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40] 남영의 '태양을 멈춘 사람들'을 읽고...

pumpkinn 2017. 6. 23. 07:51



 

남영의태양을 멈춘 사람들을 읽고

 


지난 학기 나를 열광시키며 미치게 했던 과목 혁신의 과학사를 들으며 남영 교수님의 <태양을 멈춘 사람들>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국지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을 하나 뽑으라면 단연코 적벽대전인데, 바로 과학사에서 그 적벽대전에 비유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과학혁명이라 하셨다. 그래서 과학사 수업 시간은 과학자의 삶을 중심으로 업적과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시간이 될거라 하셨는데, 흥미진진하고 과학자들의 전혀 알지 못했던 삶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나 춤추는 듯한 느낌. 그러니 갈증이 일었다.  <태양을 멈춘 사람들>은 그렇게 읽게 된 책이었다.


천동설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던 그 시대에 지동설은 어떻게 주장되었고,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그에 대한 반응은 어땠으며, 그렇게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안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완성이 되었는지 4명의 과학자들의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본 과학사 공부. 내 생전 과학사가 이렇게 재밌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주장을 했고, 갈릴레오가 자기 목숨 살리고자 지동설이 틀렸다고 천동설이 맞다 하고 재판장에서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정도였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케플러의 법칙을 배운 것 같은 가물한 기억 속에 읽게 된 책. 재밌었던 것은 책의 내용 스타일이 딱 남영 교수님의 강의법과 같아서 종종 읽다가 미소가 지어졌다. 차분하면서도 의문점과 질문들을 하나하나 던지면서 생각의 꼬리를 짚어가며 가르치ㅣ는 강의법. 그렇기에 남영 교수님의 강의는 그냥 듣고 있으면 저절로 이해가 가고 저절로 머리 속에 깊이 들어박힌다. 그 근원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뿌리까지 내려가는 강의법.


과학혁명을, 즉 태양이 아닌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천동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천동설 하면 단순히 태양이 돈다는 의미를 넘어서 고대의 철학과 카톨릭의 신앙 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


아리스토텔레스와 천동설은 떨어뜨릴래야 떨어뜨릴 수 없는 관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간단하게 요점으로 정리하자면, 흙으로 구성된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아래 쪽은 우주의 중심 방향이며, 위쪽은 우주의 바깥 방향을 의미하고, 달이 지구를 도는 이유는 달이 천상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이고, 운동도 영원 불변한 운동인 등속원운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돌멩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흙이 가진 원고유의 속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에 ㅡ이하면 지구는 음직이지 않으며, 주변의 천체들이 지구를 충심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많은 자연 현상에 합당한 설명을 내놓으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천동설은 과연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주장했을까?


놀라웠던 것은, 이미 아리스타르코스라는 고대학자가 지동설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동설을 그대로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지동설이 등장한 15세기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획을 긋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핵심적인 3가지 사건은 바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이었고, 다른 하나는 1492년의 신대륙 발견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쇄술의 발견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16세기의 르네상스 확산과 함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것이 과학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재밌었던 것은 처음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조심스럽게 내놓았을 때, 우리가 흔히 쉽게 상상하듯 어떤 충돌이나 격정적인 마찰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당시 천동설이 완벽하게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해내지 못했지만 많은 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했듯이, 지동설이 나왔다고 해서 천동설로 설명해내지 못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섦영해 낸 것도 아니었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는 수학적으로 상당히 복잡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은, 부활적 계산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새로운 달력체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율리우스력은 카이사르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집트의 달력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고, 지금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그레고리우스력이다.


이래저래 여러가지 사회적인 상황들과 유럽의 정세 변화들을 배경으로 지동설은 조금씩 꿈틀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대표되는 천동설이 붕괴되고,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하고 케플러와 갈리리에를 거쳐 뉴턴이 끝낸 짧게 잡아도 150년에 걸쳐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내놓은 지동설은 역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수성과 금성의 위치 문제가 해결되었고, 주전원 없이 행성의 역진운동을 설명할 수 있었고, 먼 행성일수록 공전주기가 느려짐을 설명해냈지만, 이러한 가설을 지탱하기 위한 어떠한 역학적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천문계산이 좀 쉬웠다는 것 이외에는 당시 상식과 어울리지 않았을 뿐더러 행성의 위치 등을 계산하는 데 있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정확한 결과를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내세운 이론들이 과학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미처 예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동안 중세까지 당연하게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붕괴되었고, 기독교적 우주관의 핵심이었던 천상의 세계와 불완전한 달밑 세계와의 구분 또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운동의 개념도 수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하네스 케플러


케플러는 우주의 3법칙을 발견한 학자로 코페르니쿠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브라헤를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말이 스승이지 브라헤가 그를 조수로 받아들였지만 사실 세세한 관측자료는 넘겨주지 않았던 걸로 봐서 어떤 경쟁의식이 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브라헤는 덴마크 귀족으로 망원경이 발견되기 전 육안 관즉 사상 츄럽최고의 정밀 천문관측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덴마크의 새왕과 관계가 나빠지자 독일로 건너가면서 케플러를 조수로 쓰게 되는데, 그가 의외의 사건으로 죽게되자 그의 모든 관측자료가 케플러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케플러는 브라헤의 자료를 바탕으로 우주 3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브라헤의 정밀한 관측자료가 없었더라면 얻을 수 없는 결과던 것이다.


케플러의 제 3법칙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첫 번째 법칙은 바로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부등속으로 공전한다는 타원궤도의 법칙이었는데, 너무 웃겼던 부분은, 케플러는 이 법칙을 발견한 후 기뻐 뛰었던 것이 아니라, 못마땅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이 아닌 타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은 케플러는 합리적이라기 보다는 탐미적인 지성의 소유자로 어떤 완벽성을 추구하는 학자였다. 그당시 찌그러진 타원은 완벽이나 완전함에서 동떨어지는 개념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후예들은 완벽함을 추구했던 탐미적인 지성의 소유자들이었다. 한마디로 우주가 기하학적인 원리에 따라 만들어짐을 확신하는 신플라톤중의적인 신비주의에 심취한 이들이었다.


암튼, 케플러의 제2법칙은 면적 속도의 법칙으로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선은 단위시간당 항상 같은 면적을 가로지름에 대한 법칙이었고, 3법칙은 태양과 행성의 평균거리의 세 제곱은주기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조화의 법칙이다.


물론 케플러의 이 모든 법칙은 브라헤의 정밀한 관측자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케플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자료를 받았다 하더라도 케플러가 발견한 3개의 우주법칙을 발견했을 거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라는 벌판에 묻어있는 다이아몬드를 쟁이질로 밭갈이를 하며 발견하는 작업처럼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케플러의 감동적 인내심이 빛낸 업적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울컥하며 눈물이 났더랬다. 그 수많은 계산들을 일일이 손으로 해내가며, 이런저런 조합을 만들어보며 평생을 바친 케플러. 그것은 분명히 수학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신비에 가까운 결과였다. 그의 수학적 탐미주의적 열정이 얼마나 집요했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과학혁명에 대해 배우면서 내게 가장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인물 중의 한 명이 바로 갈릴레이였다. 그저 그래도 지구는 돌고있다라는 명언(?)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그 말은 그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재밌었지만, 나는 갈릴레이가 아주 지적이고 인품이 깊은 멋진 학자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공부하면서 만난 갈릴레이는 진중하고 학자의 인품이 느껴지는 그런 품위와는 살짝 거리가 먼, 계산에 빠르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약쌉한 술수도 쓰며, 메리치의 가문의 후원을 얻기 위해 목성을 연구하며 발견한 4개의 위성을 마침 4명이던 메리치 가문의 형제들에게 헌정하는 그런 아부도 거리낌 없이 떨 줄 아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웃었는지. 목성의 위성이 4개가 아니었으면 우짤뻔했나 말이다.


망원경도 실은 갈릴레이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설명만 듣고서 그보다 훌륭한 기능의 망원경을 만들어낸 갈릴레이. 그리고 그것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고, 지동설을 자신의 이론에 맞춰 설명해 나간 것은 갈릴레이 이기에 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그런 모습을 우리는 과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이나 갈릴레이의 가정 환경등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그의 연구는 그렇게 절정에 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학 교수로서는 자연현상에 대해 정당한 물리적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자격이 그 당시에는 없었다. 그랬기에 궁정 철학자의 지위를 가져야만 영향력 있게 자연에 대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기 때뭉니어었다. 물론, 연구 후원에 대한 부분도 상당수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렇듯 그가 간절하게 메디치 가문의 배경을 자시의 후광으로 얻고자 했던 이유는 오로지 연구를 위해서였고, 그는 장님이 된 말년에도 연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성과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발전시켰으나, 각각 부족한 점이 있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가 지향했던 천체 운동의 기술에서 기하학적인 단순화를 이룩하였으나, 새로운 천체 운동학이 필요로 했던 역학체계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코페르티쿠스 체계에 대한 반론을 물리칠 수 있는 새로운 역학을 확립했으나, 그것을 이용하여 천체가 태양중심설에서 기술하는 것과 같은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생각은 하지 못함. 이렇듯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남긴 문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결고리로 하여 뉴턴이 최종적으로 해결했다.


남영 교수님의 말씀을 옮겨본다.

갈릴레이의 천문학과 역학을 생각해보면 둘이 따로 놓고 있다. 천문학적인 내용에서 지동설을 옹호한 것은 사실은 망원경 관찰, 그 관찰을 가지고 옹호를 한 것이고, 역학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 역학적인 내용을 가지고 지동설을 옹호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갈릴레이는 뛰어난 역학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천문학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고, 이렇게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남긴 문제는 뉴턴과 만유인력 법칙을 연결고리로 해서 최종적으로 해결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동설의 발전을 이룬 두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마지막 지붕을 씌우는 일만큼은 못하고 끝냈다는 것이고, 그 최종적인 업적은 바로 뉴턴의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작 뉴턴


과학혁명은 갈릴레오가 태어나고 죽고, 뉴턴이 태어나고 죽었더니 완성되었다.”

갈릴레오가 사망한 연도와 뉴턴이 태어난 연도가 놀랍게도 같은 1642년이었으니 참으로 재밌는 연결고리가 아닐 수 없다.


뉴턴에 대해 배우면서도 갈릴레오와 마찬가지로 내가 뉴턴에 대해 왜곡되게 알고 있었던 부분이 많았음을 알았다. 물론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어쨌거나, 그림같이 생긴 내성적인 천재 뉴턴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삶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거의 반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나는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그리고는 너무 많은 지적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 까닭에 그 후엔 우울증에 걸렸고, 남은 여생은 별다른 특별한 활동 없이 지냈다고 알고 있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현대까지 이른 과학사에 기적의 해로 불리는 두 번의 해가 있는데, 그 첫번째는 24살의뉴턴이 자신의 고향에서 만유인력이나 미적분과 광학에 관련된 기본 아이디어를 정립했던 1666년이고, 두 번째는 만 26살의 나이에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히 쓴 논문 5편을 썼던 1905년을 의미한다. 바로 그 논문 중의 하나가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이었다.


남영 교수님은 뉴턴을 단순히 만유인력을 발견한 위대한 학자로 말하는 것은 그의 업적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했다. 뉴턴이기에 가능했던 뉴턴 종합’, 즉 그는 자신 이전에 있었던 훌륭한 학자들의 업적을 모두 종합하여 만유인력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줌심설을 받아들였고, 케플러의 행성운동의 3법치과 조수이론을 수용했으며, 갈릴레이의 낙하체와 투사체 운동, 그리고 데카르트의 직선관성을 종합하여 이전 학자들이 관찰한 모든 결과를 만족시키는 종합이론을 탄생시킨 것이 바로 만유인력이다. 하지만 자신의 앞선 모든 학자들 중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받은 학자는 단연코 데카르트였다.


뉴턴이 내성적이었지만 거만했고 또한 뒤끝 작렬이었다는 에피소드를 읽고 얼마나 웃었는지, 그가 <프린키피아>를 썼을 때 최대한 어렵게 썼는데, 그것은 수학을 조금 안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에게 함부로 다루어지지 않도록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또한 한번 그와 꼬이게 되면, 그들의 이름을 그의 책에서 모두 지울 정도로 그 뒤끝이 장난아니었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의외였다.


미적분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유클리드의 책을 보기 시작한지 일 년쯤 되었을 때, 데카르트의 기존 모든 수학지식을 흡수하고, 급기야는 독자적인 수학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미적분이었다. 한마디로 무한의 정복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신비스런 수학을 만들어내었는데, 재밌게도 라이프니츠와 서로 미적분을 먼저 만들어냈다며 그 우선권 전쟁을 20년에 걸쳐 했다는 것이다. 세기의 천재들의 싸움이라니. 지금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미적분은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마치 타이탄의 싸움 같은 그런 짜릿한 전율마저 일었다.


뉴턴은 나중에 정치가로서도 활동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그가 쓸쓸하게 노년을 보냈거나, 또는 이른 나이에 죽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완전 반전이었다.

 


천왕성과 해왕성 이야기


뉴턴편에서 아주 드라마틱했던 영화 같은 스토리는 단연코 해왕성 발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 리뷰에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스토리다. 19세기 후반에 천왕성이 발견되는데, 천왕성의 궤도를 10여년 연구하니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학자들은 뉴턴의 만유인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천왕성의 궤도가 이러하니 실제로 만유인력에 의해서는 다른 궤도가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천왕성보다 바깥궤도에 있는 가상의 행성을 가설로 내세웠고, 그 행성이 어느 정도의 질량을 가지고 어떠어떠한 궤도를 돌고 있다면 천왕성의 이 이상한 궤도는 만유인력으로 충분히 설명된다는 가정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많은 노력 끝에 위치를 계산해내고, 그 위치를 추적해본 결과 해왕성이 정확하게 그 위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해왕성은 그 존재가 예측되었을 뿐 아니라 질량과 궤도까지 정확하게 예측되고 발견되었던 최초의 행성이었다는 것. 정말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렇게 먼 훗날 강의로 듣는 내가 이렇게 열광하고 흥분되는데, 그 연구에 참여하고 그 해왕성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얼마나 열광했을까.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숨 막히는 경험. 정말 멋진 스토리였다.


 

리뷰를 마치며..


과학혁명은 이렇게 아리스타르코스가 고대에 제시했던 지동설을 코페르티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 맞서 소심하게 내세우게 되고, 브라헤의 관측자료로 케플러에 의해 우주 3법칙이 발견되고 갈릴레이에 의해 망원경을 통해 달의 울퉁불퉁한 지면와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을 발견을 하게 되고 뉴턴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만유인력에 이르며 과학혁명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 만유인력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이렇듯 과학혁명은 토마스 쿤이 말했든, 어떠한 이론이 시간의 흐름 속에 어떤 부족했던 부분이 하나하나 충당되거나 수정되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상과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위기를 맞으면서, 전혀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고 그것이 증명과 반증을 통해 정상과학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는 그것이 맞는 정설인줄 알고 한 시대를 살다가 또 위기를 맞고 새로운 이론과 함께 변화가 일어나는 사이클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학사의 적벽대전 과학혁명사를 공부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너무 재밌어서 돌아가실 것 같았던, 매순간 짜릿함을 만끽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태양을 멈춘 사람들>내 심장을 멈춘 사람들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넘 과장일까? 하하하~ 내겐 새로운 장르였던 과학사에 푹 빠져 보냈던 짜릿한 시간이었다. 시리즈로 나오게 될 남영 교수님의 다음 책이 몹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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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너무 길게 써서 내가 뭐라고 썼는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

당근 문장 연결은 투박할 것이다.

내 리뷰는 너무 길어서 잘 안 읽으시지만, 

그래도 혹시 누군가 읽으신다면 이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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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ya의 음악이 어울릴 듯...

The Very Best of En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