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28] 욕망의 인문학, 강신주의 <감정수업>

pumpkinn 2014. 12. 16. 10:40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 주는 욕망의 인문학’이라는 소제가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강신주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지라 그는 어떤 식으로 글을 풀어나갈지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을게다.

 

책을 펴보니 제목이 왜 ‘감정수업’인지 알 수 있었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48가지로 나누어 그 각각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해놓고 그 각각의 감정을 가장 대표하는 책을 선정하여 주인공들의 성격과 삶을 보여주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을 대비 분석하며 좀 더 분명하게 그 감정의 색깔과 성격을 알게 해주는 책. 그래서 ‘감정수업’이었다. 

 

그 감정의 정체와 느낌을 분명하게 알게 해 주기 위해 강신주는 ‘스피노자’라는 스승을 모셔왔다. 강신주가 말하듯, 내가 알고 있던 감정들 중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의외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인 것도 있어 그 섬세한 차이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강신주는 말한다. 책을 읽다가 유독 어떤 감정에 끌리게 되면 그 감정을 좀 더 분명히 찬찬히 살펴보라고. 그 감정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소개한 소설을 읽어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끌렸던 몇 가지 감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자긍심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긍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끼는 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인할 때, 샹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기쁨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긍심은 얼마나 매력적인 감정인가.  길거리를 걸을 때도 우리의 걸음걸이는 레드카펫을 걷는 여배우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울 것이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은 거칠 것 없는 아우리를 뿜을 테니 말이다”(P41)

 

바로 내가 생각하는 매력적으로 느끼는 여성상이다. 이러한 당당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날 때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면의 성숙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빈수레처럼 시끄럽지 않고 행동이 교만스럽거나 값싸 보이지 않으며 매력이 자연스럽게 뿜어지게 되니 말이다.

 

 

경탄

 

경탄(Admiration)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강신주의 설명이다. 내가 ‘경탄’에 끌렸던 것은 강신주가 ‘철학자의 어드바이스’에 올려놓은 설명 때문이었다. 

 

항상 떠날 준비를 하라! 상대방에 대해 항상 자유로워라! 이것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무관심해지거나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 이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에만 상대방도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할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처럼 주인은 관심을 받고, 노예는 무관심에 방치되는 법이니까.” (P56)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며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자유를 가슴에 품으라고 조언해주는 강신주에 말에 전적으로 공감 동감했다. 떠날 수도 있고 머물 수도 있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곁에 머물 수가 있다는 표현은 살짝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유 의식은 관계를 더 싱싱하게 만들어주고 활기차게 해 준다는 것은 경험 속에 익히 알고 있기에 그 부분을 읽으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라 했다.

 

 

 

동경

 

과거의 절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삶과 직면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 과거 애인을 잊지 못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새로운 절정을 향유할 수 있겠는가. 꽃은 한 번만 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꽃나무는 매년 기적처럼 새로운 꽃을, 작년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신선한 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만 동경하고 있느라 올해 필 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직 움직이는 데 여력이 있다면, 과거에 피웠던 꽃망울에 대한 동경이랑은 접고, 지금은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햇빛도 있을 것이고, 뿌리를 뽑을 것 같은 비바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당당히 맞설 때에만, 삶의 절정은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P198)

 

나에게 꿈이 많은 것은 무언가에 대한 동경이 짙기 때문임을 이 책을 읽으면서야 알았다. 지난날 내가 지녔던 열정에 대한 동경, 내가 꿈을 누렸던 시절에 대한 동경, 헝그리 정신으로 똘똘 뭉쳐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 없이 맞서 나갔던 시간에 대한 동경. 

 

지난날의 내 모습에 대한 동경이 또다시 그런 희열을 맛보고 싶어 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꾸면서 열정을 되살리고 싶어 하고 꿈을 일상 안에서 누리고 싶어 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내게 주어진 현실에 맞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동경에서 나온 것임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조롱’이라는 감정의 색깔과는 상관없이 강신주가 소개한 나쓰메 소세끼의 ‘고양이’라는 소설이 아주 맘에 들었는데,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의 시니컬한 표현을 넘어서는 살아있는 조롱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표현이 어찌나 적절하고 적나라한지. ^^

 

그의 표현을 여기에 옮겨본다.

우리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아야겠지만, 우리 고양이 족은 먹고 자고 싸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일기이니 굳이 그렇게 성가신 일을 해 가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 일기를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즐길 일이다. (...)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인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성품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평소 말수가 적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내 주인이 한층 더 같잖게 느껴졌다. (P321)

 

감정 ‘조롱’에서 다뤄진 나쓰메 소세끼의 ‘고양이’ 부분이다. 그러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니 인간은 일기 같은 글을 쓰는 거라는 게다. 읽으면서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지만, 뒷맛은 살짝 씁쓸했다. 겉과 속이 달라서 일기를 쓰는 인간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내친김에 나를 데굴데굴 구르게 만들었던 문장 하나 더...

주인이 이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선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자니 답답하니까 멋대로 의미를 갖다 붙이고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P324)

 

문득, 뉴턴이 떠올랐다. 그는 잘난척하고 싶어서 소수의 엘리트만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로 책을 썼다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몽테뉴는 얼마나 멋진가. 여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불어로 글을 썼으니.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언젠가 소멸될지도 모르는 프랑스어로 쓴다는 것은 그로서는 모험이었을 거라는 글을 읽고는 물처럼 어느 그릇에 담겨도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그의 넉넉한 성품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물처럼 흐르는 성품이기에 종교 전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적 허영에 사로잡힌 오만한 사람들에 대해 이보다 더 적나라한 비꼼이 있을까 싶다. 아주 시원하게 날린 펀치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는 감정수업을 읽으면서 가장 읽고 싶은 일 순위로 올려진 책이었다. 그 후로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 우선순위 1위를 차지하게 된 책이기도 하다.

 

 

 

 

복수심

 

마흔여덟 번째로 다뤄진 감정은 ‘복수심’이었다. 복수심에 대한 철학자의 어드바이스에서 다룬 내용이 내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함무라비 법전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잘해 주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그만큼 위해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거꾸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P508)

 

그의 예리한 비판력에 흠칫거렸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에게 잘해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잘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는게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는 비위를 맞추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돌아보라는 게다.

 

그의 말을 들으니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을 ‘신뢰’하기에 ‘자유’를 마음껏 누리도록 간섭하지 않는다며, 나의 무관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건 아닌지 말이다. 너무나도 나에게만 관심이 많은 나.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는 것 알고 있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닌 더 섬세한 관심을 가지고 대해야겠다는 반성이 일었던 부분이었다.

 

 

 

 

강신주...

 

책을 통해 만난 강신주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강신주가 왜 때때로 독설가로 불릴 정도로 강한 자기주장을 펴는 철학자인지 알 것 같았다.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고 피력하며, 지금 이 순간 느낌은 감정에 충실하자고 외치는 현재형 철학자.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신념과 당당함이 있는 그이기에, 만약 내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주장이 그렇지 않다고 느껴질 때는 또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때의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시크하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쯤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떠오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그에 대한 느낌을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남자답다’, ‘쿨하다’, ‘단호하다’. ‘당당하다’, ‘머뭇거림이 없다’, ‘책임감’, ‘성실성’, ‘호탕함’ 등등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모두 남성적인 성향이 짙다. 그렇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감정의 이면에 숨어있는 다른 얼굴을 보는 섬세함은 가히 여성적이다. 이런 섬세한 감성을 지닌 그 이기에 감정에 대해 그리 치밀하고도 치열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가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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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DIVO & Celine Dion - I believe in you (Je crois en t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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