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32]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 용경식 옮김

pumpkinn 2015. 2. 10. 07:47

로맹 가리 & 에밀 아자르

 

 

손에서 잠시도 떼어내지 못하고 한 호흡으로 읽어 내린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체한 듯 소화되지 않은 먹먹한 감정이 나를 힘들게 했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창녀로 일하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로자 아줌마와 역시 창녀의 아들로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아랍인 꼬마 모모로 불리는 모하메드가 그려내는 사랑이야기.


아우슈비츠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통을 받았던 로자 아줌마는 삶이 너무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는 침대 밑에 넣어둔 커다란 히틀러 사진을 꺼내보곤 위로를 삼곤 한다. 로자 아줌마는 95 킬로그램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를 힘들게 오르내리며 투덜대고 가끔씩 아이들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보육비를 보내지 않아도 아이들을 빈민구제 소로 보내질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줌마다. 자신 역시 ‘삶이 엉덩이로 차 버린’ 구역질 나는 삶을 살았던 터라 그녀들을 이해했고,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로자 아줌마의 얘기로는,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했다. 포주들이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그런 여자들에게는 삶의 의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P30)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왜 창녀들이 아이를 갖는지를. 그저 실수로 아기가 생기게 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게 되는 거라고 그저 생각이 이끄는 대로 짐작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도 모자라 대책 없이 아이까지 낳는 무책임한 여성들이라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기에 삶의 의의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아이가 더 필요했다니.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 이유가 브라질 빈민촌의 여성들이 아기를 많이 낳는 이유와 같아서 더 놀랐다. 브라질 빈민촌의 여성들은 그 열악하고 끔찍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도 많은 아이들을 낳는 이유는 생활보조금을 타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맞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아이들을 갖고 낳고 키우는 동안 현실의 힘겨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삶의 의미를 느끼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듣고는 가슴에 싸한 통증이 일었더랬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나만의 시선으로 단죄하는지.


‘우리는 결코 아무렇게나 편히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상황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모모는 말할지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창녀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활을 모른다. 그저 영화나 책 또는 뉴스를 통해 접할 뿐.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창녀들의 세계를 좀 알 수 있었다. 창녀들에 대한 시선에 좀 따뜻함이 묻어졌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회적 시선을 그들에게서 거두기 힘들고, 나름 왜 그런 의견을 갖는지에 대한 생각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사랑까지 부인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하밀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P93)


무섭고 두려움이 견디기 힘들 만큼 자신을 점령해오면 로자 아줌마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지하의 유태인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렸다. 로자 아줌마만의 마음의 피난처를 둘러보고 있는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는 말한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P69)


눈물이 났다. 그래.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눈을 뜨면서 엄습해오는 정체불명의 두려움에 꼭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로자 아줌마는 지난날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고통이 현실과 뒤범벅이 되어 공포로 다가오지만, 내게는 때때로 삶 자체가 두려움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두려움은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내가 그려내는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는,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두려움. 그럴 때는 무언가에 더 몰입하게 된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라도.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고, 때때로 어려움에 봉착하긴 하지만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회사가 있는데도 이런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곤 서로에게 하나뿐인 로자 아줌마와 모모가 서로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모모는 사랑하고 따랐던 로자 아줌마가 죽음을 맞았음에도 3주 동안이나 함께한다. 로자 아줌마를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병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아줌마가 인간들에게 고통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한 푸들을 부잣집 아줌마에게 보낸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나보다 더 잘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주는 것.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끝까지 곁에서 지키는 것. 그것이 어린 모모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어린 모모는 ‘행복’에 대한 자세는 확고하다. 삶이 주는 험한 레슨을 이미 너무 어린 나이에 경험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약에 대해서는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로 경멸한다. 마약 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P99)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P116)


그는 너무 외로웠다. 자신은 달랑 혼자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그랬기에 로자 아줌마에게 자신이 얼마나 간절하게 필요한 존재인지를 모모는 잘 알았다.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P114)

모모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리뷰를 쓰면서도 내 눈엔 자꾸만 눈물이 그런 거 몇 번씩이나 손을 내려놓아야 했다. 자꾸만 자연의 법칙에 반항하려 하는 아줌마의 얼굴에 화장을 해주고 립스틱을 발라주고 향수를 뿌려 주며, 이미 저세상으로 건너간 로자 아줌마 곁에 함께한 3주 동안 모모는 죽음과 어둠 소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고, 또 슬펐을까? 어쩌면 아줌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갈 거라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을게다. 그렇게 아줌마를 따라가고 싶었을 모모.


모모를 자꾸만 불러주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모모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는 없는 것.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름이라는 것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이 있어야 그래야 아니까. 이름이라는 게 이렇게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오늘에야 알았다.유대인 로자 아줌마와 아랍 소년 모모의 이야기. 그래 맞다. 하밀 할아버지의 말씀이 맞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왠지 뭔지 모를 슬픈 느낌이 드는 분위기의 이름이다. 어쩌면 로맹 가리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만들어준 얼굴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고 싶어 만든 가명이기에 그 이름엔 이미 자유로의 갈망과 구속의 슬픔이 함께 어우러져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건지도.


“곰브로비치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런 시도를 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자 그 시도가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P313)


“그래서 나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젊은 시절, 초창기, 첫 소설에 대한 향수,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에 시달렸다, 새로 시작하는 것, 다시 사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이 내 존재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P323)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얼굴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로맹 가리는 결국 에밀 아자르로 새로이 탄생하게 되고,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신생 작가의 탄생으로 프랑스 문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동안 로맹 가리는 얼마나 재밌어하며 그 상황을 즐겼을까? 그 순간이 그에게는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내놓은 뛰어난 작품들이 후에 자신의 표현을 옭아매는 바로 그 동아줄이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상을 받았고, [자기 앞의 생]으로 또다시 공쿠르 상을 받았다. 그때 그는 로맹 가리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였다. 그와 두 번이나 결혼한 할리우드 여배우 진 세버그가 자살한 후 일 년 후 그는 권총을 자신의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모든 작가들이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가들이 자살을 한다. 자신들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로맹 가리의 유언장에 쓰인 것처럼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암튼. 로맹 가리가 자살을 시도함으로써 에밀 아자르까지 우리는 두 명의 훌륭한 작가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하긴 그래. 무서움엔, 두려움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사랑해야 한다고 해놓고, 그들은 사랑의 끈을 놓아버렸다.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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