사회는 불평등했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지는 않았다.”

 

>> 왠지 이 표현이 참 슬프게 들려왔다. 지금은 사회는 평등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영혼은 썩을때로 썩어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 때문이었을까..?


 

P69 거의 모든 서구 사회에서 18세기까지 유지되면서 극히 드문 겨우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이동의 희망을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엄격한 계급체제, 솔즈베리의 존과 존 포티스큐가 찬양했던 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히 정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가장 밑바닥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자유를 주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성취를 비교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자유였다. 덕분에 그들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P70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야만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따. 또 어떤 일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느냐, 무엇을 실패로 간주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다. 하버드의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는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는 것에 자존심을 걸었다. 따라서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심리학을 더 많이 안다면,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는 질투와 수치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는 일을 과제로 삼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향연 Symposium>>의 첫 줄을 가지고 헤매는데 누구는 그것을 전부 번역할 수 있다 해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P71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이룬 것

자존심 = ----------------------

              내세운 것

 

 

P71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ㄷ.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P71 이 방정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높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도 암시한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제임스는 두 번째 방법의 장점을 지적한다.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잇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진다.

 

P80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P81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P82 루소가 원시인과 근대인의 행복 수준을 비교하는 것을 보면 윌리암 제임스가 행복의 수준을 결정할 때 기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떠오른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사는 후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는 우릴 수 있었다.

 

P82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다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다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끈임없는 불안이다.

 

P85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P119 능력중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 여기서의 가난은 단지 경제적인 가난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것이 조금 궁금해졌다.


 

P123 전통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지만, 그 지위를 잃는 것 또한 어려워 행복할 지경이었다.

 

>> 우하하하하~ ^^;; 우짜자고 이런 재밌는 표현을~ 보통의 유머러스한 시니컬함이 난 넘넘 좋다~ ^___^


 

P123 경제의 특성 때문에 지위를 얻으려는 노력은 그 결과가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 미래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동료나 경쟁자 때문에 좌절할 수 있고, 자신에게 선택한 목표를 이를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고, 굽이치는 시장의 파도 속에서 재수 없는 흐름에 말려들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의 실패는 동료의 성공 가능성 때문에 더 심각해 보일 수도 있다.

 

P124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이다.

 

P124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에서 재능은 우리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재능은 한 동안 우리 손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그간의 성공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는 최고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 우리는 가끔씩만 재능을 보여줄 뿐, 평소에는 그런 재능의 소유자답지 못하게 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의 많은 부분은 외적인 힘이 준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변덕스럽게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그 힘에 의해 우리의 인생 경로와 졍제적 능력이 결정되는 셈이다.

 

P127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들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과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P129 근대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란 자신이 가진 자원으로 먹고 살 수 없어 불리한 조건으로 돈을 받고 자기 자신을 고용주에게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P130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꼐 살아야 한다” – 라브뤼예르

 

>> 하하하~ 넘 철학적이고 시니컬하면서도 그 당연한 표현에 웃음이 터졌다. 마치.. ‘적과의 동침같은 분위기.. ^^;;

 


 

P131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다. 주군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그들의 미움을 사도 상관 안 한다. 그저 당신의 주군과 의무를 사랑하며 살 뿐이다. 그래. 그래서 당신이 방한 것이다.” – 라브뤼예르

 

>> 우하하하하하하~ *떼굴떼굴~* 이 참을 수 없는 웃음~ 이 부분을 읽던 장소가 마침 사라이바 서점이라 푸하하 터진 웃음을 진정시키느라 눈물까지 흘렀다. ~ 돌아가시겠다~ 어쩜 그렇게도 재밌게 표현을 했는지~ 거의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외계인분위기였다~ 하하하하하~ ^^;; 라브뤼예르가 심하게 좋아졌다..^^


 

P131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거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벨리

 

>> 역시 마키아벨리 다운 표현이다.. 그는 철저하게 비판적이고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다. 연구대상..


 

P137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 ~?? 난 잘 웃는데~ ?? ^^ 물론 워낙 잘 웃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했지만, 어쩌면 브라질에 오래 산 덕분인지 모르겠다. 여기선 서로 몰라도 눈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누니 말이다.


 

P157 질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맞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주위 사람들이 약하거나 수치스럽다고, 겁쟁이이거나 실패자라고, 바보이거나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의 눈에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자기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좌우되기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이 자리 잡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총을 맞거나 칼에 찔려 죽는 쪽을 택한다.

 

>> 우리는 얼마나 사회적 잣대로 그렇게 휘둘려지는 나약한 인간들인지.. 우리는 자존감과 함께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오로지 그럴 때에만 자기다움으로 자기만의 길을 당당하게 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 터이니..


 

P154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 에픽테토스 <<어록>> -

 

P156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행인이 물었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차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 푸하하하하~ 까르르르륵~ 돌아가시겠다 증말~ ^^;; 소크라테스.. 이런 담대한 여유로움과 지혜를 나도 지니고 싶다. ^^ (깨몽~?? ^^;;)


 

P156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P157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P158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철학자 황제는 그런 주장으로 명예에 기초하여 사람을 평가하던 당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 상아, 작은 꽃 한 송이는 어떤가?” 마르쿠스는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 .. 이 얼마나 존경스럽고 멋진 황제인가..? 나의 가슴을 두근대게 했던 정조가 떠올랐다. ^^;; 암튼, 명상록은 167년에 쓰여졌고, 지금 내가 사는 시대는 2010. 지금은 현대고 그때는 고대임에도 사람사는 세계는 모두 같았음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때 칭찬은 중요했고, 모욕은 기운 빠지게 했으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의 기준에 나의 성품이 가려짐에 사회의 거울 속에 휘둘러지던 것은 매한가지였던게다.

 

에메랄드가 칭찬을 못들었다고 더 나빠지더냐..?? 하하하하~ ^^ 옛날의 철학자들은 이런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표현을 참 애용했던 것 같다.. ^^ 칭찬을 받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하는 아우렐리우스.. 혹시.. 고대 시대의 와우 팀장님..?? 호호~ ^^;;


 

P158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이 무조건 근거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치 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결점이 있는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부모나 연인과는 달리 철학자는 사랑에 계속 기준을 적용한다. 다만 세상이 흔히 적용하는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인 기준이 아닐 뿐이다. 지적인 양심이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더 가혹해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이런 불의가 벌어질 겨우, 우리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후광 없이도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할 수 있다.

 

>> 철학 특강을 듣고 있는 요즘이라 그런지, 귀에 더 쏙쏙 들어온다.


 

P160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렇게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P160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데미아 윤리학 Etica Eudemia>> 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P164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P165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P165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경멸하는 것처럼 그들을 특별한 악의 없이 경멸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염세적 태도의 출발점이며, 철학사에서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주는 예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P166 쇼펨하우어는 이런 식으로 묻는다. “만일 청중이 한두 사람만 빼고는 모두 귀머거리라면 그들의 우렁찬 박수 갈채를 받는다 해서 연주가가 기분이 좋을까..??

 

>> 간결하면서도 정고을 찌르는 기막히면서도 위로가 느껴지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진정 공감하는 이가 없다해서, 함께하는 이가 없다 해서 슬퍼할 일이 뭐이겠는가..?


 

P167 소펜하우어는 선선히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곧이어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의 경우 한 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보면 학교 선생들이 그들을 둘러싼 아이들의 거칠고 시끄러운 놀이에 벼로 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서 벗을 사귀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지 현재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냉소주의자들은 단지 불편할 정도로 기준이 높은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다. 샹포르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혼자만있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과의 즐거운 만남을 싫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때 그때의 나의 감성의 표현이고, 또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따라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지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따름.. 샹포르의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P183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점심 준비로 바쁜 하녀가 보기 드문 감수성과 도덕적 위엄의 소유자인 반면,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은광 소유자 남작의 마음은 시들고 역겨울 수 있다.

 

P187 그녀의 섬세한 영은 여러 사람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그녀의 본성은지상에서 위대한 이름을 가지지 않은 통로들을 통해 발현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끝없이 멀리 퍼져나갔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 마치 이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것은 어디선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이름 모르는 그들의 기도 덕분이라는 지난 날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 인간 사이 관계는 원이 되어 그렇게 돌아가는 건지 모른다.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 아래 우연은 없는 것. 우연히 만났고 우연이 이어졌고, 그렇게 우리는 수 많은 우연속에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 떠오른다. 나에게 다가온 만남을 인식을 하던 못하던 우리 일상 속의 관계가 얼만 중요한지 일깨워 준 아름다운 이야기..


 

P202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이 실패를 바라보는 냉정한 태도,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패배자라는 말은 졌다는 의미와 더불어 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을 권리도 상실했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냉혹한 말이다.

 

P224 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특권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이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추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여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P259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하다.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P267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한다. 정사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P271 존 러스킨은 부에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부에 강박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부는 특별한 종류였다. 그는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 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하게 이라고 불렀다. – 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 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에 기초한 관점을 체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시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 보통 부유하다고 생가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들의 금고 자물쇠만큼이나 부유하지 못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부유할 수가 없다.


 

P273 매슈 아널드는 <<교야과 무질서>>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오늘날 영국인 가운데 열에 아홉은 큰 부가 위대함이나 행복의 증거라고 믿는데, 사람이 뭔가를 이렇게 굳게 믿기도 힘든 일이다.”

 

>> 아널드는 통탄하는데 나는 웃음이 나왔다. ^^;; 그의 절규가 맺힌 시니컬한 표현이 나를 또 그렇게 웃게 만든 것이다.


 

P273 행복은 내적인 영적 활동이며, 그 특징은 친절과 빛과 삶과 공감이 확대되는 것” – 매슈 아널드

 

P278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에서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그것은 신문, 광고, 텔레비전 프로그램, 교과서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P282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나 바람은 전혀 없고 늘 다른 사람의 생각과 바람에 공감하도록 타고난 것 같았다.”


 

P283 울프의 책은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에서 절정을 이른다. 여자에게는 존엄만이 아니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 “1년에 500파운드의 소득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읽어내려 오다가 자기만의 방부분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나도 나만의 방이 필요해.. 라고 속으로 읊조리는 내 자신.. 버지니아 울프를 멋지게 연기한 니콜 키드맨이 떠올랐다. 그녀의 어쩌지 못하는 감성의 폭발.. 그녀의 내면의 화산 같은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결국 선택하고야 말았던 그 길도...


 

P298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는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P299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이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P328 현대 세속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 입장에 따르면 다른 모든 사람처럼끝나고 마는 것보다 더 창피한 운명은 없다. “다른 모든 사람이란 평범하고 순응적인 사람들, 따분한 교외 거주자들을 포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목표는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어떤 방법으로든 튀는것이다.

 


P330 눈을 감고 얼굴 근육을 이완시킨 채 무방비 상태에서 자고 있는 사람은 돌보아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다. 그래서 기차나 비행기에서 우리 옆에 자고 있는 사람을 오래 바라보면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 나고 가끔 그렇게 물끄러미 응시를 할 때가 있다. 버스 안에서든 아니면 여행 가서든..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아기 같은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어도 어떤 뭔지 모를 친근감도 느껴지면서 부끄러움도 느껴진다. 그런 내 모습에 웃음도 나고..  아기일 떄는 정말 꽉 깨물어주고 싶고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인간의 심리란 참으로 묘한 것 같다.

 


 

P330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요구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낯설다는 인상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위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

 

P330 다른 사람들이 이해 불가능하지도 않고 혐오스럽지도 않다는 생각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관련하여 주요한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P351 보헤미안은 전통적으로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중부 유럽 출신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P352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나 의미는 마음의 태도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어떤 장소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는 한국에 있던 브라질에 있던 나의 보헤미안 스타일의 삶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물론 땅에서 낚시를 할 수 없고 바다에서 벼를 추수 할 수 없듯이 특정 부분은 장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정신 세계에서는 결국 그것은 어떤 핑계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P353 스탕달은 이렇게 주장했다. “진짜 부르주아들의 인간과 삶에 대한 대화는 추하고 잡다한 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한동안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 큭큭~ 울화가 치미는 대화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참아내고 있는 스탕달을 떠올리닌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썩어빠진 영혼을 가진 버러지 같은 놈들어~”하고 욕을 해댔을까~ ^^ 재밌는 상상이다..^^


 

P355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P355 많은 보헤미안들이 비현실적인 믿음 때문에 고생을 하거나 심지어 굶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 그들의 추구하는 믿음을 위해 사는 삶 안에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는. 내겐 그것은 멋진 삶이고 의미있는 삶이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채를 띄우며 자신의 세계 안에서 독특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풍기며 그것을 행복 속에 누리는 삶 이길 바랬다. 내가 결혼 전 바라는 삶이었다.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 우리만의 언어 속에 뒤로 넘어가는 깔깔거림, 우리만의 꿈을 가진 맑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과 미치도록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길을 택했고, 다른 삶을 살고 있기에 내가 그런 삶 속에서 행복했을지 어땠을지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아직도 미련으로 남아있고 동경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헤미안적인 삶은 곧 내게 자유를 의미한다. 그렇게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대 자연에 속한 삶.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면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삶.. 자유.. 시간 속에 나를 그렇게 자유롭게 놓아 두고 싶은 것.

 

이렇게 내게 동경으로 남아있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없으리라는 무의식 속의 나를 알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으면 나는 알 수 없을 것. 일단은 떠나보고 싶다. 나를 느끼기 위해서.. 나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P355 자신의 영혼은 부르주아지가 품고 있는 천박한 공리적 관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헤미안들은 경멸하는 직업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 두려워 그런 빈곤에 이르게 되었다.

 

>> 어김없이 떠오르는 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아니하며..’ 참으로 오랜 시간 나를 지배했던 구절이었다. 지란지교에 나오는 그가 바로 나이길 원했고, 그런 삶을 살고 싶었기에 나는 내가 넘어질 때 마다 흐트러질 때 마다 지란지교를 떠올렸더랬다. 하지만 유안진은 보헤미안의 그런 극단적인 삶의 방식을 표현한 것은 아녔다.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삶이지만, 삶을 멀리하는 것이 아닌, 왜려 부족하고 모자라는 삶을 보담아 않으며 따뜻한 사랑으로 나의 삶의 의미를 그 안에서 추구하는 그런 포근한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내가 그 글이 그토록 ....’ 사랑하는 이유이다.

암튼 보헤미안은 이상만 추구하고 현실의 기본적인 것은 외면하다 떄로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그런 빈곤을 택하게 됨이 내겐 안타까움으로 느껴졌다.


 

P359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P363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 헨리 소로우

 

>> 깊은 공감을 한다. 이의를 달 수 없는 맞는 말이다..


 

P363 소로우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거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어작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이 말이 강요된 물질적 상황보다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상황을 표현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가 참 맘에 든다. 어쩔 수 없이 맞게 된 가난한 생활이 아닌 의식을 갖고 선택한 부족한 생활이란 그의 의도가 인식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의 이상을 삶 안에서 직접 실천하며 보여주는 그가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이런 보헤미안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기본 생활도 되지 않아 죽음을 택하는 보헤미안은 내게 무모해 보일 뿐이다. 책임의식이 없는 무절제와 무질서한 삶의 방랑자로 보여질 뿐...

 


 

P363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 어흑~ 소로~ 넘 멋져~ 우짜문 좋아~ ^^;;


 

P364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겨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P367야망은 우리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자리와 며예를 쫓는 탐욕스러운 경주에 질려 우리는 정치 활동의 영역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우리에게는 시인의 상아탑만 남았는데, 우리는 이곳으로 점점 더 높이 올라가 군중으로부터 고립된다. 그 높은 고도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독의 순수한 공기를 숨쉰다. 우리는 전설의 황금 컵으로 망각을 마셨다. 우리는 시와 사랑에 취했다.”

 

>> 18세의 나이에 자살을 한 이류 시인 체터튼..그리고 그보다 재능은 뛰어났지만 궁핍과 광기에 시달려 역시 자살을 택하는 제라르 드 네르빌.. 그들의 삶을 보면서 조금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이해 못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선택이었던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 그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를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삶 속의 궁핍을 그들이 추구하는 의미의 실천적 결과로. 그들의 고통을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누리는 행복으로 대체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런 느낌이 읽는 이들에게 어찌 비쳐질지도 안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신성한 죽음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그 죽음을 내 죽음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나.. 쟌느가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라 임신한 몸으로 뛰어내릴때 그녀의 마음 또한 읽지 않았었나.. 죽을 것처럼 미어지고 감당할 수 없는 마음으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더랬었나...

 

결국 균형이란 생각이 드는게다.. 보헤미안도 좋고 부르주아지도 좋다.. 모두 자신이 삶 속에 추구하는 것이 다를 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 모두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비싼 와인을 들고 근사한 음악을 들으며 영혼이 썩어빠진 이야기를 하는 부르주아지나.. 자신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만 결국 궁핍에 인간의 긍지마저 잃어버린 광기로 자살을 하는 보헤미안이나 뭐가 다를 바 있느냐는 것..

 

나는 부르주아적인 삶도 꿈꾼다. 그리고 보헤미안적인 삶도 꿈꾼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환경 속에 보헤미안의 영혼으로 그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난 내게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삶을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삶을 보내고 싶지 않다. 내게 주어진 삶 속에 내가 추구하는 의미를 가득 채우며 그 안에서 행복하다고 느끼고 싶다. 지난 날 사회적인 여건 속에 그렇지 못한 이들이 많음을 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다르다. 지금 내가 누리고 못 누리고는 온전히 나의 몫몫인 것이 사회에 탓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임에 감사하다. 내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밑바닥의 삶 속에 있으면 아무리 사회가 바뀌었다 해도 이렇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보헤미안이었던 두 시인의 죽음이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을 안겨 준다.


 

P371 보헤미안 시인은 기독교의 순례자처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 있지만,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시 자체가 무시당하는 자의 우월성의 증거가 된다. 어떤 사람이 이해 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P372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니>>의 서문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P373 위대하고 독창적인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 그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과 동의어였다.


 

P380 많은 보헤이만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 보헤미안들이 부르주아지들을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과연 정말 순수한 이상의 실현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이 나올 때는 때때로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사회적 풍요에 대한 질투나 시기 또는 그들 안에 잠재하고 있는 어떤 욕망들을 부르주아지들 안에서 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순수한 의미의 보헤미안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헨리 소로처럼 자신의 이상과 철학을 삶 안에서 실천하고 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보헤미안이 있는가 하면, 브루조아지들을 괴롭히는 것만 생각하다가 기본적인 생활도 되지 않아 결국엔 그들의 혐오하는 이들에게 돈을 꿔야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내가 보기에 파괴적인보헤미안도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내 안에 극단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는 표현이다.) 어떤 거룩한 이상을 추구하던, 어떤 훌륭한 꿈을 가졌던 균형을 잃고 극단으로 치닫을 때는 항상 삶의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


 

P384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떄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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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불안..

이 진지하면서도 재밌고 윗트가 넘치는 책을...

정말 불안스럽게 오래 읽었다...

 

그것은 인생수업처럼...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덮어야 하는 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의 읽는 태도가 무척 불량스럽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나가야 할 일도 자주 생기고...

그만큼 책 읽을 시간은 줄어들기도 했지만...

고백컨데...

사실...내가 불성실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드디어 오늘 리뷰를 올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작정을 하고 노트북을 키고 앉았더랬다..

 

종일 컴 앞에 앉아...

작가 조사를 하면서...

리뷰를 쓰면서...

초서를 하는 동안 무척 행복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느낌...

와우를 하는동안 너무나도 사랑했던 이 느낌... 

앞으로 좀 더 자주 느끼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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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rt asks pleasure first...^^

제목이 감성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무척 마음에 든다...^^

 

왠지...제목도 음악도...

알랭 드 보통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골라봤다...

 

 

Michael Nyman  -  The heart asks pleasure fi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