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03]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를 읽고 / 김영하 옮김

pumpkinn 2013. 5. 16. 10:19

스콧 & 젤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게츠비>를 읽은 느낌을 나에게 단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씁쓸’ 내지는 ‘분노’ 또는 ‘어이가 없음’이라고 표현할 것 같다.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을만큼의 열받음, 분노의 감정이 느껴졌다.

 

이쯤에서 분명히 하자. 내가 감히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가 피츠제럴드의 의 걸작을 폄하시키려는 게 아니다. 단지 게츠비의 죽음이 너무나도 허망해서, 고작 싸구려 속물 덩어리 데이지 같은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느라 얽혀버린 악순환 속에 엉뚱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주인공들 사이에 얽힌 감정들은 복잡하고 복합적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은 겉으로 드러나는 얽힌 관계와는 달리 의외로 심플하다. 상류사회의 사랑받는 인형 데이지. 그녀는 한때 게츠비를 사랑했지만, 그가 군대로 떠난 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사치와 허영과 이미지에 걸맞은 모든 것을 부양해줄 수 있는 남편 톰 부캐넌을 만나 결혼한다. 톰에게는 머틀 윌슨이라는 정부가 있고, 데이지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목메 사랑하여 자기를 차지하기 위해 성공을 하여 돌아오는 게츠비를 만나게 되고 다시 그에게 빠지게 된다.

 

그들은 닉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데이지는 남편과 헤어지고 게츠비와 함께하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재밌는 부분은 남편인 톰 부캐넌은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빠지게 되자 놀랍게도 마치 평생 그녀만을 사랑해온 것처럼 행동을 하며 그녀를 붙잡는다. 문화 차이란 이런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그림이다.

 

 

영화 <위대한 게츠비>

 

어쨌든, 부캐넌의 정부인 머틀 윌슨은 데이지가 운전하는 게츠비의 차에 치어 죽게 되고, 윌슨은 자기 부인이 바람이 난 것까지는 알았으나 상대가 누군지 몰랐던 터, 그녀가 죽게 되자 그 차 주인이 그녀의 정부라고 믿고는 엉뚱하게 게츠비를 죽이고는 자신도 죽는 것으로 끝난다. 재밌는 것은 두 부부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정부’라는 자랑스럽지 않은 타이틀을 갖게 되는 이들이 모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게츠비가 죽는 것은 아니겠지 하며 가슴을 졸이며 읽었으나 역시 게츠비는 윌슨의 손에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어이없는 이 신파 드라마는 이쯤에서 끝나게 되는데, 읽으면서 분통이 터졌던 것은 바로 데이지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닉이 분노할만했다. 적어도 꽃이나 조환은 보내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저만 살겠다고 줄 헬랑을 놓고는 또 어딘가에서 그렇게 사교계의 속물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겠지. 정말 구역질이 났다.

 

사랑할 가치조차도 없는 여자를 사랑한 게츠비. 게츠비가 영국에서 맞춰 보내는 셔츠를 내던지며 수북이 쌓여가는 셔츠들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기가 막혔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개츠비의 죽음을 알았을 때 그녀는 개츠비의 죽음이 슬프기나 했을까? 아니면 미안할 대상이 없어져서 한시름 놓았을까? 혹시 그가 남긴 셔츠가 아까워서 슬퍼지진 않았을까? 그녀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두고 닉이 ‘돈으로 가득한 목소리’라고 표현이 떠올라 씁쓸함엔 시커먼 공허감까지 더해졌다.

 

영화를 제대로 느끼고 싶어 집어 든 책이었는데 책으로 읽고는 너무 열이 받아 영화를 보지 않았다. 시리즈로 열 받을 일을 자초할 이유야 없으니.

 

어쩌면 게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속에 그려놓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데이지를 사랑했고, 또한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데이지’라는 환상 속의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데이지여도 좋겠고, 그레이스여도 좋았겠고, 도리스여도 좋았을 것이다. 가끔 우리는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를 통해 보고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또는 꿈일 수도 있는 것.

 

 

 

김영하는 말한다. 데이지도 게츠비도 상대방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데이지는 사랑을 위한 사랑을 했던 것이고, 게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자기가 그린 자신을 사랑한 거라고. 결국 그들은 그들이 사랑한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공감했다. 그랬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었지 상대방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 한 사람 게츠비를 이해하고 게츠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준 친구 닉 케러웨이가 있어 게츠비의 죽음은 덜 슬펐다. 그가 화려한 파티를 열 때는 바퀴벌레처럼 우르르 들러붙었던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장엔 오지 않았지만 (도서실에서 봤던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를 제외하고), 아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애도하고 슬퍼해주는 친구가 함께 있었으니.

 

집념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개츠비가 그 험한 삶을 달려오고 그 수준까지 올라간 것은 오로지 단 한 가지 이유 데이지를 되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상류사회의 배지를 달아줄 수 있는 그녀. 어쩌면 개츠비는 그녀가 톰에게 돌아갔을 때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겐 너무 허망한 죽음으로 비치는 개츠비의 죽음이지만, 그에게는 어쩌면 영혼의 안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리뷰를 쓰면서 들었다. 그래. 그의 죽음은 분명 억울했지만, 그가 남은 평생 느껴야 할 고통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따뜻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다운 거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인류에 공헌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 아니다.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그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위대하다. 따라서 그 위대함에는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있다.” 라고 작가 김영하는 말하고 있다.

 

그래. 사랑이란 그런 거다. 우리는 데이지처럼 사랑을 사랑하기도 하고, 또는 게츠비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실은 상대방을 통해 비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기에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을 한 내가, 그 사랑을 선택한 내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게다.

 

슬픈 소설이다. 이 소설 중에 내게 가장 고통스럽게 비친 이는 바로 닉 케러웨이였다. 그 속에 함께하면서 또 밖에 있는 이방인의 역을 모두 맡아야 했던 닉. 그가 게츠비를 아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게츠비를 이해했고, 받아들였고, 톰과 데이지와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게츠비가 가는 마지막 길이 외롭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게츠비의 친구들을 찿아다녔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 게츠비는 질투의 대상이었을 뿐 친구는 아니었다는 것. 내가 죽음을 맞을 때는 과연 몇 명의 ‘친구’가 와서 함께 해줄까..? 자연스레 떠올리지는 질문이었다.

 

김영하의 말을 빌어 리뷰를 맺는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이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해달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라고. 개츠비에게는 데이지라는 목표가 있었고, 데이지에게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지향이 있었다. 지친 윌슨은 엉뚱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몸이 뜨거운 그의 아내는 달려오는 자동차를 잘못 보고 제 몸을 던진다. 작가인 피츠제럴드마저도 당대의 성공과 즉각적인 영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표적들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들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꽂혔다.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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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재즈는 아니지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재즈 한곡을 올려본다.

게츠비에게 어울릴 듯한...

Madeleine Peyroux의 Dance me to the end of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