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34]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가 보여주는 선과 악 / 이윤기 옮김.

pumpkinn 2015. 8. 25. 11:55

 

움베르토 에코, 그가 벌써 작고한지도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는 나의 존재조차도 모르지만, 삶의 어느 시점에서 현대의 지성과 같은 하늘 아래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출판사에 근무하던 여자 친구로부터 추리 소설을 써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고 2년 반 만에 탄생한 책이 <장미의 이름>이다. 만약 여자 친구의 권유가 없었으면 이 책은 하마터면 탄생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오늘날 가장 저명한 기호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부터 현대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지식을 쌓았고, 전 세계 수십여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해독하는 지독한 <공붓벌레>이자 <언어의 천재>이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움베르토에 대한 표현이 과장된 찬사가 아니었음을 느끼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그의 방대한 지식과 지적 풍요에 혀를 끌끌 차면서 빠져들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고자 했던 것은 중세 시대의 로마의 역사를 알고 싶었음에서였다. 그런데 수도원의 역사와 아비뇽 사건을 비롯해 성지 순례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프란치스코회의 소형제 수도회에 대해 상세한 내용들까지 만나게 되다니. 생각지 못한 반가운 선물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귀한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이자 한 때 종교재판 조사관이었던 윌리엄 수도사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베네딕트회 수련사인 아드소가 초대되는데 두 수도사가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동안에도 계속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들. 잠시도 손을 떼지 못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 나는 그렇게 숨을 죽이며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움베르토 에코 특유의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비판적 시선으로 파헤쳐지는 선과 악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이분법적 사고로만 해석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주관적 시선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가. 과연 우리는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럼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함은 나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맑고 순수한 영혼의 젊은 수도사 아드소답게 던지는 이분법적 질문에 경험 많고 열린 사고를 가진 윌리엄 수도사의 지혜로운 답변은 가끔씩 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숨 막힐 것 같은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얼마나 많은 호르헤가 우리와 함께 하는가. 

 

윌리엄과 아드소 수도사가 함께 펼치는 수사 작전의 모든 과정은 아드소 수도사의 맑고 순수한 눈을 통해 비쳐진다. 그의 관점에서 풀이되는 순진하고 정직한 표현들은 너무나 진지해서 읽는 내내 웃음이 쿡쿡 터지곤 했는데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장면들이기도 하다. 

 

 

 

 

한창 마녀사냥이 유행이었던 중세시대, 그 모든 기준은 '신앙'이 아닌 ‘종교’라는 틀 안에서 흑백 논리로만 분리되며 훈련된 사회였다. 그런 사회 현상 속에서 종교적 삶을 택한 호르헤 노수도사의 행동은 그리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그의 행동에 대한 '공감'의 영역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었던 배경에 대한 '이해'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가 생각하는 종교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흑백 논리 속에 갇힌 호르헤 수사의 장님 같은 관점. 어쩌면 움베르토 에코는 그것을 강조하고자 호르헤를 장님으로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시대적 배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멋진 윌리엄 같은 수도사도 있으니, 종종 느끼게 되듯이 역시 품성과 됨됨이는 타고나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호르헤 수도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놓고 윌리엄 수도사와 벌이는 논쟁을 보면서 한 인간이 얼마나 진리를 잘못 해석할 수 있는지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얄팍한 지식을 배경 속에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의 이름으로 얼마나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소름이 돋았다.

 

아는 것은 많지만 머리가 굳은 사람들, 다름을 포용할 줄 모르는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로지 그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 안에 갇혀 선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파괴자들. 그는 그렇게 웃음을 경멸하며 가짜 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두려워했지만, 윌리엄 수도사의 말대로 실은 그 자신이 바로 거짓 그리스도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P871)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거다. 우리는 참 진리와 참 신앙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 받아들일 때가 많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많이 오류를 범하는 부분은 ‘신앙’과 ‘종교’를 혼동하는 부분이 아닐까. 결국 신앙이란 사랑이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인데, 우리는 ‘종교’ 안에 신앙을 가두고, 종교를 갈라서는 이웃을 저 멀리 내치고는 내 종교만 옳다고 하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역사 속에 가장 부끄러운 사건은 아마도 ‘십자가 전쟁’이 아닐까 싶고, 현재 쓰이고 있는 역사 중에서는 ‘IS 전쟁’ 일 것이다. '사랑'을 나누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내 사랑을 지키자고 다른 종교의 사랑은 파괴하는 모순되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내가 카톨릭 신자로서 가장 부끄러웠던 부분은 바로 '십자가 전쟁'이었다. 

 

터키 순례 여행 중 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다. 크리스챤과 이슬람 사이에서 빼앗고 빼앗기며 많은 역사적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소피아 성당에서였다. 아직도 곳곳에 이슬람에게 점령되어을 때 회칠이 되어있는 여러 흔적들을 보여주며 가이드의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소피아 성당을 차지한 이슬람교가 성당에 회칠을 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존중이었다고 한다. 깨부수고 자신들의 모스크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성당을 그대로 보존했다. 벽과 천정을 회로 칠하고 자신들의 모스크로 사용한 것은 지금은 자신들이 운이 좋아 소피아 성당을 차지했지만, 언젠가 다시 그리스도인들이 되찾았을 때 예술 작품을 그대로 돌려주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였다. 회칠은 긁어내면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예술 작품을 회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감동이었다. 

 

참고로, 이야기의 객관성을 위해 이 가이드는 카톨릭 신자였음을 밝혀두고 싶다. 그때 그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은 극히 일부라는 것. 그 일부가 전체인양 해석되고, 잘 모르기에 두려움 속에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편향적인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마도 내가 이슬람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두려움'은 '모름'에서 오는 것이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 역사>도 그래서 읽게 되었던 책이다.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카톨릭의 역사와 교황에 역사, 그리고 수도원의 역사와 서로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된 것은 보너스로 따라온 배움이었다. 


‘장미의 이름’은 오래전 이미 영화로 보았기에 내용은 알고 있었다. 영화를 볼 때 얼마나 두근거리며 조마조마하며 보았는지. 그때 진땀을 흘리며 보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책을 읽으면서도 장면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어 그 재미를 더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역시.. 윌리엄 수도사 역엔 숀 커네리가 아니면 안 되었어...”하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아드소 수련사는 크리스챤 슬레이터여야 했다.

 

 

 

 

윌리엄 수도사에 대한 아드소의 표현의 너무 재밌어서 읽다가 쿡쿡거렸다.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없기에 개인의 외모에 관한 묘사는 하고 싶지 않다는 아드소 수련사가  윌리엄 수도사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다. 

 

“윌리엄 수도사의 외모는 남의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시선도 능히 끌만큼 준수했다. 키는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그러나 몸매가 호리호리한 탓에, 그 큰 키는 실제보다도 더 커 보였다. (...) 그는 꽃 피는 봄을 쉰 번이나 본 분이어서 당시 이미 노경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항상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오히려 더 활기를 띠었다.” (P38)

 

윌리엄 수도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느껴지는 부분이다. 물론 윌리엄 수도사가 그리도 존경스럽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바로 그의 열린 성품 때문이긴 했지만, 읽는 내내 숀 커네리로 연상되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윌리엄 수도사가 숀 코네리의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은 비단 영화를 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라고 우겨도 할 수는 없겠지만, 책에서 느껴지는 윌리엄은 숀 코네리가 아닌 다른 배우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닮았다. 윌리엄 수도사 역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가 56세였으니 연륜에서 오는, 연륜만이 안겨줄 수 있는 매력을 여지없이 그대로 발산했을 숀 코네리, 어찌나 멋지던지 책을 읽다가 그에게 푹 빠져 허우적거렸다. 영화 'Finding Forrester'에서도 윌리엄이었는데, '장미의 이름'에서도 윌리엄이다. '윌. 리. 엄' 음운이 안겨주는 남성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중후하면서도 지적인 품위. 역시 숀 코네리여야 했다.

 

암튼. 매력이 철철 넘치는 윌리엄 수도사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얽히고설킨 무서운 사건들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해박한 지식을 가졌지만, 때때로 장난기 가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치의 물러남 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펼치며 위엄을 과시한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고 박식한 지를 잘 알고 있기에 때때로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것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며, 열린 마인드로 사건을 해석하고 해결하는 그야말로 중세시대의 007이었다.


 

 

숀 커네리만큼은 아니어도 크리스챤 슬레이터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의 한 명이다. 잘 생기진 않았지만, 연기력이 좋고 맑고 맑은 영혼이 그대로 드러나는 천진스러운 눈빛이 소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 그의 그런 천사 같은 눈빛 때문에 캐스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드소는 배우고 느낀 것을 ‘진리’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아직은 어린 수련사라 자신이 믿는 진리가 얼마큼 좁은 틀에 갇힌 것인지 모른다. 중세시대 범해졌던 많은 오류중의 하나인 흑백 논리의 교육을 받았지만, 윌리엄 수도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된다. 과연 진리가 무엇인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충격 속에 배우게 된다. 

 

이방인의 종교라고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존중해야 할 것은 존중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 속에 어떠한 사물이나 상황을 한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며 성장해 가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승님과 헤어질 때 정말로 눈물을 흘렸을 것 같아 가슴에 싸한 아픔이 일었다. 책을 읽는 내내 윌리엄 수도사 같은 스승을 가졌던 아드소를 책을 읽는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가만 보면 나는 훌륭한 스승이 되고자 하는 바람보다는, 훌륭한 스승을 모신 학생이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인 것 같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카지노 로열'처럼 긴박감 넘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한 호흡으로 읽어 내려가게 했던 책 <장미의 이름>.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재미는 물론 움베르토가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주는 중세 역사도 함께 배우는 즐거움도 함께 누린 행복했던 시간. 

 

나는 호르헤 수사처럼 자기중심적 사고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아닌지.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세상의 지식인양 그 얕은 앎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들지는 않는지. 사랑의 이름으로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조심스럽게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한 마디...

 

오늘 리뷰를 쓰다가 문득 숀 커네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졌더니 놀랍게도 오늘이 숀 커네리의 생일이다. 1930 8 25일생으로 84. 이런 우연이~!! 삶 속에 불현듯 마주치게되는 이런 우연을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마치 숀 커네리와 어떤 보이지 않는 에너지 속에 어떤 교감이 일어난 듯한 느낌이 들어 들뜨기마저..^^;;

 

Happy Birthday to You, Sean~!!

 

감동깊게 보았던, 데이빗 셀린저를 모델로 한 영화 Finding Forrester 2003년에 찍었으니, 그의 나이 73세에 찍은게 아닌가. 그런데도 어쩜 그렇게 여전히 매력적이고 근사한 모습이었는지...

그에게는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표현보다는 존경한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Finding Forrester’에서도 그랬고, ‘장미의 이름에서도 스승의 역할로 나왔고, 나 역시 그의 제자가 되어 많은 것을 배웠기에 마치 내게도 스승처럼 느껴진다는데야 누가 뭐라 그럴까나...

 

삶에서도, 학문 분야에서도, 그렇게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그런 스승이 내게도 계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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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ya의 Book of Days..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장미의 이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한 권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이 곡을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