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을 읽고../이희재 옮김

pumpkinn 2008. 5. 24. 07:2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2008년 5월 18일 월요일...

 

‘몰입’은 요즘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애정을 갖고 사용하는 단어이다. ‘몰입의 즐거움’. 내 책들 틈에 껴서 내게 읽히기를 기다리며 예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얼마나 두근대며 행복했는지...

 

외국이다 보니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내가 갖고 있는 책부터 책 순서를 바꿔서 과제를 제출하면서까지 이’ 몰입의 즐거움’을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늦게까지 두고두고 아껴두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읽는 동안의 황홀함과 즐거움을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두며 '기다리는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황홀함과 행복감을 어디서 찾아 느껴야 하는지 읽는 동안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 기대했던 내용과는 조금 달랐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책을 읽기도 전에 글 쓴 분의 의도를 느끼기도 전에 내가 먼저 울타리를 쳐놓는 순수하지 못한 나의 이기심이 문제였음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 글을 쓰는 분들은 가장 속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의도를 읽기도 전에 제멋대로 저울질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독자의 자세. -_-;;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이분 책은 처음 접하는 거지만 이 분이 ‘몰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분의 내놓으시는 주장과 이론에 대한 분석과 또 그 주제들의 예를 사회 각계층에서의 반응과 느낌을 ‘여러' 각도가 아닌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편협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모든 걸 포괄적으로 감싸 안으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분석들과 설명들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같은 상황이어도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비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고, 그에 대해 아주 성실하고 충실하게 당신의 주장을 펼쳐나간 것이 마치 따뜻하고 자상한 선생님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주장을 펼 때 쉽게 편협적인 되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인데, 미하일은  모든 상황을 숲 속의 일정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한 숲을 이뤄짐을 보여주어 그가 펴는 주장은 넉넉한 포용성이 느껴져 포근함마저 들었다.

 

심리학자답게 예로 들은 일반적인 사례 안에서도 예리한 심리분석으로 우리가 ‘자아’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깊이 알고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 한 것이 참 재밌었는데,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내가 남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P 30)은 명쾌했다.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오는 자발적인 것이던 외부에서 오는 것이던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추구하게 하기 위한 원동력 즉,  선명한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얼마 전 이곳 브라질에서 강연을 하신 ‘강영구’ 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게 된 당신이 어떻게 지금의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며 강연 내내 강조하신 말씀은 바로 ‘꿈과 선명한 비전’이었다. 

 

그렇게 확실한 목표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를 ‘몰입’의 상태로 들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에너지와 영혼을 쏟아부어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 바로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에서 말씀하시는 ‘쉐마 이스라엘’의 정신과 일치된다. 

 

내가 몰입을 하며 그렇게 매 순간을 온 정성과 온 정신을 다 쏟아부었던 때가 언제였나 가만 생각에 잠겼다. 역시 유학시절이 아녔나 싶었다. 지금 죽어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때의 열정이 사무치게 그리워 순간 코가 찡하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온전히 공감했다. 결국은 바로 그 ‘몰입’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게 됨을 나 역시 지난 경험 속에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내가 모든 것을 풍요롭게 갖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난’이란 환경 속에 친구들은 당연하게 밟고 올라가는 계단들 조차  내게는 삶과 투쟁을 해야만 그 기회가 얻어졌던 시절, 그때의 매 순간은 내게 있어 투쟁이고 도전이었기에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순간이 ‘몰입’의 상황에 잠겨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몰입의 일상을 살았던 그때의 그 시간이 내겐 그렇게 잊을 수 없고 그리운 시간이고, 그때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지만, 이 책을 통해 확실하게 알았다. 그리운 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닌 내 온 에너지와 영혼을 쏟아부었던 '몰입의 순간'이었음을. 뚜렷한 목표 아래 내 개성을 지키며 열심히 달렸던 그때의 나를 나는 사랑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이가 들고 성숙해져야 하는 나이에 외려 더 미숙하게 행동하는 나 자신를 보았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내 안에 깊이 숨어있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엉뚱한 경쟁 속으로 던져버렸다. 한창 민감한 나이에도 그러지 않았던 내자신 였기에 그런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는 생소한 내 모습이 나를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참으로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나를 되돌아보니 쓴웃음만 나왔다. 내 삶의 나침판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지내온 지난 몇 년, 나의 모든 집중이 쏟아져야 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니 나의 집중력은 내 주위 산만한 곳으로 분산되어 쓸데없는 안테나만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수면 위의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쩌면 긴 광야의 시간이 내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바오로 사도처럼, ‘뒤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달립니다.’는 못되어도, 내게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길 잃음에서 오는 깊은 성찰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이제야 알겠다. 

 


 

여기서 칙센미하이가 덧붙여 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온전한 ‘몰입’의 상태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 순수하게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순수한 몰입의 즐거움을 맛보기 힘들다는 설명은 참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었다. 칙센미하이가 인용한 리처드 스턴의 말처럼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다’. 백번 공감 가는 말.

 

미하이가 마지막으로 맺는 부분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미래에 더 많은 정력을 투자할수록 우리는 그 생명의 일부분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육체가 죽고 썩어 없어져 그냥 먼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우주를 구성하는 생명의 일부분으로 남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사랑하고 몰입을 하며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사회의 인정과는 관계없이 내가 숨 쉬는 순간의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그것이 내게 주어진 내 삶에 대한 나의 임무이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은 나의 지혜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  ‘나는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행복한 상상이다.

 


마음에 와 닿은 구절

 

P 9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묏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 오든 - 

 

P 13 의심스러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칠십 평생이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는다. 그렇지 않고 허송세월만 할 경우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반대로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 죽음 너머에 또다신 삶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전혀 잃을 것이 없다. – 파스칼 – 

 

P 30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오직 그의 행동에만 무게를 두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자처럼 구는 반면, 스스로를 돌아볼 때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행동보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더 중시하면서 마치 현상학자처럼 구는 모순된 자세를 종종 보이곤 한다.

 

P 36 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슬픔. 두려움. 떨림. 지루함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한다. 무질서도를 뜻하는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내부에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 과단성. 민첩성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 엔트로피’의 상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추스르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걸림돌 없이 정력을 우리가 선택한 과제로 온전히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한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 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정신적 과정은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의 질은 급격히 저하된다.

 

P 37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 부여는 외적 동기 부여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 없이 일관된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예측이 가능한 행동. 감정. 선택에서 드러나는 이 질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성 있는 ‘자아’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P 38 의도와 목표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품는 오해가 있다. 가령 힌두교나 불교처럼 갈래가 다양한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이르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적잖은 수의 유럽과 미국 청년들이 철저히 자동적이며 우연히 이루어지는 행위만이 삶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일체의 목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P 40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과는 다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P 41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집중하지 못하면 의식은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평상시에는 정보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노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P 43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P 45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P 47 목표가 명확하고 활동 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과제와 실력이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정신을 체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시간 감각에도 변화가 온다. 한 시간이 일분처럼 금방 흘러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P 48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P 66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P 82 “내가 일평생 단 일분도 쉬지 않고 일했다는 말도 옳고, 내가 단 하루도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없다는 말도 옳다.’ 

 

P 88 게으름이 사람의 천성이 아님을 시사한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P 97  싸움, 자신을 상대로 벌이는 이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속세의 싸움이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

 

P 137 활동이 이뤄지는 전체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의 행동이 전체에 미칠 영향을 이해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직업이라도 세상을 전보다 살 만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상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P 138 직무의 가치가 크게 올라간 것은 근무자가 자기 일에 남들보다 더 정성을 쏟아부어 거기서 남다른 의미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업에서 얻는 의미는 공짜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예들이 보여주듯이 직무 수칙에 규정된 수준 이상으로 생각을 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관심도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며 이러한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자산이다.

변화도 없고 긴장되지도 않는 일을 호기심과 성취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일로 바꾸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도 원하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별도로 정성을 쏟아부어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지겨운 일은 계속 지겨운 일로 남기 마련이다. 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직무에 임하면서, 이런 조치는 과연 필요한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어떤 조치를 곁들여야 내가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생길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불필요한 구석을 없앰으로써 일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전략이다. 같은 정력을 일을 더 잘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데 쏟아붓는다면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커질 테고 직장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P 139 로절린 알로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라고 술회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워낙 흐트러져 있어서 무슨 일이 터져도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진다.

 

P 147 어느 집단에서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음식, 따뜻함, 신체적 보살핌, 돈이 제공하는 물질적 에너지며,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다. 부모와 자식이 사고방식. 정서. 활동. 기억. 꿈을 공유하지 못하면 그들의 관계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간신히 유지된다. 그 경우 정신적 공감대는 원시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P 151 같이 있는 시간이 정말로 즐겁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목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모두가 공통의 목표에 정성을 쏟을 줄 알아야 한다.

 

P 153 리더십을 갖추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목표도 배려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P 154 일과 인간관계에서 몰입을 경험하는 사람의 삶은 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특별한 묘책도 없고 손쉬운 지름길도 없다. 자기한테 찾아온 기회를 함부로 내버리지 않고 잠재력을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하면서 삶을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 채우려는 사람만이 드높은 삶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 

 

P 164 자기 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P 175 어떻게 자기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주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느냐다. 불가에서는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이처럼 진지한 유희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근심과 겸손이 조회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지혜를 익힌 사람은 반드시 이기지 않아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패와는 무관하게 우주의 질서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시도 자체가 그에게는 보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사람만이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선의를 위한 싸움에서 희열을 맛보게 된다.

 

P 177 가장 어려운 장애물 – 리처드 스턴

그것은 내 안의 쓰레기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허영심. 자만심. 우월감. 비교 의식 같은 말로 묘사되는 부분이다. 나는 그런 부분을 다스리려고 무척 고생했다. 나보다 천성이 좋은 동료나 친구가 짜증과 원한의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그 점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내 안에 있는 긍정적 요소에 힘입어 그런 좋지 못한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안 좋은 감정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그걸 이겨내는 요령을 터득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P 178 우리에게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건설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 내부에 깃든 어둠의 정체를 깨달았으면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어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의 환상에서 비롯된 그 어둠의 오만 무쌍함 앞에서 웃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한 그 게걸스러운 욕망을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 

 

P 180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목표가 없으면 한 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산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등반가가 정상에 오르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내게는 이유는 꼭대기에 못 올라가서 환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목표가 있어야 등반에서 충실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이 없는 등반은 무의미한 발놀림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을 불안과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P 181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을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 (...)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P 187 상대성 원리나 최근의 프렉탈 기하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같은 현실이지만 그것을 상이한 다발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관찰자의 시점, 보는 각도, 시간대, 렌즈의 배율에 따라서 동일한 밑바닥의 진리가 아주 판이한 모습으로 떠오른 다는 사실이다. 

 

P 193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은 오래도록 울려 퍼지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상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개인 의식이 죽고 난 뒤 어딘가에 보존되든 아니면 깡그리 사라지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미래에 더 많은 정력을 투자할수록 우리는 그 생명의 일부분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거대한 진화의 틀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의 의식은 잦은 개울이 거대한 강물로 합류하듯이 우주와 하나가 된다.

 

P 194 생명의 흐름과 개인을 갈라놓는 것은 과거와 자아에 연연하고, 타성이 주는 안일함에 매달리는 태도다. 악마를 뜻하는 ‘devil’이란 단어의 어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deveil’은 떼어내다, 동강내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이다. 복잡성을 억눌러서 자꾸 단순한 것으로 토막 내는 게 악마의 주특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