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킨의 하루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pumpkinn 2022. 5. 19. 08:24

 

오늘은 좀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음에도 웬일인지 지하철 역에 사람들이 가득이다. 보통 이 시간에는 한가한데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피커에서 Metrô가 연착이 될 거라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오는 방향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문득 오래전 지하철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떠올라 살포시 미소가 그려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 생각지 않게 끼어들어 행복한 그림을 그려주는 예쁜 사건.

 

치과를 가는 길이었다. Ana Rosa 방향의 지하철을 탔다. 종착역까지 가야 하기에 문에서 벗어나 좀 안쪽으로 들어갔다. 붐비는 사람들을 피해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간 곳에 어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는데, 깔맞춤으로 아이보리색 모시 양복을 입고 계셨다. 그에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모자에. 그 모습이 어찌나 품위 있어 보이고 멋지시던지, 뭐하시는 분이실까 쓸데없는 궁금증까지 일었다. 

 

마침, 내가 당신 앞에 서자 나더러 앉으라며 일어나시는 게 아닌가. 아니, 젊은 내가 일어나 할아버지께 양보를 해도 시원찮은데, 나이 드신 어르신이 일어나셔서 젊은 나더러 앉으라 하시다니. 아니라며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나는 “Obrigada” 인사를 드리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Lady에게 보이시는 ‘신사’로서의 호의였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르신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 앉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양보하신 자리에 앉은 내 마음이 어디 편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할아버지가 들고 계신 가죽 서류 가방을 들어드렸다. 

 

한국에서는 앉아 있는 사람이 서 있는 분의 가방을 들어드리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일 수 있으나, 브라질에서 조심스러운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고마운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가방을 들어드렸더니 웃으시며 고맙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께서는 두세 정거장을 더 가신 후 모자를 들고는 그 멋짐 가득한 인사를 남기고는 내리셨다. 

 

 

 

 

삶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 누리신 분들에게 느껴지는 그런 멋짐이 가득 묻어나는 품위 있는 분위기.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풍요로운 풍채,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와 닮으셨던 어르신., 지금껏 뵈었던 할아버지 중 가장 멋진 분이셨다.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입가엔 뭔지 모를 행복감이 묻어나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아줌마’가 아닌 마치 우아한 ‘Lady’가 된 듯한 느낌. 

 

목적지 가는 내내 내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나도 저 어르신의 나이가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소소한 친절을 베푸는 그런 포근하고 멋짐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나이를 핑계로 대접받으려는 그런 피곤한 심술궂은 할머니가 아닌, 젊은이에게도 자리를 양보해주는 그런 할머니.

 

‘멋지게 늙어야지’

‘포근하고 우아한 할머니가 되어야지’

‘그분처럼 멋지게 늙어야지.’

 

누가 뭐랄 것도 아닌데 혼자 열심히 각오를 다지는 동안 기다리던 지하철은 도착했고, 나는 또 그렇게 쓰나미처럼 사람들 속에 함께 휩싸여 메트로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하루, 기분 좋음이었다. 

John Denver의 Shanghai Breezes가 흥얼거려지는..

그.런.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