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중한당신

<참소중한당신 12월호>'헨델의 메시아'가 안겨준 잊지 못할 사건

pumpkinn 2016. 12. 22. 03:50





헨델의 메시아가 안겨준 잊지 못할 사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때였다. 우리학교의 여홍은 음악 선생님께서는 아주 독특한 숙제를 내주셨는데, 바로 한 달에 한번 음악회 참석 및 감상문 쓰기였다. 선생님께서는 교회나 성당에서 하는 성가의 밤이나 음악회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그렇게라도 공부에만 매여 있는 학생들이 잠시 숨을 돌리며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 주고 싶으셨던 선생님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때도 지금처럼 학생들은 점수에 민감했던 터라 우리는 열심히 연주회를 찾아 다녔다. 많은 친구들이 교회에서 열리는 성가의 밤이나 예술의 밤으로 과제를 써내는 동안, 나는 기왕이면 평소에 가기 힘든 음악회를 가고 싶었다. 때마침 세종 문화회관이 개관되었을 때라, 그 당시엔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나 합창단들의 초청 공연이 많았는데, 비인 소년 합창단이나 파리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 그리고 우리 시대에 많은 인기를 누렸던 폴 모리아도 그때 볼 수 있었던 귀한 공연이었다.


욕심은 낼수록 더 커지는 건가. 한번 욕심을 내고 나니 나는 좀 더 과감해졌다. 기왕이면 S석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학생이었던 내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비싼 입장료였기에 학교 음악 숙제라는 명목아래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타내곤 했다. 언제나 학교라는 타이틀은 부모님에겐 거부하기 어려운 특수 영역이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학교에서 행해지는 거라면 어떻게든지 뒷바라지 해주시려는 부모님의 마음을 철없던 시절의 나는 그렇게 나의 허영심을 위해 채우곤 했다.


그렇게 음악회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동안 한 해는 저물어갔고, 마지막 과제를 남겨두고 있었다. 음악 감상 노트에 합창단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무슨 색이었는지, 내가 어떤 전율을 느꼈는지 서투른 솜씨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리뷰를 써내던 나는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정성을 기울여 마지막 과제로 정한 음악회는 헨델의 메시아였다. 드디어 공연 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들떠서 선물을 사러 다니던 나는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공연 장소에 도착했다. 음악 설명이 들어있는 팜플렛을 사들고 허겁지겁 들어가니 친구들은 없고 내 자리 하나만 덩그마니 비어있었다. 알고보니 친구들 좌석은 뒤로 나란히 배정되어 있었고, 내 자리는 바로 그 앞좌석이었다. 혼자 앉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자리 옆에 멋진 남학생들이 앉아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머쓱해 있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뒤에서 킥킥거리고, 괜히 뻘줌해진 나는 마치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학생마냥 프로그램 팜플렛을 펴고 우아한 척 앉았다. 가슴이 어찌나 콩닥거리던지. 하지만 두근거림도 잠시, 연주회가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흐르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선물 산다고 종일을 돌아다닌 탓에 피곤했던 모양이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잠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인지. 하필 그 순간에 그렇게 잠이 쏟아질게 뭐람. 특별히 내세울 건 없어도 꿈 많은 여고생, 지적이고 우아하고 싶은 여고생이 아니던가. 꾸벅대는 나를 보고 친구들과 옆에 앉은 남학생들의 킥킥대는 소리에 어떻게 해서든 깨어 있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안간 힘을 썼지만 무의미한 저항일 뿐, 안타까운 나의 의지는 잠 속으로 사라져갔다. 급기야 나는 자연에 순응하는 겸손한 자세로 곯아 떨어졌는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삶은 나에게 호의롭지 않았다. 헨델의 메시아의 절정 할렐루야코러스 부분에서 내가 그만 벌떡 일어나버린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셨다. ‘할렐루야 코러스 부분에서는 일어나야 한다. 그게 예의다.”라고. 잠결에서도 그 말씀을 떠올린 걸까. 고백컨대, 합창 소리에 놀라서 일어난 건지 아니면 에티켓으로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결국 내 주위 분들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고, 너무나도 창피해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슬그머니 도로 자리에 앉았다. 합창이 시작되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제야 다들 일어나시는데, 정작 그때는 너무 부끄러워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앉아있었다.


그 후의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연주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불이 켜질 새라 빠져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교복을 볼까봐 그게 가장 걱정되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까지 망신을 시킬 수야 없지 않나. 있는 스타일 없는 스타일 다 구기고는 집에 가는 길은 어찌나 허망하던지. 친구들은 웃느라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나마 위로랍시고 해주는 말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에 소금 뿌리는 격이었다. 그 와중에도 폼만 좀 덜 잡았어도, 조금만 덜 우아한 척 했어도 그리 창피하지는 않았을 건데...‘하는 생각은 계속해서 맴돌고. 곧 죽어도 폼생폼사였던 여고생. 우리들의 여고시절은 그랬다.


재밌는 것은 그때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던 부끄러운 사건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쩜 그리 재밌게 느껴지는지. 꿈에서라도 잊고 싶었던 그때의 그 사건은 인제는 결코 잊고 싶지 않은, 두고두고 기억하며 웃고 싶은 귀한 추억이 되었다. 그 후로 이맘때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클래식 음악회, 세종 문화회관, 옆에 앉은 멋진 남학생, 키워드만 뽑아보면 영화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근사한 분위기였는데 완전 코미디로 끝나 버린 사건. 긴장과 스트레스가 만연한 일상 속에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겨 나오는 지난날의 재밌는 기억들은 따스한 봄 햇살 같은 환한 웃음을 안겨준다. 나의 하루를 이렇게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재밌는 사건들로 채우게 된다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삶이 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실수하고, 좀 더 많이 부끄러워도 좋았을 것을. 그러고 보니 헨델의 메시아는 나에게 잊지 못할 귀한 추억을 안겨준 구원자 메시아였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라고 끙끙대며 스스로를 힘들게 할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숨어있는 재밌는 그림들을 찾아내어 훗날 떠올리며 웃음 지을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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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보면 할렐루야를 올려야 마땅하겠으나..

그시절의 기분을 되살려 당시 내가 즐겨 들었던 Boney M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올린다..

Mary[s Boy Child / Oh My Lord 메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