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48]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고/유한원 옮김

pumpkinn 2018. 8. 6. 06:35

 

지금까지 읽어온 세계 역사들은 대체적으로 서구의 크리스천적인 관점에서 쓰인 책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관점으로 본 세계사는 어떻게 다를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슬람’을 떠올리면 우선적으로 ‘코란’과 ‘테러’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많은’ 우리는 이슬람과 테러를 거의 동시적으로 떠올리곤 한다. 물론, IS가 그렇게 ‘이슬람’을 내세우며 잔인한 테러를 자행했으니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슬람은 뭔지 모를 무서운 종교처럼 느껴졌고, 좋지 않은 선입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슬람은 그냥 나와는 거리가 먼 나라의 이야기. 나와는 상관없는 그래서 특별히 관심이 생기지도 않는 그냥 그런 대상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슬람을 좀 더 알고 싶은 관심이 생겼던 것은 안광복 선생님의 책 중에 나와 있는 ‘십자군’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왜 형제 종교로 서로를 존중했던 두 종교는 이렇게 양극단으로 갈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어쩜 내가 이슬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긴 잘못 알고 말고도 없었다. 아는 게 없었으니. 그럼 나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종교를 그렇게 싸잡아서 싫어하고 무서워하고 폭력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좋다 싫다를 떠나서 조금은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게다. ‘무지의 폭력’. 

 

그러던 중 몇 년 전 터키와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되었다. 놀랍게도 우리 가이드는 혹시 역사학 박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그분은 우리가 이슬람을 나쁘다고 알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슬람이 어떤 종교인지, 어떤 교리를 가졌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군중심리로 몰고 간다며, 우선은 어떤 종교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슬람의 문화와 교리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을 방문했을 때다. 천정에 회칠 가득한 소피아 성당,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과 그리스도 모두에게 성전이 되었던 역사적인 건물로 파란만장했던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설명을 듣는 동안 나의 마음을 끌었던 부분은 바로 이슬람교도들이 ‘회칠’한 이유 대목이었다. 이슬람이 점령을 하면서 소피아 성당 벽화를 회칠한 것은 지금은 자기들이 운이 좋아 이곳을 점령했지만, 언젠가 이 성전이 다시 그리스도교로 넘어갈 때 회칠을 벗겨서 자기들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 감동이었다. 그것은 존중이었고 배려였고, 역사를 바라보는 열린 코드였기 때문이다. 그 가이드 분의 설명을 들으며 그냥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어떤 의문들이 조금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교보에 들어가 책을 주문하다가 우연히 ‘이슬람으로 본 세계사’를 만나게 되었다.


 

 

 

저자인 타밈 안사리는 ‘아프카니스탄 카불의 유서 깊은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불 대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칸 남자와 결혼해서 아프카니스탄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었다’고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알기 쉬우면서도 유려한 필체로 옮겨 준 ‘유한원’의 말처럼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인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타밈 안사리의 방대하면서도 깊은 역사 지식과 그 방대한 역사를 한 흐름으로 보여주는 능력이 놀라웠다.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은 역사 관점과 객관적 이론 전개에 신뢰심이 들었다. 그는 이슬람이 옳다 그르다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으며 어떤 정신으로 시작되었는지. 당연히 모하메드의 탄생과 그 생애 일화를 보여주었고, 그 후, 시대에 따라 어떤 흐름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초기의 이슬람이 어떤 시대적 배경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분파가 어떤 이론을 추구하며 생겨났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당시 세계는 어떤 역동 속에 있었고, 어떠한 사건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태동되었으며, 서구와는 어떻게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한 사건에 대해 이슬람의 관점으로, 그리고 서구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보여주는 그의 탁월한 해석은 나를 흥분케 했고 전율케 했다.

 

그렇게 역사를 타고 가는 동안 여러 세계가 등장했는데, 몽골족은 이슬람 대학살을 벌이며 외적으론 이슬람 나라들을 정복했지만, 내적으론 오히려 영향을 받으며 이슬람교도가 된 무굴제국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파괴력은 있었지만 이데올로기가 없었던 몽골족 이야기와 종교개혁 시에 프로테스탄트들이 가톨릭엔 저항하면서 이슬람에 대해서는 우려를 하지 않았다는 부분도 나의 관심을 끌었고. 튀르크족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육체적인 건강을 위협했지만, 정신적인 건강을 위협하지는 않았다는 것. 그만큼 서로 이질적이고 평행적인 종교로 받아들여졌음 일게다.


 

근대로 들어오면서는 서구가 어떻게 이슬람교 나라에 개입을 했는지, 그리고 일시적인 승리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또 어떤 면에서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며 그렇게 근원적인 것을 다루기보다는 지금까지 익숙한 세계관이나 역사관 또는 종교관으로 해석하며 끌어오고 있는지를 실제 상황을 보여주며 그 흐름을 설명해 주었다.

 

이스라엘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일제히 공격했던 6일 전쟁으로 인한 그 파괴적인 후유증은 섬뜩했다. 결국 전쟁은 이기던 지던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이 6일 전쟁이 남긴 3가지 결과는, 첫째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인 PLO가 바로 6일 전쟁의 결과로 이어지고, “6일 정당이 끝난 뒤 불만을 품은 육군 장교들이 새로 설립된 바스당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이미 건강하지 못한 민족주의-사회주의에 군국주의 기질까지 뒤섞었다.”(P516) 물론, 바스당은 6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겼고 이미 시리아를 장악했지만, 6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라크에서 바스당의 두 번째 지부가 권력을 잡고 경찰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나라는 타협 따위는 모르는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이끌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결과였다.

 

세 번째 결과는 가장 불길한 것이었는데, 바로 “6일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세속 근대주의자 들과, 19세기에 나온 이슬람의 사상과 실천 중 다른 흐름의 지지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투쟁에서 전환점을 마련했는데, 그 다른 흐름이란 바로 와하야비야 운동과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이었다.”(P516) 그것이 바로 오사마 빈 라덴으로 이어지는 지하드주의자들이었다.

 

타밈 안사리의 말대로 이 “하드코어 혁명가들은 단지 ‘이슬람주의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지하드주의자’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이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광범위한 무슬림 다수의 신념에서 분명히 훨씬 벗어났으며, 심지어 대부분의 무슬림들에게 그들은 이슬람이라고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 분파는 이슬람주의의 한 조각이며, 이슬람주의는 정치적 이슬람의 한 조각이며, 정치적 이슬람은 전체 이슬람의 한 조각이다.” (P518)

 

그럼 6일 전쟁이 이룬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소 길기는 하지만, 안사리가 말하는 6일 전쟁의 결론을 적어보자면, 이스라엘은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를 얻었다. 그 영토는 더 이상의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완충 역할을 하기로 되었다. 하지만 대가로 그 영토 안에서 이스라엘 당국은 갈수록 늘어나는 반란에 부딪혔는데, 인티파다로 불리는 팔레스타인의 반란에 이스라엘은 갈수록 더 잔인한 방법으로 대처했다. 해가 바뀌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날수록 이 공격과 반격 증후군은 이스라엘의 진을 뺐으며 국제 사회에서 이들의 도덕적인 입지를 위태롭게 했다. 

대차대조표의 맞은편에서는, 6일 전쟁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과격해지고 ‘팔레스타인화’했으며, 바스당이 권력을 잡고, 무슬림 형제단이 힘을 얻었으며,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 지하드주의자 분파가 파생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극단적인 광신자들로, 사실상 모든 전쟁에서 비극적인 부산물인 결백한 방관자들이 방해가 된다고 해서 공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전쟁에 말려든 제3자가 결백할수록 더 좋은 목표물이라고 여기며 갈수록 더 끔찍하게 공격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테러리즘이라고 불리는 폭력의 독특한 한 장르다. 요컨대 6일 전쟁은 세계 평화를 위태롭게 만든 퇴보였으며, 무슬림 세계에 떨어진 재앙이자, 결국 이스라엘에게도 그리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P519)

 

이 6일 전쟁이 내게 그렇게 강렬하게 와 닿았던 것은 바로 그 결과 때문이었다. 평화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슬람이 언제부터 테러리스트로 우리에게 느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어떤 답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하게 ‘6일 전쟁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슬람의 세계 안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이 상황적 배경이 있었고, 또한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이나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서구와의 갈등도 양념으로 작용했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6일 전쟁의 후유증은 전 세계인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테러의 시발점이 되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이슬람 국가는 시아파의 호메이니 시대로, 수니파의 사담 후세인으로 흘러가게 되며 이슬람의 이름으로 서구와의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미국의 역할이 또한 흥미롭다. 늘 그랬듯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내정간섭을 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 그들은 ‘민주주의’ 또는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는 무시한 채 인형극 놀이를 한다. 바로 그들의 최대의 희생자들이 아프리카가 아닐까. 민족의 구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영토를 나누고는 국가라고 명명해주고. 그러니 부족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지리아엔 100여 개의 부족들로 이루어졌다니 실로 그 끔찍한 현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상상이 가는 부분이다.


 

미국의 보수파 역사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단지 냉전의 종식을 뜻하는 것만 아니라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지하드주의자와 와하비피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사건들에서 아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들이 보기에 이슬람이 이란에서 샤를 타도했으며 미국을 쫓아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슬림들이 소련의 적군을 무찔렀을 뿐 아니라 소련 자체를 전복시켰다. 즉, 그들은 역사가 끝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급진파들이 보기에 역사는 이제 겨우 재밌어지기 시작한 것이라 했다. 시작일 뿐이라고. (P540)

 

지하드 주의자들의 첫 번째 단계는 그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공동체의 이상적인 판본을 아프가니스탄에 세우는 것이었으니, 그곳은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정확히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신의 율법에 따라 살거나 벌을 받는 공동체였다. 이런 이유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와하피파의 자금으로 후원을 받은 지하드주의자들은 탈레반이 상장하도록 도왔는데,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모호하게 분리하고 있는 부족 사회 지역에 있는 난민수용소 출신의 구식 이념가들이 만든 당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아프가니스탄의 사체에 숨어든 과격 지하드주의자 중 일부 무리가 뉴옥에 있는 세게 무역센터와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본부에 납치한 항공기를 꽂아 넣을 계획을 꾸몄다. 그날,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게 사는 충돌했고 그로써 한 가지 결론이 확실하게 내려졌다. 바로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P541) 이렇게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끝이 난다.

 

그러면 어떤 세계사가 맞을까? 어느 쪽이 진짜 세계사인가? 서방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 정복을 했다고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알렉산더는 그저 세계를 이미 정복한 이슬람을 정복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세계 최초 발명된 도구들도 이슬람과 서방의 관점은 다르다. 

 

안사르의 말을 빌리자면,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한 때 우주란 ‘모나드’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나드는 특정 관점에서 이해하면 우주 전체이며, 각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상을 진리라고 상정했다. 세계사란 그와 같다. 특정 관점에서 보면 인류 전체의 이야기이고, 각 역사는 모든 다른 역사를 포함하며, 실제의 모든 사건은 중심 내러티브와 관련되어 어딘가에 자리한다. 그 ‘어딘가’가 그저 의미 있는 줄거리를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잡음의 일부로 배경에 놓이라는 것이라 해도, 그것들 모두가 세계의 진짜 역사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단일한 공동의 역사 안에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역사를 수집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업에 있다.” (P554)

 

 

 

 

십자군의 역사를 읽다가 성지 순례를 갔다가 과학혁명 세계사 강의를 듣다가 그렇게 여러 경로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이슬람. 그랬기에 이슬람의 눈으로 비친 세계사는 정말이지 재밌게 읽었다. 이슬람의 초기 역사는 스토리텔링처럼 재밌게 이어졌고, 근세 근대로 들어오면서는 흥미진진했고, 현대로 들어오면서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로 생생함 속에 읽었다.

 

각 나라마다 문화도 역사도 습관도 다르다. 음식을 먹을 때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일본에서는 개나 밥그릇을 바닥에 먹는다고 하지만, 밥그릇을 상 위에 놓고 먹는 우리나라에서는 못 배운 이나 밥그릇을 들고 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서로의 문화에 대해 옳고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존중해야 하는 배려의 차원이다. 하물며 종교와 신앙은 그 갭이 더 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을 규정하고,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바라보는 양식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존중 속에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일 것일까? 과연 나의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틀린 것일까?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서로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는 같은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랑’을 가르친다. 사랑의 종교이고 사랑을 강조하고 사랑을 나누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종교가 아닌 이들은 내치고 판단하고 난도질 한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어느 시골 성당의 신부님과 스님은 아주 가깝게 지내시는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위해 성당을 빌려드렸단다. 그 절은 조그맣기 때문에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런가 하면 성탄절에는 스님께서 오셔서 미사를 함께 보시며 성탄 축제를 함께 즐기신단다. 이것은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동안 이멜을 주고받았던 지인이 알고 지내는 신부님의 이야기다. 이게 사랑이 아닐까. 우상을 섬긴다며 불상을 깨부수며 스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의 종교를, 신앙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사랑을 삶 속에 나누며 평화롭고 조화롭게 사랑가는 것. 어쩌면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 ‘부처님’, ‘알라’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카톨릭 신자다. 그것은 누가 강요한 종교가 아니고,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믿고 있는 신앙이다.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불교 신자이고, 이슬람 신자고, 또는 그 밖의 다른 종교를 가진 신자일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포용하고 수용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내는 멋진 오케스트라 연주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책 중에 나오는 정복자 우마르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이슬람의 칼리프가 승리의 표식으로서 자신들에게 가장 신성한 교회에서 무슬림식 예배를 올리고 싶어 하리라고 짐작했지만, 우마르는 그 교회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조만간 무슬림들은 그 일을 핑계 삼아 그 건물을 차지해 모스크로 바꾸려 들 것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무슬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까지처럼 살고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해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며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괜찮다. 알라가 우리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P102)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말로 폭력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써 그 종교를 알고 싶게 하고 그 신앙을 갖고 싶게 하는 것일 게다. 

 

읽는 동안 끝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역사와 배움에 전율했고 흥분했고 열광했던 시간이었다. 앞으로 편협적인 사고와 무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은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그런 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조심스러운 바람을 가져본다.

 

 

* 살짝 덧붙이는 말씀

 

이 책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지 이슬람 종교에 국한된 책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리뷰가 마치 종교로 한정되어 표현된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관한 관심으로 읽었던 터라 아마도 내겐 종교적인 관심이 가장 많이 작용되었던 것 같다.

혹시라도 타밈 안사리의 훌륭한 책이 나의 한계로 인해 왜곡될까 걱정되어 미리 고백성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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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Trenning - The Welcome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