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02]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을 읽고 / 이목 옮김

pumpkinn 2013. 5. 11. 11:12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을 읽고...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은 서경식 교수가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 속에 묻어있는 문학 작품에 대한 단상을 옮겨놓은 에세이집이다. 조선인이 일본어로 쓴 책이 일본에서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 수상 이유였다.

정작 일본인보다 더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하는 조선인 서경식. 그의 글을 보면 그는 일본에서 성장과정을 거치며 느꼈던 자신의 느낌을 조금의 덧칠도 없이 진솔되게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움이었고, 그가 일본에 대해 과격하게 표현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어찌됐든 그가 일본 안에 사는 식민지국의 소수 민족으로서 느꼈던 갈등들을 그대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그의 작품성을 인정하고 수상작으로 뽑았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내가 막연하게 상상 속에 느끼는 일본과 현실 속의 일본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연설에서 침략자인 조국 일본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발언을 했을 때 그러한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시대의 지식인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던 일본에 대해 느꼈던 놀라움을 이번에 또 느끼게 됐던 것이다. 만약 한국인이라면 어땠을까? 부끄러운 상상이 그려질 뿐이다. 함석헌 선생이 책상을 치며 분개했던 우리민족의 기개는 어디에 숨어있는걸까?

마치 창밖을 바라보며 독백하듯 잔잔한 어조로 쓰여진 에세이는 내게 그냥 재미로나 감동으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읽는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많은 생각들이 함께 흘러갔다.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운동을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뒤뚱거리던 100미터 달리기를 떠올렸고,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그를 보며, 나는 왜 책을 그리도 읽지 않았을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그가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 만큼 나는 음악을 좋아하긴 했다.

그는 그렇게도 책이 좋았을까? 책보다 친구들과 놀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 보통 어린이들의 모습이고보면 그는 아주 독특한 어린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래미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엄마. 그것은 아마도 당신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배움에 대한 동경때문이기도 했겠고, 또한 ‘문’과 ‘학’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문화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책벌레인 둘째형과 막내형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지만, 남의 나라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색한 낯설음은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냥 느껴지는 것일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그 말에 슬퍼지기도 했지만, 차라리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워와 길러졌으면 좋았을걸, 그래서 진짜 부모가 나타났으면 했다는 담담한 고백에 가슴이 시려왔다. 그 ‘진짜 부모’라는 대상이 귀족도 부자도 아닌 겨우 ‘평범한 일본 부모’였다니.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아니 차라리 자기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일본에 사는 많은 조선 어린이들의 바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린 가슴에 뚫린 구멍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얼마나 차갑게 느껴졌을까? 그 찬바람이 내 가슴에도 시리도록 불어댔다.

‘조선’은 만사가 공정하지 못한 것, 조잡한 것, 어딘지 뒤끝이 씁쓸한 것, 불썽사나운 그 무엇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그런 말들을 서로 재잘거리는 다수와 학생들에게 덤벼드는 용기란, 보통 아이들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덩달아 함께 웃으며 탁구에 흥을 돋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조심스레 아이들의 이목을 피하며 애매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P188)

그렇게 ‘조선인’은 뒤끝이 씁쓸하고 조잡하고 불썽사나는 무엇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보이지 않는 무시와 차별을 조선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느끼며 자라야했으니, 일본인 부모가 진짜 부모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찌 잘못됐다 할 수 있을까?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 어린시절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많은 친구들이 한번쯤 들어봤다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는 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랐다. 아빠의 사업 실패로 전학을 갔던 동두천에 있는 동보 국민학교에서 하루는 선생님께서 부모님으로부터 ‘다리 밑에서 주웠다’라고 들은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재밌다는 듯이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소외감이란.

어린아이들은 남들과 다른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 나도 그랬다. 지금은 ‘다름’이 개성이요 매력일 수 있겠지만, 어렸을 때의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게 그리도 싫었더랬다. 우리 엄마는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으셨을까 속상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조심스레 여쭈었다. 혹시 엄마도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느냐고, 나는 어디서 주워왔느냐고. 참 철없는 질문이었지만 내겐 아주 진지하고 나름 삶의 고뇌가 묻어있는 질문이었다. 엄마는 어이가 없으신듯 깔깔 웃으셨는데, 나는 그래서 더 슬퍼지고 애가 탔던 기억이 난다. 마치 나는 다리에서 주워 왔어야만 하는 아이였던 것 처럼. 어쩌면 그당시 내가 서울에서 온 아이라고 당했던 왕따가, 다리에서 주워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슬픈 운명의 원인으로 받아들여졌던건지도 모르겠다.

서경식 교수의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 이야기는 엄마인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고, 그와 비할바는 아니지만, 이렇듯 내 어린시절 나름 꽤 슬펐던 기억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책과 이야기...

그는 그렇게 국민학교때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게되는 모든 상황 속에 맞닥드리게되는 고민과 고뇌를 책으로 위로 삼았고, 매 순간 책이 그와 함께 했다. 그에게 있어 책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요 멘토요 그의 버팀목이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책 속에 그의 이야기가 묻어있다. 음악 속에 나의 이야기가 묻어있듯이...

지난 시절 내가 즐겨듣던 음악이 흘러나오면, 나는 음악을 듣는다기 보다는 음악에 묻힌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음악 속에 빠져드는 것은 음악 자체라기 보다는 바로 음악에 묻어있는 추억 속에 빠지는 것인게다.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 떠오르는 그때의 이야기들, 상황들, 장면들. 애증들이 되살아났고, 그것들을 읽던 책들 속의 내용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를 위로했고, 그를 치유했으며, 또한 그를 배우게 했던 것이다.

 

책 속의 재밌었던 장면들...

전체적으로 진지한 분위기의 책이었지만, 중간중간 재밌는 이야기들이 함께한다. 그는 어린시절의 형들과 함께한 추억들을 맛갈나게 그렸는데, 형들과 함께 캠핑을 가서는 모기때문에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울퉁불퉁한 돌들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어 칭얼대기 시작하는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큰형으로부터 한대맞은 꿀밤. 꿀밤의 아픔보다는 큰형에게 맞았다는 것이 서러워 울며 잠든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정스럽던지. 우리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그렁대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덩그마니 걸려쟜다.

열심히 배운 ‘안녕히 계십시요’를 고작 ‘안조케쇼세’로 밖에 발음을 하질 못했다는 부분에선 황당함 속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나에게는 웃음이었지만 그에게는 식민지국 후손으로 태어난 모국어 상실자라는 스스로 씌운 오명을 오랫동안 안고 살아야했던 상처가 배어있는 말이어서 순간 웃음은 터졌지만 곧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했다.

일본인 친구가 물어본 한국말을 나중에 커서야 그 뜻을 알게된 후 씁쓸한 마음을 표현한 한마디 ‘음식인줄 알고 입에 넣었는데 젖은 걸레’라는 표현에서는 완전 죽음이었다. 그는 ‘씁쓸한 감정의 표현을 하고자 이리 썼는데, 어떻게 그리도 진지하게 나가다가 그런 시큰둥한듯 시니컬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더 배꼽을 잡아야했다.

 

마치며...

읽는 내내 내 안에서 통통 튀어오르는 단어 하나, 그것은 ‘정체성’이었다. 서경식 교수나 강상중 교수나 일본에 사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성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강상중 교수가 ‘고민의 힘’을 쓰게된 밑바탕에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깊이 깔려있었고, 서경식 교수의 ‘소년의 눈물’에서도 정체성의 혼란에 당차게 맞서 써울 수는 없었으나, 차차 자신의 오리진을 찿아가는 과정 속에 겪게되는 성장과정을 진솔되게 들려주고 있다. 어디 그들 뿐이었겠는가? 특히 격동의 시기에 하필(?)이면 일본에서 살게되었던 그들이 느꼈던 혼란과 갈등과 방황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들임을 느낄 수 있다.

문득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남편과 나는 1세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1세고 어렸을 때 이민을 나온 남편은 1.5세다. 그리고 우리 우리 아이들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2세들이다. 한 가족 안에 국적이 세개다. 엄마 아빠 한국, 큰 애는 미국, 막내는 브라질.

집에서는 아빠가 숟가락을 들기 전엔 먼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아빠가 늦은 식사를 하실때는 이미 먹었더라도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있어야 하는 등의 한국적 교육과 문화를 접하지만, 학교에선 선생님도 친구처럼 이름으로 부르는 식의 브라질 문화와 교육을 받는다, 엄마 아빠랑은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브라질 친구들과는 브라질식으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 아이들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등을 느낄까? 다행히 좋은 친구들 속에 외모는 동양인에다 소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차별없이 잘 어울리며 사랑받고 지내고 있으니 고민이나 방황은 덜 하겠지만, 어쩌면 그들도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단지 그것이 말로 고민으로 표현되어지지 않았을뿐...

잔잔한 톤으로 이어나간 글이었기에 ‘절절한’ 감동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진한 감동과 깊은 여운을 안겨준 책이었다. 첨엔 심심하게 읽혀졌지만 점점 갈수록 손에서 놓을 수 없을만큼 빠져들게했던 책. 어떻게하면 그처럼 그렇게 깊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화두이자 부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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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음악이다...

Omar Akram의 Dancing with the W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