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축제 24] 스캇 팩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고...

pumpkinn 2009. 6. 2. 02:07

 

 

스캇 팩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인터넷 서점에 올려져있는 정보가 다였고, 심지어 그의 싸이트에도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얻을수 있기보다는 어느 싸이트에서나 얻을 수 있는그의 공적인 업적이나 그가 쓴 책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스캇 펙은 1936년 5월 22일 뉴욕 시티에서 태어났다. 두 형제중 막내 였으며 그는 1959년 릴리 호와 결혼하여 세자녀를 두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구절은 이게 다였다. 

 

책에서 느끼는 스캇 팩은 그가 사회속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깨인 사람’임이 느껴졌다. 그가 사적인 부부 모임에서 벌였던 함께 자리에 있었던 남성들이 아내의 위치 또는 아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대해 내어놓은 의견에 화가 치밀어 반박하는 모습은 그당시 남성우월주의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스캇 펙은 아내던 누구던 ‘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이란 자기 확대고 성장임을 강조하며 논리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내가 그에게 가장 존경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그의 깊은 학식이나 따뜻하고 자애로운 인품도 물론이지만, 치료대상자에 대한 그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세였다. 

 

의사로서는 드물게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한 그는 
집단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형성을 이론화하는 등.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캐시와 마르시아, 그리고 태오도르의 사례를 특히 잊을 수 없다. 그는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치료에 있어서 그는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어떤 ‘개인적인 가치나 신앙’ 에서 벗어나 온전히 환자의 치료를 위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온전히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있도록 그들의 정신 치료를 도왔다. 그가 의사로서의 깊은 인간애와 진정으로 환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치유가 일어나게 했을 것이다. 많은 우리는 내게 옳거나 좋다고 믿고 있는 것은 마치 누구에게나 그럴거라는 생각아래 내지는 강요를 한다. 만약 스캇 팩이 그런 방법을 썼더라면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스캇 팩은 그렇게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려했고,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려했다. 신뢰할 수 있는,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임을 인식시켜주며 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참여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기다리며 치료해준 자상한 아빠같은 의사선생님이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치료라도 받은 것처럼 쓰는 분위기지만, 책에서 분명히 난 그렇게 느꼈다.)

 

아쉽게도 그는 2005년 9월 25일 지병인 파킨슨 병으로 69세의 아직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신의학게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게 치유가 일어났음을 느낀다. 감사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너무나도 나를 매료시켰다. 

 

그의 주요한 저서로는 위에서 말한 ‘길’ 3부작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 <그리고 저 너머에>, 장편 추리소설 <창가의 침대>와<거짓의 사람들>, <영혼의 부정>등이 있다.

 


 

 

 

그의 이론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나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분명했다. 역설법을 통해 설명해나가는 그의 글은 어떤 주제를 놓고 역으로 파헤쳐나가는 방법은 호기심을 유발하며 훨씬 더 그 흥미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이런줄 알고 고개 끄덕이며 읽다보면 다음 장에서는 그것을 일부분 수용은 하면서도 왜 그것이 아닌지를 반박하고, 또 그 다음장에서는 반박과 수용을 모두 합쳐 ‘합’을 이르게 하는 그의 논리법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너무나 재밌었다. 어디 그뿐인가.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그의 인내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적인 이론에는 신뢰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스캇 팩은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고 풀어간다. 스캇 팩이 좋았던 이유다. 그의 다각도 시선과 이해에 신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한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가치와 문화적 배경을 온전히 떠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인지. 경직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성이 심리 장애를겪게 되는 환자를 치료할 때 그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보여준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태도가 바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문제아 고통스러운 것을 피해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오히려 건전하고 지각 있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만든 환상에만 안주하여 현실을 도피하기도 한다. 카를 융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P21)

 

스캇 팩은 노이로제가 왜 걸리는지, 신경쇠약이 왜 걸리는지에 대한 그의 논리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확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책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으름 때문이라는 것. 아담과 이브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바로 하느님께 질문을 하지 않은 게으름.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용기를 내어 마땅히 물어야 했을 질문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한 것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우리 인류는 원죄를 갖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 결국 ‘게으름'이 바로 우리의 '원죄'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다가 나의 게으름은 내탓이 아니라 아담의 유전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담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더불어 내가 게으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합당한 대상이 생겼음에 뭔지 모를 통쾌함도 느껴졌다.

 

" 다 너때문이잖아~" (아담 할아버지 때문이잖아요...^^;;)

 


 

 

 

보통 우리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어준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자식이 부모인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커가면서 부모들로부터 '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것. 스캇 팩의 말을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찔러주는 스캇 팩.

 

어렸을 때 부모들의 성숙치 못한 행동으로 아이들이 받는 상처와 고통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지에 대해 스캇 팩이 보여준 사례는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신앙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 갖는 느낌은 바로 부모가 아이들에게 보여준 그 모습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역시도 내게는 일깨움이었다.

 

겉으로는 따뜻한 부모지만 아이들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않는 부모. 겉으로는 사랑이 많은 듯 하나 그 안에 들어있는 엄격함. 부모 자신도 감당 안되는 스스로의 성향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깊이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의 정신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며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이어짐을 사례로 보여주었다. 무서웠다. 혹시 내가 그런 엄마가 아닐까. 겉으로는 부드러운데 실질적으론 엄한 엄마, 나 아닐까. 우리 애리와 리예가 어쩜 그런 정신적으로 절름발이 어른으로 크는 것은 아닐지 겁이 덜컥 났다. 일을 핑계로 늘 빈자리가 많은 엄마였다.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할  나는 함께 해주는 엄마였나. 머리 속에서는 나를 위로해줄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바쁘게 돌아갔다. 싸한 통증과 함께.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들 모두 그냥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 없다. 그 모두가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그 무엇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결과적인 행동임을 볼 때, 마치 감정의 팽팽할 실낱 위를 걷는 듯한 두려움마저 들었다.

 

 여러 사례들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나도 보았고, 남편도 보았고, 또한 우리 애리와 리예가 맞게 될지도 모르는 어른이 되었을때의 정신 세계도 보았다. 과연 나는 어떤 엄마로 아이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주는 엄마일지 그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 하느님은 늘 감동을 주시는 하느님이고 따뜻하고 포근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느님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음은 바로 엄마 아빠의 사랑 가득한 지난 순간들이 있었음을 느끼며 뭉클했다. 우리 애리와 리예도 하느님을 떠올릴 때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신 따뜻하게 감싸주고 감동을 주는 하느님으로 느껴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치료자가 객관적인지 그리고 참으로 환자가 의미하는 그대로를 
이해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거짓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흥미가 있고 깊이 관심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 온전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사고의 울타리는 너무나도 두껍기 때문에.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할 때 나는 온전히 순수하게 들어줄 수 없을 것임을 이책을 통해서 깨달았다. 

 

그래서 스캇 팩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잣대로 두지 않았다. 심지어 신에 관한 부분에서도. 캐시와 마르시아, 그리고 테오도르의 사례는 내게 그 내용이상으로 감동였고 놀라움이었다. 온전히 '나'를 분리 시켜 온전히 환자들을 위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임하는 그의 모습.

 

심리학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심리학자가 될 것도 치료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상담자로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겠다. 그냥 내 관심 충족과 내 사고의 영역을 늘리는 정도에서의 공부는 몰라도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내 장래 계획에 포함시키는 것은 위험하고 조심스런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그가 경험하고 보여준 여러 사례가 이해하는데 무척 많은 도움을 주었고 재미있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바로 ‘은총’ 편이었다. 그가 은총부분에서 다뤘던 엔트로피와 원죄에 대한 이야기. 그 중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스캇 팩의 게으름에 대한 그의 정의가 새로우면서도 다채롭다.

 

그는 원죄는 게으름이며, 또한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거나 다른 이를 돕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닌 ‘두려움’이라고 해석한 그의 주장은 참으로 이색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게으름과 연결시켜 보여준 두렵게까지 느껴졌던 악의 개념,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과 하느님을 연결시켜 보여준 부분은 특히나 내게 아주 깊이 다가왔다. 때때로 무서움과 두려움마저 느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게으름’에서 시작됨을.

 

읽으면서 즐겁고 재밌었다는 느낌보다는 놀랍고 경이롭다는 느낌이었다. 좀 더 우리의 의식세계를 이해할수 있었고, 부모의 일치되지 않는 행동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알게 된 고마운 책이었다.  

 

칼리 지브란의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로 리뷰를 마친다.

 

칼릴 지브란의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이체)’

그러나 당신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마라.
당신 부부 영혼들의 해변 사이에는 저 움직이는 바다가 오히려 있도록 하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마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각 홀로 있어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게 속으로는 침범하지 마라.
생명의 손길만이 당시의 심장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다가 초서

 

P19 삶은 고해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석가는 사해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고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P20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승패는 그 문제를 얼마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용기와 지혜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없던 용기와 지혜를 만들게도 한다. 여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성장을 자극하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과 도전적인 태도를 격려해야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일부러 문제를 내주고 풀어 보도록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혀 해결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반기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P21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태도가 바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문제아 고통스러운 것을 피해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오히려 건전하고 지각 있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만든 환상에만 안주하여 현실을 도피하기도 한다. 카를 융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고 표현했다.

 

P22 그러나 결국에는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고통보다도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진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P22 어떤 경우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때 생겨나는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문제에 직면암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만성 정신 지환 상태에서 정신적 성장은 정지하게 되며, 이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인간 정신은 시들어 가ㅣ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성취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과 자녀에게는 고통을 겪는 것이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문제에 맞서서 고통을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스스로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성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이란 어떤 것이고, 고통을 이겨 내는 슬기로운 기술이란 어떤 것이며, 고통스러운 문제를 건전하게 겪어 내는 수단이란 어떤 것인가? 이를 ‘배움’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것을 이루어 내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기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 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P25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을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P28 버릇없는 아이들을 보면 가정에서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들은 자라면서 혹독한 처벌을 더 자주 받는다. 이렇게 혹독하게 벌을 주는 훈육 방법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무의미하다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부모 자신이 그들의 자제 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인하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모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P29 어린아이들에게는 부모를 판단할 만한 분별력이 갖추어져 잇지 않기 때문에 어린 눈에 부모란 무조건 하느님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일은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부모가 자제하고, 인내하고, 단정하고, 질서 있는 생활 등을 영워해 나가는 것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다면, 그 아이들은 ‘이것이 사는 방법이구나’하고 가슴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하루하루 참을성 없고 자제력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면, 이 아이들 역시 ‘저런 것이 삶의 길인가 보다’하고 마음속 깊이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 역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 궁극적으로 말하면 사랑이 전부다.

 

P31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보내는 시간,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부모에게 얼마큼 귀중하게 취급 받고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사랑이 없는 어던 부모는 자기들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감추려고 아이들에게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아이들을 소중히 여긴다고 느끼게끔 하지만 애정이 가득 찬 마음으로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지는 않는다. 자녀들은 결코 그런 말들에 속지 않는다. 부모가 사랑한다고 믿기를 원하므로 의식적으로 그 말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부모가 말로만 그러지 진심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혹시 내가 그런 엄마 아닐까? 하고 움찔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우리 집에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참 자연스럽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고 울 애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간을 많이 내주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흠칫했다. 물론 내가 아이들에게 말루만 사랑한다고 그러는 것은 아님을 나도 잘 알고 아이들도 안다 (알겠지..?? -_-;;) 그리고 시간도 안내주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느끼는 것은 어쩜 내가 최선을 다해 좀 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좀 더 성의를 다해 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P32 이와 반대로, 진실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불쾌한 순간들을 겪을 때 부모가 자기들을 잘 돌봐 주지 않는다고 의식적으로 느끼고 불평을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자기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그들 자신의 마음 깊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자신이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P32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느낌은 정신 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다. 이것은 부모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신념은 어렸을 때 얻어져야만 한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해 자기들이 귀중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어 파란곡절을 겪더라도 그러한 정신은 파괴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중하다고 느끼는 그런 감정이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 된다고 했는데,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돌보고 가꾸게 마련이다.

 

>>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빠가 내게 온전히 보여주셨던 ‘신뢰감’은 내가 더욱 내 행동에 책임을 지고 상황에 대처할 때 더 신중한 내가 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게 하셨다. 그렇게 나를 내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던 그 보이지 않는 기준은 바로 나를 믿어주시는 아빠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고, 그것은 내가 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무의식 중에 노력하게 했던 것 같다.


P33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행복한 아이들은 성년기에 들어서도 그들 자신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을 깊이 느끼게 된다. 대개의 아이들은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데 거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이런 공포는 대개 아기가 6개월째 접어들 무렵, 즉 자신이 부모와 분리된 별개의 개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개체로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개체로서의 자신은 무력하고 전적으로 의존적이어서 자기 자신을 생존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지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다. 대개의 부모는 다소 무지하고 냉담할 때가 있는 해도, 본능적으로 아이들이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는 민감하다.

 

>> 그런 것 같다. 애리가 브라질에 온 것은 1살 반. 갑자가 바뀌어버린 환경으로 애리는 온순하고 잘 웃던 성격은 불안에 떨며 자꾸만 우는 아이로 변했더랬다. 사랑으로 품어주시던 보모 아줌마를 떠나 엄격하고 무서웠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잘 적응이 안되었던 것. 엄마가 일을 나갈때면 엄마 다리 붙잡고 떨어지지 않던 애리.. 그러기를 몇 달.. 애리는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고.. 처음엔 유치원에 내가 함께 가서 있다가 오곤 했다. 아이가 버림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때 생각하면 애리에게나 나에게나 쉽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아빠와 먼저 브라질에 오게 된 애리. 엄마와 떨어져 있던 1주일의 시간은 애리에게 너무나도 충격였던 것 같다. 그 어린 애리가 엄마 사진을 보고는 그 사진을 가슴에 안고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더라는 이야기를형님으로부터 들을때면.. 아직도 눈물이 글썽거려진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커서는 엄마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으니.. 반듯하게 자라준 애리와 리예.. 고맙기만 하다..


P35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을 나중에 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길러 주려면, 부모 스스로가 자기 훈련이 잘된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기 존중감, 자기 실존에 대한 안전감을 갖게 하려면, 부모가 단순히 기계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고 변함없는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산물이다. 이런 산물을 부모에게 못 받는 경우에는 다른 데서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것들을 획득하는 과정이란 항상 힘에 부치는 투쟁의 과정이 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평생 걸리기도 하며, 평생 걸려서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P37 우리들 대부분은 다행히도 즐기는 일을 뒤로 지연시킬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길러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마치고 감옥에 간 적 없이 성년기에 들어서긴 했다.

 

>> 하하하하~ ^^ 그의 표현이 넘 재밌어서 초서로 남겼다. ^^ 정말 다행히도 감옥에 간 적 없이 성녀기에 들어선 우리.. 대단히 훌륭한 우리다.. 하하하~ ^^


P39 실제로 나는 기계 수리를 할 만한 지식도 없었고 그걸 배울 시간도 없었다, 사실 나는 내 시간을 기계 만지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투자해 왔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수리공에서 뛰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은 단순히 내 선택의 결과일 뿐, 내가 벌을 받아서라든지, 유전자에 결함이 있어서라든지 또는 처음부터 무능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을 들여서 해 볼 요의만 있으면 무슨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기계 고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수리공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이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인생에서 필요한 지적이며 사회적이고 영적인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P42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직면해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가 되고 만다.

 

P43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이러한 태도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직면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대면하는 것은 즐거운 일들을 나중으로 제쳐 놓는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앞으로 즐거운 일을 즐기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현재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P45 부모의 역할이 어려운 것은, 부모가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어렵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문제가 저절로 없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제가 없어지도록 도와주는 데 힘쓰고 문제를 더 가까이 주시하는 것은 아이들한테 해롭지 않다. 자라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아이들의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하면, 문제는 더욱더 커지고 더 고통스럽게 되어 해결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P46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삶의 무제를 그때그때 해결해 나가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이런 얘기는 말 같지도 않은 뻔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P50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대개의 환자들은 모두가 노이로제(신경증)가 아니면 성격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삶의 문제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 책임을 지려고 하고, 성격 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신경증 환자는 세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격 장애의 사람들은 세상과 대결할 때 세상이 잘못됐다고 치부해 버린다.

 

P51 신경증인 사람들은 “내가 꼭 해야 했는데”,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인데”, “내가 해서는 안 되었는데” 등등의 말을 많이 한다. 이들은 한 개인의 자기 이미지를 열등한 존재로 자각한다. 그래서 자신은 항상 수준 미달이라고 비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격 장애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꼭 이렇게 해야만 해”, “나는 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등등의 말을 자주 한다. 이는 전혀 태권이 없는 존재로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이 본인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P52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 우리 책임 밖의 것인가를 분간하는 문제가 인간 실존의 가장 큰 문제인데, 그것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어디에 둘 것인지 평가하고 또 재평가해야만 한다. 이 평가와 재평가를 제대로 성실하게 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각각의 과정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이켜보고 반성하는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P53 우리가 세상을 직시하고 또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많은 경험과 오랫동안의 성공적인 성숙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54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이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부모가 예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시간을 내 귀찮더라도 아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아이들의 성장을 북돋워 주기 위해 부모로서 적절한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P54 신경증 환자는 스스로 솔선해서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므로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신경증적 갈등이 별로 심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책임감에 심하게 짓눌려 있지 않아 부모로서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질 만한 여력이 남아있어야 한다. 한편 성격 장애인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식을 비참하게 만드는 부모가 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을 잔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P54 “신경증 환자는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고, 성격 장애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모두 못살게 군다”

 

>> 하하하하하~ 꺄르르르~!! ^^;; 읽다가 웃음이 터졌다~ ^^ 그렇구나.. 이 극단적인 비교~ 넘 웃겼다~ ^^;; 갑자기 난 신경증 환자일까, 아니면 성격 장애자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


P56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P60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받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P61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할 때, 그 핵심을 다른 어떤 개인이나 조직 등에 떠넘긴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나치즘과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P61 부모가 억압적인 태도로 아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자발성과 선택 능력을 제대로 기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느 선택의 기회가 제한적이지만 건강한 성인에게는 무한대로 주어지기 때문에 선배 능력의 미숙은 큰 문제가 된다.

 

P62 대다수의 환자에게 존재하는 ‘무기력함’은 자유에 대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이나 문제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사실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치유되고 건강해지려면, 조만간 성인의 생활 전체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될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자신들을 희생자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P64 진실이란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거짓은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의 현실을 보다 명확히 볼수록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다 나은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세상의 현실을 보는 눈이 불투명할수록 – 우리의 마음이 허위, 착각, 환상 등에 의해 혼란스러워질수록 – 바른 행동을 하기 위한 현명한 결정을 하게 될 가능성은 점점 적어진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지도와 같아서 그걸 지표로 삶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게 된다. 만일 지도가 참되고 정확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어떤 곳에 가야 할 때는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도가 거짓이고 부정확하다면, 길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P65 지도 제작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데 잇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데 있다. 현실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 보다 극적인 것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도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P67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구태의연한 세계관을 먼저 개편하거나 교정하기보다는 그 낡은 견해를 끝까지 지키는 데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 븟고 있는 것이다.

 

P68 현실을 보는 낡은 견해에 고집스러운 집착을 보이는 것은 더 심각한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된다. () 전이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세계관이 어린 시절의 환경에는 매우 적합하나 (정말 생명을 구할 정도의) 변화된 어른의 환경에는 적절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것을 그대로 옮겨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P73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는 피하게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지도를 개편하려면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재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신 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P79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로 이는 계속적이고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게된다. 따라서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세상을 잘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살펴보고 있는 자신을 살펴야만 한다.

 

P76 세상을 외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내적으로 성찰하는 것에 비해 고통이 적다. 자기를 성찰하는 생활이란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피해 가려고 한다. 그러나 진실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그 고통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점점 덜 고통스럽게 되고) 점점 더 자기 성찰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진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이란 자진해서 다가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우리가 가진 현실에 대한 지도가 정말 유효한지 확인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의 비판과 도전을 받게끔 자신의 지도를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꽉 막힌 세계 안에서 살게 된다. 시인 실비아 플러스의 비유를 사용해 보면, 전공의 병안에서와 같이 우리는 자신의 악취나는 공기를 되풀이하여 호흡하면서 점점 더 깊은 자아 도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가진 현실에 대한 지도를 수정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때문에 우리는 지도의 타당성에 대한 어떠한 도전이라도 대개는 피하고 멀리한다.

 

P78 자기 훈련이란 비본능적인 것을 하도록 자기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 본능의 다른 특징은 – 아마도 이것이 우리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 비본능적인 것을 행하고, 본능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의 본능을 개선하는 능력이다.

 

P81 그러므로 진실에 충실한 생활의 세 번째 의미는 정직한 생활이다. 다시 말해서 진실과 현실을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의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직은 고통 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도전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82 거짓말은 “정당치 못한 지름길로 가서 문제를 빨리 해치우려는”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장애를 우회하려고 할 때 마다 목적에 더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 즉 지름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이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발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실히 따르려고 한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으로 가는 정당한 지름길을 찾는 것도 옳고 적절한 일이다.

 

P82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당하다’라는 말이다. 대체로 인간은 정당하지 못한 지름길을 찾아내려는 경향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지름길을 묵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학위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원본 전체를 읽는 대신에 요약된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정당한 지름길이다. 만일 그 개요가 잘된 것이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서 자료들과 기본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커닝을 하는 것은 정당한 지름길이 아니다. 커닝을 하는 것이 요약된 책을 보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학위를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식은 얻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받는 학위는 거짓이다. 그러한 학위를 토대로 한 인생도 거짓이요, 사기이며 때로는 그 거짓말을 은폐하려고 노심초사해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P83 정신 치료가 부당한 지름길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보통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고 있는 경우가 그러하다. 부모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를 원한다. 마약 사용을 금지시킨다든지, 떼쓰지 않게 한다든지, 공부를 잘할 수 있게 한다든지 등이 그 예이다. 어떤 부모는 온힘을 다해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애쓰다가 지쳐서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정신과 의사가 무슨 마술이라도 써서 –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간과한 체 – 아이를 변화시켜 주기를 바라는 일이 종종 있다.

 

P87 하얀 거짓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는 것을 전제하므로 보통 인간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용납된다. 그렇기는 하나 사회적 인간 관계가 그런 식으로 피상적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P91 진실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어떤 규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가?

첫째: 결코 거짓말하지 말 것이고

둘째: 진실을 숨기는 행위가 거짓말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비중 있는 도덕적 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라면 몰라도 절대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셋째: 진실을 숨기는 것이 개인적인 필요에 토대를 두어서는 안 된다. , 권력, 호감 또는 도전등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넷째: 진실을 숨기는 결정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내려야 된다.

다섯째: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능력은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섯째: 다른 사람의 필요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 사람이 자기의 영적 성장을 위해 진실을 유용하게 쓸 능력이 있느냐이다.

마지막: 다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때 대체로 우리느 과대평가보다는 과소평가하기가 쉽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일처럼 보이고, 완성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또 끝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처럼 보이고,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끝이 없는 자기 훈련이라는 짐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도를 감추면서 정직하거나 개방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폐쇄적으로 살아간다. 사실 덜 개방적이고 폐쇄적인 삶은 정직하고 개방적인 삶보다 쉽다. 그러나 정직하고 진실한 생활에 다른 보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P91 개방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가 계속적으로 도전을 받도록 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 있으므로 친근한 인간 관계를 폐쇄적인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맺을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혼란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 또한 세상을 계몽하고 정화하는 데 봉사했다는 것으로 인해 안정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P92 또한 그들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감추어야 할 부담도 없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걸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예전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새 거짓말을 꾸밀 필요도 없다. 그들은 거짓말을 감추거나 유지하느라고 정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이들은 정직하려는 자기 훈련에 요구되는 에너지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에너지보다 훨씬 저게 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정직하면 할수록 계속 정직하기가 쉽고,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나 개방적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진실하게 살려는 자세가 되어있느냐와 관계된다. 이는 또한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이냐를 나타낸다.

 

P93 훈련을 한다는 것이 유연성과 결단성을 둘 다 요구하는 힘들고 복잡한 과제라는 것에 동감했을 것으로 믿는다. 용감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완전히 정직하려고 애쓰고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적절히 진실을 숨길 수 있는 능력도 가져야만 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동시에 진실로 우리의 책임이 아닌 것은 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규모 있고 효과적이며 현명하게 생활하려면 우리는 하루하루 즐거운 일들을 뒤로 미루고 미래를 내다봐야만 한다. 하지만 기쁘게 살려면 파괴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 현실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훈련 자체가 또한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훈련하는 데 필요한 훈련을 나는 ‘균형잡기’라고 부른다.

 

P94 복잡한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분노를 표현할 줄 아는 능력뿐만 아니라 표출하지 않을 줄 아는 능력도 소유해야 한다. 더 나아가 분노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출 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만 할 것이다. 때로는 심사숙고해서 자기 평가를 한 다음에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더 유익할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표현하는 것이 최선이며 어떤 때는 소리 지르고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분노를 다양한 방법으로, 알맞은 때에 알맞은 스타일로 가장 적절하고 유능하게 표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융통성 있는 대응 체계가 요구된다. 물론 분노를 조정하는 것을 배우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어른이 된 뒤에나 가능하거나 때로는 죽을 때까지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P96 이러한 균형 잡는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다. ()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다.

 

P96 누구든지 삶의 여러 가지 길과 협상할 때에는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이러한 포기 대신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인생이라는 여행을 아예 그만두는 일이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대안을 택해서 그들의 평생의 여행을 – 얼마나 더 가야 할 길을 남겨 둔 채 – 그만두곤 한다. 그들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다.

 

P99 나는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을 포기했다. 나의 승부욕이 이제는 사라졌다. 그것은 죽었고, 죽어야만 했으며, 내가 죽였다, 어렸을 때는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이 나를 잘 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부모로서는 그 승부욕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때가 바뀐 것이다. 시기에 발맞추어 나는 그것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경쟁심에 대한 포기가 내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하찮은 오해에 불과했다.

 

P101 나는 항상 이겨야만 한다는 욕망을 포기하는 동안 우울했었다. 그 이유는 사랑했던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거나 또는 우리와 친근한 것의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 바로 우울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고정은 필수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P102 환자는 단지 우울증의 증세에서 벗어가기만을 원하며, “그래서 일들이 이전처럼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의식 중에는 알고 있다. 정확히 이 무의식은 ‘이전에 있던 것 그대로’ 라는 것은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작용되기 시작하여 우울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P103 인생 여정에 있어서의 전환기들이 왜 이렇게 위기들 – 그것은 문제성이 있고 괴로운 것이다 – 을 만들어 내느냐 하면, 그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지내기 위해 우리는 예전에 중히 여기던 것들과 옛날에 써 오던 방법들, 사물을 보던 방법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P105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끝없는 인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 바로 모든 생의 의미와 더불어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중심적 지혜이다.

 

P106 ‘괄호로 묶기’라고 부르는 균형 잡기 훈련 방법: 괄호로 묶기’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잠깐 포기하고, 그 대신 새로운 자료에 적응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룸으로써 균형 이루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한쪽에 제쳐 놓음으로써 새로운 재료를 자신에게 혼합시켜 집어 넣을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P106 ‘성숙한 꺠달음이란 지난 세월 내가 갖게 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해하고 개선할 때만 가능해진다. 나에게 내재한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낯선 것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것이다. () 이처럼 괄호로 묶어 놓고, 개선하고 침묵케 하는 훈련에는 섬세한 자기 인식과 용기 있는 정직이 요구된다. 이러한 훈련 없이는 현재의 순간도 이미 보았거나 경험된 어떤 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하게 새로운 사물이나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설계가 내 안에 뿌리박게 하기 위하여, 자아의 탈증심화를 겪어야만 한다.

 

P107 ‘괄호로 묶는’ 훈련은 포기와 훈련 일반에 관한 것을 제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자기 훈련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 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죽음의 고통이란 생산의 고통이고, 생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다. 우리가 새롭고 더 좋은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발육시킨다는 것은 옛 생각과 개념, 이론, 이해 등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08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라고 세네카는 2000년 전에 말했다. 또 에리히 프롬은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서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인간은 사랑가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죽음들도,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고통들도 체험할 것이다.

 

P109 정신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사랑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그 능력 때문에 세상은 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 그들 또한 그 부름에 응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잇기 때문에 그렇다.

 

P110 가장 결정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용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P111 균형을 잡는 훈련과 그 근본이 되는 포기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당신은 포기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당신이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당신은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정체감을 포기하기 전에, 어쨌든 먼저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발전의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력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훈련을 하지도 않고 성자가 되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뿐 아니라 바라기까지 한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막으로 은거한다든지 목수 일을 하는 식으로 성자의 겉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방을 통해 그들이 정말로 성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꿰뚫고 나가야만 한다는 괴로운 사실을 모른다.

 

P112 훈련이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 할 수 있다. () , 즐거운 일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충실한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P118 스캇 팩의 사랑에 대한 정의: 사랑은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넉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P118 첫째: 그것은 목적론적인 정의이다. 정신적 성장이 그 목적이다.

 

P119 둘째: 내가 정의한 사랑은 하나의 순환적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셋째: 사랑의 정의는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인간이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므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또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기 훈련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스스로 훈련되어야만 훈련을 시킬 수 있다. 사랑의 본성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나가다 보면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남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해질 것이다.

 

P120 넷째: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또 한게를 뛰어넘으려면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표현되며,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때라야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이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또는 자신을 위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랑은 노력 없이는 안 된다. 사랑은 무척 힘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끝으로: ‘의지’라는 말을 가자ㅣ고 나는 욕망과 행동을 구분해 보려고 한다. 욕망이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지는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P121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의지는 또한 선택을 내포한다. 우리는 꼭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만약에 실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다. 이구절을 읽고.. 가만 생각에 잠겼다.. 깊은 공감이 느껴지는 표현.. 그래..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다.. 그런것 같다.. 아무리 깊은 사랑을 해도 내가 표현하지 않으면 느끼질 못한다. 내가 사랑을 표현하는 만큼 상대방은 느끼고, 상대방이 표현하는 만큼 나는 느낀다. 아이들도 남편도 친구도 존경하는 많은 분들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이 표현되지 않을 때 그 사랑이 아무리 태산처럼 크더라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표현해야하는 거라고 말하는 건가 보다..’ 하고 다시 한번 느낀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은 내 안에 항상 남아있다. “아무리 하늘 같은 사랑이 내안에 있다 하더라도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런 의미 없이 남발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처럼 자꾸 하고 싶고 자꾸 듣고 싶은 말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아름답고 훈훈해지며 따뜻하게 느껴지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좀 더 자주 표현한다면 우리 삶이 좀 더 따뜻해지고 향기로와지지 않을까…


P121 사랑의 본질에 대한 혼돈된 인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준다.

 

P122 사랑에 대한 모든 잘못된 인식 중 가장 강하고 많이 알려진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또는 적어도 사랑의 표시중의 하나라는 신념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으 주관적으로는 참된 사랑의 경험으로서 대단히 강하게 경험되므로, 이런 그릇된 인시은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에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람이 확실히 느끼는 것은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한다’ 또는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히 성적인 것과 관련된 애욕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

둘째 문제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예외 없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P126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도피를 일시저그로 가능하게 해 준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의 본질은 개인의 자아 영역의 일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자신의 자아 영역과 다른 사람의 자아 영역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아 영역을 목표처럼 솓아 붓고, 거기에 따라 고립된 자아 영역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과 더불어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되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상황을 무아지경으로 경험하게 된다.

 

P127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환상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조만간 일상 생활 문제에 대항해서 개체는 그 자신을 재확인할 것이다. () 그래서 둘 다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취미와 편견 그리고 생활 리듬만 고집하려 들고 있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하나씩 하나씩 또는 급작스럽게 자아 영역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들은 사랑엣 빠져나오게 된다. 다시금 그들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두 개체가 된다. 이 정도가 되면 그들은 서로 헤어지거나 참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P128 간략하게 말하자면 한 쌍의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참 사랑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참사랑은 사랑의 느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사랑은 때로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는 관게에서 생기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는데도 우리가 사랑하는 듯이 행동할 때 일어나기도 한다.

 

P129 우리가 그 경험 자체를 히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빠지는 경험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한 개인의 한계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그리고 일시적인 자아 영역의 붕괴다.

 

P132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가 우리에게 실제로 얘기해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젊은이에게는 ‘그에게 알맞은 짝’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화는 단지 남자 한 사람에 여자 한 사람. 여자 한 사람에 남자 한 사람이 짝지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운명적으로 미리 결정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가 하늘이 정해 준 사람을 만날 때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작정해 준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그 짝지어 주는 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서로 원하는 것을 영원히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완전한 합일과 조화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만족하지도 못하거니와 서로 원하는 것을 채워 주지도 못하고 압력이 생겨나며 사랑이라는 마력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그제야 우리는 운명의 별을 잘못 집어서 하나밖에 없는 완전한 짝을 만나지 못했으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한탄하게 된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참되고 ‘진실’된 사랑도 아니었으며, 이 형편을 수습할 만한 아무런 대첵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불행하게 살든지 이혼하는 것이 전부다.

 

>> 하하하하~ 그의 표현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읽다가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하하~ 많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이 부분만 잘라놓고 본다면 선을 보고 결혼 사람보다는 사랑해서 결혼 사람 (연애든 짝사랑이든..) 들에게 그 고통의 늪은 더 깊게 느껴질 것 같다. 자신이 사랑해서 결혼 한 사람에게 ‘내가 별을 잘못 짚었다’라고 느낄 때의 막막함..하지만 결국 그것도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그 과정속에 부부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거기에서 함께 더 성숙한 부부 관게로 발전을 하던지.. 아니면 서로의 길을 각자 찾아 떠나는 선택을 하던지.. 어쨌든 그것은 각 부부마다 다를 것이고, 각 사람의 성향마다 다를 것이고, 각 사람이 결혼에 대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해서 잘 넘겼다’ 고 그 방법이 모든 부부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혼 생활도.. 사랑도..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고 너무나도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논하겠다고 주제로 삼는것 자체가 모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캇 팩이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도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 만큼.. 그리고 환자들과의 치료동안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 만큼 아는 사랑이기 때문이고.. 나역시 내가 경험한 만큼만의 사랑을 알고 있는 것... 결국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주제를 놓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재밌게 느껴진다. 


P136 부부는 자기 자신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서로의 개성과 별개의 개체인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반 위에서만이 성숙한 결혼 생활이 가능하고 또 참사랑도 자랄 수 있다.

 

P137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참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

P137  참사랑의경험도 역시 인간 한계의 확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란 인간의 자아 영역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 경게를 확장하는 것은 자아 영역을 넘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다가가 그 사람의 성숙을 도와 주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사랑할 대상을 찾아야 한다. . 우리는 자아 영역을 훨ㅆ니 능가하는 자신 밖의대상에게 매혹을 느끼고 완전히 몰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위사들은 이러한 과정을 ‘정신 집중 Cahtexis’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 밖에 이는 대상에 집중할 때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그 대상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P138 ‘정원은 그의 외부에 존재하고 이지만, 그의 정신 집중 과정을 통해 그 정원은 내부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가 가진 정원에 대한 지식과 의미는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 그의 자아 정체감, 그의 역사, 그의 지혜를 이루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정원을 참으로 사랑하고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정원을 자신의 내부에 심어 자신과 일치시키고, 이런 과정을 통해 끝내 그의 자아 영역은 확장되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의 사랑, 정신 집중 그리고 자기의 한게 확장은 결국 무엇을 가져다줄까? 그것은 점진적이고도 발전적인 자아의 확장, 외부 세게와 내부 세계의 통합, 이에 따른 자아 영역의 성장과 확장을 연쇄적으로 가져다준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더욱더 많이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확장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자아와 세게의 거리는 좁혀진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황홀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아의 벽이 허물어지면 자아 영역도 부분적으로 붕괴될 수 있으며, 이럴 때 세계와 나의 ‘신비로운 하합’이 이루어질 수도 잆다. 세계와의 결합에서 느껴지는 극도의 황홀감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자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느낌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며 매우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우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또한 이 절정의 느낌은 갑자기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일회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그런 것이다.

 

P141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고 또는 무엇이든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열반, 깨달음, 정신적인 성장 등은 오로지 참사랑을 부단히 실천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P141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다.

 

P142 사랑에 관계된 두 번째의 그릇된 개념은 의존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143 나는 의존성이란, 상대방이 자기를 열심히 돌봐 준다는 확신 없이는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완전하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P149 이러한 역할 바뀌기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서로의 의존성을 줄이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 각자가 서로를 잃게 될 것을 대비해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P151 수동적인 의존은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수동적 의존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마음속의 지워지지 않는 공허감은 그들이 유년기에 필요로 했던 부모의 애정과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결과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유년기를 통해서 비교적 일관성 있게 사랑의 보살핌을 받은 아이는 자신을 사랑스럽고 귀중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내적 안정감을 가지고 성년기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되고 보살핌을 잘 받지 못했거나 또는 그런 것이 주어졌더라도 지속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러한 내적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성년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나는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는 불완전한 느낌과 더불어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P153 의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상대방에게 애착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는 정반대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데서 처음 시작된다.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추구하게 하며 성장하기보다는 어린 아이로의 퇴행을 부추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자유로운 해방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의존성은 관계를 이룩해 주기보다는 파괴한다. 또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기보다는 파멸에 이르는 문으로 밀어 넣는다.

 

P154 의존성의 특징은 정신적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존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영양 섭취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만족과 행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성장과 그에 수반되는 불행과 고독, 그리고 고통은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의존할 상대인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관심이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곁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의존성은 ‘사랑’이라는 말을 잘못 쓰인 여러 행동 유형 중 하나다.

 

P155 사랑의 참된 목적이란 오직 정신적 성정이나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취미는 자기를 성장시키려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때 – 정신적 성장을 목적으로 자신을 길러 나갈 때 – 우리는 자신에게 정신적인 것이 아닌 모든 종류의 것들도 제공해야 한다. 정신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육체 역시 영양 섭취를 해야 한다. 우리는 먹을 것과 살 곳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정신적 발전에 헌신적일지라도 휴식과 운동과 기분 전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자들도 역시 잠을 자야하고 쉬어야 한다. 그러므로 취미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미가 목적 그 자체가 될 때에는 대체물이 된다. 취미 활동은 그것이 자아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인기를 끈다.

 

P126 만약 그들이 자신들을 더 사랑했다면 그렇게 낮은 목적과 조그마한 일에 목표를 두고 열광적으로 집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P156 우리가 ‘사랑’이란 말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해 그 특별한 의미를 잃어버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남용이 크게 개선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나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의 질적인 차이는 무시하고 모두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남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현명함과 우둔함, 선과 악,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정으리르 내리면, 우리는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인간만이 근본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P161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지각 있게 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각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각 있게 칭찬하고, 지각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평안하게 해 주는 것과 더불어 지각 있게 논쟁하고, 투쟁하고, 맞서고, 몰아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도’를 필요로 하는 관게다. 지각 있다는 것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다.

 

P162 이와 같이 분별없이 주기만 하는 파괴적인 양육의 이면에는 많은 동기가 숨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공통적인 근본 원인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주는 자’는 ‘받는 자’의 정신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P164 적당한 때에 주지 않는 것이 적당치 않은 때에 주는 것보다 더 인정을 베푸는 것이라는 점을 배워야 했다. 또 독립성을 길러 주는 것이 돌보는 일보다 더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는 사실도 배워야 했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욕구와 화나는 점 그리고 분노와 기대치를 표현하는 것이 자기를 희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정신 건강에 꼭 필요하며, 사랑에는 감싸 주고 자기 감정을 숨기는 것만큼 노골적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P168 마조히스트는 학대에 대한 자신의 굴종을 사랑으로 본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사랑을 위해서는 부당한 학대가 그들에게 필요하며, 근본적으로는 끊임없이 복수하려고 드는 마음. 즉 증오가 그 사랑의 원동력이다.

마조히즘은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오해, 즉 사랑은 자기 희생이란 잘못된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런 믿음의 힘으로 마조히스트는 학대를 참아내는 것을 자기 희생이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신의 적개심은 무의식 속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이다.


P168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고 할 때에는 우리가 그것을 하기로 선택한 때문이고,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이다. 아이들에게 “너는 내가 너를 위해 해 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틀림없이 심각할 정도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순수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의 기쁨을 알고 있다. 우리가 순수하게 사랑할 때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를 갖는 것은 아이를 갖고 싶기 때문이고,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 동감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샤히르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할때 역시도 그것은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음을..


P169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 보다는 확대히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다. 여기에는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면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이지 않다’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문제가 사랑을 사랑이 아닌 것으로부터 구분해 주지는 않는다. 그 구분은 행동의 목적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목적이 항상 정신적 성장이고, 사랑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P170 나는 사랑이란 하나의 행동이고 하나의 활동이라고 말했다. 사랑에 대한 마지막 그릇된 오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P170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한다. 애착 과정을 통해 하나의 상대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애착을 하게 되면 그 상대를 보통 ‘사랑의 대상’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자신의 일부처럼, 에너지가 몰입되고, 자신과 에너지 몰입 대상 사이에 애착 관게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그러한 관계들을 많이 갖고 있을 수 있으므로 그러한 애착에 대해 애기해 보기로 하자. 또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잃게 되어 그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투여된 에너지를 빼내는 과정을 ‘탈 애착’ 또는 ‘정신 분산’이라고 한다. 사랑이 느김이라고 믿는 오류는 ‘애착’과 ‘사랑’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P172 사랑에 빠져 결혼한 부부는 조만간 그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짝을 찾으려는 인간적인 본능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순수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때 부부는 항상 옆에 있어야만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의 사랑을 시험하며 그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도 알게 된다.

 

P172 진정한 사랑은 애착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 훨씬 재미있고 수월하다.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 이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게 바로 ‘의지’이다.

 

P175 나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P173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지 않으렵니다.’ 그래서 나는 치료에 성공할 것 같은 그 환자를 거절하게 될지도 모른다.

 

P173 사랑의 느낌에는 제한이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할 수 있는 내 능력을 누구에게 집중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그 사람을 향해서 사랑의 의지를 집중시켜야 한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되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다.

 

P174 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보통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자기 기만을 하게 된다. () 참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만을 위하는 자기 위안적인 성질을 갖는다. 자신의 감정 속에서 사랑한다는 느낌의 증거를 찾는 것은 쉽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행동 속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참사랑이란 의지적인 행동이며 그것은 사랑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단순한 애착의 단게를 초우러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랑이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P175 이 장의 서론에서 사랑은 노려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을 확장시킨다고 했다, 쉽게 말해 마음을 넓게 가지고 좀 더 발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공포에 저항하고 게으름이라는 타성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게 된다. 노력’이란 마음을 넓게 가지려고 애쓰고 게으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알지 못하던 마음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공포감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것은 ‘용기’이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일종의 노력이나 용기다. 특히 사랑은 우리 자신의 발전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행해지는 노력과 용기이다. 우리는 정신적 성장을 지향하는 이외에 다른 목적에도 자신의 용기와 노력을 쏟아 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노력과 용기가 있는 모든 일이 반드시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 자신들의 확대를 요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행동을 행하면서 노력과 용기가 가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동이 아니다. 여기에 에외란 없다.

 

P176 “현대의 모든 정신 분석 도구를 다 이용해서 의지를 분석 할 때, 의지가 굳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행한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의지 있는 행동을 하고자 한느 노력은 실제로 관심을 기울이려는 노력이다. 의지적인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긴장은 의식을 명백히 지탱하려는 노력이며, 그것은 또한 집중적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노력이다.

 

P176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막대한 시간을 듣는 데에 보내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낭비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우리는 듣는 방법을 잘 모르기 떄문이다.

 

P177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당면하게 되는 일들이 꼭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잘 듣는 방법을 훈련시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듣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교육하자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일을 잘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도록 하자는 것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그래서 무척 힘든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들을 줄을 모르는 것을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잘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P179 사랑이란 상대적인 관계이므로 받는 사람이 줄 수도 있고 주는 사람 역시 언젠가는 받을 수 있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P186 참으로 들어 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참으로 들어 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내가 놓인 사회적 처지가 어떠한가. 내가 상대방이나 또는 상대가 말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일시적으로 그것들을 포기하거나 제쳐놓는 그런 훈련이다.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그와 같은 체험을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감정 이입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경험을 연장하고 확대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한다. 참으로 들어 주는 것은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을 제쳐 두는 것이므로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나는 것을 느끼면 날하는 사람은 공격의 위험성에서 벗어나 듣는 자에게 더욱더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많은 것을 준다. 이런 것이 일어남으로써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를 더욱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고, 훌륭한 사랑의 이중주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분리하는 것과 완전히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은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것은 사랑을 토대로 해서 서로 상대방을 성당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열심히 들으려 한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대개는 마음 속의 편견이나 아집을 가지고 될 수 있는 대로 이야기를 짧게 줄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애쓰며 듣는 데 불과하다.

참으로 들어주는 일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대개의 부부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가슴을 열고 마주하지 않는다.

 

P187 낭만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많은 부부들은 낭만에 기대고 낭만만 바랄 뿐 진정으로 사랑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힘든 일을 감내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노력한다면 막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ㄱ서이 일상이 되면 배우자는 상대방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P188 누군가 진정으로 자기 말을 들어 주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치료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P190 사랑이란 부지런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음은 곧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같다.

 

P191 사랑을 실천 (자아를 확대, 성장 시키는 것)한다는 것은 타성에 젖어 게을러지는 것을 경헤하고(노력)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용기)을 필요로 한다.

 

P191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다루지만, 그들이 실제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두려움은 불가피한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으로 인한 위협에 그저 저항 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뛰쳐나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행동이다. 어떤 단계의 정신적 성장이드, 사랑이든 항상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래서 모험이다.

 

P193 우리는 지금까지 단순히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애착)이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그 애착을 초월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랑은 시작을 위해서 무엇인가 잡는 것(애착)을 요구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잡으려면 거기에는 항상 잃어버리거나 거부당할 위험도 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랑을 거부하고 떠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 보라.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그것들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든지 믿어 보라. 당신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의존을 해 보라. 그가 당신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애착은 고통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많은 것들을 삶에서 제외시켜야만 할 것이다.

 

P194 충만한 생활은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든지 아니면 삶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 즉 성장과 쇠퇴로 만든 한 벌의 투구와 갑옷이다. 생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변화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P194 죽음이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우리의 왼쪽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것임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간다면, 죽음이란 우리 삶의 진실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두렵기는 하지만 지헤로운 교훈의 샘물이 되어 줄 것이다. 죽음의 교훈을. 즉 우리가 살고 사랑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시간을 최선으로 이용하고 생을 최대로 충만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P195 그러나 우리가 왼쪽 어깨 위에 짊어진 죽음의 실제를 부인하고, 당당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이 주는 지헤로운 교훈을 스스로 버린 결과, 현명한 지식을 가지고 충만한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피해서 떠나가면 또 항상 변화하는 삶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다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삶으로부터도 피해 가게 되는 것이다.

 

P196 모든 삶은 그 자체에 무수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살면 살수록 더욱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일생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위험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성장에 따르는 위험이다. 성장이란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게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그것으 ㄴ한 걸음 살짝 내딛는 것이 아니라 두렵게도 단숨에 도챡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제대로 성장을 실행해 보지도 못하고 만다. 겉으로는 성공한 어른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이 심리적으로는 죽을 때까지아이로 남아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서 자시을 분리하지 못하고 부모가 그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으로부터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P199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P200 성장은 단숨에 도약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은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여러 번의 작은 뛰어넘기가 쌓여서 이루어진다.

 

P201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이러한 거대한 뛰어넘기를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장하지 ㅁ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외양과는 상관없이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그들의 부모의 아이로 남아 물려받은 가치에 따라 살고, 부모의 승낙이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그들의 부모가 오래전에 사망하여 땅에 묻혀 있는 경우에도), 감히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안에 쥐어 보지 못한다.

 

P202 성장하는 것과 사랑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사랑에는 자신의 확장이 포함된다는 것 외에도 새로운 차원에로 자신을 확장해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앞의 사레들에서 보이는 주요 변화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이다.

둘째: 사랑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크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시도할 용기도 선사한다.

 

P203 자기 자신의 심리적 독립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을 선택해 나가는 사람만이 자유로이 정신적인 성장의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있다. 그러면서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P204 아이들이 부모의 기대에 맞게 행동하리라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그들은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파악하여 사랑을 제대로 배풀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인 자유 선택엥 ㅣㅆ는 것이지,. 남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205 크든 작든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모든 진정한 사람의 관계에 기반이 된다. 책임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성공적인 관게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P206 성격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책임감이 약하며, 장애가 심해질수록 책임지는 능력도 상실한다. 책임감에 얽매인다는 사실이 두려워서라기보다 책임감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렇다. 그들의 부모가 어린 시절 그들에게 책임 있는 행동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행동으로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임감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성장한 것이다. 그들에게 책임감은 눈 밖에 있는 하나의 추상적인 것일 뿐,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충분히 인식할 수 없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반대로 신경과민자는 일반적으로 책임감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때로 마비되어있는 사람이다. 보통 그들이 어렸을 때 얻은 경험은, 부모가 그들에게 충분한 책임을 다해 주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부모에 대한 보답으로 그 책임을 다해야만 하도록 길러졌다. 그러나 그 후에 죽음이나 또는 만성적인 배척을 통해 부모의 사랑이 멈추어 아이가 보답할 통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는 새로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한 상처는 그 사람이 더 근본적이고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경우에만 치료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떄문에 책임감이 정신 치료의 관게 형성에서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P210 부모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받은 상처는 몇 마디의 말이나 한두 번의 안전에 대한 재확인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조사되고 치료받아야 한다. 이것을 완치하는 데는 일 년이 걸릴지 그 이상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P219 아이들은 계속해서 자라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그들과 함께 변하고 자라야 할 의무가 있다. ()

변화하는 고통을 이겨 내겠다는 의지가 없고, 성장하는 아이에게서 배울 의사가 없는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노망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와 세상은 그런 부모를 뒤에 남겨 놓을 것이다.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대개읫 람들이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P220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자세이다. 가장 보편적인 예는 사랑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네가 잘못이고, 내가 옳다”라고 말한다.

 

P221 “내가 옳고 당신이 잘못이니 당신이 달라져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상황을 바로 보도록 하려는 태도는 대개 아무런 생각없이 행해진다. 그들은 생각 없이 일마다 간섭을 하면서 즉흥저으로 비판하고 쉽게 비웃는다. 대개 그런 비판은 화가 나거나 몹시 못마땅할 때 충동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와 같은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기보다는 혼돈을 증가시킨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책 없이 비판하고 비웃지 않느다. 때로는 첨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행위가 거만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실을 일깨워 주려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 당시에 문제되고 있는 것에 관한 한 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성과 특징을 알아주고 존중해 준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 너한테 무엇이 좋은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P222 14세기 영국 성자 - “온유한 것은 인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생긴 그대로 진실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으로 온유함에 틀림없다.

 

P222 다른 인간에게 충고하거나 비판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적으로 자기 의심과 자기 모색을 통해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다. 첫째 것은 거만한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는 부모, 부부, 선생 등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이 길은 성공적이지도 못하고 성장보다는 적개심을,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을 일으킨다. 둘째 것은 겸손한 길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은 아니다. 이것은 자아를 순수하게 확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보다 성공적인 길이며 내 경험으로 보아 이 길은 절대로 파괴적이지 않다.

 

P223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실 그대로를 당당하게 부닥쳐야 한다. 생각 없는 비판이나 이러한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행동도 사랑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225 아이를 위해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가치관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칭찬을 한다든지, 관심을 기울인다든지, 얘기를 한다든지 또는 사실을 바로 보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 그 아이가 더 호의적으로 반응할 것 같다든지 등등을 그 아이의 성격과 능력에 맞추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사태를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사실에 직면시키게 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넣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말을 잘 듣게 하고 싶으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 ㄱ서처럼 우리가 사랑을 주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전달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P226 진정한 사랑을 해내자면 완전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없이 거만한 태도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영향력이란 신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P226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일한다. 또 행동하는 것이 신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사랑은 우리의 역할이 하느님과 같은 신의 역할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 역할에 따른 책임감을 가지고 부주의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실수 없이 신의 뜻이 지상에 충만하게금 행동한다.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역설에 이르렀다. , 인간이 신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랑을 펼쳐야 한다.

 

P228 정열이란 거대한 심층적 느낌이지 제어되지 않은 감정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격언에 “얕은 시냇물은 시끄럽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잘 조절하고 평정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정열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사람이 감정의 노에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또한 자기 절제가 너무 철저해 감정을 짓누르는 것도 안 된다. 나는 환자에게 감정은 그들의 노에이며, 자기 절제 훈련은 오예를 소유하는 기술과 같다고 말한다.

 

P228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감정은 우리가 삶의 과업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P230 감정 중에서 분명 훈련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내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순간적인 애착이나 정신 집중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 집중이 장차 가져다 줄 창조적인 힘을 위해서 이것은 존중되고 길러져야 한다. 이것이 제멋대로 가게 놔두면 그 결과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혼란과 비생산성을 낳는다.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확장을 포함하기 때문에 거대한 양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P230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 능력의 한게를 넘어서서 사랑하려는 것은 오히려 사랑하려는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또 그가 사랑할 대상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은 쉬운 게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신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ㅏㄶ이 괴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P232 진정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결혼을 통해 이룬 가족과 부모 관게에 책임을 져야 한다.

 

P232 <새로운 도덕 The new morality> 저자인 조지프 플래쳐 – “자유로운 사랑이란 이상이다. 불행히도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이상을 실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자기 훈련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족 안에서나 밖에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건설적인 관게를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와 훈련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진다. 진정한 사랑의 훈련이 없는 자유란 사랑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파괴적인 것이다.

 

P233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 자신을 확대하고 있으며, 나 자신을 확대할 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P234 사랑을 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커진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우면 도울수록 내 자신의 정신적 성장도 더욱더 촉진된다. 나는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통해 성장함에 따라 내 기쁨도 증가하고, 게속해서 증대될 것이다.

 

>>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는 사랑할 때 조차도 이기적이다. 얼마나 재밌는 사실인가.


P234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는 행동이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주요 특징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별이 언제나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전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지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 준다. 이처럼 상대방과 나와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그것은 많은 정신 질환과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P241 얾마 전의 일이다. 어떤 부부 모임에서 나는 한 회원이 말하는 걸 들었느데, 아내의 ‘목적과 역할’은 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를 잘 먹이는 데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주제넘은 남성 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 나두 어처구니가 없다~ ^^ 스캇 팩의 어처구니 없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하하하하~ ^^ 봉건적인 한국 남편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들이 귀 기울여들었음 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 ^^;; (아휴~ 속 시원해~ 하하하~ ^^:J)


P242 “그녀가 가진 목적은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것이며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맞어맞어~!! 옳소질소이산화탄소변소푸소~!! 왜 이런 사람들은 모두 유명하고 외국사람인지 모르겠단 생각에 살짝 고개가 갸우뚱 거려졌다. 태어나서 당신히 한 가장 행복한 선택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난 것이고 글을 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이라고 고백하신 구 본형 선생님은 이러실까..??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집안일을 안하는 여성들을 두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가 그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함께 성장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밥을 하고 안하고는 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것이지 그것이 모든 여성들을 가늠질 하는 잣대가 되서는 안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

 

집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사랑이 담긴 따뜻한 밥을 하고 맛있는 요리를 하며 행복을 느끼는 여성들.. 너무나도 아름답다.. 울 엄마도 그러셨다. 하지만 꼭 따뜻한 밥을 하지 않는다고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모든 여성의 잣대가 밥과 살림으로 규정지어지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 단지 스팟 캑의 글을 읽으며 조금 힘을 받았을 뿐이다. ~ 스캇 팩이 심하게 좋아지는 순간이다~ 하하하~ ^^


P244 부부간의 결헙은 서로가 분리된 개체라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흔히 그러하듯이 자신의 근본적인 외로움에 겁을 먹으며 서로 하나가 되는 결혼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은 훌륭한 결혼 생활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또는 상실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 독립성을 길러 주려고 애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할 수밖에 없다.

 

P245 칼릴 지브란의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이체)

 

그러나 당신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마라.

당신 부부 영혼들의 해변 사이에는 저 움직이는 바다가 오히려 있도록 하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마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각 홀로 있어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게 속으로는 침범하지 마라.

생명의 손길만이 당시의 심장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 내 영혼을 깊이 파고드는 시.. 서로로 존중하며 함께 걸어가는 ‘따로 또 같이’ 부부.. 정말 이렇겟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고 영혼의 갈망을 존중해줄때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모습을 잃지않고 각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그렇게 함께 긴 여정을 걸어 갈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 자꾸 자신에게 예속시키려고 드는 걸까..? 특히 한국 사회에선 여자든 남자든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이 마치 관계가 좋은 부부고 서로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사람은 마치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는 사회의 모순적인 시선들.. (..그러거나말거나…^^;;)  물론 그럼으로해서 행복을 느끼는 부부들도 있다. 모두 각 부부 스타일에 따라 다른 것임으로 옳고 그름은 없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런 관계속에 두 부부가 모두 행복을 느끼느냐 아니냐인 것이지, 어떤 스타일의 부부생활을 해야만 행복하다는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님으로..

 

칼릴 지브란의 시가 너무나도 가슴메 와닿는다. 구구절절이 공감이고 또 공감이다.


P250 성공적인 정신 치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환자들에게 그저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치료는 항상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P252 우리는 이제 정신 치료를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그 본질적인 요소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조건 적극적인 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신기한 마술 같은 말도 아니며, 기술도 자세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참여요, 투쟁이다. 치료자가 기꺼이 자신을 던져 환자의 성장을 돕기 위해 감정적인 관계에 뛰어 들어, 환자와 자기 자신과 투쟁해 나가고자 하는 의욕이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적이고 의미 있는 정신 치료의 근본적 요소는 사랑이다.

 

P254 대부분 정신적인 병은 사랑의 결핍이나 사랑의 결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P255 좋은 치료자가의 역할은 좋은 부모의 역할인데 좋은 부모는 자녀와 성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부모가 해야 하는 것은 아이를 돕는 것이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치료자는 환잘르 돕는 것이지, 치료자 자신의 요구에 봉사하도록 환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P259 ‘능력 이상으로 정신 치료를 감행해서는 안 된다. 사랑이 없는 정신 치료는 실패하기 쉽고 해롭기까지 하다.

 

P259 친구나 가족과 정신 치료를 실행하는 것, 서로 모든 시간을 기울여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이상이며 성취애햐 할 목표지만 바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P260 보통 사람들도 순수한 사랑만 할 수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아도 정신 치료에 성공할 수 있다.

 

P263 나는 순수한 사랑의 상대는 사람이러야만 된다고 얘기했따, 그 이유는 사람들만이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269 삶들은 훈련, 사랑, 생활 등의 경험을 통해 성장함에 따라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해도 성장하게 된다. 반대로 사람들이 훈련과 사랑과 생활등의 경험을 통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해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이해의 폭과 그 세련됨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편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눅나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이해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널리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느 종교를 너무 편협하게 정의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P270 우리느 종교를 커다란 원목에서 잘라 낸 한 조각처럼 일률적으로 보려고 한다.

 

P270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만약에 환자들이 자기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이 아니라고 스ㅡ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그 문제는 더 이상 정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은 세계의 본질적 성질에 대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간에 일련의 관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P274 ‘목을 베는 꿈’은 그가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P275 우리의 문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 정신 치료자르 제외하고는 – 잘 모른다. 우리의 성장 발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는 가족 문화이고, 부모는 그 ‘문화의 지도자’인 것이다. 더욱이 가족 문화의 영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말해 준 신과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 주는 세계다. , 그들이 서로에게 또는 가족에게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 우리가 자라면서 세계의 본질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가 이야기하는 것으로 세계관이 결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행동으로 창조애 내는 특수한 세계가 바로 그것을 결정한다.

 

P277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부모가 신이고 굳이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곧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다위의 사실로서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따. 하느님의 성격에 관한 우리의 첫째 견해는 바로 우리의 부모의 성격을 투사한 것이며 또는 부모의 성겨을 혼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부모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면, 우리는 사랑하고 요서하는 하느님을 믿게 되기가 쉽다. 우리의 부모가 혹독하게 처벌하는 사람들이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괴물 같은 하느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성장하기 쉽다. 또한 부모가 우리를 잘 돌보다 주지 않는다면 세상도 우리ㅡ 돌보다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P278 현실적인 종교나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다시 말해 최대한 현실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역할에 부합되는 종교와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계속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켜야 한다.

 

P280 우리는 서로 다른 작은 우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모든 전쟁이 성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P281 정신적 성장이라는 것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하여 보다 더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초기 단계에서는 그것이 인식의 여행이지 신앙의 여행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이전의 경험들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로부터 탈피하고 또 전이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P281 인식을 넓히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된 주제다. 사랑은 자기 확자이라고 저의하면서, 사랑의 모험주에서도 새로운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따. 그리고 훈련에 관한 첫 부분의 마지막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느 것은 오래전에 형성된 낡은 자신을 포기하고 낡아빠진 지식을 죽이는 것을 요구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우리가 넓은 시야르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좁은 시야를 죽여야만 한ㄷ. 단기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평안할 것이다. , 우리가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그대로 작은 우주관으로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고, 숭배해 오던 자신의 ㅡ이견들을 말살시키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의 길은 반대 방향에 놓여 있다. 우리는 낡은 사고 방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두렵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이전에 배워 깊이 간직하고 있던 가치관에 과감히 반기를 듦으로써 정신적 성장을 시작한다.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

 

P282우리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 중에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독특한 개인 생활을 발달시켜 왔다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으로 보이고 우리의 감정까지도 그렇게 보인다.  (…) 삶의 의미, 목저그 죽음 등이 무제가 될 때에는 간접적인 지식은 소용이 없다. 간접적인 하느님에 대한 간접적인 신앙으로 생존할 수는 업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느 나 자신만의 개언적인 언어와 특수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P283 세계는 실재하며 따라서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다. 인류가 세계를 시험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세계에는 원리가 있다. , 세계는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예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편견이나 미신을 따르고,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고 하는 뿌리 깊은 나쁜 버릇이 있는 나약한 연구자다.

그러므로 정확히 고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이러한 훈련의 핵심이 바로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 과학적인 방법을 쓰는 훈련은 경험으로 시작되지만, 단순한 경험 그 자체만을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실험의 형식으로 반복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 경험은 정당성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ㅇ도 똑 같은 처지에서 똑 같은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P286 과학은 회의의 종교.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우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문화라는 소우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또 부모가 우리에게 물려 준 반족 진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 온 것에 댛서 회의를 품어ㅑ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태도다. 괗ㄱ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소우주의 경험을 대우주의 경험으로 변경시킨다는 뜻이다. 우리느 과학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P333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치료자가 객관적인지 그리고 참으로 환자가 의미하는 그대로를 이해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P334 과학자들이 아이를 목욕물과 함꼐 내던저 버리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아이를 보지 못ㅁ하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하늼이 실재한다는 증거를 보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같은 종류의 좁은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심리적인 울타리로, 스로 정신의 영역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을 마고 있다.

 

P337인간은 죽을 운명과 영생의 운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또는 빛이 하나의 파도이고 동시에 또 하나의 입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P340 자아 실현이란 분명한 의식 속에서 태어나고 성숙된다.

 

P341 기적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은 자아 실현의 정수이며, 그것을 뿌리로 삼아 인간의 지고한 인격과 경험이 자라는 것이다.

 

P341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느 중간 지대란 위험하게 흔들리는 장소이다.

 

P364 무의식이 나쁜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의식이 그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보아도 정신 질환이 무의식의 소산이 아니라고 하느 융의 견해는 분명 옳다. 정신 질환은 오히려 의식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거나 의식과 무의식의 부조화에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억압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는 많은 환자들에게서 그들이 아직 분명히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을 병들게 하는 성적 욕구와 적개심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욕구와 감정들이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야기하느 것은 무의식이라고 하는 관념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이 무의식 속에 처음 생겨나게 된 것은 왜일까? 이것들은 왜 억압되었을까? 대답은 의식이 그것들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문제는 인간이 성적인 욕구라든가 적개심 따위를 지니고 있다느 그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을 의식이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또 그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기를 거부해 그러한 감정들을 저 너머의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P369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 믿고 이느 것보다느 좀 낫거나 못하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따. 정신적인 발달 과저에서 핵심적이고 주된 과제는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자기의 개념을 실제의 그ㅓㅅ과 일치시켜 가는 일이다. 이 평생의 과업이 심리치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비교적 빨리 빠리 성취되어 갈 때 사람들은 종종 새로 태어난느낌을 받는다.

 

P369 만약 우리가 자기 자신으 ㄹ스스로 그러리라고 믿고 있는 모습이나 인식하고 있는 모습을 일반적인 의식과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의 현명한 일부인 무의식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나는 우선 자기 인식과 자기 표출이라는 측면에서 무의식은 지혜롭다라고 말했다. 내 무의식이 그녀가 피노키오임을 개닫게 해 준 환장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무의식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의식보다 훨씬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실 무의식은 모든 면에서 의식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현명하다.

 

P371깨다든다는 말 자체를 생각해 보자. 책을 읽다가 호소록있는 생각이나 이론을 발견할 때, 말하자면 심금을 울리는글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이 진실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생각이나 이론은 전에는 의식적으로도 생각해 본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깨닫는다라는 말은 다시 안다는 뜻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때로는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우리 내부에 이미 모든 지식과 지혜가 갖춰져 있어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개념은 교육이라는 단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교육을 뜻하는 Education은 라틴어  Educare에서 파생된 단어다. 글자 그대로라면 밖으로 드러내다또는 앞으로 이끌다라는 뜻이다. , 우리가 누구를 교육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라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것을 넣어 주는 아니라 마음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의 세계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은 모든 지식의 창고이다.

 

P372 기적이라는 것은 없다고 믿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기적이다.

 

P373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은초을 붙잡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P378 지금은 우리가 은총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데 실파흔 ㄴ것이 그 설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떄문임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자.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애써 구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선물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주어졌을 때 그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듯이 말이다. 바꿔 말하면 초능력적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이 초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임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P389 개인의 경계란 벽처럼 두터운 것이 아니라 튼튼한 세포막이나 울타리같이 적당히 개방되어 있어 다른 개체들이 침투하여 넘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의 의식이 부분적으로나마 끊임없이 무의식과 상호 침투하듯 우리의 무의식도 우리 바깥에 있는 정신에 침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며드는 그 정신은 어떤 개체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P385우리 몸을 감싸 주는 것은 옷. 살을 감싸는 것은 피부. 뼈를 감싸는 것은 살이다. 심장을 감싸는 것은 온몸이듯,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하느님의 자비에 감싸여 있다. 더구나 훨씬 더 포근하게 말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은 남아서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전하다.’

 

P388 자연 법칙 중에 가장 중요한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게 있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보다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복잡한 문화 상태에서 보다 단순한 분화 상태로 흐러간다. 한마디를 말해 우주는 흘러 내려가는 과정이다.

 

P388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아래로 흘러내리다 모양도 없고 질서도 없고 미분화된 점액질이 되어 더 이상은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를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엔트로피의 상태를 향하여 에너지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엔트로피의 힘이라고 한다. 진화의 흐름은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진화의 과정은 유기체가 단순한 문자 구조로부터 보다 고차적인 복함 구조, 즉 분화되고 정돈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분자 한 개보다 약간 큰 간단한 유기체다. 박테리아는 좀 더 복잡하며 좀 더 분화되었고 세포벽과 여러 개의 다른 종류의 분자들이 분화된 형태이며 동화 작용을 한다.

 

P390 영의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고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고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 등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려 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의 힘이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이겨 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의 경우처럼 인간의 영적인 기적은 이 저항을 극복해 낸다. 우리는 성장하고, 좀 더 나은 사ㅏㄻ이 되는 기적을 만든다. 물론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또 쉽게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교양을 증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태어난 진창 구덩이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부추니근 어떤 힘이 내부에 있다.

 

P396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은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느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은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P398 이 책은 영혼의 성숙에 관한 책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 반대 측면인 영혼의 성숙에 장애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오직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다. 우리가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장애물은 쉽게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게으름을 극복할 수 없다면 다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게으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P398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혼의 성숙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 게으름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에트로피의 힘이다.

 

P400 왜 그랫을까? 유혹받고 행동하게 되기까지 그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죄의 본질은 바로 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에 있다. , 토론의 단계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다암과 이브는 뱀과 하느님의 사이에 놎앵르 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 하느님 쪽의 다변을 듣지 못했다. 뱀과 하느님 사이의 논쟁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선과 악의 갈등을 상징한다. 마음속에서 헌과 악 사이의 논쟁을 붙여 보려고 하지 않는 또는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는 그 태도가 바로 죄를 짓는 원인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며 그 이득을 따져 봄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개 하느님 쪽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 자기 내부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 즉 모든 인간 존재의 마음속에 있는 올바른 지혜를 경청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로 게으름 때문이다.

자기 내면 안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일종의 일이다.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가 그 일을 진지하게 수행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게신 하느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수행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게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지하게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 앞에는 좀 더 험난하고 수고로운 가시밭길이 나타나게 된다. 논쟁을 벌여 보는 것, 즉 심사숙고해 본다는 것은 고통과 투쟁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고통은 회피하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가 게으른 것이다. 아담과 이브 이래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그랬다.

 

P401 그러므로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있다. 아기들, 어린이들. 청소년들, 장년들, 노인들, 게다가 현명한 자든 우매한 자든, 불구자이든 정상인이든 우리 모두에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게으를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야심만만하고 장력이 넘치며 영리한 사람조차도, 냉정하게 스스로를 성찰해 보면 자기 속에 게으름이 잠복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게으름은 우리를 끌어내리고 영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P401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P402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다. ,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도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1훈련에서 나는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현실 세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케케묵은 지도를 개정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일을 싫아한다. 결고적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경향이 있다. 이 저항은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지만, 그 밑바닥에 분명 게으름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2사랑에서도 나는 자아를 새로운 영역, 새로운 헌신, 책임감, 새로운 관계, 새로운 차원의 존재 등으로 확대하는 모험에 관해 언급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모험이라고 한 것은 지금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상태의 자기 자신으로 나아갈지도 모를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에게 솔직하게 물었을 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쉬운 길로 갔다. 힘들이지 않고도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비겁한 지름길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하느님께 묻는 것은 많은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신화가 주는 교훈은 반드시 하느님께 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담과 이브가 왜 하느님께 묻지 않아서 우리를 이 고생을 시키는걸까..?? 하는 원망이 살짝 들었다~^^;; 물어만 봤어도 우리는 에덴의 동산에서 살고 있을 것이며, 인류의 스토리는 정말 달라지는 것이었는데.. 안타깝다.. 나도 앞으로는 질문을 잘 하자~!!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미리 짊문을 잘하자~^^;; 인류를 위하는 길이다~!! 하하하하~ ^^


P406 바로 이 한 가지 점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 , 우리 모두 각각의 깊은 곳에는 병든 자아와 건강한 자아 당신의 의지에 따라 삶을 그리고 죽음을 부추길 수도 있는 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 개개인이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 각자 내부에는 하나늠이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인류의 끈질긴 소망이자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 동시에 게으름이라고 하는, 인간을 퇴행시키고 그가 태어났던 자궁 속과 다를 바 없는 수렁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엔트로피의 힘인 원죄도 존재한다.

 

P407 악의 본질에 대한 스캇 펙의 결론:

첫째: 악이나 악마는 현실에 존재한다. 악마란 어떤 미지의 힘을 설명하기 위해 원시인들의 종교적 상상이 만들어 낸 가공의 존재가 아니다. 신에 대하여 증오하며 그것을 파괴하고자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실제로 있다.

 

P408 악한 사람들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드러네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곹오을 피하기 위해 빛과 선령함과 사랑을 파괴한다. 따라서 나의 두 번째 결론은 악이란 게으름의 극한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다. 보통의 게으름이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들은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들의 존재는 단지 사랑 없음의 한 표현일 뿐 아직 악은 아니다.

정말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거싱 귀찮아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다고 지낸다.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을 유지하고 병든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행동을 한다. 이 목적을 위해 행동하다 보면 그들은 남을 파괴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이 주는 고통을 회피하는 데 필요하다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병든 자아를 유지하는 일이 건강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 때문에 위협닫게 되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건강한 영혼을 파괴한다. 따라서 나는 악이란 영적 성장을 촉진할 목적으로 자아를 확대하는 것을 회피하는 정치적 권력 행사 고골적이거나 은밀히 자신의 으지를 강요하는 로 본다. 단순한 게으름은 사랑이 아닌 것에 불과하지만 악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P409 세 번째 결론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엔토로피의 힘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게으름을 이겨 낼 수 있으나 다른 사람ㅇ게는 그것이 힘겨울 수 있다. 엔트로피의 힘이 존재하는 한편으로는 사랑이라는 진화를 부추기는 힘이 있어 두 상반된 힘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균형을 자 유지해 간다. 그러나 한쪽 극단에는 순수한 사랑만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 극단에는 순수한 엔트로피나 악만이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서로 갈등하는 힘이라서 양 극단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선이 악을 미워하듯 악이 선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엔트로피는 사악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고 인간에게 악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사회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나는 악의 세력이 행동함으로써 수많은 어린이들의 심신이 다치고 피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악은 인간의 진화라고 하는 낙관적인 조감도에 불을 지른다. 악은 다른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영혼을 파괴한다. 악은 자신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경게하는 횃불이 되기도 한다.

 

P410 세상에 넓게 퍼져 있는 악과의 싸움에 우리가 가담하는 것은 성장의 한 방법이다.

 

P411의식 conscious;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을 지닌 라닡어 접두사 con안다라는 뜻을 지닌 ‘scire’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의식한다는 것은 함께 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함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을 함께 안다는 말인가? 나는 우리 마음 가운데 무의식적인 부분이 놀라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로 정의할 때 무의식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의식이 그것을 옳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줄곧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안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무의식과 함께 아는 것이라고 결론내려선 안 되지 않을까?  의식이 발달한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가진 지식을 이미 무의식은 알고 있던 지식 인식하는 것이 향상된다는 뜻이다. 인식이란 의식을 무의식과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은 치료자들에게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정신 치료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무의식을 의식화하는과정. 또는 무의식과 관련된 의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과정으로 정의한다.

 

P412 우리가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나 자신의 내부이다.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라. 이 말은 곧 하느님과 인간이 마주보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의식과 무으식이 마주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게신 하느님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P414 나는 영적 성장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는 데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 신이 아는 만큼 인간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으식은 언제나 신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의 목표는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우리들 개개인이 모두 환전한 하느님 그 자체가 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영적 성장의 목적이란 의식이 무의식에 통합되어 모든 것이 무으시기이 되는 것에 있다는 말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야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것은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무의식의 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난 의식의 새싹이 신 그자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P415 의식은 존재 전체 중 실천하는 부분이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의식이다. 완전히 무의식적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갓 태어난 어린 아기와 같아서 하느님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P415 만약 우리가 자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독자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 의지를 하느님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하여 새롭고도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된다.

 

P416 우리가 의식적 결정을 통해서 이 세상이 그분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한 모습으로, 인간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면, 사랑이 없언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며, 인류 자체의 진보를 위해 봉사하는 삶이 될 것이다.

 

P418 영적 권력이 지닌 능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도의 깨달음을 지니고 어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의식이다.

 

P420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사람은 인생의 전문가다. 그러나 또 다른 큰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알 때 우리는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의 본질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의 동기, 결과 및 연원 등에 관하여 완전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었던 수준의 깨달음을 직접 얻게 된다. 우리의 의식적 자아는 하느님의 정신과 결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아는 것이다. 이런 단계의 영적 성장과 위대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고 겸손하다. 그들의 깨달음 중 하나가 그들의 비범한 지헤는 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와 자신이 연결된 통로를 유념하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이 뿌리로부터 그 통로를 따라 흘러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배우려는 노력은 바로 이 연결 통로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가 그들에게만 특별히 있는 부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체와 그리고 하느님의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지식과 권능의 근원을 질문 받게 되면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나의 권능이 아니다. 내가 지닌 이 작은 권능은 보다 위대한 힘의 조그만 표현일 따름이다. 나는 단지 일종의 통로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나의 힘이 아니다.” 이러한 겸손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자신이 하느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자기 의식의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를 당신의 도구로 비추소서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한 자아의 망각은 마치 고요히 사랑에 잠긴 것과 같이 조용한 환희로 다가온다.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의로움으로부터의 탈출도 가능하게 해 준다. 합일이 있는 것이다.

 

P422 권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P423 복음서의 가장 신랄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예수의 끝없는 절망이었다. 그가 그토록 노력하고 자신을 개방했지만 열두 제자 가운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수준으로 올라선 사람은 없었다. 가장 현명한 제자조차도 그를 뒤따를 수는 있었으나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무한한 사랑으로 인해 그는 전적으로 혼자 앞서 걸으며 제자를 인도해야 하는 책임감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이러한 종류의 고독감은 영적 성장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앞서간 거라면 모두가 겪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웃으로부터 점점 멀어짐에 따라 하느님과의 관게가 점점 밀접해진다는 즐거움이 없다면 감당해 내기 힘든 점이다. 의식이 성숙하고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일체감은 우리를 지탱시켜 줄 만한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P424노이로제는 마땅히 치러야 할 고통을 회피하려는 데서 온다라든가/ “건전한 성진은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진실에 충실하고자 한다또는 정신 질환은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신의 의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때 일어난다

 

P428 증후군과 질병은 동일한 현상이 아니다. 질병은 증후근이 나타니가 훨씬 전부터 생겨난다. 증후군은 병이 아니라 치료의 단서이다. 원하지 않아도 증후군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것이 은총의 한 양상임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무의식이 전해 주는 메시지다. 우리가 원하기만 함다면 자신을 점검하며 재정비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메시지 말이다.

 

P429 자신의 증후군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증후군은 자기 영혼의 혼란이 겉으로 드러난 것임을 깨닫고 무의식이 주는 메시지와 그 은총을 수용하여 치료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한다.


P431 에메니데스 또는 상냥한 이은총을 가져오는 자. 오레스테스만이 인지할 수 있었던 환각 소의 퓨리스는 곧 그의 증후근을 나타내며, 정신 질환이라는 개인적 지옥을 의미한다. 퓨리스를 에우메니데스로 변화시킨 것은 우리가 지금껏 말해 왔다시피 정신 질환을 행운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고 한 덕분에 일어난 것이다. 끝내는 퓨리스에게서 놓여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의 존재가 부당한 형벌이라거나 자신이 이 사회 또는 다른 무엇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 오레스테스의 신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신화였다. 나는 신화를 좋아한다. 무척 매력적이다. 그래서 그리이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고 그렇게 열심히 사 모았던것 같다. 단지 신의 이름을 잘 기억하질 못해 잘난척하는데 도움이 되질 않아 좀 속상했던…^^;; 신의 게획적인 계략였음에도 자신의 몫을 당당하게 인정하는 오레스테스.. 신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용서와 함께 주어진 선물.. 바로 은총이었다. 스캇 펙의 말대로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때 우리는 자유로와지며 은총을 선물로 받음을.. 누구나 지난 경험을 통해 한 두번은 경험 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경험했고 지금 현재도 경험중에 있다. 받아들임으로 해서 오는 자유로움..


P435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태어나서 9개월이 되기 전에 극단적인 애정 결핍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들의 병은 여러 가지 처치를 통해 얼마간 회복은 가능하지만 완치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성격 장애자들은 유아기에 보살핌을 잘 받았지만 생 후 9개월에서 두 돌이 되는 사이에 애정 결핍을 경험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병은 정신병보다 심각하지는 않으나 역시 치유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신경증 환자들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잘 돌보아 주었다가 두 돌이 지나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 보살핌이 부족해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격 장애나 정신병보다는 그 병의 정도가 약하고, 치료하여 완치되기도 보다 쉽다고 생각한다.

 

>> 아이들이 어렸을 때 부모들의 사랑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커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보여주는 무섭기조차 한 통계다. 우리 애리와 리예가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엄마였나..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P438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으며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덜 귀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고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우리 대부분은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름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 받은 자는 적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은총의 부름을 받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라고 풀이하고 싶다.

 

P439 우리가 건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저항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왔다.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 우리에게 저주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이다. 은총이 인간의 진화라고 하는 사다리로 우리를 밀어 올리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인것처럼 엔트로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힘에 저항하여 지금의 편안한 자리에 그냥 머무르게 하거나 훨씬 적은 힘이 요구되는 사다리의 아래로 내려가도록 부추긴다.

 

P440 은총을 인식하고 그것이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함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며 자신이 하느님 곁에 있음을 아는 것은 소수 뿐이다.

 

P443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다. “Dilige et quod vis fac –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P443 소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 속의 그 신성한 목소리를 받아들이기까지 몇 년 동안이나 이 두려움과 씨름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두려움과 자격이 없다는 느낌이 권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끔 할 정도로 커졌을 때 신경증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정신 치료의 중심적 주제가 된다.

 

P447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 받은 사람은 적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은총에 따르는 데 수반되는 어려움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은총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에 입각하여 나는 우리가 은총에 의해 축복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라고 했었다. 요컨대 은총은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극서이 전혀 틀린 말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은총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은총을 차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 있다. 그러나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 때 은총이 우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P448 어떤 처원에서 보면 은총의 부름에 응하고 응하지 않고는 나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 선택을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명백해 보인다.

 

P448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은총을 소유할 순 없다 해도 은총이 기저거럼 올 때 우리 의지로 자신을 열어 놓을 수는 있다는 점이다.


P446 퓨리스가 은총을 가져오는 정령으로 바뀐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 오레스테스는 신들의 자비를 얻고자 노력햇지만 동시에 신들이 자기 짐을 덜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총을 입은 것이다. 그가 뜻하지 않은 선물, 즉 은총의 축복을 받은 것은 찾아 헤매면서 또 전혀 찾지 않는다는 역설을 교묘히 배합했기 때문이다.

 

>> 너무나도 절묘한 해석이다. 넘 맘에 든다. 찾아 헤매면서 전혀 찾지 않아 은총의 선물을 받은 오레스테스..


 

P450 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꿈이 자기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해야 한다. , 자신들의 무의식이 어떤 꿈을 의식 속에 동장시킬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P450 환자가 일단 꿈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포기해 버릴 수만 있다면, 기억된 꿈은 양에 있어서는 줄얻르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극적이라 할 정도로 증가한다. 그 결과 환자의 꿈은 더 이상 찾에 헤매진 않지만 무의식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치료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P458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잘 읽기 위해서는 이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때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자기의 마음 읽기란,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보아야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 

 

흐르는 곡...

Andante의 Love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