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in De Botton

[독서리뷰 5]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pumpkinn 2011. 6. 1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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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리뷰

리뷰에 앞서...

책장에 꽂혀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단연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다음에 읽혀질 책이었다. 원제와는 전혀 다른 제목으로 붙여진 제목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제목을 참 그럴싸하게 잘 갖다붙였다는 생각이 짙게 들었다. 그렇게 철학자들의 위로를 통해 치유받은 고통의 슬픔기쁨으로 바뀌며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안겨주며 희망이란 씨앗을 가슴안에 다시 품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

어쨌든 이번에 알랭 드 보통이 다루고자 선택한 주제는 바로 철학이었다. 불안과 삶과 사랑에 이어 내게 다가온 것은 철학이었다. 첫 페이지를 펴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라는 몽테뉴의 명언이 쓰여있는것을 보면서 이 책이 얼마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지, 얼마나 환한 빛을 안겨줄지 내 몸과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은 분명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책 속으로...

목차를 보니 어떠한 이유로 마음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부제들이 써있고, 그 타이틀마다 다른 철학자들이 함께 했다. 반가운 이름들. 내가 그들을 잘 알아서 또는 깊은 지식이 있어서 반가운 것이 아니라 (그랬으면 좋으련만) 안광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접했던 철학자들이 고스란히 알랭의 책에 담겨있어 마치 길거리를 가다 좋아하는 곡이 나왔을 느껴지는 그런 반가움이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소크라테스. 안광복의 처음읽는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나를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절대 긍정주의자 소크라테스. 몸에 독이 퍼지질 않아 감옥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녀야 했다는 그가 떠올라 울컥해졌다...

암튼, 소크라테스에 이어 우리에게 행복의 의미는 금전적인 것에 있지 않음을 삶으로 보여주며 우리를 일깨워주고 싶어했던 에피쿠로스. 그리고 늘 그의 명언으로만 이름이 익었던 세네카와 아마도 그당시의 마광수 교수 역할을 했던 듯싶은 몽테뉴, 안광복 선생님의 책에서 무대위의 삼류 엑스트라로 표현되어 나를 배꼽잡게했던 개인적으로 별로 정 안가는 쇼펜하워와 마부에게 채찍질을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를 하여 나를 같이 울게 만들었던 철인 니체.

알랭 드 보통은 그들 철학가의 삶과 사상을 들어 그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위로와 치유를 선사하는지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철학자고, 이미 안광복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나를 온통 사로잡았고 감동시켰고, 눈물을 흘리게 했던 내가 존경하는 철학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얼마나 남의 말에 귀가 얇게 작용하나. 또한 우리는 얼마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닫아버리고 있는가..? 남들이 (특히 선전이나 광고 속에) 그렇다고 하면 그런줄 아는 아무런 의문도 질문도 없이 믿으면서, 정작 우리가 말을 듣고 믿어야 할 부분에선 두 손으로 귀를 꼭 막고 있는 우리들. 그는 모든 것이 다 옳다고 옳은 것이 아니며, 모두가 그르다고 해서 다 그른 것은 아님을 질문이란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며, 우리가 속해 있는 삶이 얼마나 많은 거짓과 과장됨 속에 싸여 있느지를 한번 되짚어 보게 한다. 그리고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는 훈련을 시킨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 (P71)

에피쿠로스는 내게는 여전히 로망이고, 내가 꿈꾸는 삶이다. 물론 상추만 먹고 살고 싶지 않고 보리빵만 먹으며 살고 싶지 않다. 때로는 와인도 마시고 싶을 것이고, 때로는 근사한 여행도 다니고 싶을 것이다.

학생 때 나는 무척이나 보헤미안적인 삶을 꿈꾸었더랬다. 아마 에피큐리언적인 삶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우정, 사색, 자유가 함께하는 삶. , 서로 공감대가 형성하고 꿈을 가진 이들(같은 꿈이 아니라 하더라도..)과 함께하며. 지적인 대화를 나누고. 사색하며 자유로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우리만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행복한 나. 참 부러울 것이 없을거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에피쿠로스에게 그렇게 끌리는 것은 바로 내가 선택한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로써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과연 내가 흔들림이 있을까..?하는 생각때문이다. 우리가 삶 속에 무엇을 추구하며 살던 결국은 우리는 행복하고 싶은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내가 더 갖고 덜 갖고를 떠나 내가 가진 그것으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다면 정말 천상의 행복을 바로 이 지상에서 맛보는 것일게다. 모든 부러움이나 시기나 질투는 비교에서 오는 것이니, 내가 가진 것에 행복하고 만족한 상태에서 무슨 비교가 있을 것이며 무슨 부러움이 있을까..? 왜려 그렇게 당당하게 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행복에 가득찬 함을 꾸려나가고 있는 나를 남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네카를 이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접하게 된 것은 내게는 즐거움이었다. 여러 책 속에 인용되는 그의 명언들을 접하며 그가 궁금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 다닐만큼 나의 호기심이 깊지 못했는데, 바로 알랭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으니 이만저만 호사가 아닌게다. 그가 네로의 선생님이었다는 사실도 참으로 솔깃했고, 그 정신병자 네로가 바로 자신의 선생님에게 독약을 내리는 것도 충격이었으며, 그가 참으로 존경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죽음을 맞는다는 것도 내게는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세네카가 주장하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관한 부분은 내게 참으로 깊이 들어왔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것도 잃을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가진다. 현명한 사람은 자족한다. 만약에 질병이나 전쟁으로 한쪽 손을 잃게 되거나, 사고로 한쪽 다리, 혹은 두 쪽 다리를 다 읽는다해도 현명한 사람은 남은 것에 만족할 것이다.’ (P157)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자연의)법칙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이 법을 우리는 준수해야 한다.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참는 것 최선의 방법이다.’(P177)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기에 그의 말은 더 강한 위력을 갖는 것 아니겠나. 알랭 드 보통이 물론 언급을 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많은 것들이 있지만 (악처와 현모양처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장렬한 최후는 우리에게 삶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은 죽음도 그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지 못함을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다시 되짚어보게 했다.

몽테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마음에 들었고, 그의 진지한 빈정거림이 나를 웃게 했고, 그의 열린 마인드가 나의 숨통을 터주었다. 어쩌면 현대에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결국 모든 전쟁과 분쟁의 시초가 되는 올고 그름’. 그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사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그의 삶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쇼펜하우어는 고등학교때 귀가 따갑게 들었던 철학자중의 하나였는데, 안광복 선생님의 책을 읽을때부터 별로 정이 안가는 철학자면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철학자였다. 그당시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인기교수 헤겔을 배아파했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그가 별로 정이 안가고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은 그에게서 왠지 이중성이 느껴졌기 때문일게다. 인기를 갈구하는것 처럼 보이기도 한 것이 그 안가는 정에 플러스 알파가 되고.

왠지는 모르지만 쇼펜하워를 보면 사랑을 연구하기 위해 원숭이를 연구했던, 그래서 나를 폭우같은 눈물을 쏟아내게 했던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떠오른다.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 닮아서일까..? 결국은 그들이 사랑을 얻지 못해서일까..? 그러면서도 처절하게 사랑을 원했던. 그들의 사랑에 대한 고귀함이 나를 연민으로 이끌었던 두 학자.

니체는 아마 우리 모두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가 아닌가 싶다. 다른 많은 것 중에 단연코 나를 가장 깊고 강렬하게 터치하는 것은 바로 그의 곤경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부정적인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은, 그 뿌리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질식시켜, 한참 자란 그 식물의 줄기를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곤경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못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P361)”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나 곤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나. 하지만 니체는 달랐다. 결국 그 곤경은 우리가 좀 더 성숙되어진 인격으로 승화될 수 있는 통로이며 훈련과정이라고 보며 우리는 자신이 처한 곤경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그 곤경으로부터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일구지 ㅁ소하는 사실에 당혹해야 한다고 주먹 불끈 쥐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바그너의 부인을 사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바그너의 부인은 복도 많지. 음악가에 철학가에.. 그 멋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니..^^ 살로메에 대한 연정이 행복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상상의 나래는 그냥 접어두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

단지 그가 너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 가슴 치며 통곡할 일이고, 그의 여동생의 감히 그의 작품에 손을 대어 제맘대로 고쳐 쓰고 니체 이름으로 책을 내었다는 사실에 분개할 뿐이다.

어떻게 감히~!! -_-;;

 

리뷰를 마치며...

뉴스위크나 뉴욕타임스나 선테이 텔레그레프에서는 그를 높이 칭송했다. ‘철학의 세계로 안내하는 굉장한 입문서’, 또는 쉽고 이해하기 쉬운 색다른 성격의 , 위트로 넘치는 현대적 우화라고도 표현했다. 물론 당연히 그가 들어야 할 칭송이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 나의 알랭이니까~ ^__^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평할때는 무척 주관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좋으면 무조건좋은…^^)

한편, 내 마음 한 켠에 조심스럽게 고개드는 생각 한 토막은, ‘만약 그들이 안광복 선생님의 처음 읽는 철학사를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물론 알랭 드 보통과 안광복 선생님을 비교하는건 결코 아니다. 서로 다른 성향이기에 비교조차 할 수도 없는 그들이나, ‘철학 입문을 두고 보았을때 내가 볼때는 안광복 선생님의 저서고 결코 뒤지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배꼽을 잡으며 재밌게 읽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재밌었다뿐만이 아니라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부터 중세 철학 스토아 철학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었기에, 내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던 철학이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게 되었는지.. 처음으로 나도 철학이란 학문을 읽을 수 있는 주제(?)가 되는구나..’ 그야말로 지상으로 내려 온 철학으로 느끼게 해준 것이다.

철학의 자도 모르는 내가 감히 내어놓을 의견은 아니지만, 안광복 선생님의 처음 읽는 철학사가 영문으로 번역되어도 시모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만큼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쉽고 재밌으면서도 그 흐름을 멋지게 짚어주셨으니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지 않음이 이상할게다.

내참~ 왜 알랭 드 보통 책 리뷰에 안광복 선생님 선전을 일케~ ^^;;

이 책을 읽으면서 살짝 아쉬웠던 것은 너무나도 진지한 번역부분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유머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 (번역가님 죄송함돠~!! ^^;;)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읽다가 - 초서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 소크라테스 편

P12 나는 숨을 쉬느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거요....., 그러니 여러 분.... 그대들이 나를 사면하든 말든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그대들은 알게 될 거이오. 일백 번을 더 고쳐 죽는다 해도 말이오.

>>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를 읽으면서 그저 이름만 알았던 소크라테스에게 온전히 반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의 외모에서 오는 어떠한 수모적인 욕도 전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만큼 자존감이 높고 당당했던 소크라테스. 그를 너무나도 존경한 플라톤. 플라토닉 러브가 바로 소년이 성숙한 어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데서, 즉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존경하고 사랑한데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도 참으로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는 죽음 앞에서조차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보다 더 당당했고, 심지어 너무나도 건강한 나머지 독이 몸에 퍼지질 않아 감옥 안을 걸어다녀야 했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에피소드를 안겨준 소크라테스이기에 알랭 드 보통의 책 첫 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철학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거창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한 목숨 살리자고 도망을 가지 않았더라면, 게다가 도망 후 겨우 2-3개월 있다 위장병으로 죽게되었을 걸.. 차라리 철학이라는 이름 앞에 장렬히 죽었더라면.. 얼마나 더 멋지고 존경스런 철학자로 비쳐졌을까..?  했던 아쉬움이 함께 했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물론 지금도 철학사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추앙되는 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살짝 멋이 조금 덜해지긴 했다.


P16 당초 다비드는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들이켜는 장면을 그리 작정이었으나 시인 앙드레 셰니에가 극적 긴장감을 한껏 불어넣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자 선뜻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따. 소크라테스가 이제 곧 자시의 목숨을 앗아갈 독약을 잡으려고 침착하게 손을 내밀면서 자신의 철학적 논지를 끝내는 모습이라면 아테네 법에 대한 복종과 자신의 소명에 대한 헌신을 동시에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 훨씬 극적인 그림이 되리라는 것이 셰니에의 제안이었다. 지금 우리는 비범했던 한 존재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교훈적인 순간을 모겨하고 있다.

>> 마치 괴테가 에커만에게 라파엘로의 그림을 설명할 때의 섬세함과 들뜸이 느껴졌다.


P16 다비드의 그림엽서가 나에게 그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마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행위가 나의 것과는 jansk eowhwjrdldjTrl Eoansdlf 것이다.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려는 욕망은 나로 하여금 마치 학예회날 학교를 찾은 학부모처럼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크게 웃도록 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 알랭은 자신을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으로 표현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렸지만, 내게는 왜려 그것이 따뜻함으로 느껴졌다. 처음 보는 상대방이 불편할까봐 굳이 웃기지 않아도 웃어주는 배려나 편하게 해주려는 행동, 그것이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이라는 표현이라기엔 조금 모순이 아닐까 싶었다.

나도 다분히 그런 모습을 보인다. 물론 상대적이긴 하지만,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도 있고, 또는 상대가 불편하던 말던 내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때 주로 하는 것은 침묵이지만..

어쨌든 알랭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 완벽해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닌 우리 보통 사람 같은 행동을 하는 그가 더 인간적으로 편하게 느껴졌다.


P17 세관을 통과하거나 경찰 순찰차와 나란히 차를 달릴 때면 내 마음 밑바닥에는 어느새 제복을 입은 저 공무원이 내게 호감을 품어줬으면 좋으련만 하는 바람이 자리 잡았다.

>> 하하하~ ^^ 어떻게 이런 감정까지도 콕 찝어내는지..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느끼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감정이 아닌가..^^


 P18 필로 (Philo, 사랑)와 소피아 (Sophia, 지혜)라는 단의 그리스어 어원이 암시하는 철학 (Philosophy).

 >> .. ‘Sophia’라는 뜻이 지혜라는 뜻이구나.. 몰랐다.. 그래서 소피아 언니가 지혜로우신 거구나. 대체적으로 보면 사람과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데, 즉 이름따라 그 사람이 느껴지는데, 다시 한번 정말 그렇구나 하고 느껴졌다. 그럼 안젤리카인 나는.. 천사같다는 결론이.. 우하하하하하하하~ 흠흠~ ^^;;


P21 아테네의 수호신에게는 암소를, 달과 처녀의 신 아르테미스와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는 염소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는 암탉이나 수탉을 바쳤다.

>> 그냥 상식 차원에서 알고 싶어 초서에 옮겼다.


P23 하지만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적의를 두려워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에 못지않게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각자의 내적 인식에 의해서도 의혹을 품으려는 우리의 의지는 곧잘 꺾인다. 심지어 그 근거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관습들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져 내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좀처럼 의심을 품지 않는다.

>>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 ?’라는 질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그다지 큰 의문을 품지 않는다. 내가 그런 의문을 품게 될 때는 보통 내게 불편함을 주거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어떤 상황적이나 환경적인 문제로 할 수 없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석하게도 나 같은 사람에게 일상적인 관습이나 습관들에 ?’라는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아마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 더 빠를지 모르겠다.


P25 아내 크산티페는 변덕스런 성격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말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가장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 하하하하~ 그야말로 지혜로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소크라테스답다~ ^^


P26 누구든 소크라테스와 얼굴을 마주하거나 대화를 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일이 있다. 비록 처음에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했을지라도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소크라테스는 어느새 상대방이 현재 자신의 생활방식과 과거 삶의 방식에 대해 설명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도록 요리조리 몰아가다 끝내는 완전히 가둬버린다. 그렇게 포위하기만 하면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스스로의 모습을 모든 각도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정확히 재점검하기 전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 이 시대에 소크라테스가 살아서 나의 모습을 모든 각도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정확히 재점검하게 해준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어떤 것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될까..? 하지만, 꼭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어야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는건가..? 그렇진 않다. 이미 나는 내 지난 삶을 통해서 와우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나의 본 모습을 보았고 내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보았다. 그럼에도 내가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행동력이 따라주지 못함이고 게다가 나의 밤길을 밝혀줄 별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P29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파고들 수 있었다. 그가 천착한 문제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벼룩은 자기 몸 길이의 몇 배나 뛸 수 있을까?” ‘모기는 입으로 소리를 낼까 아니면 항문으로 소리를 낼까?’

>> 으하하하하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는 도통 이런 것들은 내 관심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P30 극작가와 철학자를 구별 짓는 것은 일상적인 설명들의 적절성에 대한 대조적인 평가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눈에는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빈대가 자신의 몸 길이보다 훨씬 높이 뛰고 모기들은 어딘가에서 소리를 낸다는 정도의 지식에 안주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상식을 광적으로 의심할 뿐 아니라 또 복잡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대안을 찾는 데 별난 갈증을 품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 거참~


P34 메논의 초상 역시 전해오진 않지만, 나는 어느 아테네 호텔의 로비에서 그리스의 남성 잡지를 뒤적이다가 조명을 밝힌 수영장 안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남자와 닮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 하하하하~ 알랭의 이 유머감각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결코 없다. 하하하하하~ ^^ 그는 읽는 독자들이 이런 위트에 (스스로는 은근한이라고 표현했지만) 미치도록 열광함을 알고 있을까..? ^^


P35 소크라테스는 짧은 시간에 돈과 영향력은 그 자체로는 미덕의 필요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메논에게 논증했다. 부유한 사람은 조경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존경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에 달려 있다. 빈곤이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의 한 자락을 들추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보면서 자신의 미덕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단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듯,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곤궁을 악행의 징표로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P36 사람들이 틀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신념을 논리적으로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논과 앞에서 말한 장군들이 불완전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널리 받아들여지던 규범을 논리적으로 점검하지 않고 그대로 흡수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동성의 특성을 꼬집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체계적인 사고를 하지 않은 채 인생을 사는 것을, 도자기를 굽거나 구두를 만들면서도 기술적 절차를 모르고 있거나 따르려 하지 않는 것에 비유했다.

P38 소크라테스는 이런 복잡성을 존중하지 않고, 또 최소한 도공만큼의 엄격함도 기울이지 않은 채 자신의 견해를 거리낌 없이 밝히는 사람들의 확신에 절대로 주눅 들지 말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너무도 명백한 것이라거나 당연한것으로 선언된 것들 중에서 실제로도 그런 것들은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 세상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진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기존의 확고한 견해들도 완벽한 추론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종종 수세기에 걸친 지적 혼란 상태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여야 할 이유는 결코 없는 것이다.

>> 언젠가 어느 수도원에서 성당 문 앞에 개가 앉아 있었던 것에 대한 우화가 생각이 난다. 첨부터 그 개가 성당 문 안에 앉아있었던 건 아니지만, 언젠가 그 개를 사랑하던 신부님이 그렇게 있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그 신부님이 떠나신 이후에도 그렇게 그 개는 그 문 앞에 앉아있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 문 앞에는 개가 항상앉아 있어야 하는 것 같은 관습이 형성되었던 것.. 어느 젊은 수사님이 의문을 품는 그 순간까지도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고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

성당에 개가 있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 형성은 떄로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흘러 내려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져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따르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넘 재밌지 않은가..? 분명 나도 궁금해하지 않는 수사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P40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그것이 과반수에 의해 받아들여지느냐 또는 오랜 세우러 동안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믿어져 왔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암시한다.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그릇됨이 증명될 수 없어야 진실이 될 수 있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들이 제아무리 저명한 인물이라 해도 그릇된 점이 증명되는 진술이라면 그것은 거짓임에 틀림없고, 그러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P42 우리에게 힘이 될 반론(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부패한 사회에서의 부의 축적)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막연히, 아니면 기분 나쁜 채로 그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쩃든 자신이 옳다고 고집해야 할 것이다.

>> 하하하하~ 내 주장이 옳은 줄은 아는데 딱히 그것을 제대로 정리해서 말하지 못할 때의 우겨대는 평소 우리의 모습~ 하하하~ ^^


P43 소크라테스는 반론에 이성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신봉되는 올바른 신념을 순수 의견 (True Opinion)’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진실한 이유만 아니라 그 대언들이 왜 허위인지에 대한 이해까지 수반하는 지식 (Knowledge)’과 그 순수 의견을 대비시켰다. 소크라테스는 그 같은 진실의 두 가지 버전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 다이달로가 만든 아름다운 작품들에 비겼다. 직관에서 나온 진실은 버팀대 없이 옥의 대좌에 놓인 조각상과 같았다.


P48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경우 소크라테스처럼

>> 왠지는 모르지만 피오리나가 떠올랐다. 칼리 피오리나. 자신의 온 열정과 사랑을 다 쏟아 성장시킨 HP에서 쫓겨(?)날 때 눈물 한 방울 흘리니 않은 그녀. 아마 내가 그녀였다면 분해서 울고불고까지는 하지 않았다치더라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란 힘들었을거란 생각을 했다. 정작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읽는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소크라테스도 알았고 아테네 시민도 알았다. 그가 옳다는 것을. 그가 독배까지 받아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그의 행동은 아테네 시민들의 정신적 영적 성장을 위한 행동이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던 작은(?) 소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녔나. 억울했을 것 같다. 이것은 회사를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단 하나뿐인 나의 생명을 단지 그들이 아니다라고 했기에 박탈당해야 한다는 것.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태연하고 당당하게 독배를 받아들었다.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나. 자신이 추구하는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신의 생명도 아깝지 않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그것을 가진 소크라테스가 부럽기도 했다.


 

 

P49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와는 정반대의 경향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다. 모든 삶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말이나 빈정거리는 의견이라도 들으면 금방 당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안이 되는 질문을 던지는 데 실패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이런 혹평을 할까? 우리는 진솔하고 치열하게 사고하는 비평가의 반대와 그저 염세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비평가의 반대를 똑 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려 하는 것이다.

>> 비난을 받을 때.. 라는 상황을 두고 나를 생각해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두고 깊이 비난을 해댔던 기억은 없으나 대화를 나누다 빈정거리는 말들이나 상처되는 인신 공격으로 상처를 받은 기억은 난다.

그때를 떠올리면 당장에 그에 걸맞는 멋진 대답으로 한방 먹여주지 못해 집에 돌아와 끙끙대곤 했다. 그것들로 인해 나는 깊이 상처를 받았었고, 그러한 사소한 것들에 온통 모든 안테나가 켜있던 내 자신을 용납하질 못해 우울증까지 걸렸던 기억도 있다.

그러면 나는 왜 그랬을까..? 인정 못 받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그것은 곧 인기와 연결되었던 건 아닐까..?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내 삶의 목표가 없었기에 쓸데없는 데에 많은 주파수가 널부러져 있었고, 그런 내 자신은 자신이 없어지고 점점 당당함을 잃어갔던 것. 그랬기에 왜려 어렸을 때는 우습게 넘어가던 것들을 그 당시의 내가 우습게 넘기지 못하고 아파하는 내 모습이 죽어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인정받고 싶다라는 강한 욕구가 엉뚱하게 나타나고 있었던게다.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일 게다.

암튼, 알랭의 해석에 공감이 갔다.


 

P66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파이돈의 말)을 읽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눈물이 샘솟듯 소아 나왔다. 크리톤은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일찍부터 눈물을 끊임없이 쏟고 있던 아폴로도로스는 마침내 울부짖음과 비탄에 휩싸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장면은 영화처럼 내 머리속에 그려졌고,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의 참을 수 없는 눈물을 보면서 나도 코가 찡해지며 눈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부분에선 눈물이 더욱 흘렀다. 그의 당당함이란. 그의 결연함 앞에 우리는 더욱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게다. ‘철학자라는 타이틀에 앞서 그런 훌륭한 한 인격체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 늘 내게 기둥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주고 깨우쳐 주는 친구의 어이없는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헤어나기 힘든 너무나도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을 테니까..


P70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는 우리로 하여금 옳지 못한 명분을 품게 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건은 자칫 많은 사람들에게 다수의 미움을 사는 것과 옳은 것과의 관계에 대한 감상적인 믿음을 조성할 수도 있다. 또 초반에 오해를 받았다가 훗날 리시포스가 제작한 동상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 마치 천재와 성인의 운명처럼 비칠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은 천재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우리가 만약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비난 받을 때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린다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거부의 정당한 명분보다 단순히 거부하는 자세를 미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70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실과 동의어로 보는 것은 인기 없음을 잘못과 동의어로 믿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짓일 것이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 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와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P71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 에피쿠로스

P82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P83 아직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철학을 할 시기가 지나가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맞이하기에 너무 젊거나 늙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 이 말은 내게 참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사실 철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룩하게 느껴지기에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얹어놓고 동경을 하며 바라보는 숭고한 어떤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가 철학이라는 것을 무척 가깝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나, 안광복 선생님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를 대한 후 내게 철학은 전보다는 무척 가까이 내려와 앉은 듯한 느낌인 것은 사실이다. 철학이 이렇게 재밌는 것인줄 몰랐던 것이다. 물론 안광복 선생님의 뛰어난 필치와 유머로 우리 수준에 맞게 쉽게 풀이해놓으신 덕분임을 알지만.. 어쨌든, 저에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면 지금은 내 곁에 계신 당신쯤으로 여겨지는게다.

결론은, 나는 철학을 한 준비도 되어있고, 행복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


P85 ‘Epicurean’ –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의하면 쾌락 추구에 헌신하는 그러므로 안일을 좋아하고, 감각적이고, 탐욕스런으로 되어있다.

>> 그런데 이상하다. 왜 에피쿠로스는 아주 소박한 삶을 살았는데, 그에 대한 영어 사전 해석은 저렇게 되어있을까..? 같은 당대에 살아 소문에 의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실질적인 그의 삶의 방식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지않나. 그가 추구한 것이 어떤 삶이었고, 어떤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갔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P90 에피쿠로스의 시각에서 보면,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돕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었다.

P90 우리 인간은 당장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대신 에피쿠로스보다 백 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도덕적 정의들을 평가할 때 동원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방식에 따라 우리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그렇게 말했을 때 철학은 우리의 고통을 합리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의 병을 치유하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P93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

>> 진실되게 말하자면, 나는 우정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은 형벌 같은 외로움이다. 에피쿠로스의 우정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우정에 대해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늘 내 곁에 있었던 것이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P93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P93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P94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친구들은 우리를 알아봐주고 돌봐줌으로써 우리에게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P94 친구들에게서는 그 사람 참 무섭지 않아라든가 너는 이런 느낌 받지 않았어?”라는 질문을 던지면 , 별로라는 시큰둥한 대답보다는 이해한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혹여 시큰둥한 반응을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조차도 극지를 여행하는 탐험가만큼이나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P94 진정한 친구들은 절대로 우리를 세속적인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며,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자아다. 이상적인 부모들처럼, 우리를 향한 친구들의 사랑은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P95 에피쿠로스는 삶의 기초가 되는 우정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진정한 친구는 큰 재산으로도 얻을 수 없는 사랑과 존경을 베푼다는 점을 인정했다.


P96 에프쿠로스가 자신의 친구 메노에세우스에게 설명했듯이,  “(현명한)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

>> 아마 나는 현명한 사람이 되기는 조금 어려울 듯 싶다. 나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아주 많이 먹고 싶어하니까..^^


P96 그러한 소박함은 친구들의 위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테네가 중히 여기는 가치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은 더이상 물질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자기 중심과 주관이 올바로 서면서 사회적인 시선의 성공이나 부유가 그들에게 감히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고한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이들.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지..


P96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등을 예방할 수 있다.


P97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했다.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어떤 상태를 두고 미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 참으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 깨달음 속에 무릎을 탁 치며 고개 끄덕거리게 하는 많은 이론들이나 배움들이 이미 고대 시대부터 전해져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면 사람 사는 곳이기에 시대를 떠나 같은 상황속에 같은 깨달음을 받는 것은 당연한건지도 모르겠고...


P98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P99 욕망에 때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이 있다.


P101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 문제는 결핍에서 오는 고통이 의외로 큰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 아니겠나.. 전에는 그것이 그다지 고통스러운건지도 어려운건지도 몰랐다. 그걸 느끼기 위해서는 내가 무언가를 가졌어야 하니까.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나로서는 없다는 상황을 힘들어하는 누군가들이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지금 역시도 내가 무언가를 많이 가진 것은 아니나, 조금 삶이 편하고 이것저것 주위에 편한 시설을 누리는 지금 그 중의 하나라도 없어서 조금이라도 내가 불편해지는 것을 많이 힘들어한다. 심지어 인터넷만 안되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말이다..


P106 행복은 멋지게 장식한 빌라보다는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

>> 백번 동감 옳은 말이다.


P107 그렇다면 값비싼 물건들이 크나큰 기쁨을 안겨다 주지 못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자신의 두개골 옆면에 구멍을 뚫게 한 편두통 환자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잘못 때문이다. 말하자면 값비싼 물건들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따로 있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것들을 마치 물질적 차원에서 확보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는 않고, 새로운 물건이 진열된 선반으로 끈임없이 이끌린다. 우리는 친구들의 우정 어린 충고 대신에 캐시미어 카디건을 구입한다.

>> 너무나도 맞는 이야기다. 이번에 내가 엉뚱한 밤색 코트를 사는 해프닝도 결국 이런 심리상태에서였던 것... 사람의 심리란...


P108 에피쿠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자유이다.


P111 루쿠레티우스는 우리 자신의 분명한 분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풍문에 의해서필요한 물건이 정해지는 방식을 개탄했다.

>> 나 역시 카더라~좋더라~’ 통신에 얼마나 솔깃해 하는지..^^ 루쿠레티우스가 통탄해하는 그 사람들 중에 나도 끼여있다니, 내가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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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끝났다.

다음으로 읽을 책은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는데 그만 계획이 바뀌었다.

하지만 알랭도 나를 이해 할 것이다. 내가 성장하기 위함이니..^^

초서는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한 부분까지 그냥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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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Fukada Kyoko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

Into the Light으로 골랐다...

알랭 & 철학과 함께 Into the 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