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서에 책에 대한 느낌을 다 쏟아부어..
이번 ‘할아버지의 기도’에 대한 리뷰는 초서로 대신합니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할아버지의 기도’를 읽고...
‘할아버지의 기도’를 읽다가…
P4 ‘행복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원문은 ‘마카리우스’로 신들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신이 누리는 기쁨이라는 의미와 신이 누리는 기쁨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축복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 그야말로 ‘지겹게(?)’ 들었던 행복하여라. 성경말씀.. 이 ‘행복하여라’ 원문으로는 마카리우스라는 단어로 ‘신들의 기쁨’이라는 뜻이라는 말은 내게 알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신들의 기쁨을 우리 인간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으셨던 하느님의 사랑. 당신의 축복. 내 생전 그 분의 뜻을 다 알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하지만, 이렇게 간간히 그 분의 깊고도 깊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그 분의 사랑을 느낄 때면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오는 기운, 감동을 느끼며 이 순간만큼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당신. 사.랑.합.니.다.
P5 ‘레치얌’은 히브리말로 ‘삶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뿐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때론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삶일지라도, 삶은 여전히 거룩하고 서로 축복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 “레치암~ 레치암~” 속으로 가만히 외쳐보았다. ‘삶을 위하여~ 나의 삶을 위하여~ 그대의 삶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위하여~!! 레치암~ 레치암~” 목에 차오르는 눈물 그렁대게 하는 이 알 수 없는 감동. “레치암~”
행복한 삶이던, 고통이 함께 하는 삶이던 삶 자체가 축복이라는 말씀. 다시 한번 “레.치.암~!!”
P7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눈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만 보고 싶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눈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눈 없이 햇빛을 본다면 눈부심보다 먼저 따뜻함을 느낄 것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움보다 먼저 향기를 느낄 것이고, 얼굴을 보면 인상보다 먼저 마음을 느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P9 “’약속된 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굶주림이나 두려움에서 빠져나와 누리는 자유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차별이나 불의로부터의 해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것이리라. 바로 내면 안에 있는 선을 따라 살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능력이다.
>> 나도 그렇게 나의 내면 안에 있는 선을 따라 살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은 것이다.
P17 “할아버지, 그럼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게 물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말씀하셨다. “네쉬매레야,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 이것이 내가 배운 섬김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이다. 물론 그때는 너무 어린 탓에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섬김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섬김이나 봉사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축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진심으로 생명을 축복할 수 있어야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 그래 그런거였어. ‘성실함’이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마치 공기처럼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기에 그 소중한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리예가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6살때였나..? 학교에서 씨앗을 주고 솜에 물을 적신 곳에 씨앗을 넣어놓고 매일 물을 주며 그 씨앗의 변화를 조사해 가는 숙제였는데, 어쩐 일인지 친구들 씨앗은 선생님이 알려준 기간 안에 싹을 티웠는데, 자기 싹은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나도 나오질 않자 왜그러는지 걱정되어 물어보는 리예에게 내 대답은 참으로 건조했다. “매일 물 줬어..? 안줬지..?” 다구치듯 묻는 내 대답에 열심히 주었다는 소리에 “조금만 기다려봐 조금 늦을 수도 있어..” 내가 레이첼 할아버지의 지혜를 가진 엄마였다면, 나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모든 생명이 같은 시각에 똑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혜는 없고 마치 리예가 당연한 것을 모르는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해주었던 기억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것, 해야하는 것에는 끈기있게 기다릴 줄 아는 리예.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난 후 기쁨에 찬 목소리로 자기 씨앗도 싹을 내었다며 보여주는 것 아닌가..? 엄마가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음에도 기쁨을 함께 나눠주는 리예를 보며 고맙기도 했고, 참 못난 에미다 싶기도 했다. 암튼. 앞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좀 더 지혜로운 엄마가 되야지 싶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지혜는 왜 꼭 지난 다음에 깨달아지는지..-_-;;
P18 카발라에 의하면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거룩한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꽃으로 나뉘어 우주에 흩어졌다고 한다. 모든 사람, 모든 존재 안에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의 불꽃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의 현존을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 카발라는 우주 안에 숨어 있는 거룩한 존재가 매순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고 가르친다. 세상이 우리의 귀에 속삭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신의 불꽃이 우리 마음에 속삭인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듣는지 가르쳐주셨다.
>>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스런 이야기인지. 수 없이 많은 불꽃으로 나뉘에 우주에 흩어진 거룩한 존재. 그 흩어진 불꽃은 모든 사람, 모든 존재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의 불꽃으로 심어졌던 것. 온 우주는 신의 불꽃으로 가득하고, 그 거룩한 존재는 우리에게 매순간 말을 건네고 있다. 우리 귀에 속삭이고 있는 그 신비한 거룩한 존재의 소리를 우리는 매일같이 듣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귀를 열고 듣는지 안듣는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 얼마나 아름답고도 신비스런 이야긴지. 마치 아바타에서 나온 그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숲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P18 거룩한 존재와 예기치 안은 만남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축복을 빌어주는 일이다. 세상 안에는 거룩함을 일깨우는 축복들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순간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 인사하고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 오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축복을 통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거룩함은 깨워지고,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 인사하고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축복’이란 단어를 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10가지 단어에도 ‘축복’이란 단어가 들어있다. 나는 축복을 해주는 것도 좋아하고 축복 받는 것도 좋아한다.
매일 밤 애리와 리예에게 ‘축복기도’를 드려주는 것은 나의 하루 일상을 마감하는 의식이다. 네쉬메레가 그랬던 것처럼,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도 아이들에게 기도를 안 해준 것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이미 잠들어버린 애리와 리예에게 기도를 해주고 돌아와 눕는다.
어쩌면 내가 애리와 리예에게 해주는 축복기도는 나의 이기적인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해볼 때 있다. 이 거친 세상에서 어떤 고통이나 유혹이 와도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잘 헤쳐나가주길 바라는 마음.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릴 줄 아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쁜 아이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 꿈과 비젼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삶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리는 행복을 맛보게 해달라는 기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눌줄 아는 사랑 많은 아이들로 자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 그랬다. 온갖 좋은 것은 그 기도 속에 다 들어있다. 가끔 기도가 넘 길다며 좀 짧게 안되냐고 투덜대기도 하는 아이들이지만, 잠을 자러 가기 전에 엄마에게 와서 머리를 들이미는 애리와 리예를 보면, 축복 기도는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이 되어버린 듯. 감사하기만 하다. 설사 그 축복기도가 엄마의 이기적인 기도라 할지라도.
가끔은 그 기도가 건성으로 되어질 때도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잠은 자고 싶은데 기도는 해줘야 하고. 하지만 그 축복의 기도는 나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아이들 머리 위에 얹은 나의 손을 통해 내려주시는 축복이기에 애리와 리예가 지금까지 반듯하게 이쁘게 자라준 것이 아닌가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한다는 핑계로 필요할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엄마 아빠. 그러기에 많은 부분을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던 애리 리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으로 세지않고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준 바로 그 분의 축복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당신. 감사합니다.
P19 외할아버지가 빌어주는 축복들은 모두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거룩함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 아멘~!!
P21 봉사나 섬김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
>> 나는 봉사나 섬김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섬김’이나 ‘봉사’는 행동으로 내가 하는 것을 제쳐두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 어떤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따뜻한 시선에서도, 한번의 따뜻한 포옹을 해주는 것도 섬김이라는 말은 내게 섬김과 봉사에 대한 개념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따뜻한 시선 한 번 던져 주는 것으로 섬겼다 생각하고, 따뜻한 포옹 한 번 해준 것으로 봉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거창하게 생각지 말고 작은 몸짓 하나에서도 우리는 섬김과 봉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뜻으로 와닿았기에 내게는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섬김과 봉사의 좀 더 섬세한 의미. 내겐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던 부분이다. 어제 성목요일 미사에서 옆에 앉아계셨던 근심 가득해 보이셨던 언니. 평소 친분이 있는 언니는 아니셨지만, 왠지 모르게 미사 때마다 자꾸만 내 눈에 들어오는 언니. 평화의 인사 때 마음으로 안아드렸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언니는 평화의 인사 후 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그저 단지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었다.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누군가가 여기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내 마음. 그 마음이 전해진 듯했다.
P22 인도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고개를 숙여 “나메스떼”라고 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 말은 ‘제가 그대 안에서 신의 불꽃을 보았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그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축복할 때 우리는 그들 안에 내재한 선의 불씨를 타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P22 “네쉬메레야. 그분이 사람들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할 몫이란다.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축복이 필요한단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 물을 먹은 새싹이 자라듯 우리의 삶 역시 성장하게 된다.
>>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그분이 사람들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 즉. 그가 그답게 자기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이란 것. 내가 누군가를 자기답게 살도록 도와줄 때 또 다른 누군가는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자기 자신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
문득,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삶을 살고 있고 나의 행동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전율 속에 깨닫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책.
P23 축복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축복은 만남의 순간이다. 함께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우친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아무런 가식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다. 이 순간 상대방에 대한 불신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얻는다. 우리는 축복을 통해 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깊이 성찰할 수 있다.
>> 자기답게 사는 것. 자기다움을 잃지 않게 사는 것. 우리는 그것을 와우답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된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축복’. 축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P23 삶을 축복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가 깊은 유대 속에서 힘을 얻는다. 권태와 공허뿐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외로움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 우리가 서로 삶을 축복해줄 때 더욱더 친밀해지고 그 속에서 잊어버렸던 나 자신을 찾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축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삶이 중요하고 자신에게 축복받을 만한 어떤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때 내게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난다.
P23 우리가 타인을 위해 봉사하거나 섬겨서 그들의 나약함을 채워주고 고장난 부분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우리 안에 있는 존재 그 자체다. 돕거나 고쳐주거나 구해주는 것과 섬김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이다.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는 여러 거지 방법이 있다. 우정을 통해, 또는 좋은 부모가 되어주거나 일을 통해서도 섬길 수 있다. 친절과 연민, 관대함과 수용을 통해서도 섬길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섬기든지 우리의 섬김은 그 자체로 우리를 축복한다.
P24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면서 축복을 보낼 때 세상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카발라는 공동체로서의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티쿤 울람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유지하고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P26 고도의 기술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자신 안의 선함을 잊고 기술이나 전문직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문 기술이 아니다. 미래는 전문적인 기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얼마나 충실한가. 그리고 그 삶을 얼마나 축복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 전문적인 기술 물론 중요하지만, 영혼이 상실된 테크닉적인 삶이 아닌, 우리가 삶에 얼마나 충실한가. 그리고 그 삶을 얼마나 축복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말은 요즘 삶과 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P26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 불신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축복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P30 우리들 대부분은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축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축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특벽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삶을 잡다한 것들로 채우고 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것뿐이다.
P32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한 것이며 존재하는 자체가 바로 축복이라고 했다. 부버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인생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우리를 축복이 주어질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우리가 축복을 과거라는 냉동고 속에 집어넣고 꽁꽁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축복을 지나쳐 보내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는 축복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공허함만 맛보는 것이다.
P32 우리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누군가를 축복해줄 수 있다. 삶의 축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다 나은 사람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삶을 어떻게 즐기는가 배우는 것이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간혹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면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삶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눈을 키워 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알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겸손. 결국 우리는 겸손 할 때만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내가 가진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장 겸손해지는 우리. 하긴 ‘겸손’ 없이 어떻게 나의 보고싶지 않은 모습,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안의 양면성을 받아들이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안에 양면성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만큼 그것이 드러날 필요가 없었던 심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게다. 물론 내가 마냥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쫀쫀하고 치사한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너무나도 아픈 고통을 값으로 치뤄내야했던 기억. 받아들이고 나니 자유로워짐을 그렇게 죽어도 그건 내모습이 아니라며 용납할 수 없다고 부들부들 떨던 나. 결국 그렇게부인하며 도망치던 것은 나에게 우울증과 갑상선이라는 병만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처럼 고통은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한다. 나는 그로 인해 많이 성숙해졌고 많이 풍성해졌다. 나와 함께하는 주위사람들에게 좀 더 편한 아줌마가 되었다고나 할까..
P38 진정으로 생명을 축복하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축복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축복이 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래리는 깨닫지 못했다.
>> 파커 팔머가 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나누어줄 수 없다. 그것은 곧 고갈이 되어 우리는 진이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게 되면 끝없이 샘솟는 옹달샘처럼 우리의 그것은 고갈되지 않게 계속 샘솟게 되는 것이다.
축복 역시 먼저 나의 자신의 삶이 축복으로 채워야 한다. 행복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우리가 갖고 누리고 있는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당연한 이치다.
P39 차를 다 마시면 외할아버지는 촛대를 두 개 식탁에 올려놓고 거기에 불을 붙이셨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짧은 기도를 하셨다. 때로는 큰 소리로 기도하실 때도 있었고 눈을 감으신 채 고요히 묵상에 잠기기도 하셧다. 그때 나는 외할아버지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주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 촛불을 키고 기도를 하시며 묵상에 잠기시는 할아버지. 그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꼬마 레이철.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지. 이런 할아버지를 가진 레이첼은 바로 축복받은 아이가 아니었나. 누구나 이런 삶의 이치를 꼬마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할아버지를 다 가진 건 아니니까..
어린 레이철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을게다.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는. 그러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후 책 속에 그 그림이 그대로 그려질 수 있었던게 아닌가..
P41 누구도 부르지 않는 ‘네쉬메레’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것은 ‘사랑스러운 작은 영혼’이라는 뜻이었다.
>> 네쉬메레.. 사랑스러운 작은 영혼.. 리틀 트리가 떠올랐다.
P41 우리가 누군가에게 한 번 축복을 받았다면 그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 축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한 번 받은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
얼마 전 성경 공부 시간에 이윤제 베드로 주임 신부님께서 들어오셔서 ‘강복’에 대해 해주신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결코 취소될 수 없고, 이루어질수 밖에 없는 축복’이라고 하셨던 말씀.
한 번 받은 그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우리는 그냥 축복도 아니고 취소될 수 없는, 결코 이뤄질 수 밖에 없는 축복을 미사 때마다 받고 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인지...
미사를 좀 더 자주 참여하면 그만큼 강복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신앙심 깊은 분들이 행복한 삶을 사시는 이유를 알겠더랬다. (물론 내가 말하는 ‘행복’은 경제적인 넉넉함을 말하는게 아니다.) 매일 미사 참여 속에 매일같이 취소될 수 없는 이뤄질 수 밖에 없는 축복을 그렇게 매일 받고 계시니 어찌 그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시 진리란 씸플한 것이다.
P42 “레이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렸단다. 단지 그것을 소리내어 할 만큼 지혜롭지 못했고 용기가 없었지.”
>> 표현하지 못한 엄마의 마음...
P43 매우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삶과 첫 대면하는 순간을 만난다. 그 순간 삶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성찰하게 된다. 상처를 입은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한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다.
>> 그래. 우리는 지난 날 경험으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슴으로 알고 있다. 그 고통을 통해 삶이 내게 해주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제서야 듣게 되고, 삶의 말을 알아듣는 지혜를 가지게 되고 그와 함께 내가 얼마나 강한 영혼을 지녔는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친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게 되는 성장의 통로가 되어주는 축복의 통로임을 우리는 잘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레이첼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와닿는게다.
P50 내 생각에 세 개의 초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몸을 나타내는 것 같구나. 그리고 촛불을 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단다.”
>> 영혼, 축복, 은총. 이 모두 너무나도 아름다운 단어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
그 단어 리스트에 우리의 영혼을 밝혀주는 ‘촛불’도 집어넣어야 할 것 같다..
P51 “안식일이 끝나도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 안식일이 아름답고 거룩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도 아름답고 거룩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주기 위해서란다.” (…)
“이 세상은 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도 해야 하지만 삶을 즐기기를 원하셨단다. 춤추고 먹고 마시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겪는 체험 안에 모든 즐거움이 있단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서로의 몸을 통해 나누는 특별한 즐거움도 있단다.”
P56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한 지혜를 지녔단다. 그들 모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사는 길인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지.”
>> 행여 레이첼이 겸손하지 못한, 나만 잘난 줄 아는 자만심 가득한 아이로 자라는 것을 레이첼의 어머니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레이첼을 이해시켜 주셨다. 레이첼의 높은 지능 점수가 보잘 것 없는 거란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것이 다가 아닌, 다른 이들이 가진 고유하고 특별한 지혜를 알려주면서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어머니. 그 할아버지의 그 딸.. 참으로 지혜로운 어머니시다.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애리와 리예가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와 자랑하면, 좋아라 하며 마치 애리와 리예가 최고인양 같이 좋아하고 칭찬하는 것에서 끝나던 내 모습. 살짝 부끄러워졌다.
P59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기대나 지나간 과거 경험이나 이름표나 가면들에 의해 쓸데없는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쉽게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내리거나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놀랄 준비를 하면서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삶에 대해 단정이나 판단을 내리지 않고 삶 자체를 껴안을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문득 삶에 대한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P60 부처의 씨앗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닌 지혜를 발견하는 능력이리라. 지혜는 우리가 얻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지혜란 우리 자신이 점차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P61 단단한 도토리 한 알이 흙에 심겨 상수리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한 알의 도토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도토리는 상수리나무로 자란다는 그 가능성에 의해 도토리로서의 존재 가치를 지닌다. 상수리나무가 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힘이 없다면 도토리는 다만 작고 볼품 없는 죽은 알갱이에 불과할 것이다.
>> 도토리는 그저 다람쥐가 좋아하는 그것인 줄 알았지, 도토리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내고서 상수리 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내게 참으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도토리가 그 큰 상수리 나무가 된다니. 정말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오호통재라 나의 무쉭함이여~!! -_-;;)
P61 우리의 본질은 우리 안에 심긴 부처의 씨앗, 즉 지혜를 성장시키고 지혜로 나아갈 가능성으로 인해 존재 가치를 가진다. 우리 중 누구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도토리 씨앗은 땅에 심겨 그 자신의 본질을 펼쳐나가기를 갈망한다. 상수리나무가 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이용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는 보다 완전한 인간성과 지혜로 나아가려는 바람이 있다.
>> 그렇다. 우리 중 누구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는 보다 완전한 인간성과 지혜의 씨앗이 심어져 있는게다.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 속엔 축복이 함께 하고, 그 축복은 영원으로 이어지며, 우리와 함께 하는 이들에게 축복을 나눠주는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좀 더 온전한 내가 되며, 삶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림이다.
P65 하느님의 영은 관념이 아닌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무신다는 진리를 이해하신 것이다. (…)
우리 개개인은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게 된다. 영혼을 향한 과정은 우리를 관념이나 허상에서 자유롭게 하고 참 지혜로 나아가게 하는 투쟁의 길이다. 우리 모두는 지혜로 나아가고 더욱더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노정에 있다. 이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무조건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다다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비틀거리고 때로는 어둠 속을 헤매면서 우리는 삶에서 주어진 모든 상황과 여건들 앞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야 하며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지녀야 하며 주의를 집중해야만 한다.
>> 참으로 쉽지 않다. 영혼을 향한 과정이 우리가 잡혀있는 허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닌게다. 우리는 충실된 성실함으로 꾸준히 인내 속에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음을 삶을 살수록 알겠다는 것이 참으로 슬픈(?) 진실인게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삶의 양면성. 우리는 성장을 원하지만 그 성장은 고통 속에 이뤄지며, 신앙인인 우리는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그 구원은 죄를 통해서 이루어짐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양면성이다.
P76 그때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축하의 방식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끄는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도 외할아버지와 하는 건배를 더 좋아했다.
>> 어린 아기들이 촛불을 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 전 우리 대자 부부의 애기 생일 파티를 갔는데, 고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좋아라 하는지. 박수를 치며 좋아라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더랬다. 어린이 레이첼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든 듯.. 그러나 할아버지와의 건배가 얼마나 좋았으면, 생일 축하 예식보다 더 좋았던걸까..^^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할아버지가 잔에 와인을 따르는 것을 바라보는 레이첼. 촛불을 켜는 할아버지. 레이첼과 건배를 하는 할아버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내 입가엔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
P78 “레치얌은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서로 축하하는 게 마땅하다는 의미란다.” (…)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포도주 향의 달콤함을 맛볼 때면 우리의 삶이 그 자체로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단다.
P78 유대인들의 삶의 역사는 무척이나 굴곡이 진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늘 ‘레치얌’을 외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어쩌면 진정으로 상실과 고통을 체험한 사람만이 삶의 소중함과 경이를 깨닫고 ‘레치얌’을 외칠 수 있는지도 모른다.
P84 너무나 엄청난 상실을 체험할 때 우리는 다시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실컷 울어야 한다. 진정으로 슬픔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고통은 항상 우리 자신과 미래의 삶에 미진한 채로 남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깊은 슬픔을 털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두면 뒤돌아본 대가를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과거라는 소금 기둥 안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된다.
깊이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잊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진정으로 슬픔을 표현했을 때 우리는 치유받는다. 또한 고통이 아닌 사라으이 마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과정이다. 이미 사라진 것들을 더 이상 끌어안으려 하지 않고 하나씩 놓아 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들을 위한 참된 슬픔이다.
>> 진정으로 슬픔을 표현했을 때 우리는 치유받는다. 또한 고통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삶의 과정이다. 이미 사라진 것들을 더 이상 끌어안으려 하지 않고 하나씩 놓아 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들을 위한 참된 슬픔이다. 라는 말은 내게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하나씩 놓아 보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들을 위한 참된 슬픔.. 그래.. 놓아 보내야지...
우리가 놓아 보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가버렸기 때문이 아닌 바로 나 스스로가 그들을 놓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P92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우리는 기적 사이로 소리 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눈을 보게 해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지혜로 채워주십시오. 번개가 번쩍 빛나는 순간처럼 당신의 현존이 우리가 걷고 있는 어둠을 비추시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바라보는 어느 곳에서나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가 타오르고 있음을 보게 해주십시오. 당신 손으로 손수 지으신 진흙인 우리가 거기서 거룩함을 알아보고 외치게 해주십시오. 이곳이 바로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임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나이다.
>> 아름다운 기도문이라 적어봤다. ‘이곳이 바로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임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나이다.. 레이첼의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구절.. 몇 번을 나도 속으로 되뇌어 봤다… 이곳이 바로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곳임에도 우리가 알지 못했나이다…………
P97 마지막으로 가장 순수하게 남에게 베푸는 차원은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코트를 주지만 누가 주었는지 모르게 주고 그 코트를 받은 사람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자선을 베풀었다는 사실도 잊는 것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가슴에 깊이 담았습니다. 진정한 베품의 의미를...
P98 “그렇단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선을 베푸는 것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단다.” (…) 외할아버지의 말에 다르면 비록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지 않은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낫다. 삶을 축복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 잘못된 방법이라고 해도 축복하는 것이 좋다.
>>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선을 행한 의도가 어찌되었든 그 행해진 선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지고 삶의 따뜻함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언젠가 이경렬 베드로 신부님께서 강론시간에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바로 베품에 대한 말씀이셨는데, 바로 같은 맥락이었다. 그 선을 행한 동기나 의도가 다소 불순했다 치더라도, 그 행위로 인한 결과가 선으로 이어지기에 베품은 그 동기보다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말씀. 물론 순수한 의미가 담겨있음 더 좋겠지만, 행함을 받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순수한 의미가 없기에 행해지지 않은 베품보다는, 순수한 의미는 아녔어도 행동으로 행해진 베품이 그들에게는 의미가 되어지는 것 아닐까..?
P110 단순히 누군가와 함께 머무를 때 가장 좋은 치유가 일어난다.
>> 그러게.. 낯선 사람과의 Free Hug로도 위로 받는 우리 아닌가..
P111 일단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삶을 축복받게 되면 거기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이 있다. 서로가 나눈 사랑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상대에게 영향을 주고 죽음 이후에 더욱 강렬해진다.
P115 “죽음은 이 세상 삶의 끝이기는 하지만 서로가 맺었던 관계의 끝은 아니다.”
P119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길이다.
P126 엑스 선생은 젊은 외과 의사들에게 환자의 심장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아무리 의과대학에서 감성을 무시하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들은 자신의 감성을 죽이고 생명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우리는 자신의 본성대로 삶에 임하게된다. 엑스 선생도, 레이첼 닥터도 바로 그렇게 영혼이 따뜻한 사람들이 아니었나. 그들은 생명이라는 것이 결코 맥박의 수치와 심장 박동의 수치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슴으로 알았단 분들이다. 그런것 보면 세상이 아직도 멸하지 않고 따뜻함 속에 굴러가는 것은 어디선가 하느님이 우리 가슴 안에 심어준 소명을 다하는 그들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P127 프루스트는 발견을 위한 항해는 미지의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일이라고 했다.
P127 엔젤스 애린이 그의 저서 <<네개의 다른 양식>>에서 말한 방법.
잠들기 전에 15분 정도 시간을 내 그날 하루를 성찰한다.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노트에 답을 적는다. 세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 나에게 놀라운 일이 있었는가?’
‘오늘 나에게 감동을 준 일이나 마음에 와 닿았던 일이 있었는가?
‘오늘 나에게 영감을 준 일이 있었는가?’
많은 것을 노트에 쓸 필요는 없다고 말해준다. 이 일은 하루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돕는다.
>> 나도 한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내 삶에 열정이 살아나지 않고, 자꾸만 가라앉는 듯한 느낌. 요쉬 닥터가 느끼는 그 느낌이 바로 내가 요즘 삶 안에서 느끼는 그 느낌이기에 이 방법은 참으로 귀에 솔깃했다. 내 삶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다. 길게 쓸 필요가 없다하니 쓸데없는 붙임설명은 떼놓고 한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당장부터..
P129 “요쉬 선생님, 당신은 아직도 옛날 방식 그대로 삶을 바라보고 있어요, 한번쯤 자신을 소설가나 신문 기자나 시인이라고 가정해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세요.”
>> 나도 요쉬 닥터과 같은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내 일상이 뭐 그리 갑자기 경이로워져서 놀라운 일이 눈에 뜨이고, 감동을 준 일, 영감을 준 일이 떠오르겠는가..? 그럴 것 같았으면 레이첼을 찾아가지도 않았을게다. 하지만, 레이첼이 가르쳐준 방법은 참 재밌을 것 같았다. 기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삶. 소설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의 삶. 시인..은 왠지 넘 감상적이어서 그닥 끌리지 않았다. 내게는 기자의 눈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P133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을 산다, 어떤 일을 다르게 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아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같은 일을 새로운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관점을 지닌다면 오랫동안 해왔던 일들 안에서 놀라운 축복을 발견하고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다. 육안으로 볼 수도 있고 이성의 정신으로 볼 수도 있으며 영감으로 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바라볼 때에만 삶이 지닌 깊은 의미와 축복을 발견하게 된다.
>> 그래.. 동의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너무나도 아무런 의미 없는 것처럼 식상하게 대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임에도. 남의 눈에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면 무엇하나.. 정작 우리 스스로는 그 삶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채 무의미하게 보낸다면 말이다. 씸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무언가 큰 일을 할 때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선 우리가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주로 내가 속한 곳에서가 아닌, 내가 속하지 않은 다른 거창한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니.
우리는 스스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을 산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래 내 삶은 의미 있는 삶인게지...
P135 누군가의 생명이 소중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은 그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이러한 것이 어떤 말이나 의식보다 더 큰 치유의 효과를 낳는다.
P144 어떤 것을 안전하고 바르게 보호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져야 하는 첫 번째 책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돌보고 보호할 생각이라면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어떤 것을 바꾸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른다.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고 실망을 느낄 수도 있으며 상실의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 당신이 시대를 앞서가려고 한다면 분명히 세상은 박수를 쳐주기보다는 비웃음을 보낼 것이다. 앞장선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다. 진정한 의미의 보호란 단순히 은신처를 찾아 도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해줄 참된 안식처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P148 우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록 고통의 상황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삶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연민을 가지고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고통의 상처에서 얻은 지혜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안식처를 찾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P149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바로 그것이 삶을 더 강하고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기도 한다. 상실과 위기가 오히려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를 꿋꿋이 넘어설 때 우리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난관에서 자유롭게 되고 성장을 체험하게 된다.
P152 병은 분명 여러 가지 면에서 잔인하고 우리를 외롭게 하고 활동에 제약을 주고 두렵게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강하다. 인내를 가지고 견디면 병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누구나 데이비드가 꾼 꿈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지슷한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삶이 우리에게 베푸는 축복이다.
P154 가면을 쓰고 있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데 왜 엄마는 몰랐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얼마나 귀엽고 예쁜 레이첼인지. 그러게 가면을 쓰고 있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데 왜 엄마는 몰랐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 어린이적 발상이 너무나오 이쁘고 귀여워 읽다가 웃음이 터졌다. 그 황당한 장면 속에 쩔쩔매는 엄마. 이해시키려 노력하지만 도저히 꼬마 레이첼을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
초서를 하면서 문뜩 ‘가면’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 자신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모르는 건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를 보는 다른 사람들인거지. 결국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종종 가면을 쓰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허감을 느끼고 우리의 영혼은 그 공허감 속에 방황을 하는 것.
그럼 요즘 나의 텅빈 듯한 마음은 나의 영혼이 느끼는 공허함 때문인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삶이 내게 주는 많은 질문들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나의 영혼은 방황 중인지도 모르겠다..
P156 의과 대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음을 버리는 것이 환자를 위해 더 좋은 의사가 되는 길이라고 교육받았다. 결국 나는 더 좋은 봉사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이 제대로 봉사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탈진시키고 냉소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외로움에 빠져 우울증에 걸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을 버리면 인간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 안에는 삶의 어떤 체험을 변화시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고 인생을 완성시켜나가려면 지식이나 전문성을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마음을 계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식만으로는 인간답게 살거나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쓴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한다.
P165 Clear - 그 낱말의 궁극적 의미는 ‘빛의 인도를 받아 온전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었다.
P177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져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침묵일 것이다. 드러내지 못한 비판과 불평으로 가득 찬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처가 되고 영혼의 쉼터가 되는 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침묵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침묵을 몹시 목말라한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보고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침묵은 위대한 힘이 있는 장소이며 치유의 장소다. 침묵은 하느님의 무릎이다.
진정한 성장은 우리 안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침묵 속에서 성장을 이루게 되면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험에서 구조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의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닐 수 있다.
>> 현대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침묵’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지.. 가끔씩 만남 속에 너무나도 많은 말을 하고 돌아온 날은 마치 내 영혼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감을 느낄때가 종종 있다. 그게 싫어서 말을 아끼고 싶다가도, 종종 분위기에 빠져 많은 쓸데없는 소리를 쏟아내고는 돌아서서 또 그 공허감에 끙끙거리곤 하는 나.
이렇게 겉으로 시끄러움 속에서 지내니 내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나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제 좀 조용하게, 차분하게,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 이런 공허감을 안고 살려고 하는 것인지…
P178 안식처나 영혼의 쉼터란 우리가 부닥친 삶에서 도망쳐 갈 도피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힘을 얻는 장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감사의 마음으로 삶을 헤쳐 자갈 힘을 얻는 장소를 찾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P181 죽음은 우리를 보다 온전하게 한다. 죽음의 순간 인간은 가장 중요한 가치를 비로소 깨우치며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찾는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상실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인간 관계의 근원적인 회복을 가져온다. 지난 몇 년 동안 죽음을 통한 아름다운 치유를 수없이 보아왔다. 죽음은 일종의 헌신이며 섬김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맞는 순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진실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문을 열어준다.
P182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의미는 체험을 승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의미는 영혼의 언어다.
P190 “‘쉐마’는 고통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삶은 가치있다는 의미란다.”
P191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은 이 삶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이다.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 때문에 영혼들은 때때로 인간이 되는 결정을 미루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기도 모르게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게 되어 그것을 발견하고는 힘들어하기도 한다.
P191 나는 출생 예정일보다 훨씬 앞당겨 태어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영혼은 아직 삶을 택할 준비가 안 되었을 것이고 많이 놀랐을거라고 설명하셨다, 나의 영혼은 내가 인큐베이터에 머무는 동안 내 속에 머물러야 할지 떠나야 할지 망설였다. 그 후에 세상에 나와서도 내 영혼은 작은 새처럼 두려워했고 조심했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내 영혼이 의지할 수 있는 말을 해주기 위해 내가 말도 배우기 훨씬 전에 ‘쉐마’를 가르쳤다고 말씀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내 영혼이 그것을 발견하면 힘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P192 스트레스란 단순히 시간에 쫓기거나 일이 많거나 하는 문제라기보다 내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스트레스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 같은 생각이다. 스트레스는 단지 일이 많거나 바쁘거나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님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시간에 쫓겨도 그것을 스트레스로 느끼지 않고 즐겁게, 심지어는 충만감까지 느끼며 보낸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란 그것과는 무관하게 레이첼의 표현대로 내면의 문제인 것 같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 성실하게 그것을 해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는 겉으로 드러나는 가면 속에 숨어 있을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P193 우리 각자는 그와 같은 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라고도 부른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오직 깜깜한 암측 속에서만 자신의 별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별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우리는 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영혼이란다.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지 읽는 순간 눈물이 그렁 맺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오직 깜깜한 암흑 속에서만 내 별을 제대로 보게 된다고...
밤에만 빛나는 별. 암흑 속에서야 우리의 영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우리네 삶. 이 얼마나 모순적인 아름다움인지…
P194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은 윗사람이 못살게 굴거나 아이가 말썽을 부리고 연인과의 관계가 깨지는 데 있지 않다. 영혼의 감각을 잃는 데에 있다. (…) 스트레스는 우리가 영적인 본성을 거스르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인식을 지닐때에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혼임을 깨달아야 한다.
>> 우리가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혼...인거구나...
P194 우리를 일깨우고 영혼의 감각을 깊게 해주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기도, 묵상, 성가 부르기, 요가, 단식, 선 등등, 그런데 많은 놀라운 일들 중 하나가 상실의 체험이다.
>> 과연 나는 ‘상실’의 체험을 하면서까지 영혼의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P195 웃으며 우리가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힘은 다르다고 말했다.
P195 영혼은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다. 꿈과 음악, 예술, 그리고 부모가 되는 체험을 통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를 일깨워준다.
P198 어떤 것을 아는 데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때로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섬광이 번쩍거리듯 단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부엌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다. 아마 우리 모두는 진실한 자아를 가리키는 내적인 나침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든 따라가지 않든 그것을 언제나 우리를 본향으로 향하는 바른 길을 가르쳐준다.
P209 근본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삶을 인간적으로 보고 삶이 당신을 어루만지도록 내어주는 자세다.
P210 극단적인 독립과 개인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냉소적으로 변하고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사람을 사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 잘 살기를 원한다면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은 우리를 어루만져야 한다. 섬김이야말로 세상을 치유하는 길이다.
P210 우리가 남을 돕는 데에는 진정한 섬김이 없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섬기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삶을 바라본다. 도움을 주는 것과 섬기는 것은 삶에 끼치는 영향도 다르다. 당신이 누군가를 도와준다면 그를 당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남을 돕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식하고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섬김이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 자신으로 섬긴다. 우리의 체험으로 섬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내 존재 자체로 섬기는 것을 체험했다. 나 자신을 당황하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나의 한 부분을 통해 부족함 없이 섬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안에 있는 통합된 존재로서의 내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섬김은 동등한 관계다.
섬길 때에야 나의 약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의 약함을 섬김을 위해 사용할 때 약함이 지닌 힘을 보고 이해하게 된다. 많은 경우에 나의 약함이나 결점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느끼게 하는 바탕이 된다. 나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셈이 된다. 우리의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외로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외로움을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잘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어렵게 배운 의학 지식 덕분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삶에 대한 어떤 것이 나를 겸손으로 이끌었다.
>> 돕는다는 것과 섬김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 분명한 차이를 알았다. 섬김의 뜻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나는 ‘섬김’이란 희생적인 봉사를 뜻하는 것인줄 알았다.
P212 내안에 있는 약함이 상대 안에 있는 약함과 만날 때 서로를 치유하고 강하게 만든다. 섬기게 되면 함께 나아가게 된다. 남을 도울 때에는 만족감을 찾게 되지만 섬김은 오직 감사의 체험만을 공유한다.
P212 ‘인간 잠재력 운동’ 창시자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그대가 지닌 것이 망치뿐이라면 그대에게는 모든 것이 못처럼 보일 것이다”라고 했다.
P212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고쳐주거나 바로잡아주려고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온전성이나 삶의 진수를 알아볼 수 없다. 고쳐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전문성에 의지한다. 우리가 섬길 때에만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온전성을 본다. 섬길 때 우리는 그것이 꽃피도록 함께해준다. 그때 그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안의 온전성을 보게 될 것이다.
P212 섬기는 사람은 모두 근원적으로 삶을 섬긴다. 섬기는 것은 우리의 관심과 시간과 삶을 투신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다. 섬김이나 봉사는 삶을 고치거나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통제하거나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섬길 때에만 우리는 살미 거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섬김은 의무보다는 관대함에 가깝다. 섬김은 우리 서로에게, 그리고 삶 자체와 연결시켜준다.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게 된다. 섬길 때에 당신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당신에게 힘을 주고 새롭게 하고 축복할 것이다.
P221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고통이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을 보여주고 나눌 수 있을 때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P222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 은총에 의해서 우리가 받은 상처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삶의 에너지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여러 번 이것을 경험했지만 전 과정은 여전히 신비스럽다. 신비로운 어떤 것이 우리를 치유의 도구가 되도록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P228 상처받은 두 사람의 삶 사이에 알 수 없는 어떤 주파수가 맞을 때 깊은 치유가 일어난다.
P229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그가 의미를 찿도록 격려해주는 것.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긍정해주는 것. 그가 중요한 사람임을 알게 해주는 것. 자기 판단이나 자학을 하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것 등이 삶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그의 삶을 축복해주는 것이다.
P230 다른 사람들을 위해 진정으로 함께 기뻐해줄 때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기쁨을 나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저는 늘 축하해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거기 있었어요. 그들의 행운이 저에게도 행운을 가져올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저는 마치 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온전하게 그들과 기쁨을 나누지요. 그렇게 하면 정말 저도 행복해져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바로 그때 그 일이 저에게도 일어나는 것이지요.”
P232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상호적이고,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된다.
P239 궁극적으로 천당과 지옥의 차이는 천당에는 서로를 축복할 줄 아는 사람들이, 지옥에는 서로를 축복하는 법을 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P244 나는 인생을 고치는 법을 배우려고 몇십 년의 세월을 애쓴 후에야 문득 인생이 고장이 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 모든 존재 안에는 더 큰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씨앗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갈 때 삶을 잘 섬길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P245 모든 삶 안에는 고유한 지혜가 담겨 있다.
P245 제대로 살려면 삶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삶은 어느 누구를 통해서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P245 삶에 완전히 통달한 스승은 없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삶에 대해 배워 나간다. 누구나 인생으로서 미완성이다. 그러나 아주 깊이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삶의 세밀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스승이 있다면 삶에 깊이 귀를 기울여 듣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스승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알아내야 한다. 스승을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스승이 가리켜 주는 길을 따라 우리 스스로 걸어감으로써 알아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듣는 비법을 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삶의 비법을 배울 수는 없다. 스스로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P246 삶을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지혜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246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전문적인 지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더 나은 기술을 계발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인간적인 새로운 어떤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전문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향해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 삶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P247 티베트 사람들은 더 잘 살 수 있는 지혜의 선물을 전수해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아마 이것은 적과 친구, 연인과 부모와 아이, 심지어는 개미와 독수리와 말 등 삶을 지닌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지닌다는 의미이리라.
P262 “적어도 이 한 마리에게는 차이가 있지.”
>> 가끔씩 우리는 무언가를 하면서 온 세상을 다 바꾸어야 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아주 은연 중에 말이다. 나의 작은 시도가 무슨 변화를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시작을 하다가도 그만두거나, 잘 하다가도 기운을 잃게 되기도 하고, 의미상실에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하나에게는, ‘그’하나에게 차이가 있는거라면,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우리는 전 인류를 다 사랑할 수는 없으나, 내 가족을 사랑할 수 있고, 내 친구,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세계를 바꿀수는 없으나 나를 비롯해 나와 함께 하는 누군가를 도울 수는 있다. 그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와 나에게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나와 그 누군가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는 우리의 삶인게다.
너무나도 거창하게, 꼭 한비야 언니처럼, 이태석 신부님처럼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말자.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에서 ‘나’부터 시도하자. 그리고 ‘너’로 넘어가자. 그래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그 작은 ‘우리’는 좀 더 많은 우리가 될 것이고 그렇게 점점 큰 원을 그리며 주위로 퍼져 나간다면 큰 세상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되는게 아니겠나..
에구.. 또 가슴이 벅차온다...
P262 그래요. 제가 하는 일이 세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제가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삶을 어루만지는 일인 것 같아요, 미숙아들을 어루만져줌으로써 적어도 그 한 아기에게만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 그래.. 우리가 어떤 사회에 공헌하는 좋은 일을 한다 하다라도 그것이 세상을 바꾸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럴 수도 없는 것이고, 단지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는 고통만일 수도 있는 삶이란 것에 작은 쉼표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다시 살아낼 힘을 얻도록 꿈을 꾸게 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한 사람에게는 차이를 주는 것 아니겠나. 적어도 다시 희망을 갖고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하는 것...
P263 섬김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한게에 부닥칠 때 우리는 마음을 다친다. 그 문제가 너무나 크게 느껴지고 우리가 하는 일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어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이 모여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 우리가 하는 일이 위대하거나 보잘것없거나 상관없이 우리는 한 번에 한 사람의 삶을 축복할 수 있다.
>> 한 번에 한 사람의 삶을 축복...
P266 영혼을 지닌 것은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가 없다. – ‘영혼의 구슬’
P267 누군가의 삶을 축복해준다는 것은 그가 지닌 고유함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본질 속에서 성장하도록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누누갈르 우리가 우너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면 그가 지닌 본래의 모습을 망가뜨리게 된다. 삶을 축복해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P281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방법은 그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해나가도록 지지해주면서 가만히 어깨동무해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직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그 믿음이 그의 삶에 커다란 버팀목이 된다.
>> 머리로도 알고 마음으로도 느껴지는데 행동으로 잘 안되는게 바로 이부분이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 좀 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때때로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침묵이 형벌처럼 느껴질때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엎어질걸 알면서 넘어질걸 알면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스스로 배울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것. 그 대상이 딸일 수도 있고, 어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상이 누가 되었든, 신뢰를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은 내 인격의 도량만큼 적용이 되는 것 같다. 그러기에 먼저 그런 내가 되어야 있어야 함이 느껴진다. 침묵도, 믿고 기다려주는 신뢰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닌 것 같다. 인격이 성숙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싶다.
P294 삶의 끝자리에서 바라보는 삶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르다. 우리 모두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했던 것에 의문을 품게 된다.
>> 굳이 삶의 끝자리에 서 있지 않아도, 나는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했던 많은 것에 인제 그리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없음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삶은 변하고, 삶 속에 있는 나도 변하고,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나의 가치와 의미도 변하는 것 같다.
결국, 조물주의 사랑빼고는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P294 우리가 중요하다고 매달렸던 것들은 지극히 사소해지고 아주 단순한 몇 가지만이 중요해진다. 암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로서 나는 그들이 다다른 삶의 끝자리인 바닷가를 함께 걸으면서 지혜라는 조개들을 줍곤 했다.
P295 죽음의 경게선을 넘어갔다 되돌아온 사람들은 특별한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그런 체험을 통해 그들은 삶 안에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방법이 있지만 모든 삶은 지혜를 이르는 하나의 영적인 여정이다. 그것을 안다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달라진다.
P296 태초에 드러남 없이 존재하는 절대적 근원이며 순수한 존재자체인 엔소프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게는 존재에서의 빛의 발산인 오르엔소프로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신의 빛인 오르엔소프가 우주로 번져 나갈 때 나오는 거룩한 섬광이다. 루리아는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 안에는 거룩한 섬광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했다.
P296 인간 본래의 목적은 빛의 섬광을 벗겨내고 본질적인 거룩함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거룩함을 품은 진주를 숨긴 조개와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 안에 있는 감추어진 거룩함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P297 카발라의 티쿤 올람은 모든 삶 안에는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람들의 삶을 축복해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단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우리 안에 있는 선을 찾는 거란다. 삶을 축복할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제자리에 되돌려놓는 것이란다.”
P298 외할아버지는 삶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며 우리 또한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삶을 축복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P298 섬김은 영혼의 일이다. 진정한 섬김이란 우리 안에 있는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선을 향한 전환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어떤 전환은 아주 작고 어떤 전환은 크다. 이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 탐욕, 무절제한 열망, 무감각, 무의식의 사슬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진정한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보다 영혼이 더 강하다는 증거다.
P298 남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지닌 본래의 선을 따라가는 것이며 그것을 더 깊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299 모든 섬김의 행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어느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자기 안에 빛을 밝힌다면 결국 그 빛이 모여 이 세상을 환히 밝히게 될 것이다.
P302 “저는 지난 몇십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 기도할 때 하느님이 그래 하고 응답해주시기도 하고 아니야라고 하실 때도 있지요. 그렇지만 자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패트릭, 자네는 물러나 있게나, 내가 손수하겠네라고 말입니다.”
>> 요즘 우리 가게에 일어나고 있는 골치 아픈 일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해결 해주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들어서 해결하려고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은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릴 줄 아는 신뢰를 가르쳐주시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손수해 주신다는데 왜 우리가 이렇게 끌끌대는건지…
P309 신비에 대한 감각을 지니게 되면 우리는 실망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미지의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신비를 지닌다는 것은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존경심을 지니면서 마음을 여는 자세다. 누구든 그가 알지 못하는 차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언제든지 지헤에 다다를 수 있다. 장터에서도 신비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 어쩌면 신비가 우리에게 말을 거네고 우리를 치유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신비인, 우리가 머무는 자소에서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신비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거나 이해하려고 열망하지 않아야 한다.
P310 그냥 신비를 바라보기 위해 마음의 창을 열면 된다. 삶을 관조하는 사람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지혜는 해답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찾는 해답은 항구한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잘사는 비법은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삶에서 일어나는 물음들을 나누는 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P321 “그들은 어떻게 고통을 겪는지엗 ㅐ해서는 알고 있었단다. 그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거든. 거기에 익숙해져서 어떻게 자유를 누려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거야.”
P322 우리는 항상 노예 생활이냐, 알 수 없는 미지의 삶이냐를 놓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란다.”
P323 오직 자유를 지닌 사람만이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세상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그들 안에 있는 선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단다.”
P324 우리가 선을 따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속박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상태, 또는 탐욕이나 무지 드으이 무가치한 관념들의 덫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희생이나 권리 주장 등의 이름으로 노예가 된다. 이 이야기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것을 우리의 손에서 놓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과 마주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고 아픔을 주는 장소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P324 자유란 몇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옳은 것을 위해서 가장 익숙한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내면으로부터 신뢰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하루 아침에 약속된 땅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일을 다른 이에게 맟겨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자유를 향해 나가려고 할 때 거기에 하느님이 손수 함께 계신다.
>> 자유를 얻게 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에언자나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셨다는 말씀이 내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누구에게도 맞기지 않으시고 직접 해결해주신다는 말씀 아닌가. 나를 얽어매고 있는 삶의 굴레들. 하느님께서 직접 해결해주실거라 생각하니 얼마나 기쁘고 홀가분해지는지..
하느님은 우리의 짐을 우리가 지지 않고 온전히 당신께 맡기고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시는데 굳이 우리는 자기가 그 짐을 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게다. 미련퉁이 같으니라고..
P325 약속된 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다. (…)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같은 것이리라. 바로 내면 안에 있는 선을 따라 살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능력이다.
>> 아멘~!!
.
.
흐르는 곡은..
Chris De Burgh 의 When Winter Comes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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