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즐거움 리뷰..
리뷰를 시작하며…
‘다중지능’을 힘들게 읽고 다음으로 이어진 ‘교양의 즐거움’이란 나른한 제목의 책을 펼쳤을때는 일단은 책의 내용에 앞서서 20명이나 되는 ‘저자’들을 보며 그야말로 ‘경악’했다. 그래. ’경악’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 하다. ‘박 홍규 외’라고 써있어서 저자가 한사람 이상일거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스무명씩이나 되리라고는 감히 상상을 못했던 것. 하지만 일단은 저자 조사에 앞서 책을 읽어나갔다. (읽으면서도 머리 한구석엔 저자조사에 대한 걱정이 내어깨에 짐되어 무거운 마음이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원래 축제 마감즈음에는 까페엘 잘 안들어가는데, 오늘은 그냥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가 선생님의11월, 12월의 필독서는 '저자 조사' 하지 말 것! 공지사항을 읽고 이게 꿈인가 생신가 얼마나 신났더랬는지.. 혹시나 내가 잘못 읽은건가..싶어서 나중에 다시 들어가 확인 사살까지 했다..
암튼, 그렇게 무거운 짐을 턱~ 내려놓고 가니, 갑자기 내삶에 빛이 들어오는 느낌.. 그거 걱정되서 초서도 리뷰도 쓸 엄두가 안났더랬는데, 이렇게 신나서 리뷰를 쓰고 있다..^____^ (흐뭇~!!)
읽으면서...
‘교양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바로 제목 그대로 ‘교양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 20명의 각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문가들이 마치 노래를 부르듯 읊어놓은 글들은 정말 읽는 이로하여금 지적 충만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재밌고 흥미진진했던 것은, 철학, 심리학, 사서, 한국 문학, 세계 문학, 사진, 미술, 건축, 만화, 음악사, 판소리, 재즈, 발레, 뮤지컬, 영화 등등.. 우리 삶속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모든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닌 영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다는 것이다.. 정말 흥미진진한 여행이었다.
생명, 휴머니즘, 유토피아 - 박 홍규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
먼저, ‘르네상스’는 중학교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시험때마다 나오던 단골소재로 참 익숙했지만서도 내게는 늘 광범위한 주제였다. 물론 한마디로 요약되어질수 없는 광범위한 영역임은 당연하지만서도). 그런데 박 홍규 교수의 이 짦은 몇페이지의 글은 ‘르네상스’의 근본적인 의미와 그것의 정신과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한 표현이었는지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주어 마치 모범답안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새로왔던 것은 셰익스피어가 르네상스 말기의 문학가였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처음 듣는 얘기로, 새로운 정보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겁게 익혀졌다.
장기판의 안, 장기판의 밖 - 이 정우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게다가 이 정우의 구조주의에 대한 분석은 ‘내가 철학에 대한 관심이 내가 느끼는거 이상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사실 내가 ‘철학’을 접해본것이래야, 중고등학교때 칸트니, 쇼펜하워니, 니체니 하면서 유명하고 저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을 시험문제에서 답을 맞추기 위해 공부한게 전부다. 그나마도 실용주의니 실존주의니 염세주의니 하는 철학이론은 들어봤어도 ‘구조주의’에 관한 언급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어보는거라, 역시 무척 흥미진진했다. 토템이즘이니 애니미즘이지하는 단어들도 처음 접했고. 물론 레바-스트로스, 소쉬르, 마르셀 모스등등의 철학자 이름도 처음 접해보았다, 그런데 이 짧은 글을 통해 느끼는 구조주의에 대한 해석은 내가 아주 조금 기억하고 있는 다른 철학 이론에 비해 좀 더 포용성있게 느껴졌다. 암튼, 그의 토테미즘에 대한 설명이나, 신화에 대한 해석이 무척이나 흥미로왔으며, 그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 역시 무척 재밌게 느껴졌다.
레바-스트로스의 한계를 통해 우리는 ‘구조의 바깥’을 생각하게 된다. 구조의 바깥, 코드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카오스와 욕망이 있다. 구조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카오스와 욕망이다. 구조/코스모스는 이 욕망/카오스를 길들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카오스는 결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으며 안정된 듯한 구조/코스모스 아래에는 늘 욕망과 카오스가 물결치고 있다. (P43) 라는 저자의 표현이 무척 모순적이면서도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마음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 - 김 기현
(심리철학의 쟁점)
그리고 ‘마음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의 심리 철학은 정말 참 신기했다. 그래서 철학자고 그래서 심리학자구나..하는.. 읽으면서 마치 나도 심리 철학자가 된듯, 정말 그렇다면 마음은 우리의 육체중에 어느 부분에 속해져있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느낌’과 ‘감정’들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또한 ‘의식’은 어디서 어떤 현상으로 나오는건지…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을 시작으로 현대의 심리철학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노쟁과 토론을 거듭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속시원한 답을 못내놓고 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로 그게 신의 영역이 아닌건가..하는 철학자들이 벼로 달가와하지 않을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설명할수 없듯이,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어 태어난 우리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정신이고, 영혼이고, 의식이 아닐까..?? 그부분은 바로 신의 영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을 전혀 모르는 나지만, 구조주의에 이어진 심리철학은 정말로 읽으면서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 다음번에 이에 관련된 서적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원리, 인간의 도리 - 최 재목
(사서의 핵심)
최재목 교수의 사서의 핵심은. 지금까지 독서축제를 하면서 접한 몇권의 고전들과 다산선생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가까이 느껴진 사서삼경, 또느 사서오경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선생님께서 언젠가 ‘논어’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걸 들으며, ‘논어’를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글은 논어뿐만이 아니라. 대학을 시작으로 사서를 다 읽고 싶게만드는 어떤 ‘자극’같은게 느껴졌다.
전에는 옛문헌이라하면 왠지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그런 느낌이 강했는데, 독서축제를 하면서 그런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서뿐만 아닌, 우리 옛 선조들의 글도 읽고 싶어지는 열망이 생긴것은 고맙기도하고 기쁘기도한 아주 반가운 감정이다. 또 이 사서를 어떤 순서로 읽어야하는지까지 친절히 말해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 서 성철
(세계문학의 새 중심, 중남미)
서성철의 중남미 문학에 관한 글이 남미에 살고 있는 나의 깊은 관심을 끈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을게다. 브라질에 살고 있다는 이유말고도, 내가 읽은 몇 안되는 남미 문학과 관심을 갖고있던 작가들이 언급되어 있어, 정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 마치 나를 위한 글인마냥 신나게 읽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은 내가 처음 대한 남미 작가의 책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때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백년동안의 고독’을 지적허영심에 읽었던 기억. 재미난 스토리와 마지막 돼지 꼬리를 달은 아기가 태어남으로 예언이 현실로 이뤄지고 그렇게 번창했던 마을은 지도에서도 사라지는... 이야기의 결말은 내게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너무 오래전에 읽었기에 다른 세세한 부분은 기억 희미하지만. 마지막 결론부분에 내가 느꼈던 충격은 기억이 난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무섭기까지 했던.
암튼, 그 마르께스와 페루 대통령으로 출마까지 했던 유명한 작가 바르가스 료사는 내게 한때 이상형으로써 내 수첩에 사진까지 붙여져있던 작가였다. 물론 바르가스 료사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가 지닌 지적 능력과 또 그와 함께 그의 너무나도 멋진 배우같은 외모는 젊은 아가씨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
이 남미 문학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들 이름이 많이 빠져있어서 조금 아쉬웠고 (특히, 브라질 문학의 거장인 마챠도 디 아씨스 Machado de Assis) 통속소설가로 브라질의 인텔리 작가들 사이에서는 시기를 받고 있는 현대 브라질을 넘어서 이미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연금술사’의 빠울로 꼬엘료에 대한 얘기도 한번 언급될만도 했다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이거야 물론 내가 브라질에 사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브라질 얘기를 많이 듣고 싶었던것은 당연한거였을게다…^^
나는 국적이 없다 - 윤 상인
(이종교배 시대의 일본문학)
‘나는 국적이 없다’의 일본 문학에 관한 글은 여러가지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내 시선을 붙잡고 충격을 느끼게 했던 부분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시상식때의 연설부분이었다. 그의 객관적이면서도 깨어있는 의식인의 모습과 함께 그의 용기에 혀가 둘러졌다. 만약 한국의 어느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자기나라의 부끄러운 부분을 지적하며 연설을 했다면.. 하고 상상을 해보았다. 흐미, 상상도 하고 싶지않다. 아무리 그의 행동이 의식있고 지각있는 행동였다하더라도, 아마 그작가는 한국에서 제 명대로 못살았을것은 물론, 그 책을 읽지말자는 촛불시위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가 일본에서 천황의 훈장을 거부하며 그런 연설을 했을때, 일본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을하고 받아들였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어쩜 이런 부분에서 우리 나라는 아직 어린아이 시기에 머물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좋으면 ‘신난다’ 박수치고, 싫으면 ‘두주먹 불끈쥐고’ 우리편 네편을 가르는.. 아직 미성숙한, 자아의식이 정립되지않은 미성숙기에 있는 우리..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네의견도, 내 의견도 존중하는.. ‘다름’을 ‘차이’를 존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 이 광호
(19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
이 광호의 19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을 읽다가, 나의 한국 어휘 이해력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글속에 여러군데서 표현되어지느 ‘탈낭만화’가 도저히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갔던 것이다. 읽으면서, ‘순정만화’, ‘명랑만화’, ‘교육만화’등등 여러종류의 만화 쟝르는 알지만 ‘탈낭만화’라는 쟝르는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어렴풋이 상상했던 만화 쟝르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글들로 표현되어, 당체 이해가 안갔더랬는데, 마지막즘 가서야 글이 새롭게 분해되어 펼쳐지면서 그것인 ‘탈낭 만화’가 아닌 ‘탈 낭만화’로 보여진 것이다. 하하하하하~ 혼자서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한국말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나지만, (나이들어 이민 나온 내가 물론 그래서도 안되고..) 가끔씩 이런 경우를 당할때가 있어 황당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암튼. 사설이 길었다. 어쨌든, 한국 문학의 변화를 이 글을 통해 조금 더 이해할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고, 또한 내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느 ‘은희경’ 작가에 대해 좀 더 깊이 느낄수 있어서 좋았다. 나 공지영보다는 은희경을 좋아하는데, 공지영은 마치 시대의 아픔을 혼자 다 겪는 듯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자긴것을 겸손으로 포장해 내보이는것이 한동안 구역질이 났었다. 지금 그녀의 글은 그런 부분이 많이 없어진듯 한데, ‘수도원 기행’을 읽은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책은 더이상 읽지 않는 반면, 은희경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재치넘치는 표현과 일상의 섬세함을 그녀만의 표현으로 그려내는 능력이 존경스러울정도로 예리해서 그녀의 글을 좋아한다. 가만보니 내가 ‘공씨 기피증’인것 같다. 공자도 벼로 안좋아했고 공지영도 별로 안좋아하고.^^;; 그것은 개인 취향임으로 그분들께 상처가 안되었음 좋겠다. (외교적 발언으로 마무리하는 펌킨~ -_-;;)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도 인공적인 - 정 주하
(사진예술의 역사)
정주하의 사진 이야기는 정말로 재밌었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나,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사진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누가 시작했을까? ’ 라는 의문을 한번도 가지지 않았던 내 자신이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사진의 역사며 사진이 예술안에서 차지하는 의미며 그 변천사를 알게되는 것은 사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기회가 되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때 특별활동으로 ‘사진부’엘 신청을 했었다. 두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사진부 담당이 독어 선생님이셨는데 분위기가 예술가 타입여서 그분위기에 그랬고, 또 하나는 사진을 들고 다니며 찍는 내 모습을 상상해볼때, 괜히 그럴듯한게 멋져보일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부에 들고 싶은 이유가 ‘사진’과는 무관계한 것들이었던것이 지금 생각하니 살포시 웃음이 나온다. 암튼, 나는 결국엔 사진부에 들지 못했는데, 이유는 내 개인용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는 각자 개인 카메라 지참이 요구되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은 ‘사치’였던 환경에서 결국 참여할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것은 바로 아빠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사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던 아빠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속의 모습조차도 카메라에 담으셨고, 나중에는 사진 현상도 직접 하실만큼 사진에 관심이 많으셨더랬다. 미8군의 회계사로 일하셨기때문에 그러한 환경적 여건이 아빠의 취미생활을 자유롭게 할수있는 바탕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렇게 찍혀진 우리 사진들을 한명한명마다 따로 앨범을 정리하시는게 취미셨고, 우리가 이민을 떠나는 날 그 앨범은 이민가방을 두개나 차지할정도로 많았더랬다.
나는 우리 애리와 리예에게 그런 아기자기한 엄마는 못되지만, 지금이라도 아이들의 일상을 담아주려 하고 있다. 물론 싫다고 도망가는 아이들이지만, 나중에 크고나면 그것이 모두 추억의 한페이지로 그 아이들과 함께하게될 것이다.. 살며시 미소지어지는.. 지금 내게 그렇듯이..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 성 완경
(‘제9의 예술’ 만화)
성완경의 ‘칸과 칸 사이’의 만화 이야기는 읽는동안 정말 무아지경이었다. 내가 ‘만화’하면 또 ‘한 만화광’아닌가.. 하긴 우리 집안은 엄마만 빼고 아빠부터 시작해서 온 가족이 만화광이었더랬다. ^^
누가 단순하게 오다가다 시간때우기로 뒤적거리는 것이 만화라고 했나.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만화를 읽기위해 배경음악까지 틀어놓고 진지하게 심취하며 읽었던.. 내게는 문학서적이었더랬다.. 그런데 그만화에 이런 깊은 철학이 있고, 이런 심오한 정신이 있다는 것이 괜히 흐뭇하기까지 한 아주 푸근한 느낌이었다. ^^
만화광답게 거론 되어지는 많은 만화가들의 이름이 친숙했고, 특히, 황 미나 만화는 나와 내 동생이 가장 좋아하던 작가였다. 그녀의 굿바이 미스터 블랙이라던가, 유랑의 별등은 고전이라 불리워져도 전혀 손색없는 역사만화, 그런데 황미나가 한가지 우리를 힘들게 했던것은 그녀는 주로 주인공이 죽는 것은 물론 때떄로 등장인물을 전멸시키는 경우가 많아, 나와 내동생이 만화책 뒷면에 나와있는 주소로 제발 주인공과 등장인물을 죽이지 말아달라는 편지까지 쓴 기억이 난다. 우리 딴에는 무지 심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수 없다. (그시간에 공부나하지..소리가 절루 나온다..^^;;)
암튼, 이 만화를 거론하면서 우리시대때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캔디캔디’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참 의아스럽다. 캔디캔디는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아름다운 이야기. 한때 ‘캔디’가 나의 롤 모델로 나도 캔디처럼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않는 내가 되리라고 무지 노력했던 기억에 또한번 웃는다...
우리 애리와 리예에게도 읽히고 싶어서 얼마전 교보에서 ‘캔디캔디’를 주문해서 읽게했다. 한글도 읽힐겸.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사랑받는 만화. 캔디를 잊을수 없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그 미학을 즐기라 - 박 신의
(현대미술, 어떻게 볼 것인가)
박신의의 현대미술에 관한 글을 읽으며, 정말 삶은 점점 복잡해져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심지어 커피 한잔을 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선택을 해야한다. 내가 어렸을때는 블랙 커피, 또는 밀크 커피가 다였는데, 요즘은 그 이름도 내용도 다양하다. 블랙 커피 밀크 커피는 물론, 아이리쉬 커피, 모카 커피, 카푸치노 등등..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그것이 ‘편하다’라고 한다. 정말 편한 것일까..??
언젠가 어느 작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어머니를 위해 온가족이 함께 떠난 모처럼의 가족 여행. 온 가족은 신나서 즐거운 여행을 즐기는데. 정작 어머니는 카드키의 불편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센서로 작동되는 샤워실, 심지어 카드키를 꽂아야 불이 켜지는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어서 결국엔 울음을 터뜨리셨다는 이야기.. 아날로그 시대의 어머니와 디지털 시대의 우리들.. 과연 우리는 편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예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박신의 교수의 미술사에 관한 글은 우리 삶속에서 미술뿐만이 아닌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것을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자존의 철학이 꽃피운 우리 그림 – 강 관식
(우리 그림의 고전적 전범 조선 후기의 진경풍속)
강관식의 조선 후기 미술사는 또다시 한번 정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했다. ‘다산 선생’을 읽으면서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정조,, 역시 그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가슴에 열정이 살아있는 왕이었다. 미경이가 그랬나..?? 사학과 친구가 정조를 사랑해서 덩달아 정조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노라고.. 이 조선 철학이 깃들여진 미술사를 읽으면서 다른 것은 눈에 그다지 안들어오고 정조부분이 눈에 번쩍 띄었다.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 강혁
(한국 건축, 음화와 양화)
강혁의 건축 이야기는 참 흥미로왔다. 우리나라에 ‘건축’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새로왔고 우리나라에 ‘건축’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유래되어 들어왔는지을 알게된것도 참으로 재밌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그 옛날에 그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의 제자들이 유학을 통해 건축 활동을 했다는 사실도 참으로 멋져 보였다. 지금은 유학이 너두나두 다 가는 상황이지만 우리때도 쉽지 않았던 유학..그때는 오죽했을까..??
제목처럼 그냥 ‘사는 집’이 아닌 ‘느끼는 집’으로 새로운 컨셉을 적용헀던 건축, 그야말로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깃든 건축… 바로 공간 예술이라 불려지는 것이 당연하구나..싶었다..
음악 역사, 미술 역사, 건축 역사등등 무엇이든 ‘역사’가 들어가면 지겨워지려는 난데..참으로 이상한것이 이 ‘교양의 즐거움’에 나오는 역사는 정말 재밌게 읽혀지고, 또한 그들의 뿌리를 알게 되는것이 이렇게 흥미로운지는 이번 축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 김 용환
(서양음악사 넓게 보기)
김 용환의 서양 음악사 역시 내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며 나의 흥미와 관심을 자극했다. 그 유명한 고전 작곡가들이 그들의 영감에 의해 곡을 만들기도 했지만, 실은 그들은 고용인이어서 무작정 주문(?)이 들어오는대로 곡을 만들어야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왔다. 게다가 연주를 하여도 짜집기 연주로 청중의 귀를 즐겁게하기 위해 이곡 저곡을 짜집기해서 연주를 했다는 사실도 거의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이었다... 정말 ‘돈’ 앞에서는 인간은 그 무엇이든 창조(?)해내는 무한한 능력을 가졌구나..싶었다.. 자신의 곡이 뒤죽박죽 다른 작곡가의 연주와 함께 섞여서 연주될때 작곡가는 얼마나 슬프고 허무했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기술의 힘을 빌려, 청중과 함께 - 황 성호
(현대음악의 이해)
황성호의 현대 음악의 이해는 새로운 악기들과 새로운 컨셉의 시도로 청중과 악기가 하나가 되게 하려는 시도가 놀라왔다. 마치 과학자처럼 끝업는 시도와 연구로 계속적으로 새로이 탄생되는 쟝르들, 테크놀로지와 음악과의 결합.. 그들은 음악가인지 과학자들인지 살짝 혼동스럽기마저.. 앞으로 그들의 결합이 어떤 음악을 우리에게 보여줄것인지 많은 기대가 된다..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 - 김 현준
(재즈 변화의 역사)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의 김 현준의 재즈의 역사는 정말 많이 웃으면서 읽었다. 어쩌면 그렇게 내 느낌을 콕~ 찔러서 표현을 했는지.
‘재즈처럼 그 매력과 특성과 만끽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음악이 또 있을까. 재즈는 첫눈에 빠져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이기보다는, 오래 세월이 흐른 뒤 문득 깨닫는 그것처럼 깊고 넓고 복합적이다..’ 하하하하하~ 얼마나 웃었는지.. 바로 그랬다 내가.. 사실 내게 있어 재즈는 참으로 매력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내겐 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느껴진다. 그런 마음을 이렇게 콕~ 찝어서 표현한 김 현준이 참 재밌게 느껴졌다.
암튼. 편안하게 재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느낌까지 섬세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써내려간 글은 정말 참 맛갈스러웠다. 재즈의 역사며, 재즈의 여러가지 쟝르에 대한 설명이며,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내가 재즈 전문가가 되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이제 재즈를 들으면 조금 더 이해가 될것 같은… 사실 나는 내게 ‘재즈를 좋아하는가?’하고 물으면 뭐라 답을 할줄 모르겠었다. 왜냐면 그 물음 자체가 우문이었음을 누가 알았겠나.. 너무나도 광범위한 질문..
내가 재즈를 처음 접했던것은 유학시절 아르바이트할때 같이 일했던 직원이 재즈광이었다. 하두 재즈를 들어서 함께 일하던 나도 재즈를 접하게 되었고, 특히 그분이 좋아했던 뮤지션은 ‘데이빗 샘번’이었는데, 그 이름도 그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노라 존스를 만나면서 재즈를 다시 듣게 되었던것 같다. 노라 존스 광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그녀의 수줍은듯 아름다운 얼굴에서 나오는 청순함과 피아노를 치면서 살짝 노스탈지아가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처음 그녀의 ‘I’ve got to see you again’을 들었을때는 눈물이 터져나왔더랬다. 그녀의 마치 혼자 넋두리하듯 표정없이 부르는 노래는 왜려 그 무표정이 ‘격렬한 그리움’보다 더 깊게 느껴졌더랬다..
암튼, 이 재즈에 관한 글은 이야기의 이어짐 자체도 너무 재밌었지만 정말 재즈의 역사나 쟝르에 무지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어 너무나도 흥미 진진하게 읽을수가 있었다.
살아남은 다섯 마당, 잃어버린 일곱 마당 - 유 영대
(판소리 열두 마당 개관)
유 영대의 판소리는 판소리를 이해하는데 역시 도움을 주었고,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에는 그 유명한 ‘서편제’가 떠올랐다. 한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딸에게 독약을 먹였던 아빠.. 동생이 누나를 찾아가 함께 소리를 하며 눈물 흘리던 장면.. 그 모든 것이 우리나라에만 있다던 ‘한’을 느끼게 하며 가슴이 저려왔더랬다.
정말 아쉬운 것은 12 마당중 7개나 전승되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왔다. 우리의 정신이 묻어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잘 전승하여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나라의 정신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언어가 끝났을 때, 발레가 시작됐다 - 이 은경
(발레 천상의 아름다움)
이은경의 발레,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술이라 멀리서 동경만하며 발레공연을 보며 스스로의 허영심만 충족했지 그것에 대해 깊이 알려하지 않았던 내모습을 발견하며 발레 복장에서만도 그렇게 많은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고는 예술은 무엇 하나도 그냥 의미없이 표현되는것이 없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강수진의 발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감동과 자극을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발이 문들어지도록 연습할때 과연 나는 무엇을 했나..??’ 아마 그녀의 발 사진을 본 사람들은 한번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것이다. 나역시 그랬다. 내가 지난 날 이루고자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투덜거리며 힘들어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던 나는..과연 그녀가 그랬던것처럼 그렇게 피깎이는 노력을 했던가..??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참 많은 생각에 잠겼더랬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동작과 날아갈듯한 가녀린 몸을 지니기 위해, 그녀들의 발은 문드러지고, 팔짜걸음이 되는 그런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그들이었다.
재밌었던 것은, 치마 길이에 따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알수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왔고, 루이 14세가 발레스타였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왕이 직접 발레를…와우~ 정말 상상만해도 멋진 일이 아닌가..?? 그 포악한 루이 14세가 발레를 사랑한 것.. 히틀러가 음악을 사랑한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아무리 전쟁을 좋아하고 냉혈적이고 폭군적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감성은 어떡해서든 나타나는거구나 싶었다.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 김 학민
(뮤지컬 알고보면 더 재밌다)
김 학민의 뮤지컬, 정말 소제목처럼 ‘뮤지컬 알고 보면 더 재밌다’. 내가 본 뮤지컬들을 상상하면서 읽다보니 그 재미가 한결 더했다. 뮤지컬..그냥 노래하면서 연기를 하는것이 뮤지컬인줄 알았는데, 뮤지컬에도 여러 쟝르가 있고 또한 그 유래도 알게되니 한결 더 흥미롭게 읽을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스 사이공’은 실망스러웠다. 왜냐면 한국의 ‘블루 사이공’을 보고 난 다음에 보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블루 사이공에 비해 미스 사이공은 내용이 너무 뻔한 내용이라 식상했고, 아이들과 보기에는 너무 노골적인 표현들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한국에 나갔을때 친구의 초대로 함께 보았던 ‘블루 사이공’은 정말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장치와 배경등, 그리고 식상한 내용이 아닌 정말 월남 전쟁의 비극이 현재로 이어지는 양쪽 아이들의 이야기와 자신의 실수로 부하들을 잃어 결구엔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또한 그 아빠를 돌보는 정신박약아 딸.. 그 딸의 연기에 나는 푹 빠져버렸었다. 마지막 그가 죽은 후 단조로 흘러나오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음악이 나올때는 나는 거의 통곡을 했던것 같다.. 지금도 그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눈물이 그렁거린다. 정말로 예술성에서나 작품성에서나 미스 사이공을 능가하는 작품이었다. 그것이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을 할수 있다면.. 우리 한국의 우수성을 외국에 알리게 될까..하는 바램이 나도 모르게 강하게 들었다.오페라의 유령도 잊을수 없는 뮤지컬로 기억에 남는다. 미녀와 야수는 아이들이 더 좋아했고..
음.. 뮤지컬 글의 리뷰를 쓰려다가 내가 본 뮤지컬 감상으로 방향이 잘못 잡혔다..^^;;
어쨌든, 새로운 시도를 한 덕분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라이언 킹’ 등등이 태어났다니, 앤드류 로이드 웨버에게 감사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들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예술적 재능과 또한 자신들의 작업에대한 열정을 나는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수가 없다. 레 미제라블은 나의 게으름으로 놓쳐버린 뮤지컬, 언젠가 온다면 꼭 놓치지 않고 볼 것이다.
장 뤽 고다르, 빔 벤더스, 페드로 알모도마르.
라스 폰 트리에 - 홍 성남
(유럽영화로 가는 네 갈래 길)
홍성남의 ‘유럽영화로 가는 네 갈래 길’은 내게 좀 생소했다. 아빠로부터의 유전적인 영향으로 나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결혼 초까지는 ‘새로운 영화 제작이 왜 이리 느린거야..??’하고 투덜될 정도로 새로 나오는 영화는 모조리 섭렵하고 다녔더랬다.(공포영화빼고) 지금은 여러가지 상황과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아이들과 함께 보기로 약속한 영화빼고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지만, 암튼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라면 할말도 많은 나다. 그런데 이 유럽 영화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이 없어서 마치 준비된 잔치에 신나서 갔더니 먹을게 없을때의 황당함 마저 느껴진다. ^^;;
유럽 영화를 처음 접했던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였다.. 나는 이과반였는데, 문과반 국어선생님께서 보충 수업을 들어오셨다. 이과반이다보니 마땅히 수업을 주기가 뭐하셨는지 선생님은 영화 얘기를 하길 시작하셨는데, 그야말로 선생님은 전문적인 영화광이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비유하신 미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와의 차이.. 바로 이책에 써있는 그대로였다. 그러면서 강조하셨던 말씀은 “프랑스 영화는 내용이 아니라 배경과 음악이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끝나는 프랑스 영화를 이해 못하겠다고 느끼는데, 바로 그 이유는 프랑스 영화는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느끼며 보아야한다는 것. 그리고 배경과 음악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면서 최고의 영화로 ‘남과 여’를 뽑으셨다.
마침 불어반이었던 나는 친구와 함께 프랑스 문화원엘 가서 프랑스 영화를 접하겠다고 깝죽거리며 다녔던 기억이 난다..^^;;
몇번 갔다가 내 수준으로 느끼지도 못하겠는 횡설수설한 영화를 몇편 보고는 가기를 그만두었던 기억.. 그럼에도 새로운 경험으로의 시도 자체가 즐겁고 신났던 기억은 나와 함께한다. 그리고 학생복을 입고 프랑스 문화원에 들어설때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지만도 않았다. 그들은 분명 우리가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줄 알았던것 같다..^^;;
이 유럽 영화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때 우리에게 유럽 영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시던 문과반 선생님이 떠올라 낙엽만 굴러가도 깔깔거리던 그리운 그때 기억에 잠겨본다.
맺으며…
각각의 리뷰에서도 여러번 반복되었듯이 ‘교양의 즐거움’은 정말 흥미로왔다. 각 분야의 역사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듯 새롭고 솔깃한 정보들로 가득한 이야기가 재밌었고, 그야말로 ‘교양의 즐거움’ 이란 책 제목처럼 읽는동안 나의 교양이 무럭무럭 자라는 듯한 지적 충만감을 주어 그것 또한 빼놓을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분야에 재미를 느끼고 흥미를 느끼며 또 흥분하며 즐거워했는지… 그 반응을 살펴 보는것 또한 재밌는 즐거움거리였다. 다음에 읽게될 ‘위험한 생각’은 어떤 책일까..?? 제목이 너무나도 위험스럽다..하하하하~ ^^
한가한 오후의 나른한 느낌이 드는 제목을 가진 ‘교양의 즐거움’은 제목으로 볼때 지루할지도 모를것이라는 나의 상상을 깨고 참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몰랐던 수많은 새로운 정보들이 내 머릿속엘 들어가는 느낌이 책을 읽는내내 나를 흐뭇함속에 잠기게 했다.
초서: 교양의 즐거움을 읽다가..
P12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다.” [리주치니 – 자유에 대하여]
P13 물론 그때(르네상스)라 해서 완벽한 개혁이 이루어졌거나. 자유의 존엄성이 완전하게 보장되었거나, 의심할 바 없는 자연의 은총이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백한 한계 앞에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자유의 존엄성’을 그 어느 때보다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적어도 르네상스에서 인간은 ‘자유인’을 추구했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자유, 사회의 자치, 아름다운 자연을 향한 개혁의 몸부림이었다.
P13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활동과 함께 인간의 육체도 그 존엄성을 획득했다. 이전까지 육체는 신의 이름으로 경멸당해왔을 뿐이다. 비로소 사람들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자유의 존엄성을 해치는 궁핍과 무지, 편견과 독단, 권위와 억압은 비난 받았다. 법이 그 존엄성을 인권으로 규정하거나 궁핍과 무지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정신만은 확실히 고양되어 있었다.
P13 그들은 학문과 예술에 두루 관심이 있었으며 항상 자기만의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다. 또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든 곳을 여행했으며,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 충실했다. 이로써 그들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상대적 관용으로 다양성과 변화를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롭고 드높은 삶의 보편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그렇게 지성인, 교양인. 보편인이라는 참된 인간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 언젠가 초서를 하면서 ‘나의 르네상스’ ‘Angelicka의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그때의 결심처럼 ‘나의 르네상스’를 실현하고 있는가..?? 아나스타시아 언니처럼 내 삶에 개혁을 일으켜 과연 내가 원하는 삶, 내가 그리던 삶으로 그려가고 있는가..?? 아직도 제자리에서 뱅뱅돌며 그 주위를 못벗어나는 나를 느낀다.. 그렇다.. 내가 내 삶에서 원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바로 ‘개혁’, ‘혁신’, 또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뜻뜨미지근한 변화가 아닌, 내 오장육부가 다 비틀어지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엎어지는 그런 개혁인 것이다.
P14 그보다는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추구하고, 새로운 사회와 세계, 조화로운 자연을 모색하는 성실한 생활인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인이라 할 것이다.
P14 셰익스피어는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한다.
>> 놀라운 사실이었다. 셰익스피어가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한다니, 그래서 이 책 읽는게 참 재밌는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익히 들어왔던 것들의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느껴지는 쏠쏠한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P15 흔히 르네상스를 ‘근대의 봄’이라 한다. 그러나 ‘중세의 가을’이라 보는 견해도 있는 만큼 근대와 중세 사이의 시기, 그러니까 14~16세기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뜻한다.
P15 현대의 몇몇 학자들이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이라 불렀다. 르네상스가 지닌 중세적 요소의 핵심은 봉건제와 가톨릭이다. 물론 그 둘은 13세기 문화의 형성과 종교적 분열이라는 ‘근대의 봄’ 기운에 의해 점차 쇠퇴했으나, 기본은 르네상스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더라도 필자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세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보기 때문이다.
P17 르네상스, 인간은 오직 스스로 세상에 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노력으로 신을 대체하는 보편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는 존재로 추구되었다. 여기서 보편적이란 모든 학문과 예술에 정통한 것을 뜻한다. 바로 보편인 또는 만능인의 인간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했고, 그 자유의지에 따른 모든 사회활동을 존중했다.
P18 부의 추구는 어디까지나 자유와 학예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정당화되었다.
P19 르네상스는 휴머니즘이라는 지적 개혁에서 시작되었다. 그 학자를 휴머니스트라 했는데, 당시 중세 신학에 젖은 대학교수가 아니라 대학 밖에서 활동하는 세속 문필가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중세의 이상인 속죄의 생활 대신 자유와 창조를 위한 투쟁을 주장한 점, 전통 종교가 강요한 정신의 억압상태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의식을 자극한 점. 인간 사고와 창의력의 가능성에 새로운 자신감을 부여한 점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P19 요즘 흔히 휴머니즘의 인문학의 또다른 표현으로 쓰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휴머니즘이란 특정 분야 혹은 학문 및 예술에 대한 특정한 태도가 아닌 하나의 ‘정신’이며, 그 핵심은 생활과 지혜의 결함, 지적활동과 실천능력의 조화다. 이른바 문, 사, 철(문학, 사학, 철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아니라 모든 구체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중시하는 실천적 명제이다.
P20 르네상스인에게는 한없는 모색과 탐구의 자유정신이 있다. 추구하는 대상은 한정이 없고, 모색 기간 또한 정함이 없다. 그는 모든 구분과 경계를 자유자재로 뛰어넘으며 언제나 변화한다. 이러한 개별의 미완, 유동, 다양은 전체의 통일, 조화, 균형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르네상스적 정인의 핵심이다.
P20 알베르티는 말했다. “인간은 하려 한다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 마커스 버킹엄이 이말을 들으면 살짝 미소를 지을 것 같다. ‘성취’라는 의미가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무엇이든 성취할수 있다’라는 것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생각. 전같으면 전적으로 동의를 했겠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동의를 할 수는 없다. 안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안되는 것에 매달리며 애꿎은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되는 것에, 내 강점을 긍정적인 부분에서 살려 내가 원하는 삶으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시간관리이고, 그것이 바로 내삶을 내것으로 만들수 있는 정도임을 알겠다. ‘하려한다면 무엇이든 할수 있다.’ 에 속지말자..^^;;
P20 알베르티를 비롯한 르네상스인은 자유로운 인간이 누리는 ‘삶의 환희’를 생의 모토로 삼았다. 단테의 ‘신곡’ 등 르네상스 문학과 미술에 나타난 인간은 개성과 관능이 넘치는 자유분방한 존재다. 육체와 감각을 죽이는 중세적 종교인이 아니라 육체와 감각에 젖은 현실인, 현실주의자다.
P20 르네상스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고정된 위치나 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이는 르네상스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상황이었기에, 그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요구된 것이기도 했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위기의 시대다. 위기에 대처할 수 없는 과거 대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곧 개혁이다.
P21 에라스무스, 그는 유럽 방방곡곡을 누비며 많은 책과 편지를 썼고, 각국의 휴머니스트들과 친교를 맺어 유럽 사상계의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자유인답게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으며, 추기경을 비롯한 어떠한 직업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지러운 세파에 휩쓸리지 않았다. 자유는 그의 운명이었다.
>> ‘자유’는 그의 운명이었다. 라는 말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와 꽂혔다. ‘자유’ 말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단어다. ‘자유, 자유’를 외치며 나의 길을 간다고 억척스럽게 지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 코끝이 찡하다. ‘자중자중’ 내게 주어진 삶, 아니, 내가 선택한 삶,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잘 지켜내리라.. 자유롭기 위해서 감당해야할 것은 ‘외로움, 고독’ 함께하기 위해서 감당해야할 것은 ‘책임’ 하지만, 때때로 함께해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고독은 찾아온다. 그래서 더 외롭게 느껴질때도 있다는 것을… 에라스무스…그가 부럽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실현하며 살다간 그가 지금 이 순간엔 부럽지만, 그도 그러기위해 겪어야했던, 감수해야했던 그 ‘무엇’이 있었을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끝까지 놓치지않은 그가 우러러보인다.
브라질 가수중에 ‘Erasmo’라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 음..그니까 그가 좋은게 아니라, 그의 노래가 좋을 뿐이다..언젠가 그의 노래를 올려보겠다..^^ 암트~ 그래서 에라스무스가 더 친근감 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P21 에라스무스는 ‘그러나’라는 말을 자주 해 ‘그러나 박사’로 불리기도 했다.
>> 이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 와우들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로 불릴지도…^^
P21 또한 그는 최초로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성서 번역의 효시가 되었으며, 성서의 부정확성을 폭로해 원전비평의 기초를 닦았다. 대중도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멈추지 않았다. 신학자로서 그는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했고, 형식에 구애받는 성직자의 복잡한 사변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며, 소박하고 순수한 원시 기독교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22 알베르티 “행동하라. 무위는 죄악이다.”
>>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자신이 전도여행을 다니고 선교를 하러다니면서도 도움을 받으면 행여나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까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면서 삶을 영위헀다하니, 정말 보통 신앙인은 물론, 수도자들이 닮고 싶어하는 우러름의 대상이 아니될수 없는 분 같다..
P22 르네상스는 작고 자유로운 도시, 활기찬 자치의 도시, 저마다 개성이 있는 다양한 시민들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시라는 시민 자치의 정신에서 비롯했다. 미켈란젤로가 지키려 한 피렌체가 그 상징이고,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도 바로 그런 곳이다.
이상에 비해 현실의 도시들에는 무제가 너무 많았다. 휴머니스트들은 무엇보다 부패한 교회에 저항했다. 에라스무스와 모어, 알베르티나 미켈란젤로도 그랬다.
P23 르네상스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목적에 맞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정치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민중군주론을 주창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교회국가가 다시 흥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변호인으로 비난받았다.
P23 라스카사스는 평생을 두고 제국주의 침략과 원주민의 인권탄압에 맞서 싸워, 국제주의 정신을 구원하는 선각자가 되었다. 르네상스 예술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삶과 자연에 대한 사랑, 또 하나는 틀에 박힌 과거의 형식을 벗어던지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태도다, 단테의 [신곡]은 그 구조와 사상이 중세적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서의 다양성을 포현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
P24 흔히 다 빈치는 과학의 선구자로 지칭되는데, 그가 대표하는 르네상스 과학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을 존중하는 유기적인 자연관에 입각한 것으로 17세기 이후의 기계적 과학과 확연히 다르다. 시스틴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과 천장화 <천지창도>등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일인자로 꼽히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생명력을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조와 비례의 원칙을 스스로 깨버리기도 했다. 인간의 멋은 몸을 미켈란젤로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다.
P25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자유의 사상이다. 신체의 자유 그리고 정신의 자유, 자유는 배타주의를 배타하고 금지를 금지한다. 그것은 다원주의이며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모든 사상의 공존과 대화를 인정한다.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P28 주체철학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인식, 의미, 역사의 가능 근거를 신, 하늘. 운명, 섭리 등이 아닌 ‘인간 주체’로 보는 입장이다. ‘가능근거’를 ‘선헙적근거’라 부르기도 하므로 ‘선험적 주체’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서구의 근대철학이란 ‘인간을 주체로 세운 철학’이다.
P29 구조주의는 주체 중심의 문화가 빚어낸 폐단에 맞서 새롭게 모색된 사유양식이다. 그 발단에는 여러 맥락이 있지만 굵직한 것들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의 유산, 바슐라르, 게루등의 인식론,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주체 중심의 근대 사유를 거부하고 인간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바슐라르와 게루는 19세기 이래 탈합리주의 사조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마련하면서 구조주의를 향한 길을 예비했다. 더 직접적으로,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적 사유릐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다.
P30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애니미즘은 세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과 신성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을 말한다. 그와 비교해 토테미즘이란 특정한 한 씨족/부족이 특정한 어떤 존재들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토테미즘은 처음에는 그저 미개인들의 괴상한 면모라고 가볍게 치부했으니 인류학, 민족학, 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ㅅ 그 의미가 다각도로 파헤쳐졌다. 각 씨족은 자신들의 토템을 먹거나 해치지 않는다. 이것을 ‘금기’라 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죽여서 먹는다.
P34 기능주의는 말 그대로 토템이 그 씨족에 어떤 실질적 기능을 한다는 이론이다. 즉 그 씨족의 삶에 도움을 주고 그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P35 사회학적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볼 떄 토템이란 한 사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단순한 문장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그 씨족의 조상을 뜻하며, 그 떄문에 그것에 예배하고, 의미 있는 날이면 잡아먹으면서 피를 나눈다. 다시 말해 토템은 씨족의 신체적 생존이 아니라 집단적 정체성을 위해 기능한다. 이런 이론은 베버와 더불어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겔이 제기했다.
P37 어떤 기호의 ‘의미’는 그것에 내재해 있지 않다. 즉 자의적이다. 야옹이를 ‘개’라고 멍멍이를 ‘고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개’라는 기호가 꼭 멍멍 짖는 동물을 가리켜야 할 이유가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즉 기호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 이부분을 읽고 무척 반가왔다. 왜냐면 어렸을때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질문이었기 떄문이었다. 왜 고양이를 하필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왜 강아지를 ‘강아지’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하며 나를 둘러썬 사물들이나 둥물들에 붙여진 이름들이 왜 그이름여야 했는지, 그 근거는 어디서 온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무척 깊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졌던 똑같은 질문을 이 책에서 발견하니 어찌 아니 반가울수 있었을까..?? ^^ 몇십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답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기만하다..
P37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라고 말한다. 의미는 현상학이 말하듯 인간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해석학이 말하듯이 숨겨진 것도 아니요, 실증주의가 말하듯 말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관계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차이들의 놀이’로 성립한다.
P47 마음과 신체 또는 물질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심신문제를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형태로 전면에 부각한 최초의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의 차이는 해소될 수 없으며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원론을 주창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의 본질적 특성은 ‘생각함’인 반면,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공간을 차지함’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생각하는 한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정신은 사유하는 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의 영역과 물질의 영역을 확고히 구분한다. 마음과 물질에 관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 심리철학자들에 의하여 실체이원론이라고 불린다.
P51 행동주의는 처음에는 마음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한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 행동주의 이전의 심리학 이론은 내성 심리학 또는 구조주의 심리학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내성적으로 고찰해 여러 심리상태들 사이의 규칙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P58 한 심리상태를 바로 그 심리상태이게 하는 것은 그 상태를 구성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 상태가 전체적인 체계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이나 역할에 달려있다. 이러한 이론이 기능주의로 현대 심리철학에서 마음에 관한 정론의 지위를 오랫동안 누려왔으며,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능주의는 심리상태를 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책상과 같은 것으로 본다. 기능주의에 따르면 한 심리상태가 그 상태일 수 있는 이유는 체계 내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 독특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에 외계인도 로봇도 인간과 같은 마음상태에 있을 수 있다.
P64 사서는 유학 측에서 확정한 주요한 책(경전)인 네권인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그 성립과 관련한 네 선생을 표면에 내세워서 사자서라고도 한다. 혹은 [대학]과 [중용]을 합쳐서 [학용]으로 [논어]와 [맹자]를 합쳐 [논맹]으로 부르기도 한다.
P67 먼저 [대학]을 통해 ‘학문의 규모를 정하고 뜻을 정립하며’ 다음으로 [논어]를 배워 ‘학문하는 근본을 세우고’ [맹자]를 읽어 ‘학문의 발전과 의리를 분별하는 말을 배우며’ [중용]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터득한다’는 것이 주희의 ‘사서 읽기 철학’이다.
P69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본문인 경1장과 그 해설인 전10장으로 구성했다. 경 1장은 [대학]의 기본 사상인 삼강령과 팔조목에 대해 서술했고, 전 10장은 그에 대한 세부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주츼는 그중 전 5장의 격물, 치지 부분에 대해 원문이 없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그 내용을 스스로 만들어 보충하기까지 했다. 이를 ‘격물보전장’ 또는 ‘보망장’이라 한다. 이것은 134자의 짧은 문장이지만 주희의 격물치지와 관련한 학문 세계가 압축된 거으로 그의 철학사상을 연구할 때 뺴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 주희의 열정과 용기가 참 대단하다 느껴졌다. 물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면 원본의 무엇이 빠졌을지 ‘감’을 잡을수 있겠지만 ‘원본분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또 그 원본자리에 자신이 직접 보충해서 꿰어넣은 사실은 나로서는 조금 의아스럽다못해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원본훼손정도의 의미가 붙여지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러움.. 암튼, 그의 열정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그것만 못지않아 보였고, 그 열정이 감동스러웠다.
P71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이다. 공자의 말,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공자와 당시 사람들이 나눈 대화, 제자들의 말, 제자들 사이에 나눈 대화 등으로 구성된ㄷ. 공자와 그 제자들이 유교의 이상인 [대학]의 도를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이른바 유교이론의 구체적 실천이 생생하게 담긴 자료집이다. 그 내용은 모두 공자 (BC 552~479) 라는 한 위대한 인물의 사상과 행동, 가르침을 조명하고 부각한다. 이러한 점들은 공자의 사상이 중국 고대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다가와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한편, 삶에 필요한 많은 시사와 가르침을 던져주는 매력을 딴다. [논어]의 ㅕㄴ찬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공자가 직접 기록하고 정리한 거이 아닌, 그 제자들이 기록하고 그들의 문인들이 편찬한 것이라 보는 편이 무난할 것 같다.
P73 [논어]에는 이렇게 인간의 냄새가 풀풀 난다. 모든 시선은 인간의 현실 그 자체로 향해지고, 무엇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인가를 절실히 캐묻고 반성하게 한다. 이렇게 [논어]에는 ‘사람이 희망’임을 할하는 공자의 사상과 아싱이 뜨겁고도 간절히 드러나 있다.
P75 맹자는 공자가 강조한 인에다 의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을 이어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을 말한다. 더불어 그는 호연한 기운 즉 대자연과 합일화는 인격체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공자의 인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먼 곳보다는 가깝고 친근한 곳으로 정이 더 가는 이른바 원근법적인 사랑으로서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보편적인 인애의 덕을 주장하는 한편 그 실천 면에서는 현실적인 차별에 따라 합당안 태도를 결정하는 의의 덕을 내세웠다.
P75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업이 있어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도덕의식도 요구할 수 있다고 보아 다양한 경제정책을 제시한다.
P77 중용의 자의에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장이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하였다. 주희는 중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이고, 용이란 ‘떳떳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P79 고전 ‘읽기’라는 작업 속에는 단순히 그 무언가를 많이 아는 지식의 축적과 집적만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읽는 ‘지금’의 ‘내’가 나의 앞날에 대해 어떤 선지자적 예언자적인 빛과 소리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 읽어내려가며 흘리는 땀방울의 크기만큼, 사서는 분명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지혜의 길을 터주며 미래를 향한 적지 않은 시사를 가져다줄 것이다.
P135 “더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처럼 품위를 손상시키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135 “사랑에만 고유한 경험은 결별에 있다.”
P167 특히 중요한 것은 칸과 칸 사이의 관계다. 칸의 구성은 이야기의 구성이자 시간 흐름이 공간적 구성이며 그림의 구성이기도 하다. 이 구성에는 대체적인 컨벤션이 있지만 자유롭고 새로운 형식의 구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개 각 칸을 따라 우리 눈동자가 움직이지만 사실 만화가 촉발하는 상상력이 작용하는 공간은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이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나의 칸과 다음 칸 사이의 이 틈에서 행위 혹은 장면의 상호 관련성을 포착하고 음미하면서 하나의 사건이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만화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만화는 독자를 칸과 칸 사이의 ‘도랑’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독자의 상상력에 가속도를 붙게 한다.
P169 만화식으로 그린다. 곧 카툰화한다는 것은 형상을 추상화함을 의미한다. 이는 세부 묘사를 업댄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다. 핵심 의미를 좇아 주어진 형상을 벗겨내면, 사실 묘사를 했을때보다 그 의미가 더 커진다. 단순화가 의미 전달에 더 효과적인 것이다.
P169 우리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모든 거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나 무생물에도 동일성과 감정을 부여하고, 세상을 우리와 닮게 고친다. 얼굴을 사진이나 사실화로 보면 나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확실히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만, 카툰의 세계로 들어가면 자신으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이 카툰에 발려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카툰이라는 진공상태로 독자와 그의 의식이 빨려들어가며 그 빈 껍데기를 타고 그들은 다른 세계로 여행을 한다. 카툰의 세계에서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이다.
P173 윌 아이스터가 말했듯이 “코믹스가 멜로디라면 그림소설은 심포니다” 소재와 스타일의 가공할 다윈주의와 혼합성 그리고 독창성과 실험성이 이러한 그림소설류 단행본 ‘저자 만화 ‘의 주요 특징이다.
P179 사실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없으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비엔날레라는 거대한 행사를 위해 엄청난 돈을 쓰지 않아도 되고, 종잡기 어려운 작품들 앞에서 ‘예술’이라며 감상해야 하는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되며, 읽기조차 어려운 미술평론이나 이론들로 머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 박신의 교수의 표현은 마치 내 가려운 곳을 속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정말 때때로 우아한척 그림앞에서서는 그림에 조예가 깊은 듯한 포즈를 취하며 서있는 나를 연상하며 얼마나 웃음이 나왔는지 모른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성화는 이해가 되고 탄성을 지르게 하지만, 특히 추상화같은 것은 정말 어떻게 이해하며 보아야할지 난감할때가 있다.
P183 설치미술은 ‘조각이 잃어버린 장소성을 회복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장소성은 실제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맥락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업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그렇게 무너가를 늘어놓고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설치미술에서 조각 같은 어떤 이베적 조형물을 감상할 뿐만 아니라 장소적 체험을 하게 된다.
P277 재즈는 멕시코 만과 연한 미국 남부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흑인 노예 후손들의 정서를 담은 블루스가 그 모테이다.
>> 미국에서 좀 살긴 했지만. 난 뉴올리언즈는 가본적도 없고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뉴올리언즈’를 떠올리면 마치 내가 자라난 고향을 떠올릴때와 비슷한 향수를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한가함, 나른함, 담배연기, 노인들, 뜨거운 태양..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왠지모를 외로움 슬픔 같은 것들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P286 자각에 대한 관심은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 또한 작곡가의 작업은 과거에 비해 더욱 전문적이어서 감성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음악을 이해하려면 이에 관한 역사적 관심과 더불어 음악에 관계된 여러가지 지식도 필요하다.
또한 진정한 작가는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을, 또는 실험을 통해 늘 새로움을 선보여 우리를 즐겁게 하며 또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그들은 주문배수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매력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술과 정신이 충만한 작가는 늘 진지하며, 자신감이 넘치고 또 솔직하다.
P286 재즈 음악인들에게 통용되는 ‘진리’ 중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느다’는 말이 있다, 이는 ‘재즈는 해석의 음악’이라는 정의와 함께 어떤 장르의 재즈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이다. 앞서 거론했듯 즉흥연주 기법과 곡에 대한 다양한 편곡으로 말미암아 재즈는 같은 곡이라도 모두 다르게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어느 연주주에게 청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우너하는 분위기 그대로 연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P287 재즈는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똑같이 접근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한다. 왕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답 또한 없다. 하지만 오답의 길을 걷는 일은 종종 관찰되는데, 재즈를 들으면서 자신의 감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첫번째다. 아무리 많은 삶들이 명작 운운하는 작품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재즈의 매력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며, 누구나 음악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오래 시간 재즈를 듣다 보면 어느 정도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며, 많은 이들이 명작이라 일컫는 작품의 가치를 때닫을 기회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P287 사람들은 아직도 재즈라는 단어에서 상류츠으이 여유 있는 문화생활이나 어두운 클럽 안의 자욱한 담배연기 같은 퇴폐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 나도 여기서 특별하지는 않다. 재즈하면 왠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로버트가 프란치스카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어두컴컴한 재즈클럽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런 분위기는 ‘퇴폐적’이라기 보다는 재즈가 갖는 재즈다운 분위기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쩜 당연한게 아닐까..
P288 지금껏 삶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재즈를 듣는 이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재즈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니아일수록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재즈는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중독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설적 미학이 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스스로 찾는 이에게만 자신의 매력을 마치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듯 보여주는 그런 음락이 바로 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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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책의 분위기를 살려..
재즈로 ‘특별히’ 골라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곡 중의 하나..
Smmertime을 골라봤다.........
이 Summertime은 언젠가 보았던..
이 은미의 ‘거대한 콘서트’에서 초대되어 나왔던..
그 여자분이 정말 멋드러지게 부르셨더래는데..
그만한 분위기의 곡을 찾기가 쉽지않다..
아쉽지만...
다른 버젼으로 골라봤다..
Mahalia Jackson 의 Summer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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