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축제8] 정민의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읽고....

pumpkinn 2008. 9. 22. 01:30

 

저자 정민 교수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저자 정 민은 1960년 음력 10월 15일에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에는 1961년 1월 3일생으로 되어 있다.’  그의 홈 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살아온 길’ 부분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함석헌 선생님을 뵈고 난 다음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한문학’이라는 것이 마치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하는 문학이란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그의 예스러운 문체에서 오는 느낌 때문였는지는 몰라도, 그냥 나는 혼자 당연히 연세가 꽤 드신 분일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책을 쓰신 분의 나이가 책을 읽는 데 어떤 상관관계를 유발하는 거야 아니다. 하지만 정 민 교수의 사진을 보고선 너무 젊어서 깜짝 놀랐고, 나와 겨우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놀랐다.

 

나이 차가 얼마 안 난다는 것으로 삶의 깊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고, 각자 추구하며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달랐기에 굳이 비교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단지 그분이 이렇게 한문학의 한 획을 그으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됨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분이 이룬 영광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지나온 몰입 속에 느꼈을 환희와 설렘의 순간을 지난 시간 나는 과연 몇 번이나 느껴보았나에 대한 돌이킴이었다.

 

암튼, 나는 그분의 한문학에 대한 깊이와 그분의 수많은 논문 발표와 많은 작업들을 보며 이 분 또한 다산 선생 못지않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당신도 자신을 두고 하는 얘기가 ‘뭔가에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하지 않았나.

 

지금은 스스로 ‘새’에 미쳐있다고 말하고 있는 정 민 교수. 그래서 새에 관한 모든 문헌을 섭렵하고 있고 카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새에 관한 책을 내려한다는 그는, 현대에 사는 제2의 정 약용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10여 년을 연암 박지원에 빠져있다가 다산 정약용에 빠져버린 정 민.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길을 가면서도 다산만 생각하고밥 먹으면서도 다산만 떠올랐다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와 정보들끼리 부딪치며 정리되었다.’  다산도 그러지 않았나. 주역에 빠져 앉으나 서나 그대 생각이듯, 그렇게 빠져 형에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편지로 보내지 않았나..

 

특히, 정 민 교수가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때 논문들을 쓰며 만났던 석주 권필에 빠져 꿈에서까지 권필을 만났었다는 글을 접하며, 그가 얼마큼 몰입을 하며 자신의 온 영혼을 다 쏟아붓는 분인지 감격 그 자체였다.

 

 


 

부끄럽게도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분을 늘 먼 곳에서 찾았다. ‘중국의 역사는 제 손금 보듯 알고 중국의 고사는 제 집안일처럼 훤하면서, 막상 우리나라의 옛일은 깜깜하게 모른다’는 다산선생의 꾸짖음을 가슴에 두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알고 싶고 알아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함 석헌 선생님께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이렇게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교훈이 역사 속에 묻혀만 있지 않도록 이렇게 책을 통해 일깨워준 정 민 교수에게 감사한 마음이 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분의 ‘미쳐야 미친다’도 읽어보고 싶다.

 

그의 저서로는 수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골라보면, <한시 미학 산책>, 산문집 <책 읽는 소리>,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 불어와>, <돌 위에 새긴 생각>, <한문의 이해>, <와당의 표정>등 그 외 많은 저서가 있고, 논문으로는 <석주 권필의 세계사 연구>, <나라꽃 무궁화의 어문학적 고찰>, <권필과 이안눌 대비론>, <위경 천전의 낭만적 비극성> 등등이 있으며, 앞으로 현재 그가 미쳐있는 ‘새’에 관한 문헌들이 줄줄이 나올 것이다.

 

 

다산은 1762년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 씨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다산의 자는 ‘미용’, ‘용보,’ 귀농’이고, 호는 삼미자,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태수, 문암일인 등이며, 고향집의 당호는 여유당이고 시호는 문도이다.

 

그는 4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위에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22세 때인 1783년(정조 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데, 이때 정조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았으나, 한때 잠시 만난 천주교로 인해 그는 삶에 큰 고난을 맞는다.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당파 싸움에 휘말려 지난날 잠깐 동안의 천주교와의 만남이 그를 유배지로 쫓겨가게 하지만 그는 그에 굴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학문 연구과 저술활동으로 승화시키는 그의 저력을 만나게 된다.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의 대부분이 바로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다산초당이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장소가 되었음은 아무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리라. 500권을 읽기도 어려운데, 500권 집필이라니. 

 

다산의 모든 학문 밑바탕에 깔린 정신은 바로 ‘위국 애민’이었다. 그는 백성의 삶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바로잡는데 보탬이 되지 않는, 고작 제 한 몸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어떤 학문을 하던 삶에 적용을 하고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만을 받아들인 다산. 그는 단지 이론으로만이 아닌 그의 삶을 통해 그가 추구하고 열정을 쏟은 모든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학자였다.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방면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그의 손에 거쳐간 모든 분야엔 천재성을 발휘한 다산 정 약용. 어쩌면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표현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많은 분야에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그는 끈기가 없어 중간에 그만둔 것이 한둘이 아닌 끝이 불분명한 천재였으니 말이다. 무엇을 시작을 하면 끝을 내는 다산에게는 그가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별로 달갑지 않은 비유일 것 같다. 다산 역시, 누구를 닮으려 노력하지 말고 독특한 나만의 개성을 살려 나만의 나가 돼라 강조하지 않았나.

 

암튼, 다산은 전 생애를 걸쳐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사색하고 저술하고 활동했다. 유배되기 전이나 유배기간 중이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은거할 때나 한결같이 자신의 영달보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이 점이 그의 위대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의 저서는 감히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중의 몇 가지를 적어보면, <흠흠신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전제>등이 있다.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을 읽으면서 많이 경악하고, 또 많이 웃었다. 다산의 치밀함과 끈질김 그리고 ‘해박한 지식’이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 그의 학식의 깊이와 그가 학문을 통하여 추구한 원칙을 그는 삶 안에서 행동으로 보이며 끝까지 자신의 철학을 굳혀나갔다.

 

10강 50목 200 결로 표현된 다산의 지식 경영법, 제목만 보아도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깨우쳐주고 싶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각 강에 실려있는 목들과 결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모든 것들을 떠나, 나는 지금 현대에 와서 우리에게 교육되고 있다고 생각한 ‘시간 관리’나 ‘행동 철학’들을 다산은 이미 그 시대에 자신의 삶 안에서 매 순간 게을리하지 않고 치열하게 실천해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강점을 잘 알아 내가 잘하는 것을 살려내어 나만의 개성을 지닌 독특한 작업을 하라는 것은 너무나 놀라웠다. 그리고 퇴계 이황의 서적을 읽고 자기 제자들의 강점을 살려 각각의 제자들을 맞는 곳에 두고 공동작업을 통해 500여 권이라는 저서를 저술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정도가 아닌 정 민 교수의 표현대로 ‘경악할’만 한 일이었다.

 

곧디 곧은 성품으로 형 정약전도 ‘그릇이 작은 것이 흠’이라는 걱정을 하게 했던 정 약용. 한치의 어수룩함 없이 너무나도 곧고 곧은 다산이 바로 내 주위에 있었다면 나는 그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강직한 성품과 함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시를 읋을줄 아는 낭만적인 다산, 탐관오리들 틈에 고통을 겪는 백성들을 향한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목민심서

목민심서

 

그가 마지막 남은 엽전으로 배고파 우는 아이들에게 엿을 사 먹이 고는 놔두고 가버리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나누다 눈물을 흘리는 다산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은 단순한 지식 경영법이 아닌, 그것을 어떤 자세로 배우고 생활에 임하며, 우리는 학습을 할 때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가 상세하게 예문과 함께 들어있다.

 

무슨 공부를 하든 메모와 카드 작업과 초서를 강조하며 절대 정리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다산 선생의 가르침이다. 그동안 귀찮아서 안 하던 정리 작업을 진지한 마음으로 임해야 하겠다는 다짐 또한 생겼다. 그 정리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내가 잘하지 못하는 공동작업이 얼마나 많은 시너지 효과를 내는지에 대해 깨우치게 된 <다산선생의 지식 경영법>은 정말 앞으로의 내 학습 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할 아주 고마운 책이었다.

 

선생님이 왜 그리도 ‘초서’를 중요시 강조했는지 이 ‘다산선생’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읽으면서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많은 안건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 읽기가 재밌었고, 반복되는 만큼 그 중요성이 더 깊이 내 가슴에 각인되었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통해서 한문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정민 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 다산선생의 출생연도가 잘못 기입되어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