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70] 조안 키티스터의 ‘십계명’ 을 읽고../ 성찬성 옮김

pumpkinn 2012. 3. 5. 08:41

     

 

 

 

'십계명 마음의 법'을 읽고....

 

지난 주일 미사가 끝난 후 성물방엘 갔다. 그냥 뭔가 내게 도움이 될 책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들렸는데, 내 시선을 끄는 책 ‘십계명 마음의 법’. 사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오랜시간을 지내왔으나 십계명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물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등등,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뜻을 말하는게 아니다. 10가지 계명이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내가 단순하게 아는 의미보다 분명 깊은 가르침이 있음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있었기에 나의 영적 성장은 이뤄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십계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서 카톨릭 신자라며 성호를 긋는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진지하게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나름 결심을 한 해이기에 일단 기본적인 틀부터 제대로 잡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런 와중에 발견한 이 책은 내게 어떤 표지처럼 느껴졌던게다. 수십 년동안 밑바닥을 기고 있던 내 영성이 성장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

나의 바램에 보답이라도 해주기라도 하듯이 이 책은 내게 어렴풋이 겉으로만 알고있던 십계명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글자 그대로의 십계명을 풀어놓은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범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한 그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아주 분명하면서도 단호하고 엄격한 어조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우리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는지. 그러면서 말로만 찿고 우상을 섬기는지. 또한 우리는 하느님 이름을 마구 빗대어 부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하인 부르듯이 하는지. 또한, 우리의 잣대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놓고 내 맘대로 하느님을 종부리듯 하는 우리인지. 우리가 얼마나 삶 속에서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는지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말이다...  

하느님은 요구하거나 요구하지 않거나 간에 늘 현존하시리라.”고 가르치는 라틴 속담이 있다. 하느님은 나를 찾지않으신다. 하느님은 이미 나와 함께 게신다. 중요한 것은 벌써 나를 찿아내신 하느님을 내가 인식하는 일이다. (P36)

이렇듯 하느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은 보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찿으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때때로 원망하며 하느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며 징징거리는게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이런 우리 인간의 모습은 안스럽기마저 하다. 하느님이 이런 우리의 행태를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히실까...

어쨌든, 십계명에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 안에 우리 인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목조목 들어있어 단순하게만 알았던 십계명이, 그렇게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놀라움 속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어진 첫 번째 사랑의 법과 두 번째 사랑의 법은 결국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여기서 이윤제 베드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에게 감동을 넘어선 충격을 안겨 주었던 한 말씀.

율법과 사랑이 충돌할 때는 사랑이 우선입니다.”

결국은 사랑인게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라 하시고, 우리들끼리도 그렇게 나눔 속에 사랑을 하라고 강조하시는게다.  때마침 시작된 성경 공부. 십계명을 좀 더 구체적인 면에서 알고 시작하는 신약 성서는 내가 조금 다른 맛을 안겨주었다. 뭔가 앞뒤가 이어지는 느낌. 이제서 느껴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깊은 느낌 속에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내게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조안 카티스터 수녀님의 설명이 더욱 좋았던 것은 그녀의 다각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하느님을 쫀쫀하게 당신 틀에 가두어 설명하지 않으셨다는 것. 즉 당신이 카톨릭 수녀시기에 카톨릭적으로만 표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내겐 어떤 시원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때때로 종교 서적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느님을 어떤 틀 안에 가두어 설명하는 부분인데, 나는 늘 생각했다. 어떤 종교 안에서 하느님은 계신다고. 단지 그들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있음을. 하느님이 그렇게 쫀쫀째째하게 어느 한 종교를 두고 당신을 드러내시지는 않으실거라는 것이라는게 나의 생각. 그런 같은 이유로 마더 데레사를 존경하는 이유고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카톨릭 신자로서 긍지를 갖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한번의 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들여다보며 온전히 내 삶 속에 배이게 하겠다고 나름 깊은 다짐을 해본다.

십계명을 읽으며 순간순간 느꼈던 나의 느낌들은 초서에 달았다..

 

 

조안 키티스터 수녀님...

 

 ‘십계명 마음의 법’ 을 읽다가  – 초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삶이란 가장 좋은 것들. 가장 훌륭한 것들,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을 관상하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완전한 삶은 우리가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바로 그것에 덤벼들어 전념하게 만다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은 삶 속에서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십계명은 문화를 뛰어넘고 문화보다 앞서며 나날의 일시적인 기교보다 한층 중요한 것들이다. 십계명은 영속되고, 우리네 삶이 서 있는 영적 토대가 되며, 우리가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광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을 향해 매진하는 길이 된다.

 

1. 성찰의 법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 탈출 20,2-3

P26 우리 모두는 하나 이상의 신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그 점을 인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온갖 생명이 단일한 근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 우리가 군소 신들에다 우리 자신의 큰 부분을 헛되이 낭비해 왔다는 사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황당무계한 신전들에서 예배를 드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일생이걸릴 수 있다.

P26 계명의 힘은 그것이 우리를 불러 세워 삶에서 진실로 중요하고, 진실로 궁극적인 무엇을 기억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계명은 우리가 섬기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우리를 실망시키는 미혹들에서 우리 자신을 구해 내고자 시도한다.

P27 우리가 언제까지나 진실로 소유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가 우리 내면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 스스로 배양해 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신감, 영성 교사, 자기정의, 자부심, 용기, 진실이 되어 버릴 때 우리는 그저 사는 체하고 있을 따름이다.

P28 하느님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감각과 다른 사람들을 불충한 사람으로, 이교도로 단죄한다는 것은 창조 과정 그 자체를 부정하는 짓이다. 인간이란 피조물은열 달을 걸려 태어나지만 타고난 인격체가 되기전까지는 여러 해가 걸린다. 영적인 삶은 서서히 밝아 오는 일종의 전진 과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온전한 의식을 지니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P29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다른 말로 정의하고, 다른 어조와 운율로 예배하는 이들에게서도 하느님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


P29 우리는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는 그 하느님을 위한다면서,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성별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극히 무신론적인 짓들을 자행한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 우리의 인종, 우리가 성을 부여한 하느님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종교를 반종교적으로 만들며 우리의 하느님을 왜소하게 축소시켜 버린다.

>> 내가 카톨릭을 택한 것은 바로 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왜소하게 축소시켜 버리는’ 종교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을 내 울타리에 가두어 놓는 행위들에 반발심이 컸던 그 이상으로 카톨릭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있는 그런 넉넉한 공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편안함이 어디서 오는지는 바로 ‘카톨릭’이라는 단어의 뜻이 ‘보편적’이라는 것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열광시켰던 켈커타의 데레사 수녀는 (물론 다른 성인들도 그렇지만) 바로 내가 답답해하고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그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주시는 소화제 역할을 해주셨다. 자기 모상대로 하느님을 지어내고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하느님을 가두워 자신들이 내놓은 계명에 하느님 이름을 갖다 붙이는 행위들에 얼마나 구역질을 느꼈던가..

만행의 저자 현각 스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신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계시는데 인간들이 이런저런 이름의 종교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가두고 있다고...

어쨌거나 죽어가는 걸인들, 버려진 병자들을 간호하면서도 그들이 운명을 다할 때는 그들이 원하는 종교의식으로 장사를 치뤄주시는 데레사 성녀의 모습. 나에게는 바로 그것이 답이었다. 데레사 성녀는 당신이 그들에게 베푼 무엇으로 개종을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거니와, 순수한 사랑의 베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 하느님을 단순히 ‘카톨릭’이라는 종교안에 가두지 않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말하고 이름지어 놓은 종교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심을 당연히 아셨던게다. 나를 카톨릭으로 이끄신 분은 분명 우리 엄마지만, 마음으로 깊이 잠기게 하신 분은 바로 데레사 성녀셨던게다.

그런데 조안 카티스터 수녀가 또 이렇게 분명한 어조로 글로 표현하여주시니, 탈벤 샤하르의 행복론을 읽으며 느꼈던 바로 나를 광분하게 했던 그 희열, 동질감이 느껴졌다.


P29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상 숭배를 자행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상에 따라 하느님을 지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온갖 우상들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우상이 되어 버린다.

>> ‘우리는 우리의 모상에 따라 하느님을 지어낸다.’ 공감 또 공감이다. 마치 나는 아닌 듯 이렇게 맞장구치며 말을 하지만 물론 나 역시도 그 중에 하나일거고..


P29 우리는 우리네 삶의 중심에다 우리 자신만을 올려놓음으로써 영원한 것들, 지구적인 것들, 우주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은 상실해 버리고 만다. 전체에 대한 안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엉뚱한 악령들과 싸우느라 몸부림친다. 우리는 신전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 엉뚱한 악령들과 싸우느라 몸부림을 치는 우리들..이 얼마나 에너지 낭비며 기운 빠지는 이야기인지. 정작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우린데 그 대상이 잘못 골라진 대상이라니 말이다...


P30 이렇듯 한 국가 권력이 다른 국가 권력을 미리고 들어서면서 우리 모두는 결국 기만에서 나온 기만들에 시달린다. 우리는 평생토록 장님처럼 배회하면서도 우리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 결함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절대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여행을 도중에 가로막으면서도, 그런 진행성 마비 상태를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쳇바퀴를 돌릴 뿐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우리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쳇바퀴를 돌릴 뿐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절대를 향해 가는 자신의 영혼의 여행을 가로막는 것도 내 자신.. 우리 자신이 귀머거리고 장님이라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 어제 복음 말씀이 떠오른다.. 두 손가락으로 귀를 열어주시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혀에 바르시니 말리 혀가 풀려 벙어리가 낫는 장면들...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귀머거리에 장님에 벙어리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 언제가 되어야 우리가 그렇다는 사실을 인식을 하며 하느님께 겸손되이 무릎을 꿇을 것인지...

쓰면서 웃음이 나왔다. ‘우리’라고 표현하는 내 자신이. 우선은 나부터 겸손되이 눈물로 엎드려야 할 것인데...


P30 하느님은 인간이 만들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축소될 수 없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P31 첫 번째 계명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가 삶 속에서 하느님보다 더 중시해 온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우상으로 만들어 왔는지 거듭거듭 성찰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의 진리를 계속 접하게 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우리의 나태에도 불구하고 여행길 끝에는 하느님이 우리를 기다리며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우리의 몸부림을 지원하고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바로 이 계명임을 깨닫게 된다,

P34 이것은 우리네 한 평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누구 또는 무엇을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에서 진지하게 손 댈 자리가 어디인지를 결정해 주는 계명이다. 이것은 일이 힘들어질 때마다 우리가 어디로 얼굴을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계명이다.

P34 첫 번째 게명은 우리를 고향으로, 비단 하느님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로 이끌어 주도록 되어 있는 계명이다.

P34 사물들에 대한 사랑은 삶 속에서 우리를 이런저런 축복으로 이끌어 준다. 오래가지 못하는 사물에 매달리는 것은 인생에서 우리를 여러 가지 고통으로 끌고 갈 따름이다. 오래가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P35 우리에게는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전혀 없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증거도 전혀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줄곧 “여기에는 이것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속삭이는 잦고 선명한 목소리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증거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P35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이라서 그럴 능력이 있기라도 하듯이, 절대 진리를 정의하려는 풍조 역시 우상 숭배를 연상하게 만든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숭배하는 그릇된 신으로 만들게 된다.

P35 코란은 “하느님은 동쪽이자 서쪽이니, 네가 어디로 얼굴을 향하든 거기에 하느님의 얼굴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 너머를 볼 수 있을 때라야, 우리 주위와 세상의 나머지 종교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 하느님은 동쪽이자 서쪽.. 우리가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거기에 하느님의 얼굴이 있다는 코란의 가르침은 뭉클함과 감동이 함께 일었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그곳에 계시는 하느님.. 내가 어느 곳에 있어도 하느님 품속이라는 말..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어야둥둥 내사랑~ 내 귀염둥이~ 하느님이 우리를 보실 때의 마음이 그러시지 않을까..? 그 안에서 우리는 마치 천년이라도 살 마냥 사랑해도 모자르는 시간들 속에 아웅다웅 거리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 모양새가 얼마나 안쓰럽고 안타깝게 느껴지실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한 번에 하루씩을 사는 연습 속에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누리며 사는 내가 되겠다고 다시한번 다짐을 해본다.


P36 “하느님은 요구하거나 요구하지 않거나 간에 늘 현존하시리라”고 가르치는 라틴 속담이 있다. 하느님은 나를 ‘찾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신다. 중요한 것은 벌써 나를 찾아내신 하느님을 내가 인식하는 일이다.

>>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이미 나와 함께 계신 하느님.. 단지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일 뿐. 나는 먼 곳만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찾고 있으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니...


P36 내가 하느님 안에 들어가는 것은 늘 예기치 못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이 때로는 기쁨이며, 때로는 고통이다, 그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이며, 때로는 혐오이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것이 늘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에머슨은 말한다. “하느님은 은밀한 문을 통해 모든 개개인에게 들어오신다.

P39 하느님은 체험이지, 어떤 사물도 어떤 관념도 아니다. 그대가 하느님을 찿았다고 결론짓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어떤 신인가를 경계하라, 만일 그것이 사상과 원칙의 하느님이라면, 이를 의심하라, 파스클은 말한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마음이지, 이성이 아니다.


P37 하느님이 ‘그’가 되는 한, 그 하느님은 거짓된 하느님이다. 만일 하느님이 순수한 영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신학자 산드라 슈나이더는 말한다. “남성적인 하느님 상이 일반 그리스도인의 상상 속에 제아무리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을지라도, 신학적 전통이 하느님에게 성을 지정해 드린 일은 결코 없었다.

>> 그래도 왠지 나에게는 하느님은 ‘아버지’처럼 느껴진다. 넉넉하고 깊은 사랑, 모든 것을 다 보시면서도 때때로 못 본척 해주시면서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기다려주시는 분, 지혜를 가르쳐 주시는 분. 물론 ‘엄마’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왠지 아빠라는 이미지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드는게다.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2. 존중의 법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 탈출 20,7

P38 미국 중남부 일리노이 시도드에 소속된 패트릭 먼로는 (동성애 성직자에 대한 투표) 일치를 지지하는 발언에서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찰의 법 제 1계명에서도 그랬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우리의 뜻 안에서 우리의 계명을 퍼뜨리며 단죄하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골라서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어떠한 예외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두고 보면 동성애자들도 하느님의 아들 딸들인 것이다. 단지 우리가 정한 사회 법에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단지 그들이 우리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아인 것이다. 더우기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사제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그래선 안되는 일 아닌가...

나는 동성애 문제에 민감하다. 왜냐면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의 30%가 게이 손님들이다 보니 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는 못하나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 그들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보니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사랑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게다.

우리 가게에서는 그들이 게이라고 해서 다른 대우를 받지 않는다. 때론 더 깊은 사랑과 정성으로 그들을 대한다. 우리 가게에서만큼은 그들이 편안히 상처 받은 인간의 존엄성이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게다. 물론 그들은 충실하고 신뢰를 안겨주는 손님이기도 하다.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로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혐오스런 일이다. 패트릭 먼로 신부의 용감한 지지에 나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P39 이는 어쩌면 교회가 지금까지 가장 멋지게 두 번째 계명을 수용한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그리스도인 무리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새 시대의 교회에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을 합동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자리에서, 무리 중에 자신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이들을 저주하고 매도하는 데 하느님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항상 하느님의 의향을 완벽하게 아는 체하지 않는 전진하는 교회, 순례하는 교회엿다. 이들은 끄떡없는 확신으로 안다는 오만을 과히사며 서로 충돌하는 데 하느님을 이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었다.

P41 고대 문화 어디에서나 이름 짓기는 – 그 사물의 본질을 아는 일은 – 한 개인의 주체성과 직결되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삶에서 그들의 위치나 목적이나 능력,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을 보여 주는 일종의 표지였다. 무엇인가에게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이름 자체에 함축된 특성들을 부여한다는 뜻이었다.


P44 필로(첫 세기 유다교의 최고 지성인)가 지적하고 있듯이, 두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증언할 필요가 전혀 없는 어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느님을 들먹이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일을 두고 도대체 ‘맹헤살’이유가 어디 이쓴냐고 따진다. 만일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맹세는 그 거짓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점은, 무엇 때문에 신성한 진리를 내세워 거짓을 보증하게 함으로써 절대 존재요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 하는 것이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인데,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진리는 어느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가르침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것만을 보아도 어떻게 우리는 신이 한 종교에만 머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이미 신이 아닌것 이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을 고작 어느 하나에 가둔다는 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행동인지..


P44 무엇인가를 두고 맹세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성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하느님의 성실성을 모독하는 위험을 초래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맹세는 진실을 더 진시랗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허위의 결과만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심각한 것이다.

>> 절대 공감이다~!! 맹세를 하는 것도 변명을 하는 것도 나는 이질감을 느낀다.


P45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두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계명은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하느님의 존재를 빌려, 하느님의 권능을 빌려 하느님 노릇을 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어 사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허위를 보증하는 데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헛일이다. 하느님께서 결코 하실 리 없는 일을 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 역시 헛일이다.


P45 이것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자들이 범하는 죄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느님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고 주변 세계를 그 자체의 기준들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런 기준들은 그들이 가면서 만들어 내는 것들이다. 이는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고 가할 권리도 없는 ‘이러니 하느님이 너를 벌하시리라.”는 식의 협박이다. 여기에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무겁게 달라붙어 있다.

>> 우리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이런 협박을 듣고 지내는지. 공동체에서 원하는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거부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식의 유치한 행위들. 처음에는 그러한 말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함에 있어 나도 어렵지만 동참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협박(?)에 신물이 났다.

지금은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지 못할 것이면 하지 말자~!!’라는 마음을 굳게 지키게 되었다. 봉사라는 것이 내가 받은 축복과 은총과 시간을 기꺼운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것 아닐까.? 그럼으로해서 나의 신앙도 함께 하는 이들도 또한 바라보는 이들도 행복하고 감사한 삶으로 이어지며 다시한번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아닐까..?

그런데 많은 공동체에서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띄질 못한다. 서로 나를 내세우기 위함이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을 거부하게 되면 그것은 당장 하느님의 뜻으로 승격되어 상대방에게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을 서슴치 않는 미성숙한 신앙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득실득실 거리니 마음의 평화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자 참여하는 신앙 생활이 시기와 분열로 이어지는 것.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잃지 않고, 신앙의 근본을 지키며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게다. 바오로와 열 두 제자들도 그런 갈등 속에 보낸 것을 알고 난 후 나는 이러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부딪히며 둥글어지며 성숙되어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인제는 전처럼 그렇게 상처를 받으며 병까지 걸리며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지는 않는다. 고만큼은 성숙되어진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싫어하셔, 하느님이 벌주셔, 등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병적으로 피한다 그러한 비유들을.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시는 분. 어떻게 우리에게 벌을 허락하신다는 말인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부당한 결과들, 힘든 고통들은 곰곰히 뒤돌아보면 모두 우리의 선택의 잘못 아녔던가..? 우리의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바르지 못한 행동이 안겨준 삶이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치셨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혐오스런 거부반응을 느끼게 되는 게다. 자신들의 잘못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벌로 표현을 하니 말이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P46 정말 그렇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법을 아주 훌륭하게 터득해 냈다. 우리는 우리의 신심을 증명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한다.

>> 절대 동감이다.


P47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함들을 외면하게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한다.

P47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나 사람 또는 집단에 휘두르는 일종의 곤봉으로 이용한다.


P47 끝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신심과 올바름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한편, 우리 주변의 삶에서 오는 힘든 문제들을 모조리 회피한다. 우리는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께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달라.”고 청하면서 스스로에게는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 이 부분에선 나도 뜨끔했다. 말로 기도하는 것으로 마치 나는 나의 의무를 다한 듯, 거대한 거룩한 뜻에 부합되는 삶을 살고 있는 고상한 사람인 척 했다. 하느님은 사상도 이론도 윤리도 아닌 ‘체험’이다. 그것이 보여주듯이 말로만 기도한다고 해서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며 하느님을 알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말로 기도하는 무늬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 행동으로 기도하는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을 하자.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하느님을 닮아있는 내가 되어있지 않을까..?


P49 내가 알기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에 초점을 마준 채 ‘부당하게’는 철저히 무시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계명의 취지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을 너무 자주 부르는 것이 나쁘다기보다 불경한 일들을 정당화하는 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다,

P50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만드셨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단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지성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을 책임지기 바라시지, 우리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 그들의 직관과 결정과 지시에 따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P52 스승이 말했다. “양복장이에게 가서 신을 일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셔츠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물어보아라.

>> 하하하하~ ^^ 이 얼마나 유머러스하면서도 품위있는 한 방인지~ ^^ 늘 신을 거들먹거리며 늦장을 부리는 그 게으른 양복쟁이가 스승님의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을 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


P52 두 번째 계명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든 아니든 하느님과 아무 관련이 없을 경우 그분을 개입시키지 말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도덕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분의 성스러운 특성을 파괴한다. 걸맞지 않는 하찮은 것들과 하느님을 결부시키게 된다.

>> 무슨 뜻인지 알겠다. 특히 브라질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삶의 일부가 되어있다보니 나도 덩달아 그리하였는데, 앞으로는 조심하여야겠다. 하찮고 사소한 일에까지 하느님 이름을 결부시키지 않는 것. 이것은 하느님 이름을 자주 부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P53 존 스튜어트 밀은 “언어란 마음의 빛이다.”라고 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에 관해 하는 모든 발언은 하느님을 우리보다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만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말하는 태도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 언어란 마음의 빛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표현이다. 비단 하느님 뿐만 아니라 우리 입으로 표현되어지는 모든 것들이 그 실제보다 더 크게 혹은 작게 만들어지는게다. 하지만 그 대상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라면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며 우리가 모르고 저지르고 있는 이 실수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고쳐야 할 것이다,


P53 불행히도 우리는 하느님께 똑같은 짓을 자행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벼락을 내리실 짓”이라고 하며 그분을 징벌의 도구로 삼는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이 축복하시리라.”고 하며 축복의 근원으로 그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표현하고 이쓴 ㄴ거승ㄴ.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인간의 편협한 견해를 뒤삳침해 달라고 하느님께 ‘부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P54 언어는 사물에 그 진가를 부여한다. 언어는 우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가 하면 동시에 눈이 멀게 만들기도 하낟. 마치 우리가 사소한 일로 홧김에 시키면 시킨 대로 하려고 하느님이 존재하는 양 이야기하는 것은, 참된 하느님과는 전혀 무관한 신을 만드는 것이다.

P54 하느님을 걸고 단언하는 것이 우리를 악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하면서 드러내는 부덕한 의도이다.

P55 쉴 로우보덤은 “언어는 지배 도구들 중 하나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호되게 나무랄 때, 우리 자신에게 하느님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보다 진실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P55 우리가 자행하는 악을 하느님 탓으로 돌림으로 써 합리화 하는 짓은 그 자체가 악행임에 분명하다.

P56 아랍 속담은 “말이 네 입에서 나왔을 때는, 말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말이 네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네가 말을 지배한다.”고 가르친다. 거친 표현이 그저 순진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하나의 형식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더 나은 것이 감정의 자제이다.

 

3. 기억의 법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 탈출 20,8

P58 삶은 대체로 영혼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일은 중요하지만 목적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성찰은 인간이 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P60 안식일’은 모든 생명체에 정의를 요구하는 낱말이다. 하지만이 세계에서는 안식일의 의미가 하루가 다르게 퇴색되고 있다. 안식일이 인간 존엄성의 근간과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을 존중하는 히브리인의 외경심에서 나온 것만은 분명하다. 안식일은 사람들이 피곤에 지켜 ‘쉬는’ 날이 아니다. 이날이 휴일이 되는 까닭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죽을 때까지 내몰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P61 안식일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하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P63 소모적인 상업주의, 자기도취에 빠져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지구를 파괴하면서 혼돈에 휩싸인 세계 관계 속에서, 안식일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교훈을 우리 모두가 망각하기 전에 우리에게 결단을 내리라고 고함치고 있다. 안식일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 우리가 인간이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 잊어버렸다. 따라서 물론 타자가 누구인지도 잊고 말았다고 말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 인간성을 발현하거나 발현하지 않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으로 남용을 자행하도록 허용하는 태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성찰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성찰하지 않을 경우, 성찰을 시작하지 않을 겨웅,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과 지구와 우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노예화하는 체제 속의 톱니 노릇 외에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고 말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유일한 자신은 시간이라고, 따라서 시간을 올바로 사용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P64 그리스도인에게 일요일 안식은 물론 경축에 뜻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기억’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왜 창조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종종 내외적으로 자기 파멸을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다 싶은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금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안식일은 삶의 핵심이요. 삶의 성장에 있어 쐐기들이며, 삶의 의미를 찿는 삶의 미래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P65 현재 안식일 정신을 증진시키고자 제시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의 문화로서 남은 삶에 관해, 삶의 중요한 일들에 관해 훌륭한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면 정말 필요한 것이 안식일 정신이다. 우리에게 나머지 세상에 정의를 행하도록 일깨우고 자극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 정신이다. 안식일은 과거 모든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애썼던 온갖 것들을이야기해 준다. “차분하라, 신중하라, 만족해 하라, 세상을 너그러이 대하라, 그러면 너는 타고난 그대로 아주 귀한 존재가 되리라.

P68 “탈무드에는 안식일이 필요한 이유 세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안식일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그 누구도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허용되지 않고,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으며,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예와 부자가 적어도 한 주일에 하루는 동등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해 줍니다. 안식일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일곱 째 날에 창조하신 세상을 관조하셨듯이 우리가 일의 좋은 부분을 관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P69 그는 만년필 하나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저는 작가입니다, 이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그는 펜을 잡아 가방에 넣으며 말을 끝마쳤다. “저는 안식일에 어떤 펜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과 저를 위한 날입니다. 저만을 위한 날이 아니지요.

>> 안식일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나는 안식일이 한 주를 열심히 일했으니 ‘쉬어라’라는 의미의 날인줄 알았다. 하느님의 ‘쉼’과 나의 ‘쉼’이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나는 몸의 피곤을 쉬는 하루였으나, 하느님은 6일의 창조 작업 후 세상을 관조하셨듯이, 지난 6일을 우리는 관조하고 성찰하며 그 의미를 하느님 안에서 새기는 것. 그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줄 몰랐던게다.

이 작가의 말처럼 안식일은 나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를 위한 날. 바로 그런 날인 것임을 나는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P69 세 번째 계명이 지적하는 진정한 죄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죄가 아니다. 그것은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지 않는 죄이다.

P70 세상은 안식일의 심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일요일은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과는 무관하다. 일요일은 우리가 평일에 끝내지 못했던 일들을 해치우는 시간이다. 안식일 전례들은 우리에게 영원을 일별하기 위해 시간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는 성스러운 삶의 형식들이다. 그리하여 나날의 삶은 더 이상 단조롭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포자기는 씻겨 나간다.

P70 우리가 우리를 신적인 것들과 연결시켜 주는 전례를 중단할 때, 현세적인 것들의 생명 일체를 약화시킨다. 우리는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이승 너머에 고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망각해 버릴 위험이 있다.

P71 안식일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삶에 중대한 일들, 영혼의 일들을 관조하는 명상과 관련되어 있다.

P72 안식일 정신은 우리가 삶 속에 하느님의 공간을 만들어 드릴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다. 그리하여 영원한 나라에서 살기 위해 오늘 스스로를 자제하는 데서 비롯되는 평온과 여백은, 우리로 하여금 가식적이거나 강요당하거나 허세 부리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 의식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한다. 안식일은 인간의 계획 속에서 하느님의 일들을 의식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P73 전례는 하느님의 품 안으로 들어서고 그보다 못한 온갖 것들의 촉수에서 벗어나라는 낯익은 초대로 영혼에 기름칠을 해 준다.

 

4. 돌봄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 탈출 20,12

P76 야훼 신앙은 삶을 똑바로 직시하고 이끌어 간다. 지금 이곳이 이 신앙의 유일한 소재이다. 야휘스트(Yahwist)들은 활동하는 다른 영역이 어디에도 없다. 중동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과 달리, 그들은 이 세상 너머의 어떤 세계를 기정사실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곳뿐이다. 의미가 생성되는 곳,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곳, 인간이 온전히 인간적으로 되는 곳이 이곳이다.

>> 놀라웠다. 야휘스트들의 신앙을 바라보는 자세가. 죽어서의 세상이 아닌,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곳에서 천국을 누리는 사상. 요즘 현 신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상이 아닌가.. 나는 이것이 새로운 현대의 신앙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대 야휘스트 전승에서 내려온 것이라 하니 놀라웠다.

영원히 오지 않는 내일, 죽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후 세계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땅을 딛고 서있는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천국의 삶을 누리는 삶. 바로 우리 신앙인의 올바른 모습이다.


P82 네 번째 계명은 인류를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라’가 아니라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자각하라’는 지령이다.

P83 이 계명은 우리 사회가 금방이라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있는 세대 간의 연결 고리들을 새삼 소중히 여기도록 촉구하고 있다. 유다의 속담처럼 “진정으로 죽은 자는 잊힌 자들뿐이다.


P85 나를 놀라게 만드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것이 목록에서 철저히 잘못끼어든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것이 등식에서 다른 한쪽을 완전히 비워 두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조안 수녀님의 예리한 지적에 내가 더 놀랬다. 정말 그렇네.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으며 그저 자식으로써의 자세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P87 내 뜻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들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부모 노릇이 아니다. 그것은 독단이다. 앤 브르드스트리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지혜가 없는 권위는 날이 없는 묵직한 도끼나 같아, 다듬기보다는 타박상을 입히기에 딱 좋다.

>> 비유가 너무나도 적절하니 마음에 쏙 들어왔다. 지혜가 없는 권위는 날이 없는 묵직한 도끼와 같아 다듬기 보다는 타박상을 입히기에 좋다... 나도 명심할 이야기다.


P88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뱀의 이빨보다 훨씬 매서운 것이 고마움을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이다.

P89 피터 유스티노브는 이렇게 말했다. “자식은 부모라는 뼈대에다 이빨을 갈아 날을 세운다.
P89 남들에 대한 권한을 지닌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 사랑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P89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알아낼 기회를 잃고 만다.

>> 특히, 한국 부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어서 살푼 웃음이 나왔다. 그리 간섭을 하는 나는 아니지만. 이는 나에게도 조심하라는 경종처럼 들렸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자. 너무 많이 알려주려고 하지 말자. 스스로 실수를 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공간을 주자. 이 부분이 내게 부족한 면임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P90 샤론 다우티아고는 이렇게 썼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어머니께 바치는 시가 되지만, 어머니는 내가 언제까지나 쓸 수 없는 한 편의 시와 같다.

5. 생명의

“살인해서는 안 된다.” – 탈출 20,13

P92 탈무드는 “생명 하나를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라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소한 일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주위에 생명의 문화를 창출하여, 남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성찰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P92 폭력을 막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은, 그저 새로운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기를 띠게 된다. 생명의 말씀인 다섯 번째 계명은 능력과 힘의 차이가 힘과 완력의 차이가 불과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한다.

P92 탈무드는 “힘은 이를 행사하는 자들을 매장시켜 버린다.”고 가르친다.

P95 다섯 번째 계명은 생명을 값싸게 치고, 죽음을 두고 목숨을 바친다고 말하는 자들을 소리 없이 질책하고 있다. 문제는 경솔하게 집행하며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힘이 곧잘 덕행의 가면을 쓰고, 흔히는 선을 행한다는 명분 아래 제멋대로 파괴를 자행한다는 데 있다.

P104 우리 안에서 생명의 한 부분이 죽거나 떨어져 나갈 때, 그때가 부활의 시간이다. 잘스 피델슨 주니어는 “삶은 작은 죽음들의 연속이요, 생명은 늘 죽음을 벗어나 되돌아오곤 한다.”고 했다. 이는 상실과 실망 또는 자연스런 죽음들과 사회적 실패 이후에도 우리 안에서 삶이 되살아나게 하라는 것이며, 그 점은 다섯 번째 계명 또한 마찬가지다.

P105 가정, 삶의 문제점들, 잊힌 가치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생명보다 오래가는 어떤 것에 목숨을 바칠 떄, 죽음은 설령 찾아들어도 결코 종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천천히 죽이는 바로 그런 것들을 우리가 과도하게 먹고 마시고 피울 때, 우리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속에 담긴 온전한 윤리적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 된다.

P105 우리는 어떤 것을 성장하도록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죽이게 된다. 인디라 간디는 “움켜쥔 주먹으로는 악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P106 “사람을 죽이지 마라.”라는 다섯 번째 계명을 거스르는 가장 큰 죄는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 진행되면서 서서히 생명을 파괴해 나가는 어떤 것에 대한 무관심일지 모른다. 내가 어떤 것을 끝장내기보다 구하고 싶어서 거기에 충분한 관심을 쏟을 떄, 나는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터득한 셈이다.

P106 우리는 때로 미래가 다가오기도 전에 죽여 버린다. 우리는 정해진 인생의 무대에서 일정한 나이에 삶이 끝나는 것으로 규정해 놓는다. 이것은 영혼의 안락사이다. 삶은 매 시기마다 베풀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눈앞에 등장하기도 전에 죽여 없애지 말자.

P107 우리는 삶의 의미를 항상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기를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일러주는 신호일 뿐이다. 테네시 윌리암스는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대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그래도 이 질문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믿어야 한다.

 

6. 투신의 법

“간음해서는 안 된다. - 탈출 20,14

P115 간음이 정말로 상호 관계를 파괴하는 경우는 드물다. 간음은 흔히 상호 관계가 이미 악화되어 왔음을 알려 주는 신호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호 관계가, 사랑이 성을 넘어 친교에 도달해야 함을 깨닫는다.

P115 어느 누구도 자급자족할 수 없는 까닭에, 우리 모두가 상호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저마다 혼자서 영혼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줄 때 비로소 온전하게 알려지고, 온전하게 도전받고, 온전하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자신을 위해 상호 관계를 무시하고, 협동 관계를 악용하며, 자기도취에 빠져 성적으로, 감정으로, 심리적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것은 여섯 번째 계명을 위반하는 일이다.

P116 우리는 서로의 느낌들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 세계는 우리가 가지는 관심의 폭만큼 좁아진다. 우리의 시야 또한 자기도취의 수준만큼 협소해진다. 우리는 보다 넓은 세계관을 상실해 버린다. 우리는 나머지 세계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에 맞도록 뜻매김한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의 과심이나 기분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독점하려 든다.

P117 오래가고, 서로의 행복을 감싸 주는 사랑은 우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게시고, 한결같이 사랑을 받으실 자격이 있고,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바라시며, 불변하시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닌 인간임을 보여 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P117 간음하지 마라.”라는 게명은 우리더러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쓰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P119 다른 누군가의 목숨과 사랑을 수중에 넣어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고 자신은 그것 없이도 제 갈 길을 잘만 헤쳐 나갈, 그것이 바로 간음이다.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착취이다. 그것은 상호 관계가 없는 방출이다.

>> 새로운 개념의 간음. 아니, 간음의 영역이 여기까지 미치는 것인줄은 몰랐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P119 우리는 여섯 번째 계명이 육체적인 부정행위와 관련된 것처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가장 사소한 부분일 수도 있다. 여섯 번째 계명은 마음의 성실성과, 울기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간음은 누군가에게 헌신할 뜻도 없이, 누군가를 대신하여 기꺼이 죽을 마음도 없이 사람을 개인의 육체적 만족에 이용하는 상태를 말한다.

>> 간음이 뜻하는 것이 이리도 폭이 넓다니. 사실 정신적이던 육체적이던 불륜만이 간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상황들, 마음가짐, 정신 상태, 그런 모든 것을 통틀어보면 바로 이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 아닐까...


P120 여섯 번째 계명은 올바로 사랑하는 일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으로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쏟아 넣지 않은 열정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구해 내는 일에 관한 것이다

P120 여섯 번째 게명은 네가 사랑할 때 올바르게 사랑하라고 말한다, 진실로 사랑하라, 가식 없이 사랑하라. 사랑이 아파할 때 사랑하라. 육체와 영혼으로 함께 사랑하라. 사랑이 오래 이어지도록 사랑하라. 이런 사랑은 육체를 초우러하고, 혼인을 초월하고, 단순한 우정을 초월한다. 이것은 사시사철 오래도록 이어지고, 육체보다 영혼이 훨씬 많이 투여되는 그런 사랑이다. 이것을 또 다른 육체로 대체하는 것이 절대 용납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122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그들을 우리 자신에게 맞추기나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지 않고서도 그들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랑은 서로가 자유로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용하는 최고의 사랑이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완전한 크기로 성장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상호 관계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위에서 보다 흥미롭고, 보다 활발하고, 보다 재미있는 누군가를 찿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P124 한 사람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통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이다.

>> 절대 공감이고 동감인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속을 하려 드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그 지독한 이기심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본인이 안게 되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P124 상호 관계는 봉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호 관게는 상호 존중으로 이루어진다.

>> 그렇다. 상호 관게는 봉사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로지 상호 존중으로서만이 건강하고 성숙한 관게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사랑도 존중이 있을 때 오래 이어지는 것.. 

 


 

 

 

7. 나눔의 법

도둑질 해서는 안된다.’ – 탈출 20,15    

P129 누구에게든 쓸모 있는 것은 절대 파괴하지 말고 필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음식을 낭비하거나, 아직 쓸 만한데도 단순히 새것을 들이기 위해 내버리는 해픈 씀씀이는, 필요하지만 여유가 없어 살 수 없는 이들에게서 그런 것들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 언젠가 성경 공부시간때 마리 요셉수녀님께서 바로 이 부분 도둑질을 하지마라에 대해 강의를 해 주신적이 있는데, 나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이기도 했고 감동적이기도 했었다. 수녀님의 강의로 인해 도둑질 하지 마라가 단순히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그런 단순한 개념이 아님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바로 마리 요셉 수녀님께서 해주셨던 강의가 바로 이 구절였던 것.

내가 입지 않고 있는 옷, 내가 쓰지 않는 물건들, 그 모든 것들을 이웃과 나누지 않는 행위는 바로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는 계명에 어긋난다는 말씀. 그때 느꼈던 그 놀라움을 나는 분명한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먹고 남긴 음식물들을 버리며, 안입는 옷을 옷장 속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도둑질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건지...

그 강의 내용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 다시 한번 놀라웠고 다시 한번 내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P150 성경에서 말하는 도둑질은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죄라기보다 사회적인 죄이다. 우리가 필요치 않은 것을 손에 넣는 짓,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파괴하는 지, 공총체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필수품을 제공하지 않는 짓이 바로 도둑질이다.

>> 가슴에 새길 일이다..


P138 우리가 입에 올려 이야기하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도둑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이들에게 조금도 베풀지 않는 종류의 도둑질이다. 이런 부류는 지상의 온갖 재화를 혼자서 소비하고 통제하고 비축하는 방식으로 도둑질을 한다. 우리는 이를 극렬개인주의:라고 부른다. 속지 마라. 이것은 영적인 폭음이자 폭식이다,

P140 누군가를 속이고 훔칠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가난이 도둑질을 부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라크 사람들은 도둑질이 가난을 부른다고 말한다.


P140 그대의 사적인 가계부를 눈여겨보면 그대의 인생철학을 알게 된다. 그대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베푸는 상대는 누구인가? 그대가 사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가 베풀지 않는 상대는 누구인가?

>> 나의 개인적인 용돈에 대한 사용내역을 꼼꼼이 적어봐야겠다. 가계부에서 내 인격이 드러나는건가..? ....


8. 발언의 법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 탈출 20,16

P147 말은 신을 닮은 까닭에 신성하다. 말이 우리네 세상을 창조한다. 말은 새 생명을 낳기도 하고 데려가기도 한다.

P147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을 만드는 일이다. 누구 또는 어떤 것을 두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물론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짓이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이 있는 대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이름 붙임으로써 그분을 모독하는 짓이기도 하다. 이것은 인간 공동체가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함께 키워 가야 하는 신뢰성을 훼손한다. 이것은 상호 관계를 좀먹는다. 그리고 자아의 신빙성을 파괴한다.


P150 원칙은 분명하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서 부당하게 이익을 보는 것이 없다면 그 거짓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는다. 우리는 사적인 일들은 사적인 것으로 지켜 줄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 노출시키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생활에 대한 욕구가 우리의 발언을 부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친절을 베풀려는 의도가 우리의 발언을 진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 친구가 즐겨 하던 바로 이 말처럼 말이다. “명확히 진실이 아니라고 해서 명확히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자주 느끼는 것은 전혀 새로운 해석에 대한 충격에 가까운 느낌들이다. 지금까지 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는데,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혼의 해가 되지 않는 친절을 베푸는 의도에서는 즉. 거짓말을 하면서 부당하게 이익을 보는 것이 없다면, 거짓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적인 해석인지.

결국 이것은 그 의도의 원칙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율법과 사랑이 충돌할 때는 사랑이 이긴다는 것.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놀라웠다. 십계명을 풀어주는 책에서 이런 해석을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도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앞으로 하얀 거짓말을 애용하자는 뜻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이런 구차한 부연 설명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 조안 수녀님께는 무례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것을 마치 특별한것처럼 말을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조안 수녀님의 폭넓고 깊은 해석 속에 점점 매료되어가고 있는 나를 느낀다...


P150 하지만 누군가가 거짓말로 부당하게 이득을 얻게 되면 그럴 때는 우리가 창조계를 욕되게 하고 우리 자신을 더럽힌 셈이 된다.


P151 거짓말은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존재와 직결되는 것, 곧 그들의 명성, 그들의 분별력, 그들의 삶의 질을 앗아 간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것은, 거짓말이 그것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에게서도 그런 것들을 앗아 간다는 사실이다.


P154 어떤 상황에서든, 거짓말은 한 사람은 진실을 고백하는 편이 낫다. 그러면 거짓말에 당한 사람이 보다 빨리 용서하면서, 미래가 한결 확실해진다.

>> 이것은 내가 지난 날 살아오면서 느끼고 배운 진리 중의 하나다. 내겐 거짓말을 했다는 경험 보다는 내가 무언가 실수를 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기억이 몇 있다. 그럴때 내가 느낀 고통은 찝찝함. 내가 가장 싫어하는 느낌 중의 하나가 바로 찝찝함이다. 마음의 평화를 훔쳐가는 바로 그 느낌. 그러기에 내가 배운 것은 상황 수숩을 빨리하고, 가장 빠르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실수를 조금이라도 빨리 인정하고 사과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이미 어린 시절을 깨우쳤다.

내가 애리와 리예에게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것. 거짓말을 했거나, 설사 어떤 실수를 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처법임을..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큰 헤택을 받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임을....


P156진실은 수술처럼 아픔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치유력을 지닌다.”


P157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최고의 기억력을 지닌 사람이다. 거짓말을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는데, 진실은 다 하나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치 핞다. 이것은 모든 모든 재주 중에 가장 쉬운 재주이다. 새뮤얼 버틀러는 이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바보나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거짓말을 잘하려면 상당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결국 어느 누구도 그렇듯 줄곧 빈틈없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 절대 공감~!!


P158 만일 나 자신이 정직하지 못하다면, 내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삶 속에서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P158 보답을 받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어떤 보답도 필요치 않는 것이 진실이다. 진실은 그 자체가 나름의 보답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추억도, 그럴듯한 어떤 설명도, 함께 모의하는 어떤 공모자도 필요치 않고, 드러날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9. 자제의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된다.” – 탈출 20,17P162

P162 탐냄은 굴레 풀린 욕망이라는 정신적 질병이다. 이는 한껏 만족하고자 하는, 그러고 나서도 더 갖고자 하는 결핍이다.

P165 제어할 능력이 결여되는 것이 죄가 된다. 이성과 의지가 이유 없는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죄이다.

P166 하지만 아홉 번째 계명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조금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손아귀에 넣고 우리의 마음을 욕구로 날뛰게 만드는 욕망과 축적이라는 야수들을 먹여 키울 필요가 없다. 아홉 번째 계명의 힘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몸을 더럽힐 뿐 아니라 영혼을 비뚤어지게 만들기도 하는 음욕에 무릎을 꿇지 않도록 미리 막아 준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욕을 알아보았노라고 고백했던 지미 카터는 이를 거부할 줄도 알고 있었다.

P170 우리가 자기 자신만큼 다른 사람의 선한 이익을 위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 사람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든 성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이용할 때, 그것은 음욕이다. 성이 개입되는지 여부는 상관없다. (...)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바랄 때, 우리는 결국 우리가 소유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소유물로 만드는 어떤 것을 바라는 셈이 된다.

P170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행위는 서서히 시작되어 횟수가 계속되면서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는 습관으로 굳어 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가지도 비인간화한다.

P170 음욕은 사실 성이 아닌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음욕은 쾌락이 아닌 권력과 연관되어 있다. 음욕은 사랑이 아닌 지배와 연관되어 있다.

P171 자유로이 오가고 스스로 완전해지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

 

10. 확신의 법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 탈출 10.17

P177 그리스도교에서는 십계명이 담고 있는 의미를 발전시켜 온 신비 전승이 존재한다. 신비가들은, 만일 그대가 하느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버린다면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축재와 소유를 초월할 때, 십계명 전체가 가리키고 있는 유일하신 분이 그대를 붙들고 끌어안으시리라는 것이다.

P178 특정한 사물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여지를 만들어 내는 초탈은 사물들을 박탈당하는 상실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가치 있는 삶 속에 내재하는 전부를 소유하는 비움이다.

P182 인간의 영혼을 깨물고 윽박지르고 질식시키는 탐욕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항구적인 불만족이라는 영적 질병에 걸려들 운명에 놓여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P185 지금의 문화에서 충분함이라는 감각은 정신 이상의 표지가 된다. ‘더 많음에 대한 욕구가 정상으로 간주된다. 늘 거머쥐고, 늘 욕심을 부리며, 늘 자기 불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측은한 노릇이다.

P185 탐욕을 치유하자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충분하게 사랑하여 그것만 있으면 다른 무엇이 없어도 혼연하게 지낼 줄 알아야 한다. 만일 탐욕에 기우는 성향을 없애려 한다면, 무엇을 새로 살 때 이전의 것을 새것과 함께 계속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이전의 것은 양보하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을 그냥 쌓아 두곤 한다면 조심하라.

P187정욕만 한 불길이 없고, 증오만 한 고리대금업자가 없고, 어리석음만 한 올가미가 없고, 탐욕만 한 급류가 없다.” 탐욕은 다른 이들을 거스르는 죄이지만, 그것이 탐욕에서 유일하게 악한 점은 아니다. 탐욕은 자기 파괴적이다. 탐욕은 그토록 측은하게 만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으로 즐기는 법을 배우는 대신, 시기로 우리 자신을 고갈시킨다.

P187 한 달 동안 날마나 한 가지 물건을 내주어라. 이는 영혼이 한결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이른바 영혼에 기름 치기이다.

 

11. 첫번째 사랑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마태 22,37

P190 사랑에 관한 논설이 십계명 자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두 가지 큰 게명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게명에다 계명을 덧붙이고 있는가? 십게명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대답은 일허다. 우리는 이 계명들이 계명 그 이상의 것을 다루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 계명들이 제한 규정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계명들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이 계명들은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그 사랑이 결코 사그라져서는 안 된다는 애정 어린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

P193 그런가 하면 실질적인 진술이 어떻든 간에, 성서에서는 징벌, 도둑질, 종살이는 물론 심지어 에배와도 관련되는 법규들이 해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바뀌었다. 이 같은 역사에서 도출되는 함의는 중요하다. 법은 성장한다. 법은 변한다. 아니,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상장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바꾸어 가고 있다. 우리는 삶과 상호 관게와 인간 공동체와 정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

P194 우리가 율법을 고정되고 경직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가르칠 때 율법은 파괴되며, 사랑을 강요할 때 그것은 시들어 버린다는 말이다. 율법의 기능은, 질서와 정의의 옹호는, 보살핌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생명과 나누는 연애와 관련되어 있다. 주위 환경에 맞추어 변화할 줄 모르는 법은 우리에게 법률도 질서도 확보해 주지 못한다. 무슨 영향이 있다면,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법들은 무엇보다 우선 사랑을 파괴한다. 우리가 각각의 계명으로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행실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명이 지니고 있는 의중이다.

P196 우리가 어떤 계명을 지키면서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망각하면 그 계명을 전혀 지키지 않는 것이나 같다. 그것은 그저 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실로 천박한 일이다.

P196 네 정신을 다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해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그에 대한 해설일 뿐이다.”

P197 계명들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척도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계명들은 우리의 사랑에 실체를 부여할 뿐이다. 게명들은 우리의 사랑에 토대를 제공할 뿐이다.

P198 시인 T. S. 엘리엇은 말했다. “가장 고약한 반역은 그릇된 이유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다.”

P199 참된 하느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 영혼에 방향을 알려 주며, 전진적인 창조의 활력을 쏟아 낼 통로를 제공한다.

P199 하느님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것은 우리를 우주 전체와 연결시켜 준다. 이것은 우리를 작고 연약한 자아 저 위로 들어 올려 우주의 심장 박동에 부분적으로 합퓨하게 만든다. 이것은 삶에 의미와 빛을 부여한다.

P200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기억이 존재한다. “우리는 영적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인간들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영적 존재들이다.” 재클린 스몰이 한 말이다.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기억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위해 주의를 이성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이 아니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유일한 희망이다.

P200 우리가 영혼을 다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지상의 그 무엇도 우리의 정신을 파괴하거나 우리가 가는 길을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 “나의 날을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관장하신다는 사실을 깅거하면 도움이 된다.”는 찰스 스윈돌의 말처럼.

P201 인생의 목표가 하느님을 길들여 그렇게 해 주시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느님 안에 녹아드는 것임을 내게 일깨워주는 것은, 모조리 탄생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리듬 속에 깃들어 있다. 나는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동일한 모습으로 떠나가게 된다. 인성이 지니는 이 같은 양극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모든 발걸음의 목적이 그저 나를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데려다 주는 데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12. 두번째 사랑의 법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 22,39

P210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두려워하는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 안에서 찾아낸다. 두 번째 사랑의 법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되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두려워하거나 평가 절하하고 있는 그 무엇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210 두 번째 사랑의 법은 우리 모두를 향한 일종의 경고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겁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를 다른 사람들 안에서 찿아내어 배척하리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온갖 약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상대방도 받아주시리라고 믿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을 참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에서 배척하고 있는 것을 진실로 사랑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의 약점들과 결함들, 열등하고 취약하고 ㅎ=왜소한 면면들, 모자람들을 인정하면서 자기글 받아들일 때라야 우리는 상대방에게 진실로 팔을 벌릴 수가 있다.

P211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이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한게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몸부림치는 그들을, 부족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호되게 꾸짖고, 비웃는 짓을 중단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P212 모든 사랑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느끼는 대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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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icamus Domino....

소름끼치는 전율의 감동을 안겨주는...

은혜로운 성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 중의 하나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곡...

그래서 벅찬 가슴에 눈물 그렁대게 하는 곡....

오늘의 곡으로 골랐다... 




Benedicamus Domino
  
Benedicamus Domino! 
Deo Gratias
Benedicamus Domino! 
Deo Gratias


생명이 움트는 새벽 소리에 
우리는 눈을 뜨며
오직 감사의 맘으로 
또 하루의 첫 순간을 
주님께 모두 드리네
해 맑게 떠오른 아침 햇살처럼 
주님께 향한 사랑
깨끗한 마음으로 
또 하루의 큰 사랑에 
감사와 찬양 드리네
주님 찬양해 
주께 감사해
영원한 주님의 숨결이 
나의 영혼을 깨우시기에
새로운 생명으로 
내 영혼을 깨우시기에
또 하루의 은총에 영광과 찬미를 
새 생명의 은총에 감사를 알렐루야
Benedicamus Domino! 
Deo Gratias
Benedicamus Domino! 
Deo Grat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