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22]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 손우성 옮김

pumpkinn 2014. 5. 26. 11:34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사라 베이크웰의 몽테뉴의 삶과 철학뿐만 아닌 그와 연결된 모든 것을 샅샅이 파헤친 나를 온전히 매료시킨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난 후 다시 읽게된 몽테뉴의<수상록>은 확실히 그 느낌이 깊었다. 수상록을 손에 드는 순간 내 가슴엔 여린 떨림까지 느껴졌으니. 하지만, 푹 빠져 읽었던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와는 달리 모든 찹터를 신나게 읽었던 것은 아니다. ‘서적에 관하여’,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교만에 대하여’, ‘독서에 대하여’, ‘대화에 대하여등등 쏙 빠져들어 읽혀지는 장도 있었지만, ‘레이몽 스봉의 변호처럼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읽어도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마치 우주 속을 헤매는 듯 집중을 하지 못하는 장도 있었다.

하지만 재밌게 읽혀졌건 지루했건 그 모든 글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몽테뉴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그는 스스로를 어떻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삶을 추구하고 또한 무엇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솔직한 표현들이 가감없이 그려져있어 읽는 동안 많이 웃고 깔깔대곤 했다.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자신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그렇게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어떤 강한 감정도 열정도 분노나 지나친 겸손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마치 음식의 맛을 없애는 조미료를 빼낸 자연식 그대로의 깊은 맛을 내는 요리라고나 할까? 그는 덤덤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심지어 자신을 너무 솔직하게 표현하여 웃기는 상황에서 조차도 서술해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는 1533년 페리고르의 몽테뉴 성에서 출생했고, 노후에 담석증으로 고생하다가 1592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 전반에 걸쳐 프랑스에는 카톨릭교와 신교의 종교 전쟁의 내란시기를 맞는데, 프랑스 종교 전쟁의 내란 속에서 그렇게 온전히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쏟아부으며 에세를 썼다는 것은 물론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한몫했겠지만, 어쩌면 스스로 생존하고자하는 본능에서 나온 제스츄어였을지도 모른다.

몽테뉴는 운이 좋게 부유한 신흥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런 좋은 환경으로 노동을 열심히 하여 돈을 벌지 않아도 될만큼의 재산이 태어날때부터 주어졌던지라 그런 환경이 자신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스스로 모질지 못하고 게으르고 무른 성격을 갖게된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운 좋은 몽테뉴는 아버지 피에르 몽테뉴의 열린 교육을 받음으로 젖먹이때부터 유모 가정에서 함께 자라며 그들의 삶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산교육을 받았고, 또한 철저한 라틴어 교육을 받게함으로 어렸을때부터 고전을 읽음으로 넓혀진 학식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인들과 철학자들의 지혜를 일찍 접함으로 그는 이미 삶이 주는 허무와 행복과 고통의 이면을 일찌기 엿봄으로써 거의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일어났던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생각하면, 어쩜 그런 처절하고 참혹한 종교 전쟁 속에서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온 관심이 자신에게 향했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바로 그 종교 전쟁이 그를 참혹한 외부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한 바로 그 메인 요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본인 스스로는 자신 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적당히 넘기듯 글에서 표현하지만 그가 보르도 시장에 재선된 것으로 보아 그는 시장으로서의 의무를 훌륭하게 해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겸손을 빗대어 스스로를 낮추어 표현한 것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본인은 진정 그리 느꼈을 테니까.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 지내버릴 때가 있고, 실제 그렇다고 생각함은 그리 놀랄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거짓말쟁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몽테뉴가 좋았던 것은 때로는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도 저도 아닌, 때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게 해석되는 많은 상황들이 뚜렷한 자기 주장이 없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바로 그런 면이 자유롭게 느껴져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게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절대적으로 이것과 저것을 가를 수 있을까? 물론 인륜과 천륜을 거스르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제외하고. 잘못된 상황 해석이나, 같은 사건을 보고 다르게 해석하는 우리의 시선들은 정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가 초기에 회의주의와 스토아 주의에 깊이 심취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찌나 그리도 해학적인지. 하지만 본인은 너무 진지하게 써내려가서 읽는 이로하여금 배꼽을 잡게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제보다도 더 예쁘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추악하고 못난 여자들이 가진 태를 빼며, 지극한 숭배를 받고 날뛰며 좋아하는 것을 본다. (루크레티우스)” (P128) 하하하하~ 이 얼마나 낯뜨거워지고 등에서 땀나는 머쓱한 이야긴지.

나처럼 먹기를 탐하는 버릇은 건강에도 해롭고 쾌락에도 손해될 뿐 아니라 점잖지 못한 일이다. 나는 너무 급하게 굴다가 가끔 혓바닥을 꺠물고 손가락을 깨무는 수가 있다. (...) 식탁에서는 이야기를 짤막하고 재미있게 하면 아주 좋은 양념이 되는데, 나는 먹기에 바빠 말할 틈도 없다.” (P223) 까르르르륵~ ^^;; 너무 몽테뉴다운 표현이 아닌가 말이다.

몽테뉴를 읽으면서 가장 깊은 반성을 안겨주었던 부분은 바로 대화부분이었다. 나는 어느 논제에도 놀라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진 신념이 내 것과 아무리 달라도 불쾌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경박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도 인간 정신의 생산에 맞지 않는 것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자기 판단으로 무슨 결정을 내릴 권한을 주장하지 않으니 여러 가지 반대되는 의견도 부드럽게 보아간다. 그래서 그런 데 동의할 생각은 없어도 시원하게 들어는 준다. (...) 우리 주위에서 믿고 있는 그런 모든 잠꼬대는 적으나마 들어줄 값어치는 있다” (P147~148)

성숙한 인격을 가진 이만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배려, 존중. 그것.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점점 빳빳해짐을 느끼며, 좀 더 젊었을 적 내안에 풍성하게 받아들여지는 다른 의견들이 웬일이지 반사거울로 즉각 반응을 하며 대화를 나누던 대상과 살짝 불편해지는 경우를 종종 경험을 하는 나였던터라 그의 대화 부분은 내게 더 깊이 와닿았고 반성케하고 성찰케 했다.

몽테뉴는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며 에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며 문학사에 굵은 자국 하나 짙게 내었는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작가가 떠올랐다. 바로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는 자신을 좀 더 잘 알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쓰는 에세이는 비단 그의 일상에 대한 느낌 뿐만이 아니라, 그가 관심을 보이는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곤 한다. 여행, 건축, 철학, 그림, 사랑, 종교 등등. 아주 예리하고 통찰력 넘치는 글, 시니컬하면서도 해학적인 글을 쓴다는 것도 닮았지만, 대머리(^^)라는 것도 닮아서 웬지 더 친근감이 가는 그 둘이다.

암튼, 그는 책 속에서도 보여주듯이, 세상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의 성격상 문제나 가십거리의 회오리 속에 휘말리는 것을 극히 싫어했기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을 뿐, 그의 글 속에는 군데군데 침묵의 목소리를 엿볼 수가 있다. 라보에시의 작품 <일인자에 대항하여>를 출간하게되고, 그 후 이 책은 리베르땅에 의해 많이 이용되곤 한다. 물론 항간에는 라보에시의 이름을 빌려 쓴 몽테뉴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고는 하나, 어쨌든 몽테뉴의 수상록에서는 라보에시의 작품으로 그려지고 있다.

내가 가장 즐겁게 읽었던 장은서적에 관하여’,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교만에 대하여’, ‘독서에 대하여’, ‘대화에 대하여였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했고, 그의 성향 안에서 참으로 많은 나를 발견했고, 내게는 꼭 고쳐야하고 보완해야할 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몽테뉴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내모습이라며 꾸미지 않고 내어놓음으로써 자유로움을 누리는 그를 보며 그래, 그러면 되는걸..”하는 편안함과 위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글들 속에 옮겨져있는 수 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구절들을 읽으며 그들을 좀 더 깊이 알고 싶고 그들의 책을 읽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리고, 특히 그들 중에서도 몽테뉴는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루크레티우스의 글을 특히나 많이 인용했는데 꼭 그들의 작품들을 읽어야지 다짐을 했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려고 공부했다. 그 뒤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했다. 지금은 재미로 공부한다.” (P145)

몽테뉴의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 아닐까싶다.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배움이 좋아서 하는 공부. 그래서 재밌는 공부. 그래서 공부할때 맛갈스런 행복을 느끼는 지금의 내가 좋은게다.

 

 

그냥 한 마디...

문예 출판사의 수상록과 동서 문화사의 수상록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었다. 같은 역자 손우성의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다른 글들이 나를 그렇게 양다리 걸치게 했다. 읽으면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가끔 난해한 구절들을 읽으며, 만약 김유신이나 김희균 교수가 수상록을 번역했더라면 어떤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하는. 지금보다 더 깊고 맛갈스럽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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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ar Akram의 Searc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