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이야기

[음악&이야기2] 헨델의 메시아와 웃지 못할 기억...

pumpkinn 2010. 2. 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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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하나...

 

내가 고등학교때..그니까..1학년때..

우리 음악 선생님은 아주 아름다운 외모의 성악가...

여 홍은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숙제를 내주셨더랬다...

 

 한달에 한번씩 음악회나 연주회에 참여하기...’

그리고..그 증거(?)감상문을 써내기’....

 

지금이나 그때나 점수에 목숨거는 학생들..

많은 친구들이 교회에서 하는 '성가의 밤'이나..

예술의 밤으로 많이들 때우는 동안..

욕심이 많던 나는...

기왕지사 가야할 것...기왕이면...

평소에 내가 접하기 힘든...연주회를 가고 싶었다....

학교 숙제인만큼..엄마 아빠에게 입장료 받기도 당당했고...

 

그당시...

'세종 문화회관'이 처음 개관되어...

세계적인 음악가들이나 합창단들이 많이 왔었고..(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팝스타들도 많은 공연을 했더랬는데...

비엔나 소년 합창단과 파리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 내지는...폴모리아 연주회도...

그때 내가 두근대며 갔던 음악회 중의 하나였다...

 

그때두 꼭 S석을 고집했더랬고... 

학생였던 내겐 터무니 없이 비쌌던 입장료들...

'학교 음악 숙제'라는 타이틀이 우리 엄마 아빠에겐 거부 불가능의 영역였음으로...

나는 당당하게 엄마아빠에게 뜯어(?)내던 기억.....^^

내가 유일하게 사치부릴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거라면..

마음껏 만끽하자는 욕심에서 비롯된 나름 용기있는 시도~ ^^

(나 같은 딸들은 부모님에게 당췌 도움이 안된다..^^;;)

 

그것보면...

나는.. 스스로는 욕심없다고 생각 하면서도...

참 엉뚱한데서 욕심을 많이 부렸던것 같다...

 

어쨌거나~

시간은 그렇게 흘러...

1  마지막 리포트를 써내려고 갔던..음악회가...

바로...'헨델의 메시아'였다...

 

마침 그때는 크리스마스 씨즌이었는데...

연주회가 있던 당일 날..

나는 이런저런 선물을 챙기느라...

하루종일을 백화점으로 돌아다녔고,,,

결국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시간이 되서야 겨우 연주회장에 도착..

 

음악회가 거의 시작할때 쯤 허겁지겁 뛰어들어가니...

먼저 온 두 친구들...사이좋게 함께 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 내자리가 하나 비어있었다...

 

혼자 앉게되어 조금 실망했는데...

웬걸...그 옆에 왠 멋진 남학생 둘이 앉아있었다...(흐뭇~ ^^;;)

 

내 친구들은 서먹해있는 나를 보고 킥킥대고 있었고...

내심 좋긴했지만 (^___^)....괜히 멋적어진 나는...

내가 무슨 음악에 엄청나게 조예깊은 여학생인것 마냥...

프로그램 팜플랫을 펴고 엄청 우아한척 앉았는데...

이게 왠일..

갑자기 졸음이 오기 시작하는게 아닌가...-_-;;

 

그날.. 종일을..잠시도 쉬지않고 돌아다닌 탓에...피곤했던지..

잠이 물밀듯이 쏟아져온 것이다....-_-;;

 

이 무슨 짓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하필..그 순간에..그렇게 잠이 쏟아질게 뭐람...

꿈많은 여고생..멋지고 싶은 여고생...우아하고 싶은 여고생이고 싶은 나였구만...

하필이면 그 멋진 남학생들 옆에서 잠이 오다니...

 

참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나의 의지는 자꾸만 잠속으로 사라지고...

꾸벅대는 나를 보고.. 뒤에 있는 내 친구들..

옆에 앉은 남학생들...킥킥대는 소리가 나의 존심을 거슬려도...

'존심' '졸음'은 애초에 상대가 안되는 적수였다...~

 

내가 어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랴...

나는 결국 잠으로 골아 떨어졌는데....

그냥 그쯤에 끝났으면 정말 좋았을걸....

더 비참한 씨리즈 2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_-;;

 

헨델의 메시아의 절정..'할렐루야' 코러스에서...

내가 그만 벌떡 일어난..불상사(?)가 생긴것이다...

 

늘 선생님께 귀가 따갑게 들었던...

한국사람은 듣는 매너가 없다...”

할렐루야 코러스에서 안일어나는 국민은 한국 사람뿐이다..” 라는 등등...

할렐루야 합창이 나올 때는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마도 꿈결에서도....내게 강박관념으로 남아 있었던것 같다...

 

잠결에 벌떡~ 일어나고보니...나혼자...

(알고보니..중간쯤 일어나던데..난 막상 그땐 챙피해서 못일어났다..-_-;;)

그 주위사람들은 결국 웃음을 떠뜨렸고...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죽고 싶었다..)

 

있는 스타일 없는 스타일을 그렇게 구겨버리고..

왜 내가 그때 교복을 입고 갔을까...’

차라리 평복을 입고 갈걸...’

우리 학교 망신 다 시켰다...’서부터...

그애들이 내 얼굴을 기억할까..’등등..

별의별 상상 속에.. 정말 울고만 싶었다....

 

내 친구들은 웃느라구 걷지를 못하고...

위로한다는 말들이..마치 내 상처받은 자존심에 불을 지피는 것만 같았다...

삶의 비정함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_-;;

 

암튼...

내가 폼만 좀 덜 잡았어도..그리 챙피하지는 않았을건데...^^;;

곧죽어도 '폼생폼사'였던 우리의 여고시절...

나는 그렇게 스타일을 구겼지만...

그때의 죽고싶을만큼 챙피했던 기억은...

지금의 내겐 두고두고 웃음을 안겨주는 기억으로 남아있다...하하하하~^^

 

 

기억 두울...

 

할렐루야는 또 다른 추억....

내가 고등학교때 다녔던 이태원의 대성교회성가대에선..

성가 본곡 연습을 들어가기 전에..

목의 틔우는 연습을 할렐루야’ 로 시작했더랬다..

 

해서 여의도에 있었던  세계 복음화 대회때..(1980년였나..?? 연도는 잘 기억이 안난다..)

영락 교회, 충현 교회, 대성 교회의 세 교회 연합 성가대가 성가를 맡았었는데..

연습때..셋 중 가장 작은 교회였던 우리 교회가 살짝 기가 죽었더랬다..

 

우리 대성 교회의 성가의 밤은 수준 높기로 유명했고..

성가 칸타타를 우리 교회에서 처음 발표를 할 정도로 인정을 받긴 했지만..

사실..정말 영락과 충현 교회 학생 성가대들의 수준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연합 성가대에서 불러야 하는 곡중의 하나가 바로 '할렐루야' ... ^^

우리 교회 성가대의 18번 곡이 나오니..

그야말로 우리는 신났을수 밖에....^^

할렐루야 이후로 우리 교회 성가대의 위상이 높아져..

죽었던 존심 살리고 기도 활짝 피우고...^^ 

그때 참으로 열심히 준비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성가대를 섰던 기억이 난다..^^

 

내가 클래식과 그리 친한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이렇게 할렐루야는 지난 날의 여러가지 행복한 기억을 많이 안겨준 곡이다..

 

세계 복음화 당일 날..

우리는 그 귀한 자리에 성가대로 설수 있음이 얼마나 가슴 벅찼던지..

그야말로 가슴으로 눈물로 성가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정말 참으로 순수하고 맑았던 시절....

너무나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이 함께했던 시간들...

 

오늘 또 기억의 보따리에서 하나를 꺼냈다....^^

 

                  

                  

 

 

헨델과 <메시아>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려지는가 하면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처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고 설명을 들었을때 나는 헨델이 여자일거라고 상상했던 기억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 헨델이 건장한 남자임에도 그리 불려졌던 것은 헨델의 작품은 화려하고. 자유 분방하며, 선율미가 돋보이는 세속적이고 친근한 느낌으로 편안한 어머니를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을 한다는데, 이 두 작곡가 모두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독일의 대음악가들로 바로크 음악을 총 정리하는 한편, 그 뒤로 이어지는 고전파, 낭만파 등 여러가지 음악사조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음악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헨델은 독일의 할레 출생으로 유럽을 떠돌아 다니다 영국에 정착을 하여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는 9세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 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미 20세에 오페라 Almira(1705)에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며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는데 그는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 <테세오Teceo>와 함께 종교 음악의 명작인 <찬도스 Chandos Anthoms>를 비롯하여 <라다미스또 Radamisto>, <쥴리어스 씨이저 Julius Cesar>, <아도메토 Admeto>, <톨로메오 Tolomeo> 등 그의 창작의 전성기 시기에 명작중의 명작들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그의 명성도 점차 운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그가 운영하던 왕실 음악 아카데미는 문을 닫게 되는데, 급기야는 재산 탕진에 반신불구까지 되고 돌팔이 영국 안과 의사로 인해 실명까지 하게 되는 헨델. 그가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던 어느 날 찰스 기본이라는 무명의 한 시인이 보내온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와 버림받은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능의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이사 53:3)' 라고 적혀 있는 이 격려 편지가 헨델에게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헨델은 2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깊은 묵상 속에 하느님을 만나게 된 헨델은내 앞에 하늘이 열렸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었다다고 눈물로 외쳤고, 바로 그날 영원 불멸의 메시아를 작곡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한 무명의 시인이 보낸 격려의 편지가 절망과 좌절로 죽어가던 헨델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영원 불멸의 명작을 만들게 되는 불씨를 던졌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만약 그 무명의 시인의 격려 편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헨델의 메시아는 없었을 것이고, 헨델의 메시아가 없음으로 인해 내 여고 시절 행복한 기억을 심어준 아름다운 추억도 함께 없어졌을 터이다.

 

절망과 좌절로부터 부활된 헨델에게서 그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처럼 태어난 메시아. 특히 오라토리오 <메시아>중 코러스 부분인 할렐루야는 여러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는데,  1742년 런던 초연에 참석했던 조지 1세가 감격에 벅찬 나머지 기립을 했던 덕분으로 지금까지도 이 할렐루야 코러스를 들을 때는 기립하여 듣는 관습도 생겼고 (덕분에 나는 웃지못할 추억도 생겼고..^^;;) 하이든이 할렐루야 코러스 연주를 듣다가 코러스의 웅장한 합창에 감동 받아 무의식 중에 저편에 신의 영광이 나타났도다라고 외치며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암튼. 이 곡은 하이든의 천지 창조와 멘델스존의 엘리와와 함께 세게 3대 오라토리오로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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