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킨의 하루

그래도 나름 흡족했던 새해 첫날

pumpkinn 2022. 1. 2. 09:20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말과 새해를 혼자 맞았다. 남편은 일 때문에 먼 곳에 있고, 딸들은 여행을 떠났다. 마리아도 나가고. 온전히 혼자였던 어제오늘, 묘한 느낌이다.

 

난 혼자 시간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 한창 사춘기 시절 친구들과 떨어져 한국을 떠난 이후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 속에 절로 터득된 익숙함인 듯하다. 하긴 고등학교 시절 앙케이트의 특기란에는 ‘혼자 잘 놀기’라고 재미 삼아 써놓곤 했던 걸 떠올리면, 그때도 혼자 잘 놀았던 것 같다.

 

어젯밤 남편과 딸들과 화상통화로 난리부르스를 추며 시끌벅적하게 새해 인사를 하고 맞은 새해 아침. 그래도 새해 아침이니 기도부터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써니가 징징거려 부엌에 가서 바나나 하나 종종 잘라서 먹이고는, 미국에 계신 엄마에게 새해 인사 전화드리고는 거실에 나왔다가 컴퓨터가 켜져 있어 ‘전기 아껴야지’ 끄려고 컴 앞에 앉았다가 눈에 들어온 밴드 페이지. 댓글 남겨주신 분들께 답글 인사드리고는 배가 출출한 것 같아 커피를 끓이고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는 치즈를 한 장 얹어서 먹으면서 컴 앞에 앉았다.

 

그러다가 ‘아참~ 기도드려야지~”하고는 방에 들어가 묵주 기도를 드리고는 나와 다시 컴 앞에  앉아 지난주부터 끙끙거리고 있던 리뷰를 마저 끝냈다. 류시화의 책은 리뷰를 쓰기가 참 어렵다. 그냥 감정이 흐르는 대로 써내려 가기엔 느낌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드디어 리뷰를 끝내고는 브런치에 올리고 밴드 페이지에 올리고 나니, 새해 첫날 무언가 의미 있는 작업을 했다는 충만감이 느껴져 흐뭇했다. 그 와중에 점심을 챙겨 먹고, 요리를 못하는 와이프 새해 첫날 굶었을까 남편한테 걸려온 영상통화,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늦은 오후로 들어서고 있는 시각. 

 

우리 써니가 또 간식을 달라고 낑낑거려 마몽을 잘라서 그릇에 넣어주고는 나도 하나를 먹었다. 써니 가시내는 자기 것을 다 먹고는 또 달라고 내 옆에 앉아서는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오매불망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모른 척 시침 뚝 내 몫을 끝내고는 또 커피를 타서 컴 앞에 앉았다.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Copy & Paste!! 

 

블로그에 들어가니 반가운 스와니님께서 다녀가셨다. 새해 인사를 드리고 나니 비 오는 소리.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게다. 벌떡 일어나 이방 저 방 뛰어다니며 창문을 닫고, 부엌에 달려가 창문을 닫고 나니, 손바닥 만한 공간 이건만 그것도 좀 뛰었다고 숨이 차다. 

 

그러는 사이 밖엔 어둠이 내리고, 건너편 아파트엔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창 밖으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는 베란다에 테이블을 옆에 놓고 앉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읽고 리뷰를 올리겠다고 마음먹은 책을 딴짓하느라 끝내지 못해 마저 읽으려는 마음이었다.

 

책을 읽기도 잠시 Spotify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이 그리로 쏟아진다.

 

So let me go
 I don't wanna be your hero
 I don't wanna be your big man
 I just wanna fight with everyone else

 

You're a masquerade
 I don't wanna be a part of your parade
 Everyone deserves a chance to
 Walk with everyone else

 

책을 읽을 때는 주로 Instrumental music을 듣는데, 오늘따라 팝을 틀었더니 사단이다. 읽던 책을 놓고는 볼륨을 높였다. 뭐 딱히 가사가 와닿았다기보다는 리듬과 멜로디에 이끌렸던 것 같다. 어쨌거나 이 묘한 느낌은 책을 놓게 하고 나를 다시 컴 앞에 앉게 했다. 글로 쓰다 보면 감정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외로움? 아닐 것이다. 무의식 속에 느끼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해온다면 ‘무의식’의 영역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이나, 외로움은 아닐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못 느끼는 사람이다. 

 

한국을 떠나 지독하게 겪어내야 했던 외로움, 숨 쉬기조차 힘들었던 형벌처럼 다가온 외로움은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겪어야 할 내 몫을 다한 듯, 그 후로 나는 외로움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혼자면 혼자인 대로, 함께면 함께인 대로,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상황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마치 내 사전엔 ‘외로움’이란 단어는 없는 불량 사전인 듯, 지금까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랬기에 오늘 내가 느낀 이 미묘한 감정이 내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외로움도 아니고 공허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움도 아닌 걸. 과연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긴, 이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가졌던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어쩌면, 매일매일을 살아내느라 묻혀 있던 감성이 모처럼의 휴식에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올라와 내 마음을 두드리니 그런 내가 낯설어 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도 모를 일인 게다.

 

어쨌거나, 한 해의 첫 시작인 오늘, 작은 것이긴 하지만 리뷰 하나 매듭을 지을 수 있어서 마음이 흡족하다. 좋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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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감성을 두드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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