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05] 그리스에 미친 작가,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읽고 / 김희균 옮김, 강대진 감수

pumpkinn 2013. 5. 31. 05:20

 

내가 왜 이렇게 그리스에 열광하는지는 나 역시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내 첫사랑이 그리스 남자였던 것도 아니고, 어렸을 때니 그리스에 가 본 것도 아니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그리스를 사랑하며 세상에 나온 듯, 그냥 그리스는 존재 자체로 무작정 동경으로 다가온 대상이었다.

 

심지어 그리스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 늘 그리스 남자가 주인공이던 앤 햄프슨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책에서 만난 주인공 이름을 내 이름과 함께 적어놓고 하트 모양을 그려 넣고는 좋아라 하던 나. 그때를 떠올리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래서 내 친구들은 내가 정말로 그리스 남자와 결혼할 줄 알았단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리스 여행을 보내주는 남자와는 결혼했다. 친구였던 남편은 지금도 놀린다. 

 

"그리스 남자와 결혼할 거라며?" 
"#@@@$#$@*&"

 

그리스는 그렇게 나의 온 관심과 사랑을 고스란히 받은 나라였다. ‘그리스’라는 이름부터 내겐 신비스러우면서도 뭔지 모를 동경을 일으킨다. 인간의 품성을 지닌 신들의 이야기, 인간을 사랑한 신, 신을 사랑한 인간, 인간을 질투하는 신, 질투하는 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려는 신, 신과 인간들의 싸움 등등 그 모든 것이 내겐 환상적이고 어쩔 수 없는 매력으로 느껴지는 게다. 

 

좀 더 알고 싶고 깊게 파고들고 싶은데 정작 나의 마음과는 달리 단편적으로만 조금씩 알 뿐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좋아하는 내 모양새가 웃기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리스의 문화나 신화에 잘 알지 못하기에 막연한 동경이 갈망과 열망으로 이어지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앙드레 보나르의 <그리스인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문명이 어떻게 탄생이 되었는지부터 시작하여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거쳐 페리클리스까지 주룩 흝고나니 어찌나 신이 나는지. 유레카~!! 가 절로 외쳐지는 순간이다. 

 

앙드레 보나르 Andre Bonard (1888-1959)

 

 

앙드레 보나르는 1888년 스위스에서 로잔에서 태어나 로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1936년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5~1928년 로잔 중학교와 고전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이후 1957년까지 30년 동안 로잔 대학 그리스어, 그리스 문학 교수를 지냈다. 대학 교수이자 작가로서 앙드레 보나르는 여러 저작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 생생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입히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글에서 지식인 사회 특유의 사변을 걷어내고, 학생들이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대하듯이 읽도록 가르쳤다.

 

책 날개에 쓰여있는 앙드레 보나르 소개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엔 ‘안광복’ 선생이 떠올랐다. 안광복 선생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를 얼마나 재밌게 읽었는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깔깔대며 읽으면서 철학의 전체 흐름을 알 수 있어 신이났더랬는지. 안광복 선생은 철학이 지루하고 골치 아픈 학문이 아니라 재밌고 쉽게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으로 끌고 내려와 학생들에게 가까이 느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앙드레 보나르와 참으로 닮았던 까닭이다.

 

어디 그뿐인가?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은 어찌나 재밌고 유쾌하고 명쾌하며 맛갈스러운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또한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놀라운 내용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 방대한 내용을 마치 시냇물 흘러가듯 쉽게 풀어쓰며 전체적으로 이해를 도우니 어찌 내가 미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그동안 두서없이 읽었던 그리스 신화나 문화 이야기가 제자리로 맞춰 들어가 조각모음이 되며 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가 좋아 미치는 것은 당연했다.

 

앙드레 보나르는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한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말로만 참여하는 이론적인 인문주의자가 아니라 행동하며 참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냉전의 위기가 최고조로 달했던 1952년 ‘국제평화수호자대회’ 참석차 동베를린으로 가던 중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그를 위해 구명운동이 일어났고, 그 역시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이적행위일 수는 없다’고 맞섰지만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후 그리스 문명사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다가 1959년에 작고했다.


그리스 문명의 탄

 

 

앙드레 보나르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 문명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부터 보여주었다. 그리스 문명의 탄생엔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 어떤 환경이 어떤 이유로 인해 그리스 문명이 탄생되었는지를 아주 재밌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가 전해주는 그리스 문명의 탄생을 읽으며 지금까지 보도 듣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접하며 내가 느낀 것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봄의 축제를 하며 멀쩡한 처녀가 나무로 만든 신 디오니시스와 몸을 섞는 관습부터 시작하여,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친조카를 3명이나 제물로 바치는 총사령관 테미스토 클래스 이야기까지. 죽은 자를 위해 수프를 끓여놓는 풍습은 그나마 우아한 부분이었다.

 

자식을 노예로 팔거나 버릴 수 있는 아버지의 권리는 황당스러웠다. 죽일 놈이든 키울 놈이든 한 가문에서 아이들이 여럿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너 형제들이 합쳐서 한 명의 부인을 두며 번갈아 가며 남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악스러운 이야기였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그야말로 “이런 짐승 같은 것들~!!” 욕이 절로 튀어나오고. 그러니 여성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앙드레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그리스어엔 ‘바다’를 칭하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도 놀라움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 '바다'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었다니. 어디 그뿐인가? 그렇게 뛰어난 문학과 예술의 문화를 가진 그리스에서 ‘문학’이라는 단어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표현이 풍부한 작품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리스의 매력에 흠이 생긴 것은 아니다.

 

바다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원주민들에게 배운 기술로 배를 만들어 바다에 나가는 그리스인들의 용기. 문학이란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어. 그럼에도 그리스인들은 일을 하며 노동의 힘겨움을 덜어버리고자 불렀던 노동요가 서사시가 되고 나중에 서정시, 극시로 발전하게 한 그리스어의 풍요로움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세상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에 대한 법칙을 알고자 하니 과학이 발달되었다는 것. 그들이 학문에 매진한 이유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인간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으니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두 말하면 숨찬,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이야기였다. 훌륭하게 자란 이들을 보면 어떤 부모님 밑에서 어떤 가정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을 했는지를 알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앙드레가 지적했듯이, 그리스의 문명과 문화의 발달을 가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쨘~!!”하고 생겨난 것은 없었다. 필요에 의해서 (실은 배가 고파서) 바다에 나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웃나라의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또 그러다 보니 문학을 배우게 되었고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들을 이용해 인간을 기쁘게 하고 봉사하려는 마음이 바탕에 깔리며 발전되었다는 것. 이러한 모든 배경들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스인들이 농사와 뱃일을 에게인들, 즉 크레타인들에게 배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반가움이 밀려왔다. 내게 깊고 깊은 감동을 안겨주며 열광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 바로 크레타가 아니던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크레타인들에겐 이미 글이 있었고, 2층 집에 샤워실까지 만드는 앞선 문명의 크레타 섬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거장이 나왔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닌 듯싶었다. 피는 못 속이는 거니까. (내 새끼도 아니구먼 괜히 내가 흐뭇하고 난리다.)

 

각 도시들 간에 그리 전쟁이 많았어도 올림픽이나 어떤 경기가 열릴 때는 ‘전쟁 중단’이라는 것도 유쾌했고, 또한 다른 야만족으로부터 침입을 받을 때는 지들끼리 그렇게 싸워대다가도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대항했다는 것도 재밌었다. 물론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지만.


 

“우리는 흔히 나쁜 의미에서 야만족이라는 딱지를 붙이지만, 야만족의 본래 의미는 그리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타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타지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그것이 그리스인이 듣기에는 ‘바르바르’라는 새소리와 다름없었다. 제비도 야만족이고 타지인도 야만족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인들이 야만족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앞선 문명을 그리스인들도 충분히 존중했다. 다만, “자유롭고 싶고 누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가 여느 민족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P34)

 

너무 웃기는 언어 탄생의 비화. 그래서 바르바르라는 새소리와 같아서 그들은 타지인을 ‘바르바르’라고 불렀다는 것. Barbaro는 스페니쉬어로도 ‘야만족’이라는 뜻이다. 야만족의 탄생이 그리 시작되었다니 어찌나 웃기던지. 그만 깔깔 웃음이 터져버렸다.

 

어찌 됐든, 그리스 민족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그들의 수단을 가지고 문명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신이 기적처럼 나타나서 그리스인에게만 특별한 재능을 부여했을 리 없다. 문명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분투해온 것들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리스 문명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문명이 발달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은 거꾸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면 세계가 다시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세계는 서로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다. 인간은 세계를 바꾸고 세계는 다시 인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의 본질이다. 인간과 세계의 접합. 인간과 세계의 융합을 지향한다. 인간과 세계는 대립하는 당사자로서 서로 싸우고 투쟁한다. 그러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나간다. 문명을 완성하는 것이다. (P45)

 

그리스의 문명의 탄생에 이어 가장 먼저 읽게 된 것은 위대한 시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였다. 앙드레는 일리아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민족의 전쟁사다. 
정복욕에 불타서 혹은 신의 부름을 받아서 전쟁에 나선 영웅들의 이야기다. 
가장 끔찍한 재앙에 투입된 인간들. 
“신 가운데 가장 더러운 신이며, 피를 마시고 사는” 
아레스의 포로가 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일리아스는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트로이아 전쟁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전쟁은 오늘날 그리스 본토라고 불리는 뮈케나이의 아카이아인들과, 소아시아의 아이올리스인들 사이의 경쟁심이 발단이 되었다. 재밌는 것은 일리아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호메로스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엮어 하나의 시편에 담고, 하나의 드라마로 완성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태어나서 전장에서만 자란 아킬레우스. 그는 사회생활의 쓰라림도 겪어본 적이 없고 져본 적도 없는 혈기 왕성하고 피가 끓는 젊은이다. 하지만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그 이기에 감정의 포로가 되고 제 감정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가련한 영혼이다. 그래서 아킬레우스의 영혼은 늘 폭풍이고 흐림이다.

 

하지만 그는 삶을 사랑하고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앙드레는 표현한다. 오로지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렇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그였다고 말이다. 아킬레우스는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에게 죽음은 없다. 왜냐하면 현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전사일 수밖에 없는 아킬레우스 인 것이다. 무사하게 오래 살기보다는 명예로운 삶, 즉 명예로운 죽음을 택함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삶을 택한 것이다.

 

그런 아킬레우스에 반해 헥토르는 전혀 다른 성장환경을 갖고 있다. 헥토르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는 헥토르에게 특별한 애정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호메로스라는 작가를 휴머니스트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라고 앙드레는 말한다.

 

헥토르도 아킬레우스만큼 용감한 사람이지만, 그 둘은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용감한 사람이고,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훈련을 통해 용기를 배운 핵토르.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하면 신이 나는 사람이지만, 헥토르는 전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쟁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가 자기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였음이니 어찌 그를 적장이라 하여 애정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호메로스의 그에 대한 특별한 사랑에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다. 토르야 말로 진정 용감한 인간이었다. “두려움이 뭔지 알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 그런 용기야 말로 진정한 최상급의 용기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휴머니

“아킬레우스는 용감해지기 위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색과 품위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사색과 품위만으로 헥토르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용기는 더 깊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헥토르가 갖춘 품위는 그저 단어로서 존재하는 품위가 아니다. 헥토르의 품위는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데 있고, 필요하다면 조국을 위해 죽는 데 있고, 아내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데 있다. 헥토르의 용기는 현자들의 용기와 다르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용기는 일상과 동떨어진 머릿속에 존재하는 용기이지만, 헥토르의 용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용기다.” (P89)

 

도저히 따로 떨어뜨려 적을 수가 없어 본문을 빌려왔다. 헥토르는 그런 용기를 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헥토르는 그렇게 가족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진정한 시민이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는 아킬레우스도 끝까지 사랑하려고 했다. 칼을 놓치고 아켈리우스 앞에서 죽어가면서도 헥토르는 사랑을 했고 평화를 꿈꾸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 싸우러 나가기 전 사랑하는 아내 안드로마케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를 읽으며 마치 안드로마케가 된 듯 폭풍 눈물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나 역시 안드로마케처럼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의 자유를 빼앗아갈까 봐, 당신을 슬프게 할까 봐....”를 걱정하는 남편 헥토르. 또 눈물이 그렁댄다. 헥토르는 헥토르이기에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운명이 나를 삼킨다. 
그러나 나는 싸우지 않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성할 것이다.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을 것이다.

 

그랬다. 헥토르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싸우고 사랑하다가 죽음을 택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삶을 활활 불태우고 한가닥 미련도 남겨두지 않고 재가 되는 삶.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리스인 이야기를 통해 만난 또 한 명의 진정한 영웅 헥토르, 그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앙드레의 입을 통해 듣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영화 <트로이>가 떠올랐다. 호메로스가 표현한 인물 하나하나를 영화에서 너무나도 표현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킬레우스 브래드 피드. 헥토르 에릭 바나, 파리스 올란드 블룸, 그리고 프리아모스 필립 폰다. 읽는 내내 내겐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은 배우들로 대치되어 더 깊이 빠져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바로 왜 프리아모스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한 전쟁의 원인을 가져다준 헬레네를 미워하지 않았는지, 왜 안드로마케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 헥토르를 죽게 만든 원인인 헬레네를 미워하지 않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 의문점이 풀렸다.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헬레네 역시도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프로디테의 시기를 받아 이런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신들의 전쟁에 희생양이 된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아름다운 감동은 신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인물은 바로 파리스다. 파리스의 복합적인 성격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씁쓸함이 일었다. 파리스의 웃기는 짬뽕 같은 변명에 “헉~” 소리만 나왔다. 앙드레 말처럼 헬레네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차라리 파리스가 자기 남편처럼 용감한 사람이었으면 마음고생이 덜했을 터. 저런 쪼잔하고 좀팽이 같은 비겁한 남자를 쫓아서 트로이까지 쫓아오게 되고, 자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상황 속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으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싫었을까.

 

더욱이 자신은 정숙하고 법도를 지키는 여인이었는데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아프로디테의 시기로 인해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으니. 그야말로 신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법도와 질서를 지킨 것이 죄요, 아름다운 게 죄였다.

 

앙드레 말처럼 일리아스에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재밌는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가졌으며 그들만의 매력을 지닌 인물들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대서사시다.

 

“<일리아스>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P95)

 

앙드레의 말처럼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일리아스 부분에서 디오메데스에 대한 부분도 건드리고 싶었으나 참았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치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스에게 대들고 아폴론과 맞서는 용기. 그것은 분명 신을 우습게 보는 건방진 모습이 아니라.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순수한 열정을 다할 뿐이었다는 것. 그가 신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오만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불꽃이 그를 담대하게 할 뿐이고 그는 정열적인 사람인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는 그 정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열에도 색깔이 있다. 
아킬레우스의 정열이 우울하고 엄숙한 것이라면, 
디오메데스의 정열은 밝고 경쾌하다. 
광신도의 열정이다.

 

디오메데스의 용기는 아테네 여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보면 디오메데스는 중세 기사를 닮았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기사답다는 앙드레의 말에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전사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디오메데스에 대해 어찌 한마디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단 말인가. 


키클롭스와 오뒷세우스

오뒷세우스와 바다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그리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오뒷세이아>고. 글도 <오뒷세이아>로 배운다고 한다.  <오뒷세이아>는 ‘그렇게도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스토리구나’라는 감탄사보다 ‘그리스 어린이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인문학 고전과 함께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는 호메로스에게 간택받았고, 그의 입을 통해 전쟁의 영웅에서 바다의 영웅이 되어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많은 즐거움과 모험심을 안겨주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역시나 흥미로웠다. 오뒷세우스는 일리아스처럼 호메로스에 의해 전래되어오는 이야기로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재편집된 이야기다. 

 

이야기 흐름은 10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향길에 바다 위에서 겪게 되는 온갖 모험과 탐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집으로”라는 번역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오뒷세우스는 황금에만 눈먼 자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새로운 것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선원들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퀴클롭스의 소굴로 쳐들어가고야 만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담대하게 하는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퀴클롭스를 만나러 간 이유는 타이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괴상한 괴물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자연은 위험한 존재들이 사는 무서운 곳이기도 하면서 신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 신비를 보고 싶고, 샅샅이 뒤지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알고 싶다. 오뒷세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명인이다. “ (P112)

 

오뒷세우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로망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걷지도 못하는 아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오뒷세이아고 글도 오뒷세이아로 배우는 것 아닐까?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재밌다고 읽는 오뒷세이아는 단순히 그리스 민족이 읊조리고 마는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 자체가 하나의 생생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던 자들도 들썩이게 하는 힘으로 가득하다는 것. 

 

<오뒷세이아>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민족의 시다. 
바다를 처음으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일들의 기록이다. 
꿈과 투쟁의 기록이고, 지침서다. 
호기심에 가득 찬 용감한 사람들은 오뒷세우스를 흉내 내며 바다로 떠났다.

 

오뒷세우스의 무기는 용기와 지혜였으며,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라는 보나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기도 제목이 ‘용기와 지혜’라는 생각에 미치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최초의 여류시인 삽포

열 번째 뮤즈, 삽포 

삽포가 최초의 여류시인 있다는 것은 내겐 상큼한 놀라움을 안겨주는 한편,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왜 하필 ‘삽포’라고 이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리스어에는 늘 의미가 따라붙는데 ‘삽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들었음이다. 내가 그녀의 이름에 집착했던 이유는 폴츄기스나 스페니쉬로 ‘사뽀 (Sapo)’는 '개구리'를 뜻하는 단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뮤즈로 불리던 이 아름다운 여성 시인과 개구리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어떤 우아한 의미가 담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삽포는 아프로디테와 미의 세 여신, 뮤즈 (시, 음악,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을 숭상하는 여성 종교 단체의 장이었다. 그녀 말로는 “뮤즈를 섬기는 집”이 그 단체의 정체라고 한다.” (P151) 

 

뮤즈라는 단어에서 뮤지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 또한 내겐 새로운 배움이었다. 이렇게 어원을 배워가는 것도 정말 짜릿한 희열이 느껴지는 재미고 즐거움이다. 

 

삽포가 운영한 뮤즈의 신전은 음악 학교나 예술원도 아니었고, 전문학교도 아니었다. 예술이 좋아서 예술을 배운 게 아니었고, 예술을 직업으로 삼으려고 배운 게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는 것. 

 

그리스는 모든 예술의 바탕에 인간을 아름답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정신이 근본적으로 깊게 깔려있다는 것이 모든 면의 구석구석에서 묻어난다. ‘그리스’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문화가 떠올려지고, 문학과 예술과 음악, 철학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으며 연상이 된다. 마치 ‘그리스’라는 이름 안에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있는 느낌이랄까.

 

책 초면에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리스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언급되었었는데, 삽포가 살았던 ‘레스보스’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다른 그리스의 여느 도시와는 달랐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헥토르의 아름다운 아내 안드로마케도 당대의 음악과 시를 향유한 시민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멋지고 매력적인 헥토르가 교양이 있고 음악과 시를 아는 지성미를 겸비한 그녀의 매력에 폭 빠졌었을 것임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재밌는 것은 삽포가 바로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결혼하여 그녀가 ‘금꽃’이라 부르며 사랑해마지않는 딸도 있지만, 자신이 운영한 뮤즈의 신전에서 공부하고 배우는 소녀들을 사랑했다. 그녀의 사랑은 열정적이다 못해 육체적인 고통까지 따랐다는 이야기는  색다른 흥미를 안겨준다.

 

그녀에게 사랑은 행복이나 기쁨이기보다는 고통이고 절망이고 아픔이었다는 면에서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랑과 참으로 닮았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지만, 에로스는 그렇지 않다. 건장한 청년의 모습도 아니고 화살을 쏘는 사람의 모습도 아니다. 샵포의 에로스는 몸에 남은 상처로 표현될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프다. 상처가 남는다. 사지가 다 부서져 나가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쓰라리다. 그게 사랑이다. 따라서 삽포에게 사랑은 끔찍한 짐승을 닮았다.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이고, 킁킁거리며 엄습해오는 짐승의 발자국이다.” (P161)

 

샵포에게 있어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형상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녀와 내가 다른 것은 그녀의 고통은 사랑이 지나간 다음에 다가오는 것이었지만, 내게는 사랑을 하는 그 순간도 고통이었다는 것. 그것이 달랐을 뿐이다.

 

“사람이란 때로 세세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잘 모르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목소리만 비슷해도 걸음걸이만 비슷해도, 삽포는 고통과 기쁨에 젖는다. 목소리나 걸음걸이만 봐도 사랑인 줄 안다. 그것이면 족하다. 기호 하나가 삽포에게는 전부이며, 기호 하나로 대상과 나는 합체하여 이윽고 폭발한다.” (P163)

 

그게 어디 삽포만 그랬을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만 보아도, 함께 들었던 음악만 들어도, 비슷한 뒷모습만 보아도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들. 그래서 살아있음이 숨을 쉬는 것조차도 형벌로 느껴지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삽포의 시를 읽으며 어떻게 그런 직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리도 섬세한 감정을 그렇게 서정적으로 표현이 될 수 있는 걸까 하는 것이었다.

 

앙드레 보나르는 말한다. 결국 그녀가 사랑한 것은, 그녀를 끊임없이 들뜨게 한 건 결국 젊음과 꽃망울이었던 것 같다고. 

 

“밝은 태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젊음과 꽃망울이 삽포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 사라진다. 젊음이 그렇고, 꽃망울이 그렇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종내는 한순간이었으리라.”(P175)

 

젊음의 꽃망울을 사랑했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반짝임이었고, 순간이었다.

 

“삽포 이전의 사랑은 불탄 적이 없다. 물론 사랑이 사람의 가슴을 태워 무딘 감각을 일깨운 적은 있다. 희생과 욕망과 부드러움을 자극하고, 심지어 잠자리로 연인을 이끈 적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고, 기쁨을 얻었고, 후회와 슬픔을 얻었다. 하지만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P159)

 

“삽포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다. 다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삽포는 그렇게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에 살다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연으로 돌아간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그녀의 생과 작품을 읽는 우리에겐 그녀의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삶이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녀 스스로에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싸한 아픔이 일었다. 그녀가 헐떡거리며 견뎌냈어야만 하는 수많은 고통의 날들이... 


비극: 아이 퀼로스, 운명 그리고 정의

아이스킬로스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아이스퀼로스. 그리스의 비극은 그냥 치정이나 삶의 슬픈 이야기를 닮고 있는 유치한 비극 작품과는 격이 다르다. 

 

“그리스인의 업적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것은 비극이다. 비극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포와 희망의 버물임이다. 그것들을 잘 결합해서 완벽한 작품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비극이다.”’라고 앙드레 보나르는 말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의 가장 기본적인 공식은 신과 인간의 정의 실현에 있었다. 또한, 가난한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동시에 그들에게 민주주의와 정의를 교육하는 매체이기도 했다. 비극 안에서도 그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당연히 영웅이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운명과 대적해야 한다. 비극의 구도는 그렇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사이고 우리의 대표자인 영웅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 영웅을 부수고 마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우리 편인 영웅은 ‘성자’나 ‘성인’이 아니다. 옳은 일을 위해 싸우지만 그 영웅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실수도 하고, 감정에 흔들리고, 경솔하며 폭력적이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용기도 있고, 애국심도 있고, 동료인 인간에 대한 애정도 있다. 정의를 존중하며, 정의가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인간이다.” (P275)

 

관객인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일치시키며 열광한다. 그리고 그처럼 모든 역경과 고난에도 물러서지 않고 불행을 극복해나가며 기뻐하는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는 말한다. 바로 비극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또는 어이없는 것은) 주인공인 영웅이 해내야 하는 역할은 너무나 거대해서 내가 영웅이 아닌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냥 신에 대적해서 싸우는 것도 무모하고 힘든데,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이겨야 한다. 그것도 ‘교만’을 부려도 안되고, 신의 ‘질투’를 유발해서도 안된다. 인간으로서 이기는 것. 이게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애초에 상대도 안 되는 싸움이지만, 이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며 이기는 인간은 하나쯤 남겨두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들이  불가항력적인 대상과 싸움을 하는 동안 빠지는 절망과 분노를 보며 함께 절망하고 분노하며, 사랑에 슬퍼하고, 상실에 죽음과 같은 고통을 함께 느끼며,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시작한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이겨내는 모습에 미치며 열광하는 관객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으며 좀 더 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극의 힘이고 주인공이 해내야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비극이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투영이라는 것, 그래서 비극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라는 해석이 절묘하다. 아픈 부분을 자극하면서 혁명을 독려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화해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현실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불의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야 공동체에 화해가 있고 그와 함께 발전을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비극은 진보를 넘어 혁명적 자세에 가깝다고 앙드레는 말한다. 비극의 서사시에 이토록 많은 의미가 숨어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아이스퀼로스는 신의 정의를 믿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그렇고, <오레스테이아>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슬에 묶인 인간을 사랑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신들의 영역인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것이 발각되어 제우스로부터 갇히게 되고 바위에 사슬이 묶인 채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제우스와 화해(?)를 이루어내고 풀려난다.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그 이상이다. 그는 인간의 창의적인 정신을 대표한다고 앙드레 보나르는 말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와 싸우는 이야기는 결국 신들의 싸움이 아닌, 인간과 제우스와의 싸움이라는 것. 인간을 몰살시키고자 하는 자연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인간은 집을 지었고, 동물을 길들였고, 쇠를 만들었고, 천문학과 수학, 의학, 문자 등을 발명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전형이다.

 

아이스퀼로스가 진짜로 신의 존재를 믿었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신들에 대한 반항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는 신을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불의에는 반항을 하며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다는 것. 결국은 세상이 질서 있는 무엇으로 귀착할 것이라는 믿음은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분노의 여신들에게 고문당하는 오레스테이아

 

 

그의 또 다른 작품 <오레스테이아>는 더욱 복합적이다. 아이스퀼로스의 3부작인 <오레스테이아>에서 나오는 아가멤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고 또한 인간적이다.

 

아가멤논이 전쟁의 영웅이라는 것과 그가 세운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가 바람난 왕비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나가며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신들이 보기에도 용서받지 못할 야망에 사로잡힌 행동이었다.

 

 그리스 신들이 재밌는 것은 인간에게 신탁을 내리긴 하나, 그들의 절대복종만을 추궁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과연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지, 즉 인간적인 사랑이 구현되는 선택인지 아닌지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와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진다.

 

아가멤논과는 달리 헥토르는 동생 파리스를 통해 신의 예언을 알았음에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용기를 내어 아퀼레우스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다. 그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신탁을 따르자면 그는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그는 아킬레스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신심이 깊었던 그가 내었던 용기는 인간답기를 포기하지 않은, 죽음을 불사한 용기이기에 우리 가슴속에 그렇게 뜨겁게 살아있는 것이다.


얀 스테인의 <이피게니아의 희생]>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반면, 아가멤논의 운명은 그가 자초한 것이다. 클로타임네스트라가 남편 아가멤논을 그렇게 처절하게 죽인 것은 명분도 서지 않는 전쟁, 즉 바로 메넬라오스 왕의 바람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한 전쟁엘 나가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쳤음이다. 

 

치를 떨지 않을 어미가 어딨으며 처절한 복수를 꿈꾸지 않을 어미가 어디 있을까? 나라면 그렇게 차가운 이성으로 적절한 복수의 기회를 노리며 기다릴 수 있었을까 싶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너 죽고 나죽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녀 자신도 아가멤논이 전쟁에 있는 동안 ‘사자 같지 않은 사자’ 아이기스토스와 간통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남편을 죽여야만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생기긴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아버지이기보다는 피를 보며 야망에 불타는 냉혈한 왕이기를 선택한 남편에게 어떤 사랑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부정과 살인을 정당화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의 심리상태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남편의 야망의 제물로 잃어버리고 난 후 그녀는 얼마나 끔찍한 멘붕 상태에 빠졌으며 그녀의 영혼은 허망함과 치 떨리는 복수심에 불타야 했을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비겁한 아이기스토스는 아름다운 왕비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원래 비겁한 이들은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보듬는 방법을 잘 아는 법이니까. (내가 <아가멤논>을 안 읽었으니 다른 형태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상상 속의 해석이다)

 

그런데 클로타임네스트라를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아가멤논 왕이 전쟁에서 돌아오며 프라아모스의 딸인 무녀 카산드라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 분노했음이다.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갔다. 내 사랑하는 딸을 죽인 남편, 그리고 나는 지금 새로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런데 남편이 첩을 데리고 왔다고 해서 화가 날까?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갔다. 그것은 집착이고 소유욕이 아닐까? 

 

그녀가 간통한 것까지는 나의 이해심이 발휘되었는데, 클로타임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이 데려온, 자기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첩을 보고 분노하여 아가멤논을 죽이려는 복수심에 휘발유를 끼얹은 모양새가 된 부분에서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그러한 질투는 남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아있을 때 이야기지, 오로지 죽이겠다는 일념 하에 섬마다 봉화를 설치해놓고 치밀한 살인계획을 세운 아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영웅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엄마 클로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아들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는 엄마의 그런 복수심의 뿌리가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 깊이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역시 <아가멤논>을 읽지 않은 나의 상상 속의 짐작이다) 그랬기에 아들 오레스테스의 눈에는 바람난 어머니가 자신의 정부와의 관계가 들킬까 두려워서 내지는 자신의 정부와 함께 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였다고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역시 ‘살인’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으나 그러한 것이 아들 안에 복수의 씨앗이 심어졌을 수도 있다. 결국 그는 엄마를 죽인 후 죄책감에 미쳐버리는 오레스테스. 아테네의 자비로 새 삶을 맞게 되긴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아가멤논의 가족 이야기는 악순환의 사이클이 계속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이 아가멤논의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죄의 계승이라니 섬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또 하나 풀어지지 않은 궁금증은 왜 클로타임네스트라는 자기 아들인 오레스테스를 몰라보았을까다. 오레스테스가 누이 엘렉트라와 함께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장면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레스테스는 아주 어렸을 때 귀양이 보내졌을 것이라는 추측밖에. 그래서 청년이 되어 돌아온 오레스테스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란 것. 이지경이 되고 보니 <아가멤논>을 읽고 싶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렇구나 하고 나름 결론을 내리고 나면 또 다른 상황이 일어나 이쪽도 이해가 가고 저쪽도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는 미묘한 상황들이 그야말로 나를 미. 치. 게. 했. 다.

 

그렇게 진지하게 읽어 내려오다가 앙드레 보나드의 표현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 왕이고 왕비인 인간들조차 저렇게 싸구려 욕망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죽이더니, 갑자기 반미치광이들처럼 날뛰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사람다운 남매 둘이 나타나 무대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놓고 있다.” (P302)  

 

앙드레 보나르를 통해 아가멤논의 삶을 잠시 엿보면서 느껴진 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연계성이다.

“아이스퀼로스 생각으로는 우리 중 누구도 나의 죄만 지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의 죄, 내가 속한 공동체의 죄도 지고 가야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도 공범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죄를 지은 가족을 죽이지 않는 한 우리도 공범이다. 아이스퀼로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법도와 운명은 그렇다.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지고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가멤논 자신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운명의 화살이 그를 향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전대의 죄까지 뒤집어써야 한다. 그가 죄를 짓는 순간 아트레우스 가문의 후손들을 노리고 있던 운명의 여신에게 딱 걸린 셈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말이다. (P294)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한 결과로 고통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 고통을 겪는 우리 인간을 보며 당신은 더 괴로워하시지만, 그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그 고통은 우리가 행한 선택의 결과임으로).

그리고, 지금은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삶을 배우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선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신다는 것이 다르다.

 

결국 그리스 신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고 ‘벌’을 하지만, 그리스도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단죄’ 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다른 점일 것이다.

 

재밌는 것은, 각자가 타고난 운명이 어쨌건 간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운명의 화살이 그를 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내게는 참 매력적이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분명하게 느끼는 것은 모든 죄와 고통의 결과는 모두 내가 택한 선택의 결과이지 신이 내게 내려준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착각을 하면서 신을 원망하는가 말이다. 하느님이 내가 정신 차리도록 치신다는 말. 운명이 그리 예정되어있었다는 말. 그 말처럼 듣기 싫은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파할 때 나보다 더 고통을 느끼시는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치시겠는가. 내 잘못을 신에게 돌리고 조상 탓을 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겁한 모습이 아닐까.

 

그리스 신들도 아무리 운명의 화살을 날리고 싶어도 인간 자신이 죄를 짓지 않으면 운명의 화살을 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강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바람에 잠시 흥분했다. 


그리스에 미쳤던 김희균 교수. 법학을 공부하고, 문학을 공부하고, 극단을 오가고, 그리스에 미쳐 번역 작업까지 한 다양한 경력만큼이나 그의 외모에선 다양한 분위기의 매력이 느껴진다

 

이쯤에서 역자 김희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역자 김희균 교수가 얼마나 그리스를 사랑했는지. 그 사랑이 두려워 빠지지 않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않겠다고 나름 열심히 결심을 하지만, 어느 순간 ‘우연’을 가장하며 나타나는 ‘운명’ 속에 우리는 그렇게 갇혀버리는 것이다. 

 

앙드레 보나르야 자신이 죽어라 좋아서 달려든 케이스지만, 김희균 교수의 그리스를 향한 사랑은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빠지고야 만 그런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그랬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대체 누가 번역을 한겨?” 궁금해서 책 표지를 몇 번이나 들춰보곤 했는지. 어찌나 글을 재밌고 유쾌하고 맛갈나게 썼는지. 대체 앙드레가 글을 잘 쓴 건지 번역을 잘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앙드레의 훌륭한 글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에 어찌 이의를 달 수 있을까만은 그 훌륭한 원본을 감동 깊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훌륭한 번역을 통해서이니, 번역본을 읽는 우리로서는 번역가의 실력에 따라 그 책에 깊이 빠질 수도 화가 나서 집어던질 수도 있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불어 전공이긴 하나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끈질긴 콤플렉스를 느꼈던 김희균 교수. 그리스를 모른다고 누가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어를 모른다고 살아가는 것에 어떤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그의 그리스에 대한 동경은 그렇게 콤플렉스 현상으로까지 나타났다는 것인 내게 흥미로웠다. 그만큼 그리스에 미쳐있었고, 미쳐있는 강도만큼 사랑이 깊었던 때문이었으리라. 나와 너무 비슷한 성향일 지녔기에 공감이 그대로 되었고, 그의 그리스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 그는 파리도 로마도 그리스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며 물귀신 작전까지 쓴다. 얼마나 귀여운 작태(?^^)인지. 그만 그런가? 티투스 리비우스도 그렇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사기를 치며 한몫 낀다.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장수 아이네이아스가 신의 계시를 받아 티베리스 강가에 라틴을 세웠다고 말이다. 트로이아 전쟁은 기원전 12세기였고, 라틴건국은 기원전 8세기인데 그렇게 4세기나 뛰어넘으며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서라도 그리스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실로라도 연결되어있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야말로 부정한 아내가 낳은 아기인 줄 알면서 ‘새끼발가락이 닮았다’고 외치는 남편의 슬픈 외침처럼 들린다. 괴테가 나와 같은 ENFP라는 것을 듣고 좋아라 하며 흐뭇해하는 바로 그런 내 마음 같은 거겠지.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나는 제발 그 Civilisation Grecque라는 책이 재미없기를 바랐다. 그리스도 별것 아니더군, 하고 홀가분하게 지배르 존을 나와서 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자꾸 꼬였다. 대충 가운데를 펼쳐도 그렇고, 제일 앞부분을 펼쳐도 그렇고, 이놈의 책은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이미 사라진 사람들인데, 그 뒤를 추적하면서 내가 두근거리고 설렜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뭐 하나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인류의 모범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수백, 그야말로 떼로 나를 맞는다. 불쌍하게 태어나서 용감하게 살다가 모범이 된 사람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건축, 법률, 의학까지 곳곳에 동상처럼 빽빽하다. 그저 놀랍고 약 오를 뿐이다. 뭐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많은지.” (P354~P355)

 

그의 놀라움과 감탄은 바로 나의 놀라움이고 감탄이었다. 어쩜 그렇게 내 느낌을 그대로 표현해주었는지.


 

그리스 신화를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음모다. 
저작권 침해다. 
그리스에는 신이 없다.
인간의 모델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리스 문화는 오로지 인간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리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의 성향을 지닌 신들. 인간이 가졌으면 하는 동경과 이상을 ‘신’이라는 모델을 만들어 불어넣고는 그들을 닮고자 했던 그리스. 얼마나 인간적이고,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그렇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신은 우리 인간이 지닌 모든 감성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희균 교수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책에 정신이 팔렸다가 그날 기어이 주차 위반 딱지를 한 자리에서 두 개나 받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읽고는 내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가 얼마나 책에 빠졌었는지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해가 갔으니까. 나도 그랬을 테니까. 

 

“나는 그리스에서 자유롭다. 시쳇말로 그리스를 몰라도 사는데 큰 불편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지독하게 먹먹하고 슬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삽포와 퓌타고라스를 원전으로 읽는 젊은이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행간에 스며있는 쓰라림과 푸른 장미와도 같은 고귀함을 읽어내고 한없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곱씹고 되새기는 아이들은 얼마나 총명하고 깊을까?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키득대다가 헥토르의 마지막 인사에 눈물을 쏟던 그 어린 시절은 얼마나 값진 것이었을까? (P356)

 

오오~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꼭 같을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감동 폭발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구나. 감성엔 여성 남성이 없다는 것. 그가 번역한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고 울고 감동하고 분통 터져하고 분노하게 되는 이 모든 격렬한 감정이 주는 희열에 대한 감사는 오롯이 그의 몫이라는 것.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앙드레 보나르의 멋진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겠지만, 훌륭한 번역이 없었으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동은 꿈에서도 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제 정중하게 헤어지려고 한다. 다시는 그리스를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내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그토록 자신을 흔들어대고 열광 속에 빠지게 했던 그리스를 떠나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이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내 눈엔 눈물이 고여있다. 마치 내가 그리스를 떠나는 것 같아서. 내 사랑을 떠나야 하는 것 같아서.

 

그리스와 함께 많이 흔들렸고,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거나 혹은 없는, 헥토르를 생각한다.

아름다운 끝맺음이었다. 그리스와 함께 많이 흔들렸고, 즐거웠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거나 혹은 없는 헥토르를 생각한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진한 여운을 남겼다. 내 안에 있거나 혹은 없는 헥토르. 일상 속에서 그를 많이 떠올리게 될 것이다.

 

김희균 교수가 그리스와 함께 많이 흔들렸고 즐거웠다면, 내게는 그리스인 이야기와 함께 많이 흔들렸고 즐거웠고 앙드레 보나르와 김희균 교수가 함께해서 그 여정은 더욱 깊었고 더욱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에 미친 작가와 그리스에 미친 역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리스에 미친 독자가 함께한 시간. 내겐 축복의 시간이었다.

 

 

..영화 'Far and away'를 보며...정작 영화 스토리보다는 음악에 반해 이 음악을 찿아 헤매던 기억들이 문득 떠오른다...그로 인해 에냐를 알게되었고, 에냐의 음악에 푹 빠지게 되었단 시간들...

 

그리스와 Enya...잘어울리지 않나..? ^^

 

Enya의 Book of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