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37]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를 읽고...

pumpkinn 2010. 5. 23. 09:05

 

저자 안광복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소크라테스 대화법 (Elenchos)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부터 중동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고등학생들에게 철학과 논리적 사고를 가르치고 있으며 학생들과 함께 ‘즐겁게 철학하기’를 실천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을 위하여 철학과 비판적 사고에 관한 글을 여러 곳에 쓰고 있으며, 서양 고대 철학과 철학 교육을 화두 삼아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또한, 자립형 사립고 특성화 교과로 기획된 “Who am I?”라는 창의적 재랑활동 과목을 수업하며 개발 중이다. (어쩜, 지금은 개발을 끝내셨을지도)

 

책에서 느끼는 그는 빠울로 꼬엘료가 작가를 두고 했던 재밌는 표현처럼 흐트러진 머리에 안경을 쓰고 뭔지 모를 무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니는 철학자의 느낌이 아니었다. 아주 현대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심각하게가 아닌, 진지하지만 즐겁게 철학을 삶 안에서 실현하는 분으로 느껴졌다. 

 

글 속에 잠복하고 있는 윗트와 유머는 읽는 내내 종종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했고, 그 흐름이 얼마나 재밌는지 마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듯 안달나는 짜릿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단순히 그냥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실용적인 철학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고, 논리적으로 되짚어 생각하게 함으로써 문제의 근원을 앎으로서 삶의 문제를 풀어내게 하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흥미로웠다. 어쩜 그래서 더 가까이 쉽게 재밌게 다가왔던지도 모르겠다.

 

저자 조사를 하다가 안광복 선생이 생각보다 훨씬 젊어서 살짝 놀라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철학을 안광복 선생님과 함께 재밌고 즐겁게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중동 고등학교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중동 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난 남자로 태어나는 우선절차를 거쳐야 하니,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부러움의 크기가 더 컸는지도.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우연히 이뤄지게되는 훌륭한 스승과의 만남은 삶이 안겨주는 축복이다. 대부분이 나의 의지나 선택의 영역 안의 것이 아님을 떠올릴 때, 중동 고등학교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한 학생들인지.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이 아니라, ‘지상으로 떨어진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을런지.

 

저서로는 <청소년을 위한 철학자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 <철학, 역사를 만나다>등이 있고, <곰스크로의 여행>등의 번역물, <플라톤, 소피스트’편에서의 비존재 논의 고찰>. <교양과목으로서의 논리학 개선 방안 연구>. <논술형 평가의 실제>, <통합 교과적 독서교육방안 연구>등의 논문을 발표 했다.

 


 

나를 외도하게 만든 책..

 

철학은 내게 넘 거창하고 거룩해 보이고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 느껴졌기에 감히 읽겠다거나 가까이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철학 특강으로 ‘철학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 무엇보다 철학자들의 삶이 나의 깊은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2010년 5월, 이 책을 만났던 당시, 나는 이 책이 읽고 싶어 몸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해서 읽고 있던 책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급기야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일단 책을 손에 들으면 끝까지  읽을 때까지 일편단심인 나를 외도하게 한 책. 바로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였다.

 

관심가는 철학자를 골라 읽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책에 나열된 순서로 읽어나간 것이 내게는 흐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왜 고대주의에는 이상과 국가가 철학자의 관심이었고, 스토아 철학에 이어 스콜라 철학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근대에 들어 신을 부정하고 이성과 과학을 앞세우는 철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특히, 간결하면서도 옛날 이야기를 읽듯 재밌게 마치 저자 스스로가 신이 나서  내려간 듯한 스토리 전개는 도저히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철학자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실로 추구하고자 했던 사상과 마키아 벨리. 홉스. 그리고 쇼펜하우어처럼 그들의 사상과 주장 뒤에 숨어있는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알고난 후에는 아련한 아픔이 일기도 했다.

 

 

철학이 아닌 철학자, ‘사람’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느낀 것은 역시 나는 ‘사람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도저히 손에 뗄 수 없을만큼 재밌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책에 소개된 철학자들의 이론이나 주장이 매력적이거나 내 가슴을 깊이 파고 들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사상에 전혀 관심이 안가는 것은 아녔으나, 그들이 삶을 바쳐 주장한 사상보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바로 철학자 그들 자신의 삶이었다. 그들이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어떤 성향을 지녔더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철학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어떤 사랑을 했는지 등등의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나를 열광시키며 빠져들게 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실현해내고자 한 바로 그것이 나에겐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하마트면 착각할 뻔 했다. 내가 ‘철학’에 큰 관심이 있는 것으로 말이다. 내가 ‘철학’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나에 대한 또 다른 발견이다. 나는 늘 ‘사람’에 관심이 있었는데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것은 큰 얻음이었다.

 

암튼, 인간적으로 존경과 감동 속에 눈물 흘리게 하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고개 숙여지는 철학자가 있었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적인 철학자도 있었으며, 베이컨처럼 어떻게 이런 장삿군 같은 철학자도 있었을까하며 읽으면서 분통 터뜨리게 하는 철학자도 있었다. 이렇듯, 철학자들의 재밌는 에피소드는 나를 더욱 책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중에서도 메인이 아닌 졸지에 밤 무대 이류 가수로 둔갑한 쇼펜하워의 이야기는 웃기지만 슬펐고,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 들고 포퍼에게 덤벼들던 장면에서는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고, 애틋하면서도 정신적인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헐리우드 배우 뺨치는 삶과 외모의 소유자 존 로크와 품격있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사랑이야기는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내렸다. 

 

어디 그뿐인가? 아름다운 미소년 플라톤이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드림에서 바로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와 함께, 철저한 자기관리, 시간관리 그리고 성실한 학습으로 게으른 나를 놀라게 했던 칸트.  아름답고 슬픈 청년 ‘에밀’의 루소, 볼테르, 라이프니츠 등등등, 너무나도 나를 매료시킨 수 많은 철학자들.  

 

그외에 나에게 존경과 감동과 사랑이 우러나게 했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를 좀 더 깊이(?) 알게되었고, 못생긴 소크라테스의 당당함에 눈물이 났더랬으며,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 ‘걸어다니는 수학 공식’ 버트런드 러셀. 전쟁 영웅이며 괴짜인 비트겐슈타인은 정말 매력덩어리였다. 

 

미셀 푸코의 매력적인 외모에서 내가 존경하던 울프 교수님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어서 또한 내겐 읽는 내내 즐거움이었다. 철학계의 제임스 딘, 사르트르가 궁금하여 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그의 못말리는 여성편력에 혀가 끌끌 내둘러지기도 했다.

 

천재는 어쩜 그리도 많은지 읽으면서 살짝 기가 죽기도 했지만,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흥미로움과 기쁨과 슬픔과 감동은 나를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다. 수 많은 매력적인 철학자들의 이야기 속에 나는 풍덩 빠져 헤어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 속에 묻혀 허우적거리고 싶었다.

 

 

이루어진 바램..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웃었는지. 시니컬하면서도 윗트와 유머가 곳곳에 묻어나는 저자의 표현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철학이란 분야를 재밌는 철학이야기로 둔갑시켜버렸음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셔서 그런가? 학생들이 사용할만한 웃기고 재밌는 표현들을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 놓았다.  그 다음에 이어질 철학자는 누구일지 어떤 분일지 궁금하여 읽고 싶어 안달이  정도였다. 얼마나 재밌었는지 남아있는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불안할 정도였다. 

 

 

저자인 안광복 선생님의 표현대로 철학을 모르는 이들에게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는 그의 겸손한 바램은 그 이상으로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철학을 재밌게 읽고 즐기도록 하면서 철학이 무엇인지를 보려주려고 했음이 분명하게 느껴졌고, 이렇게 폭 빠지게 했으니. 물론 내경우 철학이 아닌 철학자에게. ^^ 

 

이 책 한권을 읽고 내가 철학을 알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그저 들어도 낯설지 않은 철학자의 이름이 조금 더 많아졌고, 그들의 삶을 좀 더 알게 되었다는 정도일 뿐이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 주루루 흝어 내려오며 전체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었음은 내게는 참으로 크나 큰 공부가 되었다. 너무나도 달콤했던 시간.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철학자가 많아졌음에 괜히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우선 안광복 선생님의 다른 책을 사서 읽고 싶다. ^^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를 읽다가 - 초서

 

 

 

 

탈레스 (Thales, 기원전 624?~기원전 546)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탈레스는 밀레투수 사람이었는데,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 개척지에 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철학의 출발 - 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P19 탈레스 (Thales, 기원전 624?~기원전 546)는 흔히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P21 탈레스는 밀레투수 사람이었는데,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 개척지에 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P21 생계에 쫓기는 사람은 삼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하루하루 닥치는 일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찬 탓이다. 또한, 일상에 너무 찌든 까닭에 현실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따라서 삶과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절박한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만큼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 Schole’을 꼽은 이유이다. 밀레투스의 경제적 성공은 이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했다.

 

P22 철학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만한 근거와 증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밀레투스 사람들 특유의 비판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P22 요즘의 이름난 지식인들은 오히려 침묵을 미덕으로 여겼다.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두 마디 던진 말들은 곧 금언이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 라디오뿐 아니라 종이조차 없던 시대였으니, 긴 주장보다는 차라리 한두 마디의 의미심장한 말이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터다.

 

>> 하하하~ 해석이 넘 재밌다. 저자의 이런 유머러스한 표현은 한참 말썽꾸러기들일 고등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터득한 윗트일까.. 아니면 타고난 재능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P23 철학의 아버지라는 그가 남긴 철학적 주장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한 말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주장이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주장은 의미 없는 엉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 역사로 볼 떄 이 주장은 매우 가치 있다. 철학 역사에서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남긴 철학적 주장이 단 세 마디란 사실이 넘 웃겼다.. ^^;; 책에서 말하듯 과학이 발전했기에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주장이 틀렸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지만, 철학 역사에서 보면 최초로 던져진, 눈에 보이는 여러 사물과 변화를 넘어 세계는 과연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답하는 본질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했다. 사실 내 주위에 당연하게 있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에 의문을 던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러기에 철학자로 불리우는 거겠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것에 당췌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나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그들이기만 하다.

 

P23 종교도 세상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철학은 주장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논리와 합리적인 근거에 비추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은 종교와 다르다. 종교는 신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라고 선언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권하지만, 철학에서는 받아들일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P24 (그리스의 창조 신화도 물의 신 오케아노스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철학 역사에서 의미 있는 점은 오직 그가 논리를 따져 사회에 퍼져 있는 믿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관찰 결과를 종합하여 세상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결론 내리는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는 사실뿐이다.


 

P26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초연하게 독배를 들이켠 것에 비하면, 철학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다지 철학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 하하하하~ 저자의 표현 때문에 정말 웃겨서 돌아가시겠다. 마치 시모노 나나미의 로마이야기를 읽는듯한 분위기다. ^^ 넘넘 재밌다. ^^ 저자 안 광복은 마치 탈레스가 극적인 죽음 또는 철학적인 죽음을 맞지 않은 것이 무척 안타까운 분위기 내지는 좀 더 나아가 못마땅한(?)’ 분위기다.. 하하하하~ ^^


 

P27 탈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답게 우리에게 충고를 건넨다. 치열한 일상에서 한 발 물러서서 넓고 깊게 세상과 삶에 대해 통찰해 보라. 무엇이 진정한 세상의 모습인지를 고민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릴 떄, 우리는 다람쥐가 쳇바퀴 위에서 경쟁하는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철학 실험실:철학자 자격시험을 만든다면?탈레스는 물웅덩이에 빠져 트라키아 하녀의 비웃음을 샀다. “우주의 원리를 꿰뚫는다는 분이 눈앞 구덩이는 못 보시는군요!” 주변을 둘러보면, 탈레스만큼이나 뜬구름을 잡아 비웃음 사는 이들이 한둘은 있게 마련이다. 막연한 공상가와 진정한 철학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막연한 공상가와 진정한 철학가의 차이는 바로 자신의 주장을 삶 속에 합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천해 보이느냐 아니냐에 따른 것 같다. 진정한 철학가는 어떤 사상이나 주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여 그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이느냐를 고민하고, 끝까지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인간의 삶의 성장에 도움을 주지만, 막연한 공상가는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황당한 상상 속에 빠진, 그저 그 상상을 즐기며 현실에서는 자신의 주장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바로 그것이 둘의 차이가 아닐까..?

 

 

 

헤라클레이토스 (Herackletos, 기원전 540? ~ 기원전 480?)는 밀레투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최대의 항구 도시인 에페소스에서 태어났다.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기원전 515? ~ 기원전 445?)는 엘레아(오늘날 이탈리아의 벨리아 지방)사람이다.

 

 

 

 

 

최초의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 헤라클레이토스 & 파르메니데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파르메니데스

 

P29 현실주의자가 현실에 맞추어 지도를 고쳐 나가는 이들이라면 이상주의자는 미리 그려진 지도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는 치들이다. 물론, 여기서 지도란 세상을 보는 틀. 곧 철학을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 (Herackletos, 기원전 540? ~ 기원전 480?)와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기원전 515? ~ 기원전 445?)는 세상을 보는 두 개의 큰 지도, 곧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라는 철학의 원형을 만든 사람이다.


 

P30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확신에 차 있어, 토론을 하다가도 잠깐!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라고 말하며 스스로에게만 자문을 구했단다.

 

>> 우하하하하~ 증말 못말리는 인류 최초의 구제불능성 자뻑증세환자가 아녔을까 싶다. 사실 이에피소드를 읽는 지금의 나에겐 코미디 같은 상황으로 비쳐지지만 그 당시 그는 무척 진지했을 것이란 상상이 그려진다.

 

암튼, 자기 자신을 믿고 신뢰하고 스스로에 당당한 것. 꼭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 넘치는 사람, 매력적이다. (물론 큰소리만 빵빵 치는 무능력한 허풍쟁이가 아닌, 실질적 능력이 따라 줄 때 말이다.. ^^)


 

P30 맏이였던 그는 당연히 물려받아야 할 최고 제사장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아이들과 주사위 놀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아이들 놀이가 정치보다 더 제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해서 시민들은 모두 목 메달아 죽어야 한다. 그리고 수염도 안 난 애송이들에게 정치를 맡겨야 한다며 수위를 한참 넘는 독설광야유에서도 서슴지 않았다.

 

>> 큭큭~ ^^;; 시민들이 모두 목 메달아 죽으면 누굴 위해 정치를 할라고..? 그 정치의 대상은 어디서 구하나~ ^^;;


 

P30 헤라클레이토스는 나중에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가 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첫쨰, 귀족이었던 그는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조용히 사색할 여유가 있었다. 둘쨰, 세상일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으므로 당장의 이해관계를 떠나 모든 일의 근본을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줄곧 어두운 얼굴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기에, 그는 어두운 사람이라 불리곤 했다.

 

>> 헤라클레이토스. 왠지 참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다. ^^ 물론 교만하고 거만하고 그런 사람에게 호감이 느껴지진 않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이상을 좀 과격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렇게 삶으로 실천하며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 멋지지 않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을 쫓아 신념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난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겸손이란. 때로는 거추장스런 레이스로 가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헤라클레이토스.

 

그렇게 독설을 퍼부었지만, 정작 자신은 삶을 고뇌하던 철학자. 그러기에 늘 어두운 얼굴로 깊은사색에 잠겨있던 철학자. 참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그 옆에 있었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을 것 같다. 왠지 내가 좋아했던 프랑스 역사 소설을 만화화 했던 안젤리크에서 나오는 필립 같은 분위기였을 것 같다. ^^ 모든 것을 가진 귀족이지만 그에게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해 줄 수 없는 삶이기에 고뇌하는 어두움이 느껴지는 분위기.. ^^ 끄응~ ^^;;


 

P31 우두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파악한 세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바로 만물은 흐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강물도 흘러가지만 나도 또한 변한다. 세상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P31 그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대립하고 투쟁하는 가운데 의미를 갖는다. 피곤이 휴식을 즐겁게 하고 배고픔이 없으면 배부름도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은 대립되는 다른 쪽과의 투쟁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P31세계는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져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말이다.

 

P31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듯한 세상일도 우주의 섭리, 곧 로고스에 따라 이루어진다.

 

P32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몇몇 단편들, 곧 조각난 문장들만 전해져 온다. 게다가 귀족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천한 것들’, 곧 일반 독자들의 수준을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신탁 수준의 애매한 표현으로 악명이 높았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조차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솜씨 좋은 델로스 (Delos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데스 제도에 위치한 섬) 잠수부가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 킄큭~ 어두운 철학자이면서 괴팍한 철학자이기도 한 듯.. ^^ ‘천한 것들을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넘 웃겼다. 그 신탁 수준의 애매한 표현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를 하고 그를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집어 넣은걸까..? 참 궁금하다. ^^ 물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랬겠으나, 그런 애매모호한 표현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즉 해석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달라지는 것 아닌가..? 나의 철없는 우매한 의견일까나..?? ^^;;


 

P32 변하는 현실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정의로움과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세, 이것이 헤라이클레이토스가 강조하려는 바였다면 그를 최초의 현실주의자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P33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당연하다. 뭐 이런 말을 하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다음 말은 충격적이다. ‘없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실 우리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없다의 형태로 어림짐작할 뿐, ‘없음 자체를 머리에 그릴 수는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뿐이다.그런데 없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있는 것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여러 개 있으려면 있는 것 사이에 허, 곧 없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기 때문에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하나의 있는 것, 일자-‘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운동과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허공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법, 하지만 앞서 논변이 증명하듯 허공은 없다. 그렇다면 운동도 없다.

 

P34 파르메니데스가 이 논증을 통해 보여 주려 했던 것은, 세상의 참모습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냉철한 논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P36 하지만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깊은 생각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 했다는 점이다. 드러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순간의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객관적이고 차분한 마음으로 세상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는 자세. 철학자는 이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사람이다. 그 점에서 이 둘은 진정한 철학자다. 논쟁에는 감정적인 흥분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이를 못 이겨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을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철학자의 냉철한 자세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야 할 터다. 진리는 결국 모두를 이롭게 하는 까닭이다.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470?~기원전 399)는 기원전 470년경, 그리스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지혜를 낳는 산파 - 소크라테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검증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P39 철학을 하는 목적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지식과 신념이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의미 있는지를 검토하며 마음 깊숙이 박힌 독단과 선입견을 제거하는 데 있다. 편견과 독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철학하는 이들의 자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태도로 평생을 살았다.

 

P40 소크라테스의 못생긴 얼굴은 어렸을 때부터 장안의 화제였단다. 소크라테스 조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확실히 그는 못생겼다. 몹시 거친 피부에 개구리같이 툭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에 주저앉은 코, 이런 독특한 생김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아무래 놀려도 소크라테스는 밝고 건강하기만 했다.

 

>> 글에 표현된 묘사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얼굴을 상상하며 읽어나가다가 두꺼운 입술분에서 구본형 선생님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 ‘마흔 세살에 시작하다에서 당신의 얼굴에 대한 느낌이 눈, , 입 등등 부분별로 상세히 표현되어져 있었는데, 입술 부분에서 내가 얼마나 웃었더랬는지, 그 분의 진지한듯 유머러스한 성품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부분이라 내가 참 좋아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본형 선생님을 못 만나뵙고 온 것이 많이 아쉽다.

 

P40 소크라테스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한겨울에 맨발로 행군하고 얇은 겉옷만 걸치고 다녔는데도 별 탈이 없었다. 심지어 나이 칠십에 독약을 마시고도 너무 건강한 나머지 독기가 퍼지지 않아 감옥 안을 걸어 다녀야 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가 평생 도안 간직했던 모습이다.

 

>> 너무나도 건강해서 독약이 퍼지지 않아 감옥에서 걸어 다녀야 했다는 부분에서 웃음이 터졌다가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어린 시절부터 소크라테스가 평생 동안 간직했던 모습이다.’ 에서 뭉클하니 눈물이 몽글 맺혔다. 건강한 육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멋진 철학자였구나.. 마침 나오는 제임스 블런트의 Tears and Rain이 그 분위기를 더해준다.

 

P41 아마도 그에게는 돌을 쪼아 멋있게 조각하는 재주는 없었나 보다. 그의 숨겨진 진짜 재주는 정신을 모아 아름다운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 ‘정신을 모아 아름다운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표현이 넘 아름답다...


 

P41 소피스트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란 아예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은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소피스트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준다.


 

P42 아낙사고라스 같은 자연철학자는 지구는 둥글고 허공에 떠 있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해 아테네를 온통 시끄럽게 만들었단다.

 

>> 그 옛날에 이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니, 너무나도 놀랍고 또 놀랍다..


 

P43 델피 신전의 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 (Gnoti Seauton)’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단다. (지금은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 명구는 소크라테스가 왜 가장 현명한 사람인지를 꿰뚫어 설명해 준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알고 있던 유일한 사실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현명해 보이는 이들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릇된 확신은 험한 산길을 마치 길을 다 안다는 듯 눈을 가리고 성큼성큼 걷는 일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석공 일을 완전히 금나두고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일생을 걸기로 했다.

 

P45 질문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모순된 것이며 사실은 노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학자들은 논박술 (혹은 반어법)이라 부른다.

 

P45 논박술은 소크라테스가 직접 상대방에게 틀렸음을 가르쳐 주지 않고 상대방 스스로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를 낳는 산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도 한다.

 

P45 그는 스스로를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큰 말이 졸지 않도록 끊임없이 꺠물어 대는 등에로 여겼다.

 

P47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탈출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평생 다른 이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한 자신이 스스로 법을 어길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느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근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최초의 철학의 순교자였다.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아테네 최고의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플라토닉 러브. 이데아를 추구하라 - 플라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

 

P50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은 뼈대 있는 집안 출신에다 머리 좋고 운동 잘하며 잘생기기까지 해서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사람도 있다.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7? ~ 기원전 347)이 그랬다.

 

>> 흐미~^^;;


 

P51 이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귀족 청년은 소크라테스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같다는 말이 곧 못 생겼다는 뜻으로 통할 정도로 외모가 추했는데도 말이다. 플라토닉 러브 Platonic Love’ 라는 말은 남녀간의 정신적인 사랑을 뜻한다.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이 말은 지적으로 성숙한 성인에 대한 소년의 정신적인 동경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토닉 러브라 할 만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가 타락한 듯한 아테네 현실에서 끊임없이 정의와 진리를 찾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젊은 정치 지망생 플라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을 터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뒤로 석수장이 출신의 못생긴 선생과 걸출한 귀족 제자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이 두 사람은 8년 동안이나 붙어 다니며 진리를 구했다.

 

>> ..플라톤이 이토록 아름다웠었구나.. ‘플라토닉 러브라는 표현이 이렇게 생겨난거구나.. 이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귀족 청년 플라톤은 풍부한 감성을 지녔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호메로스를 읽고 그리고 사람을 보는 지헤도 있어 어쩜 그 당시 사회적 계급의 차이로 근처도 못갔을지도 모르모 보잘 것 없는 석공의 아들인 소크라테스에게 첫 눈에 반하여스스로 그의 제자가 되어 8년이란 세월을 그와 함께 했으니..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헀다는 사실이 너무 의아스러울 뿐이다. 플라토닉 러브가 남녀간의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지적으로 성숙한 성인에 대한 소년의 정신적인 동경.. .. 읽는 내내 가슴이 콩닥콩닥~ 괜히 셀로판 종이처럼 파르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플라톤인지...마침 Renata Roussou가 부르는 Both Sides Now가 나오고 있었다. 플라톤의 분위기와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P53 이데아란 이러한 수학적 진리를 모든 사물에 확장시킨 것이다. , 이데아란 객관적이고 불변하며 완전한 사물의 본질이다.

 

P53 진정한 지식은 이성을 통해 이데아를 알았을 때에야 얻어진다. 그뿐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만이 아니라 정의올바름같은 추상적인 것에도 이데아가 있다. 어떤 행동이 정의로운지 아닌지는 이익을 계산하거나 투표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행동이 정의로움의 이데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

 

P54 올바름의 이데아를 알고 있는 철학자가 권력을 쥐고 통치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는 정의로우며 이상 국가에 다다른다. 플라톤의 이런 생각을 철인 통치론이라 부른다.그런데 정의로운 국가와 개인은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국가란 큰 글자로 쓰인 인간과 같다. 인간의 여혼은 이성, 기개, 욕망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성과 기개. 욕망이 제각각 역할을 다했을 때,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만들어진다. 이 세가지 덕이 이루어져 질서가 잡힐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진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P54 조국 아테네의 쇠락과 부패를 직접 본 플라톤은 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사회가 썩는 이유를 사람들의 욕심 탓이라 보았다. 악은 아예 뿌리부터 잘라 버려야 한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만큼은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아니, 가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재산은 공동 소유여야 한다. 여기에는 우생학적인 배려도 있었다. 뛰어난 사람이 자손을 더 많이 남기도록 하기 위해 아내 공동 소유를 내세우기까지 했다. 심지어 플라톤은 장애인과 허약한 아이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죽여야 한다고 선언하기조차 했다.

 

>> 그렇게 감성이 풍부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웠던 플라톤. 무엇이 플라톤을 이렇게 극단적인 사상을 갖게 했을까.? 플라토닉 러브를 바쳤던 존경하던 스승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민주주의을 자처하면서 가장 의로운 사람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아테네인들에 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순수했던 플라톤이기에 그 엄청난 충격은 플라톤의 정신세계에 또 다른 충격적인 변화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살아있었다면, 플라톤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그가 어떤 진리를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원했을까..? 우생학적인 배려로 아내 공동 소유를 내세우거나, 약한 아이는 국가 차원에서 죽여야 한다는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주장이 시를 사랑하고 호메로스를 읽던 감성적인 플라톤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내겐 그야말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변하게 했던 걸까..? 


P56 플라톤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그가 쓴 35편이 넘는 대화편과 많은 편지들은 지금까지 온전한 형태로 전해진다. 플라톤의 철학 저술은 대부분 대화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런 글들은 대화편이라 한다.    플라톤은 기하학, 우주론, 변론술, 정치학, 음악 등 방대한 주제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과거의 유물에 그치지 않는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철학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끊임없이 일고 토론하는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 놀랍다. 기원전의 기록이 온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는 사실이 내겐 경악스러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가끔씩 너무나도 유명하고 존경 받는 철학자나 성인이나 (예수님 포함) 그들이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무척 생경스런 느낌이 든다. 책에서 나오는 분들인데 그 분들이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지점에선 우리처럼, 나처럼 살아 숨쉬던 현실 속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는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대시대에 쓰여진 책들이 20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철학자들에게 읽히고 있고, 끊임없는 논쟁거리와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이 어찌 경이롭지 않을 수 있는가..그들이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이었던 것도, 그들의 쓴 글들이 온전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도 내게는 너무나도 놀랍고 또 놀라운 사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이 현재성을 띈다는 사실도...


 

P57 모든 발전은 이미 있던 것에 대한 검토와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멈추지 않고 그 너머의 이데아를 추구한 플라톤 철학은 정의로운 삶과 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사색의 발판으로서 여전히 훌륭하게 쓰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leles, 기원전 384~322) 그리스 북부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행복과 중용, 극단은 피하라 -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P59 아리스토텔레스를 알면 서양 철학의 맥을 짚을 수 있는 까닭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비판했다. 그를 이해하면 그리스 철학 전체에 대한 감이 온다. 나아가, 그의 사상은 서양 중세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를 알면 기독교 사상도 상당 부분 정리되는 이유다. 그뿐 아니다. 뉴턴과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박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근대 사상을 알려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파고들어야 한다.   , 그가 연구한 분야는 논리학, 수사학, 생물학, 천문학,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목록은 그 자체로 백과사전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철학이 중요 입시 과목인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주받을 사람으로 통한단다. 사상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에 피해 가기 힘든 출제 포인트일뿐더러, 공부할 내용도 엄청나게 많은 탓이다.

 

>> 우하하하하~ 저주받을 아리스토텔레스~ 하하하하~ ^^;; 정말 돌아가시겠다~ ^^;; 저자의 표현이 넘 재밌어서 돌아가시겠다~ ^^:;


 

P62 하지만 그는 끝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다. 남아 있는 그의 저서 어디에도 플라톤에 대한 과격한 공격은 찾아볼 수 없다. 플라톤을 비판할 때는 항상 정중한 예의가 느껴진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스승과 논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를 잘 보여 준다.


P63 선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 이것을 잘 생각해 보고 조금이라도 수상쩍다고 생가되는 고을 샅샅이 들추어내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친한 사람들 (플라톤 학파)을 공격해야 하느 작업이기에 괴로움을 준다. … 그러나 우리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친구보다느 진리를 존중하는 편이 더 한층 경건한 일이다.

 

>>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진리에 대한 그의 경건한 자세에 읽는 나까지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찾고자하는 진리를 위해 온전히 경건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건지.. 늘 느끼는 거지만, 당대를 넘어서 후세대까지 존경받고 우러름을 받는 위인들은 특별한 무엇이 있다. 특별함이 그들을 그렇게 위대하게 하는 거겠지만..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진리에 대한 그의 자세에 고개가 숙여진다..


 

P64 그는 패션감각이 뛰어났던 철학자로 꼽힌다. 다리가 가늘고 눈이 작으며 이야기를 할 때는 약간 더듬기는 했지만, 늘 화려한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최신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조각상에서도 어딘가 세련된 옷맵시가 느껴진다. 세련된 패션 감각은 그가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은 철학자였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현실주의적인 감각은 행복과 중용을 강조하는 그의 윤리 이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 이 부분을 읽다가 빠울로 꼬엘료가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사회적 통념을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가 그려낸 부분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작가뿐만이 아니라 철학자도 마찬가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분위기도 빠울로 꼬엘료가 비꼬았던 작가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내가 갑자기 이리도 철학자 (철학이 아니라) 에게 관심이 많아진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서였으니 프랑스에서는 저주처럼 느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인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준 고마운 철학자이다. ^^

 

나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나의 호기심에 불꽃을 피운 부분은 바로 그의 세련된 패션감각이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철학자와는 정말 다른 분위기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하면 아마도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선 모른다 해도 그의 이름은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철학자인데 그의 그런 색다른 모습이 너무나도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

 

암튼, 아리스토텔레스로 인해 나는 철학의 아버지가 텔레스 인것도 알게 되었 고, 소크라테스가 몸도 정신도 건강했던, 그래서 독을 마시고도 퍼지질 않아 감옥을 한참을 걸어야 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플라톤이 그리도 아름답고 감성이 풍부했던 신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은 다 받은 것 같은 청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구보니 그들의 업적은 나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의 인간적인 삶이 더 깊게 다가온걸 보면..)


 

P64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행복한 삶이란 결코 쾌락적이고 무절제하지 않다. 무절제한 삶은 결국에는 더 큰 고통만을 가져다 준다. 행복은 쾌락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데서 온다. 이런 태도는 중용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중용이란 극단을 피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와 비겁, 절제는 낭비와 인색, 긍지는 교만과 비굴의 중간이다. 이 중간, 곧 중용을 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이성적인 판가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도덕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 꾸준한 노력과 의지로 중용의 태도가 몸에 배게 해야만 인간은 행복에 이른다. 즉 추상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탐구뿐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

 

P65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저는 권력이나 영토를 넓히는 일보다는 선을 아는 데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단다. 하지만 이는 인사치레의 말 정도였던 듯하다. 절절한 고백이 무색하게도 알렉산더는 나중에 권력 영토 확대에 더 관심이 많은 대왕이 되었으니까. 어쨌든 3년 뒤, 알렉산더는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도 자연스럽게 끝났다.

 

P66 그는 양떼를 보호하는 신인 리케이오스를 모시는 신전 근처에 리케이온이라는 학당을 열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정원과 숲 속을 거닐면서 학문을 했다. 여기서 그의 제자들에게 소요학파라는 별명이 붙었다.

 

P68 그는 세상이 단순히 기계적인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지 않았다. 인간 삶뿐만 아니라 세계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예컨대, 세포 하나의 활동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해 보이지만 한 생명체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 아래서 움직인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목적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서양 중세에 그의 철학이 신학의 기초가 되었던 까닭을 엿볼 수 있다.

 

P69 소크라테스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독배를 마시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철학을 다시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탈출했다. 하지만 탈출한 지 2,3개월도 못 되어 평생 따라다니던 위장병이 도져서 죽음을 맞고 만다. 한 해 동안에 그리스 최고의 지배자와 철학자가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 선생님의 철학특강 mp3를 들으면서도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는데, 글로 읽으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 ^^;; 왜 꼭 이렇게 돌아가시게 미치도록 웃고 싶을 때는 내가 꼭 사라이바에 있는지 그 기묘한 타이밍이 새삼 의아스러웠다. 넘 웃겨서 돌아가시겠는데 참아야 하니 눈물이 난다. 우하하하하하하~ ^^;;

 

정말 아쉬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이. 차라리 그 평생을 따라다닌 위장병이 한 2-3년정도 끌어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죽음에서 탈출한지 겨우 2,3개월도 못되어 죽게 만들다니, 철학자의 죽음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철학을 두 번 죽일 수 없다고 도망친 철학자의 말이 얼마나 무색하게 느껴졌더랬는지. 차라리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마셨으면 좋았을걸.. 하는.. 이기적인 아쉬움. 겨우 2,3개월 더 목숨을 연장하자고 도망쳐야 했던 그의 기구한 삶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선생님 말씀처럼 그는 현실주의자기 때문에 꼭 그것을 나쁘게(?) 바라볼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존경하고 따를 때는 그가 마치 성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이기심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에 나의 바램이 그리 극단적인 바램인 것은 아니리라 혼자 위로해보다.

 

그래두 기껏 도망갔는데 겨우 2,3개울두 못되어 위장병으루 죽다니.. 넘 웃겨~ 푸하하하~~ ^^;;


 

P69 근대 자연과학은 세계를 이용 가능한 물질로만 보았다. 환경오염 등 수많은 문제는 그래서 생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세계 전체에서 사물 하나하나, 생명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녔는지를 따진다. 환경, 유전자 복제 등 현대의 민감한 도덕적 문제들을 과학의 문제로만 취급해서는 올바른 결론에 이르기 힘들다. 세상을 전체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세부적인 문제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에피쿠로스 (Epikeuros, 기원전 342~275)는 도시국가 아테네가 지배하던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금욕하는 쾌락의 정원 - 에피쿠로스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

 

P71 아무리 좋은 것을 손에 넣어도 바라던 것이 아니면 실망하고, 보잘것없어도 간절히 원하던 것이면 최고의 만족을 느낀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복처럼 주관적인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남이 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도, 정작 당사자는 행복할 수도 있는 것. 행복의 기준은 남이 보기에 좋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국한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P74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쾌락을 좇고 고통은 멀리한다. 따지고 보면, 선은 쾌락을 많이 주는 것에 지나지 않고 악은 고통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통을 줄이고 가능한 한 쾌락을 많이 얻는 것이 선하고 좋은 삶이다. 이 점에서 그는 쾌락주의자로 불린다.

 

P75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과 공허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채워질수록 기대 수준이 점점 높아져 결국 고통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필수적인 욕망뿐이다. 이것은 많은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일단 채워지면 더 이상 고통을 낳지 않는다. 나아가 에피쿠로스는 필수적인 욕망에 철학과 우정에 대한 욕망도 넣었다. 철학을 함으로써 불필요한 욕망을 없애고 사람들과 우저을 나누며 소박하게 산다면, 어떤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고통도 없는 상태인 아타락시아 (Ataraxia)에 이를 수 있다.

 

P77 에피쿠로스는 말년에 방광에 돌이 생겼다. 그 후 일흔두 살에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 동안이나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는 고통과 두려움을 철학적인 명상으로 이겨 냈다. 젊은 시절 깊이 빠져 들었던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처럼, 에피쿠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없으며,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흩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P78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이야기한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네 가지 덕<4주덕>이 필요핟고 여겼다. , 불안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일은 모두 원자들의 집합과 해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지혜를 실제 삶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용기와 절제가 요구된다. 나아가 이웃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롭게 살려면 나 자신부터 정의로워야 한다.

 

P78 자본주의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렸던 때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불안에 떨고 외로워하며 미래를 두려워한다. 욕망은 채워질수록 점점 더 크고 강해지며 우리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 바로 나의 모습이다. 나는 내가 필요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라는 기준은 각기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부유하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들 때문에..


 

P78 행복이란 쾌락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쾌락으로 삶을 끌고 갈 때 생긴다. 그는 욕망이라는 전차에 이끌려 고통이 될 쾌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과연 올바른 행복인지를 되묻는 건전한 쾌락주의자다.

 

  

 

마크루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lius, 121~180)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섭리를 따르는 삶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P80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명분에 있다. 건달은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정의를 위해 산다. 그래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잠시 책을 덮게 만드는 질의문답이었다. 내 삶이 목적있는 삶일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바로 내가 삶 안에서 내세우는 명분.. 곧 사명이고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기 위해선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색을 띄고 싶은지를 알아야 하는 정체성의 문제로 되돌아 옴에 다시 한번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P80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나라였다. 로막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듯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 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 철학이었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당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토스 같은 노예 출신도 있었고, 세네카 같은 정치인도 있었으며,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 ~ 180) 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에서 황제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를 만든 숨은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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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네르바, 트리나야누스, 안토니누스와 더불어 로마 5현제로 불린다. 이들은 로마제국 전성기에 잇달라 군림한 훌륭한 황제로, 이들이 다스렸던 시기에는 정치는 물론, 경제도 안정되어,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P82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 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강조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P84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 읽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철학도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그럴 때에는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 밖에 없다고 위로해주는 안토니누스.. 그가 양아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깊은 연민과 사랑.. 그리고 깊고 따뜻한 위로에.. 그만 내가 눈물이 나 버린 것이다.. 아마도 아우렐리우스는 그런 아버지의 깊은 위로에 안토니누스 품에 안겨서 엉엉 울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리고.. 그 후로부터는 아버지의 그 말을 떠올리며.. 사나이 임을 기억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철학 위에서 답을 찾으며 슬픔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나도 뭉클하고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안토니누스도 아우렐리우스도...


 

P84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 로고스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을 찾아야 한다.

 


 

P85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이 닥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런 스토아 철학의 이념에서 나왔다.

 

>> 시모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로마인들의 열린 사고와 매력에 미동의 반항도 못하고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안광복의 재밌는 글 솜씨가 그녀와 참으로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벼락에 맞아 죽었다같은 너무나 당황스럽고 황당한 사건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시큰둥하게 표현해대는 바람에 얼마나 나를 배꼽잡게 했더랬는지.. 난 그 책 모든 씨리즈를 다 읽지 못했다. 읽고 싶은 책들 중의 단연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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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뜻으로, 기원전 1세기 말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부터 5현제 시대까지 약 200넌간 계속된 평화를 말한다.

 

P86 아우렐리우스는 전쟁 가운데에서도 과연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와 전쟁터에서 쓰인 것이다. 이 책에는 나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잔인하고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모습을 일지 않았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 고뇌하고 번민하는 황제 아우렐리우스. 그는 황제로서 자신의 백성인 군인들이 생명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싸워야 했던 전쟁터에서 그 모든 짐을 온전히 짊어내며 그가 느꼈을지도 모르는 죽음 같은 고독. 눈물이 핑 도는 애잔함이 느껴졌다.


 

P87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 ……… 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며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 …… 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P88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지닌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검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이 존엄하다는 사실도 당연하다.

 

>> 아우렐리우스.. 갈수록 감동이다.. 읽는 내내 울먹거리는 떨림이 함께 한다...


 

P88 로마가 내세웠던 세계 시민주의는 바로 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이성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법칙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이상에 따르는 것인 만큼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정복이 곧 약탈과 파괴로 이어졌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했다. 로마의 대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용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지극히 충실한 사람이었다.

 

>> 내가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로마인들의 매력에 푹 빠졌던 바로 그 이유였다. 그들은 어느 나라를 정복을 하던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해주며 그것을 말소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들의 관용과 이해와 존중..에 거의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 속에 읽으며 그러기에 로마가 그렇게 온 세계를 정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귀결에 자연스럽게 도달되었다.

 

그런가하면 제1,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은 어땠었나.. 문화부터 말살시키려 하지 않았나.. 언어를 없애고 문화를 없애며 민족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던 그들.. 그들의 더러운 목표가 그리 짧게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겠다.

 

가만보면 사랑도 문화도 심지어 전쟁도... 옛날 시대는 참 로맨틱 했던 것 같다.. 난 그때 시대에 태어난게 좋았을까..? 지금 시대에 태어난게 좋았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도 지금 현대 시대에 태어난게 더 좋았겠지.. 그 당시에 여자들은 요리며 살림이며 집안 일들을 도맡아 하며 남자들을 섬겨야 했으니.. 내가 가장 못하는 것들 아닌가... 에구 다행이다..^^


 

P89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 ……… 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도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 (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 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따름이다.

 

>> 급기야는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존경하는 황제 아우렐리우스. 그의 글은 인자하고 포근하고 따뜻하며, 심지어 로맨틱한 느낌마저 안겨준다. 이 책이 끝나면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고 싶다.


 

P90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 (Zenon)에 의해 출발한 사상이다. 원래 스토아 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의 사상이었다.

 

P90 스토아 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 이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 준 셈이다.

 

P91 <<명상록중에서>> 자연은 배우를 썼다가 다시 무대 밖으로 나게게하는 연출자와 다르지 않는다. “저는 5막짜리 연극에서 3막까지만 출연했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은가? 인생은 3막만으로도 완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연극을 언제 끝낼지를 결정하는 분은 당신을 처음에 고용했고, 지금은 당신을 내모는 자연이다. 따라서 이런 결정은 그대가 상관할 것이 아니다. 만족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라,. 그대를 떠나 보내는 자연도 그대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 누미디아 (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앙의 주춧돌 - 아우구스티누스

“악이란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는 나 자신이 문제일 뿐입니다.

 

P97 (그가 그토록 고민했던 악의 문제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없으며 선의 결핍일 뿐이라는 한마디로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무엇도 악하지 않다. 예컨대, 물건을 훔치고 집에 불을 지르는 일마저도 모두 선한 행동이다. 다만, 이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즐거움을 주는 작은 선이다. 반면, 훔치고 불 지르고픈 욕망을 참는 인내는 더 큰 선이다. 보복을 피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전과 평화라는 선을 주기 때문이다.

 

P97 논리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항상 작은 선보다는 큰 선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큰 선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 이익을 주거나 심지어 해로움을 안기는 작은 선을 택하는 때가 더 많다. 왜 그럴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유를 <<성경>>에 나오는 원죄에서 찾는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최초로 저지른 죄롤 말미암아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작은 선을 택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작은 선을 택하지 않고 더 큰 선으로 향할 수 있을까? 이는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작은 선에 대한 집착, 곧 악행에서 벗어나 큰 선을 택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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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종교적 모색을 기록한 책, 흔히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함께 서양의 3대 참회록으로 일컬어진다.

 

P102 완전한 삶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진실을 끊임없이 깨닫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런 자세를 잃어버린 오만한 삶은 자신과 세상을 황폐하고 초라하게 만들곤 한다. 반성할 줄 모르고 자신의 선택과 욕구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점을 배워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pquinas, 1225?~1274)는 이탈리아의 아퀴노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름은 '아퀴노의 토마스'라는 뜻이다.)

 

 

 

 

신앙과 이성, 신에게로 가는 두 갈래 길 - 토마스 아퀴나스

“들은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능력은 모든 인간의 이성 속에 들어 있다.

“토마스는 자신이 철학적으로 해결한 문제의 수만큼 기적을 행한 것이다.

- 교황 요한 22 (1323)

 

P103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 ~ 1274)는 이탈리아의 아퀴노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P105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경험도 정신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나아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로도 신과 세계를 바로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럼에도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기독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상과 신앙은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 신이 우리에게 준 이성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믿음이 더욱 강해져 구원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를투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강한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성과 신앙은 신에게 가는 서로 다른 길임을 깨닫고 논리적인 작업을 통해 신에게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을 택했다.


 

P109 토마스는 모든 주제에 대해 막힘없는 논리로 상대 주장을 제압했다. 그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거나 성급하게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여 억지 주장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꾸밈없는 단순하고 쉬운 용어와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평이한 논리로 상대를 설득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들은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능력은 모든 인간의 이성 속에 들어 있다라는 말에 잘 나타났다.

 

>> 왠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굉장히 강하고 남성적인 카리스마에 저돌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토마스는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말이 없고,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걸 좋아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의아하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런 엉뚱한 상상을 마치 사실인 것 처럼 했을까..했더니 바로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완전한 논리로 그에 반박하는 이들과 맞섰다는 이야기를 들어온 바, 자연스럽게 그렇게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외모는 더더욱 놀라웠다. 난 다부진 체격에 철학적인 분위기, 내겐 마치 철학의 베에토벤 같은 그런 이미지일 거라고 당연하게그리고 있었기에, 그가 그렇게 큰 덩치에 조용한 외모를 지녔다는 것도 참으로 놀라웠다. 우리들의 상상이란.. 이렇게 실지 인물을 두고도 지맘대로 상상하여 그려내는 우리들, 없는 것엔 오죽할까 하는 생각에 웃음도 나면서 딱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오는 감정은 두려움, 무서움.. 얼마나 우리는 상상 속의 이야기나 사건들을 진짜처럼 이야기하고 부풀리며 죽기살기로 매달리는지..

 

결코 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조용조용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조분조분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로 풀어가는 토마스 아퀴나스. 존경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P110 토마스의 글에서는 감정의 흐름을 어느 구석에서도 느낄 수 없다. 냉철하고 차분한 논리적 분석과 주장이 이어질 뿐이다.

 

>> 어떡하면 그럴 수 있을까..? 나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냉철하고 논리적인 글을...


 

P110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다. 국가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얻기 위한 기준을 마련해 준다,. 그런데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이란 신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신이 세상에 심어 놓은 자연법을 깨답고, 이에 따라 선을 좇고 악을 피하는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자연법에 따라 사람들을 다스리고 행복으로 이끌 때 사회의 공동선을 이룰 수 있다.

 

P111 반면, 교회는 국가가 이루려는 공동선보다 더 소중한, 신에게로 나아가는 초자연적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종교적 구원이나 신에 관한 문제에서는 국가는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교회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는 자연법에 따라 사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요컨대, 국가와 교회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해 가는 서로 다른 두 길일 뿐이다.

 

P112 1323, 마침내 토마스는 성인이 되었다. 이때 토마스의 반대파들은 그가 생전에 행한 기적이 적다는 점을 들어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한 교황 요한 22세의 답변은 간단했다. “토마스 자신이 철학적으로 해결한 문제의 수만큼 기적을 행한 것이다.”

 

P113 토마스의 가장 큰 기적은 맹목으로 흐르기 쉬운 신앙에 대해 이성적 사유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가 평화와 관용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종교 간의 갈등과 폭력이 빚어지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린 신앙은 광기에 가깝다.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인 대화로 진정한 신의 뜻을 깨닫는다면 종교를 둘러싼 어떤 문제도 폭력을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반면, 겸손함을 잃어버린 이성은 광기로 바뀌어 버린다. ‘합리적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이 행해지고 있는가! 신앙은 우리의 이성이 결코 완전하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반성해야 함을 일깨운다. 토마스가 강조한 것은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이성이다. 토마스의 사상이 겸허한 반성을 잃어버린 합리적인 현대인과, 이성을 잃고 광신으로 흐르는 종교인들에게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기적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주었으면 좋겠다.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1469~1527)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 마키아벨리

“인간이란 두려움을 주는 자보다 사랑을 주는 자에게 해를 끼치기를 덜 주저하는 사악한 존재다.

“폭력은 짐승에게나 어울릴 수단이지만, 군주는 때때로 짐승이 되어야 한다. 곧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P117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란 흔히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정치꾼의 권모술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그러니 마키아벨리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기분 좋아할 권력자는 없다. 하지만 정작 창시자격인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는 결코 권력에 굶주린 잔인한 인간이 아니었다. (…) 마키아벨리에 대한 편견은 50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마키아벨리는 결코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1469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P119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 <<군주론>.에서 이렇게 적었다.인간이란 두려움을 주는 자보다 사랑을 주는 자에게 해를 끼치기를 덜 주저하는사악한 존재다 정치는 이 같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강제 장치다.

 

>> 참 모순적인 주장이지만, 나는 경험상 그것을 알고 있다. 어쩜 내가 삶을 배우기 위해 필요했던 훈련 과정 였는지도 모른다.


 

P121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로서는 목숨 걸고 전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편도 용병, 적도 용병이다 보니 수만 명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도, 정작 전사자는 말에서 실수로 떨어진 한둘에 그치는 예술 전투(?)가 흔했다.

 

>> 예술 전투.. 하긴 양 쪽다 어차피 돈 받고 싸우는 그들인데, 어떠한 신념이나 목적 없는 전투에 누가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울까..? 전투에서 죽은 이는 말에서 실수로 떨어진 전사자 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넘 웃겼다. 참 서글프기도 하고...


 

P123 통치자가 최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면 도덕이 항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 군주가 국가를 지키려 한다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진실과 자비, 인간애와 종교에 반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 공감한다. 그러기에 리더는 고독한 거 아닐까..? 옆에서 돕는 참모가 아무리 많다 한들.. 결국 최종결정은 리더가 하는 것.. 그에 따르는 책임도 리더가.. 그러한 면을 두고 볼 때 리더는 외롭다..


 

P123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모든 일을 이성적인 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사일 뿐이다. 분명 포격은 짐승에게나 어울릴 수단이지만, 군주는 때때로 짐승이 되어야 한다. 곧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한 번의 단호한 폭력으로 더 많은 폭력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군주는 당연히 짐승의 수단을 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군주론>>의 핵심이다.


 

P124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덕목들을 구분한다. 기독교에서는 겸손과 정직, 동정심과 경건함을 강조한다. 모두 옳은 말이긴 하지만, 군주에게는 이보다는 용맹스러움, 단호함, 기민한 판단 등이 더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군주는 국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일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숱한 생명이 걸린 군주의 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가 아니라 좋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 군주가 자신을 적들로부터 보호하려면 최대한 도덕적인 인물로 보이게끔 노력해야 한다는 점만 명심하면 된다.

 

>>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굳이 거창하게 국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만약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하고 생명위협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거부하는 나이지만, 나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을 안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그림이다. 난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조차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싫어하고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 가족이 국가라고 한다면 그런 리더의 결정이 과연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 그 목적이 순수 할 때, 영토 확장이나 도적질을 위한 것이 아니, 내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P125 위대한 창작에는 약간의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 뒤 시골 산장에 틀어박혀 지낸 14년은 마키아벨리에게 괴로운 시기였지만, 인류에게는 행운이었다. <<군주론>> <<로마사론>>과 같은 그의 대부분의 저작들, <<만드라골라>>같은 유명한 희극 작품들이 모두 이 시기에 쓰여졌다.

 

>> 역시 온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꿈을 위한 에너지 발전소도 창작을 위한 부분에도 약간의 불행이나 가난은 필수적인 것� 같�.�바로 그 헝그리 정신이 우리를 사색하게 하�,�우리의 꿈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고 내 피부의 세포세포마다 인식되어 깨어있게 하는 바로 그 자극제가 되니�.

�인류에게는 행운이었�.�라는 최고의 찬사를 듣는 마키아벨�..�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이 정도의 업적은 남겨야 하는 거 아닌�..�하는 끈금 없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살짝 들어왔다 나갔�.


 

P125 <<로마사론>>, <<정략론>> 등을 살펴보면 마키아벨리는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다리 공화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고대 로마를 이상적인 국가로 본다. 그는 지배자가 존경 받고 명예와 영광을 차지하며 민중의 삶은 사랑과 신뢰로 가득 찬 세상을 꿈꿨다. 이런 세상을 위해서는 법의 지배가 필수적이고, 권력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라도 시민들 간의 갈등과 균형이 필요하다. <<군주론>>에서 엿보이는 잔인한 군주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국가 수호자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도 법이 지배하는 민주적인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P126 마키아벨리는 냉혹한 정치가라 비난 받으면서도 그의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을 만큼 치밀하게 현실적인 논리를 전개했던 인물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하지 않다. 사람들은 현실과 맞서기 보다는 꿈과 환상에 빠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힘들고 잔인한 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냉철해져야만 상황은 나아질 수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지식은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없고, 큰 위험에 맞서지도 못하며 위대한 희생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베이컨 당시에 누군가가 쓴 그에 대한 평가글

“나는 지난 50년간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나를 몰아낸) 이 판결은 최근 200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

 

P129 철학자 베이컨 (Francis Bacon, 1561 ~ 1626)은 근대 철학의 선두에 서서 과학 시대를 이끈 사람이다. 그는 지식이란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려면 모든 지식은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 정작 그 자신은 경험에 기초한 대단한 과학적 발견을 한 것이 없다. 대신,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학문적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분위기를 뚫고 근대의 파릇한 새싹들이 자라나는 데 필요한 사상의 토양을 일구었던 셈이다.베이컨은 1561,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P130 당시 영국 학자들의 생활은 일하면서 연구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싶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조폐국장을 지냈고 유명한 작가인 밀턴도 정치를 했다. 이 시기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을 흔히 영구 경험론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추구와 실생활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그들 가운데 철학 하는 것을 생계로 삼은 직업 철학자는 없었다. 외교관, 정치인, 관료 등 다른 직업 활동을 하면서 철학을 했던 것이다. 항상 경험에 기초한 확실한 지식을 주장했던 이들의 태도가 어디 비롯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가끔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느낀다. ‘사업이라는게 내겐 벅참을.. 그냥 가게를 보는 것은 재밌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안에서 즐기면 되는 것이기에 나는 내 손길이 구석구석 묻어있는 나의 공간인 나의 가게에서 손님들과 울고 웃으면서 잡담하며 일하듯 놀고, 놀듯 일하는 그 삶이 참 좋았다. 그런데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인제 나는 그냥 가게서 놀면서 일한다는 것은 없어지고 점점 불어나는 큰 덩치를 내가 이끌고가야 한다는 느낌이 그리 달갑지 않다. 난 일하기도하고 놀기도 하면서 또 하나의 내 공간이고 내가 좋아하는 놀이인 블로그 활동이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보내고 싶은데, 점점 그런 생활은 지난 날의 추억 속의 한 켠으로 자리하려 한다.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이끌어 간다라는 것을 참으로 버거워하고 더 나아가 싫어하는 것 같다.

 

.. 옆으로 샜다. ,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밀턴이나 뉴턴, 또는 베이컨처럼 Two Job 철학자들 도 그들이 원하는 철학만이나 물리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일상을 열심히 꾸려가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쓰고 이름을 남겼다. 어쩜 그렇기에 그들의 저서와 업적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없는 시간 쪼개서 연구할 만큼 그들의 열망은 깊었을 것이고, ‘부족함에서 오는 그 몰입의 폭발적인 에너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나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좀 더 기꺼운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잘 헤쳐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P132 그가 어려웠던 시절, 법학 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여왕의 전 애인 에섹스 경이 반역 혐의로 고발되자, 자청해서 그를 처벌할 검사로 나섰던 것이다.

 

>> 아마도 철학자 중에 이렇듯 인격이 안 따라주는 철학자도 없었던 듯싶다.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공부를 하도록 도와준 에섹스 경의 처벌에 검사로 자청하다니. 읽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물론 철학자는 철학자로서의 자세로 학문을 연구하고 삶을 살았다면 그는 철학자로서 존경 받을 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철학자들이 모든 면에서 성품까지 올바른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또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철학자가 아우렐리우스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명한 배우나 가수들이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야 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단지 그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인정을 받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우리의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나서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이들 아닌가. 그런 이가 이런 인간적으로 기본적인 성품도 갖추지 못한 사람의 철학이 과연 우리 인간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물론 이건 나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이다. 베이컨이 철학자로서의 자세는 훌륭했을지 모르나,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과연 우리는 존경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긴.. 이 책이 존경 받을 학자들을 소개시켜주는 책이 아니라 전 시대를 걸쳐 인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훌륭한 철학자를 보여주는 것이니 내가 굳이 이리 열받을 이유야 없겠지만, 베이컨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철학자들 중 최악이었다.


 

P133 그는 평생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모든 학문은 실생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하며, 이럴 때에만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은 결국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 루도비꼬가 떠올랐다. 내가 무슨 공부를 하면, 그 공부가 끝나면 그것이 삶에 어떻게 적용이 될 건지 내지는 도움을 줄 건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지를 물어오기 때문에 나는 참으로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그냥 좋아서 하는 공부는 안 되는 건가..싶은.. 물론 그 공부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에 어떤 사고적인 면이나 습관이 달라진다면 그것 역시 도움이 되는 것일게다. 하지만 루도비꼬가 묻는 의미는 바로 베이컨과 같은 믿음에서 오는 질문들이었기에, 내게는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물론 지금은 나의 이런 성향을 그냥 받아주지만.. 그야말로 받아주는 거지아마도 이해하는 차원은 아닌 듯 싶다.


 

P136 그가 철학에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성경>>의 권위와 미신에 주눅 들어 있던 인간 이성에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일이다. 그가 강조한 경험에 기초한 이성적 사고 덕택에, 사람들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놓친 부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이성의 겸손함이었다. 이성을 짓누르던 편견에서 해방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풍요와 행복을 누렸다. 그러나 이용당하는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나머지, 인류는 각종 환경오염과 사회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편견과 단점을 깨닫고 스스로 반성할 줄 안다는 데에 있다. 베이컨이 인간 정신을 주눅 들게 했던 편견을 일깨워 주었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이성을 자만에 차게 한 베이컨적 편견을 일깨워 줄 철학이다.

 

P138 베이컨의 4대 우상론 책 참조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는 영국 맘즈베리 근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평화를 사랑한 야수 - 토머스 홉스

“자연 상태 속에서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가운데 있다.

 

P139 홉스 (Thomas Hobbes, 1588 ~ 1679) 1588년 영국 맘즈베리 근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P145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누구도 감히 맞설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중 괴물로 이상적인 국가란 바로 이 괴물과 같아야 한다. 누구도 반항을 꿈꾸기조차 못할 만큼 국가는 무시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국가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홉스는 자연 상태를 설명한다. 자연 상태란 국가가 생기기 전의 인간 모습을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홉스는 이러한 자기보존욕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자연권이라 부른다. 그런데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들을 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결국, 자연 상태에선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서로서로 싸움을 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계속된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맺는다. 이것이 생존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맺어진 최초의 법, 자연법이다.그러나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고 한 계약이 반드시 지켜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계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를 강제적으로 지키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국가는 이때 등장한다. 계약을 어겼을 때 상대를 무자비하게 처벌하여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도록 하는 힘, 그것이 바로 국가.국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항해서는 안 된다. 만약 국가가 무너진다면,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을 지키게 하는 힘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면 사회는 다시 생존을 위해 서로 끝없이 싸움을 거는 무시무시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강력한 국가가 주는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따라서 국가는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 철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사고를 이론으로 풀어내는지 참으로 재밌었다. 워낙 나라가 혼란한 때에 태어나서 그랬던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한 흔들림 없이 국민들이 편히 기대고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괴물 같은 힘을 가진 국가를 선망했던 것 같다.


 

P147 이러한 신의 없는 태도는 거꾸로 홉스의 철학에 기초한 일관된 행동으로 볼 수 있겠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평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따라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에 따르고 굴복하는 것이 백성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그러고보면 누군가의 삶의 철학을 알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듯 하다. 홉스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행동이긴 하더라도, 그가 추구하던 어떤 이상의 밑바탕이 깔려있는지도 모르니까. 홉스의 삶... 왠지 서글픈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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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Euripides, 기원전 484?~기원전 406?)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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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혁명: 1642~1660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챨스 1세의 전제 강화를 둘러싸고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란이 벌어져, 청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파가 왕을 처형하고 공화제를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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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ill 1599~1658) 영구의 정치가, 청교도혁명 당시 국왕 찰스 1세에 맞서 국왕을 처형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P148 <<리바이어던>>의 영향 때문인지, 흔히 홉스적이다라는 말은 피도 눈물도 없이 무자비한 억압을 뜻하곤 한다. 그러나 홉스느 무척 겁이 많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홉스적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과 달리, 홉스가 가장 시원하고 사랑했던 것은 평화였다. 그럼에도 그는 평화를 얻기 위해 정의니 사랑이니 하는 고상한 이상을 내세우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을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잔인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내세웠다.

 

P148 겉으로 드러나는 사상은 아주 다를지라도, 내면에 흐르는 핵심은 홉스 사상이나 현대 정치 이론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력의 근원은 결국 국민에게 있고, 최선의 정치란 국민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만은 똑같다. 철학의 역사란 결국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진리로 향해 가는 여정이다. 야수 같은 인상을 주는 홉스도 그 긴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점에서는 여느 철학자와 다를 바 없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1596년 프랑스 중부 투렌 지방에 위치한 라에 (지금의 데카르트 시)의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성이 중심이 된 세상을 열다.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P150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지식보다도 유익하다. 뛰어난 싸움꾼이라 해도 쓸데없이 폭력을 쓰면 깡패에 지나지 않는다. 잘 싸우려면 싸움의 기술도 익혀야 하지만, 왜 주먹을 써야 하고 누가 나의 진정한 적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바른 길을 가도록 삶의 나침반을 바로잡는 일. ‘철학함이란 바로 그런 작업이다.

 

P151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1596년 프랑스 중부 투렌 지방에 위치한 라에 (지금의 데카르트 시)의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P151 그 뒤 늦게 일어나는 것은 데카르트의 습관으로 굳어졌고, 이 습관은 죽을때까지 계속되었다.

 

>> 어흑~!! 이 구절을 읽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 마치 나의 늦잠버릇을 합당화시킬 수 있는 아주 그럴듯한 변명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 물론 데카르트야 사색에 잠기느라 늦잠이었고, 나야 그야말로 코고느라 늦잠이긴 하지만서두.. 좌우당간~ 그의 사상과 철학을 떠나서 데카르트가 급~ ~ 무조건 좋아졌다~ 흐흐~ ^^;;


 

P153 지금부터는 나 자신과 세계라는 커다란 책 외에는 다른 지식을 찾아 헤매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내 젊음의 나머지를 여행하고 궁정과 군대를 둘러보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사귀며 운명이 던져 주는 여러 사건 속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 도처에서 부딪히는 사물들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기로결심했다. ………… 나는 나 자신의 행위를 꿰뚫어 보고, 참과 거짓의 구별을 배우려는 소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P155 <<방법 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첫째, 분명하게 참인 것만 받아들일 것, 둘째, 문제를 다루기 쉽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검토할 것(분석), 셋째, 분석으로 밝혀진 단순한 진리에서 순서를 좇아 복잡한 것에 이를 것(종합), 넷쨰, 혹시 빠뜨린 점이 없는가를 검토할 것.

 

P156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2+3=5’가 거짓인데 악마가 참이라고 나르 속이고 있다 해도, 속고 있는 나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이끌어 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P158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근대 서양 사상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진리의 근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이 명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봄으로써, 자연 속의 그 어떤 것보다 한 차원 높은 위치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동물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은 단순한 물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것들은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와 같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이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여느 존재보다 존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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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문화 운동이자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과 관련된 한 시대의 이념이다.

 

 

 

 

스피노자 (Benedict de Spinoza, 1632~1677)는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다락방의 합리론자 - 스피노자

“금세 저주받았다가 금세 축복받고 금세 애도 받았다가 또 금세 비웃음을 샀던 사람”

-      어느 전기 작가의 스피노자 평

“철학자가 되려면 먼저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한다. - 헤겔

 

P161 스피노자 (Benedict de Spinoza, 1632~1677)왕따 철학자였다. (…)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그는 주변의 비웃음과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철학을 펼쳐 나갔다.

 

>> 나는 이런 사람을 존경한다. 누군가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초월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지 아니면, 자신이 믿는 이상과 철학(또는 신앙)에 따라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존경스럽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사람들이 못생긴 외모를 두고 놀리고 조롱했지만, 그와 전혀 무관하게 그는 몸도 마음도 영혼도 건강하게 자랐다고 했다. 얼마나 멋진 그 인지...

 


 

l  코페르니쿠스: Nicholas Copernicus, 1473~1543) 당시 사람들이 믿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P162 스피노자는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P164 왜 스피노자는 그토록 철저하게 유대 사회에서 버림받았으며, 그럼에도 항의 없이 자신의 처지를 조용히 받아들였을까? 스피노자가 버림받은 이유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결코 인간처럼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기뻐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이성 자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이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이성이며 정신이고 곧 신이라고 생각했다.

 

P165 <<성경>>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시대에 이러한 생각은 무신론, 심지어는 악마의 사상으로 여겨졌다. 무신론자라는 비난과는 반대로,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느 그의 범신론 때문에 그는 신에 미친 사람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어떤 비난에도 대꾸 없이 조용히 참고 견뎠다. 세상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만이 진정한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실한 행복을 얻는 길, 지성이나 이성을 최대로 완성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 이렇게 철저하게 세상과 무관계한 듯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을 비웃고 왕따시키고 가만두지 않는 세상에 그 어떤 분노도 화도 내지 않고 또한 위축되거나 비관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산 스피노자. 이미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스피노자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P166 생활은 먹고 자는 것을 빼고는 겨우 그가 좋아하는 파이프 담배를 살 만큼의 여유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떤 기록에도 그가 이 때문에 고통받거나 괴로워했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그는 조용한 사색과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속에서 끊임없이 해탈을 향해 나아갔다.

 

>>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 언급되었던 자살을 택한 보헤미안들에게 내가 보고 싶었던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다. 스스로가 택한 삶 속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 삶을 즐길 줄 아는 자세. 행복에 겨워 비명을 지를 상황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광기에 걸려 자살에까지 이르렀던 일부의 보헤미안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속상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을 모르기에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스피노자라고 어려운 일이 없었겠는가.. 내가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택한 삶 속에서 그 선택의 몫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내 눈에 스피노자는 가슴이 아릴정도로 아름다워보였다.


 

P167 스피노자는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어서 그는 이름을 감추고 <<신학 정치론>>을 독일의 한 출판사에서 펴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책은 이 두 권뿐이었지만, 그는 두 권의 책만으로도 당시 모든 학파와 권력자들의 적이 되어 버리고 만다.


 

P167 이 모든 비난에도 스피노자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가 유대 교회와 가톨릭 교단, 칼뱅파, 루터파 등 당시 모든 교파로부터 비난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허용한 언론 자유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 추구가 교회 문턱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기에 침묵 속에서 자신의 철학을 꿋꿋이 계속해 나갔다.

 

>> 그는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P168 하이델베리크 대학 철학 정교수 초빙 거절 이유 - ‘나의 정신적 자유를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라는 게 이유였다. 그 뒤 그는 박물관에 매장된 듯 렌즈를 갈고 사색을 하며 생활해 나갔다.

 

>> ‘철저한 정신적 자유어쩜 이것이 그의 철저한 침묵의 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철저한 정신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가장 큰 무기는 침묵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를 결론 나지 않는 세상의 말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강한 무기.. ‘침묵’.그렇든 아니든 그를 조금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침묵의 의미를...


 

P168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에 따라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속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눈에 안 띄며 가장 겸손하고 조용하게 일생을 보냈다.

 

>> 아름다운 철학자. 스피노자..


 

P169 스피노자는 철학자로서 완전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의 삶과 철학은 주위의 어떤 비난과 찬사에도 흔들리지 않는 일관되고 완결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비난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스피노자가 아니라 오히려 감정에 휩싸인 채 그의 철학을 오해하는 비판자들이리라. 헤겔은 스피노자를 두고 그의 철학은 생기가 없고 굳어 있지만,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를 공부해야 한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삶과 행동이 곧 철학이었던 철학자의 생활 지침서이다.

 

P170자유인이라 죽음보다 삶을 더 많이 생각한다.”     세상은 욕망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만 금지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나는 그것을 하기 싫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바라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hniz, 1646~1716)는 946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합리주의의 절정 - 라이프니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상의 세계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미묘한 허구다.- 헤겔

 

P171 서양의 17세기는 천재들의 세기라고 불린다. 라이프니츠 (Gotried Wilhelem von Leihniz, 1646~1716)는 그 천재들의 세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 대체 얼마나 굉장한 천재였기에 저자는 천재들의 세기의 완결판이라는 표현을 빌렸을까..? 놀라웠다. 그 천재들의 완결판인 라이프니츠를 읽으시면서 지영이와 우리님이 떠올랐다는 철학 강의 중 선생님의 말씀을 녹음으로 들으면서 지영이와 우리님이 대단한 와우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천재중의 천재.. 라이프니츠는 어떤 철학자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P171 그는 어지간한 종합대학 교수들 전부가 100년 동안 매달려도 하기 힘든 일들을 혼자서 이루어 냈다. 미적분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수리논리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게다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 할 만한 것을 구상하였고, 심리학 쪽에서 본다면 무의식을 처음 생각해 낸 사람이다. 나아가 신학 분야에서는 어지간한 신학자들보다 신의 존재를 더 잘 증명했고, 역사학에서는 사료에 충실한 역사기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지질학, 토지 개량, 수리, 광업, 심지어 연금술 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도 민감하여 법률과 사회 제도에 대한 여러 개선안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도서관 장서 분류법, 교육 개혁과 북극의 위치 탐색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 영역에는 끝이 없었다. 어느 분야를 연구하든지 라이프니츠의 흔적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 가슴을 치거나 감동을 준.. 또는 요점 정리겸 초서록에 갖고 싶었던 부분이 아니라, 놀라움을 가져다 준 부분이라 초서에 집어 넣었다. 읽으면서 그야말로 으악~’이었다. 저자의 말대오 어지간한 종합대학 교수들 전부가 100년 동안 매달려도 이뤄내기 힘든 업적, 심리학, 신학, 수리 논리학, 물리학 등등,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시상에마상에..-_-;; (한 인간에게 이리 많은 능려이 주어졌다니 이거 넘 불공평한거 아닌감..?? ^^;;)

 

P172 라이프니츠는 1646,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라이프니츠는 지적 호기심은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미 여덟 살 때 혼자 힘으로 라틴어를 공부하여 아버지 서가에 있는 방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단다. 이 천재 소년의 지적 발달은 매우 놀라워서 열세 사이 되던 해에는 논리학에서 상당한 업적이 될 만한 생각을 해냈다.

 

>> 흐미~ ^^;;

 

P176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능한 모든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리고 결론지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나열하면 우리는 가능한 여러 세계를 만들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가운데서도 최선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완전하고 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경험 없는 사람이 고르는 것보다는 경륜 있고 유능한 사람의 선택이 더 믿을 만하듯, 완벽한 신이 선택한 세상은 가장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라이프니츠의 결론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은 최선이기는커녕 최악인 듯 보이는 까닭이다. 도처에는 악과 고통이 널려 있지 않은가? 여기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악이 있기에 세상은 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목마른 고통이 있는 탓에 우리는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더 큰 쾌락을 느끼지 않는가. 오직 선만 있는 것보다는 악과 고통이 있는 세상이 더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주장이다.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최상의 세계라고 생각하진 않으나, 악과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을 택해야 함을 깨닫고 배우며, ‘고통이 있기에 때때로 우리가 느끼는 그 행복이 더 깊게 느껴지며, 심지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됨에 이 부분에선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동의한다.


 

P181 철학자로서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의 절정이라고 평가 받곤 한다, 합리주의란 면밀한 이성과 냉철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철학시조를 일컫는 말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로 세상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질서 있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라이프니츠는 종교 사이에, 그리고 권력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이 계속되었던 30년 전쟁 직후의 매우 혼란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이처럼 혼란한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과 처방을 내린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불행히도 세상은 논리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합리적인 해석과 처방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이론적으로 아름답다 해도, 현실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 세상은 더 고통스러워지곤 한다. 마치 선하고 행복한 세상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오히려 수많은 테러와 전쟁을 불러왔듯이 말이다.

 

>> 저자 안광복의 전체를 보는 시각이 마음에 든다. 어쩜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편안함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고 그 쪽으로 치닫는 것은 왠지 모를 갑갑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론이고 주장이고 사상이지 진리는 아니잖나. 그러기에 나름 보는 각도가 다르고 해석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그 역시 달라지는 것이기에 자신의 이론이나 사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조금 거부감이 든다. 암튼. 저자의 결론이 참 맘에 들었다.

 

 

 

로크 (John Locke, 1632~1704)는 영국 서머싯의 링턴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변호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엎어 버려라 - 로크

“인간 정신은 빈 서판과 같다.

“로크는 행복한 철학자다.

 

P183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이 로크 (John Locke, 1632~1704)를 제대로 안다면 영화 욕심에 군침 흘릴지도 모르겠다. 로크의 생애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귀부인들과의 아름다운 로맨스, 잦은 혁명과 전쟁으로 넘쳐 나는 액션 장면, 정치적 음모들이 빚어내는 긴장감, 게다가 제임스 2, 보일, 뉴턴 등 장면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유명 인물들까지!

 

>> 오우~~!! 대체 어떤 철학자이길래 이리도 두근대는 멋진 철학자로 설명이 되었을까,.? 일단 수려한 외모라는 말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인터넷을 뒤졌다. ^^;; .. .. 딱히 내 스탈은 아니지만..^^;; (젊었을 때 사진은 못 보았으니..^^) 암튼, 그는 무척 영화 같은 삶을 산 행복한 철학가였나 부다.


 

P184 로크의 삶에는 정의의 수호자도 악한 무리도 없다. 그는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신중해지라고 당부한다. 우리 이성에는 한계가 있기에 누구도 확실하게 내 의견이 곧 정의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l 

형이상학: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근본 원리따위를 사유나 직관에 의해 연구하는 학문


 

P186 당시 대학에서 연구를 허용한 자연과학 분야는 의학뿐이었으므로, 그는 의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대학의 의학 수준이란 아리스토텔레스나 히포크라테스 같은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권위 있는 책들에 환자의 증상을 끼워 맞추는 데 불과했다. 그는 이런 전통 의학보다는 아직 톱으로 뼈를 썰고 흡혈 거머리를 사용하는초보적인 수준일지라도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새로운 의학 지식을 더 신뢰하고 열심히 연구했다. 로크는 경험에 기초한 사실 확인과 해석을, 편견과 혼란을 없애고 확실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매력적인 진리 탐구 방법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 늘 어떤 학문 분야든 선구자는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누구나 당연시여기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인 쉽다 어렵다를 떠나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 자체가 내겐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내가 철학사를 읽으며 가장 매력을 느꼈던 부분은 바로 철학자들의 그런 부분였듯 싶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질문조차 어색한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하고 실험하고 경험하고 사고하는 이들. 얼마나 멋진지.. 얼마나 매력적인지...


 

P190 로크는 <<인간 오성론>>에서 마치 빼어난 해부학자가 신체의 영역을 설명하듯이 우리의 정신을 분석하여 보여 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빈 서판(글씨를 쓰는 판>’과 같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며,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진리나 절대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경험을 통해 참, 거짓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로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근거 없는 믿음을 권위에 기대어 강요하는 전통을 경계한 것이다.


 

P192 1692, 쉰아홉 살의 로크느 이제는 결혼하여 마샴 부인이 된 옛 애인의 시골집에 거처를 정했다. 런던의 그을린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보다 건강에 좋았을뿐더러, 마샴 부인은 옛 애인이기 전에 그에게 가장 훌륭한 정신적 친구였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마샴 부부와 로크는 여행을 한 가족처럼 지냈으며, 어떤 스캔들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로크는 지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된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1704,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주로 이곳에서 살면서 집필활동에 몰두했다.

 

>>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성숙된 관계인지.. 로크도, 마샴 부인도, 그리고 미스터 마샴도..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이.. 아름다운 사랑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어쩜 세속의 눈으로 보면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도 이해를 하지만, 성숙한 정신적 관계는 세속의 시선과는 무관한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로 이어지게 되는 것. 특히, 미스터 마샴의 인품이 내겐 특별하게 다가왔다.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911~1776)은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시골 유지 아들로 태어났다.

 

 

 

 

 

 

 

철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

(흄은) 비로소 나를 (이성이라는) 독단의 잠에서 깨워 주었다.- I. 칸튼 -

(흄은) 에피쿠로스의 식용 돼지들 가운데 제일 뚱뚱한 돼지 새끼다.- E. 기번

 

P195 (Daivd Hume 1711~1776)은 뜬구룸 위로 올라가려는 철학에 일침을 놓는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의미는 일상을 반성케 하여 이따금 생활 태도를 교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직업 철학자들은 정교한 논리 싸움에 몰두하여,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인간 능력으로는 밝히지도 못할 거창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다.

 

P195 흄은 1711, 영국 스코트랜드 에든버러의 시골 유지 아들로 태어났다.

 

P200 그는, 우리의 도덕은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성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알려 줄 뿐, 무엇이 덕이고 악덕인지 알려 주지는 못한다. 이를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의 가슴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공감하고, 감정을 통해 무엇이 인간적이고 도덕적인지를 판단한다. 나아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려면 안정된 법질서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법률에만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설사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지라도 전체게 이익이 된다면 이를 받아들일 줄 아는 공감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서 도덕적일 수 있다.그는 종교나 철학 이론에 기대지 않고 인간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지식과 도덕을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흄은 낙천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철학에서는 혁명가였다.

 

P203 그가 의심하고 회의했던 것은 일상생활이 아니었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에서 머리 떨어진, 인간이 알 수도 없는 문제들에 대해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을 짓고 있는학자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 낸 학문은 결코 확실할 수 없으며 의미도 없는 작업이다. 철학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신과 영혼, 진리같이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들에 굳이 철학자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시인이나 사제들의 허풍만으로도 충분하니까.그는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철학은 오히려 상식의 세계로 내려와 불완전한 인간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늘 겸손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삶을 성찰하게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칸트는 흄의 책이 비로소 나를 (이성이라는) 독단의 잠에서 깨워 주었다라고 말했다. 가장 완벽한 사람은 가장 불완전한 사람이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발전은 없고 현상 유지나 퇴보만 남았다는 뜻인 까닭이다. 건전한 회의주의는 학문과 삶의 건강을 지켜 준다. 완벽한 이론을 주장했던어떤 철학자들보다도 낙천적이고 건강했던 흄의 삶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 (Francois-Marie Arouet, 1694~1778)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렴치를 분쇄하라! - 볼테르

“우리는 진리의 힘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 종교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 빅토르 우고 -

 

P205 볼테르는 썩어가는 교회, 왕권이 흔들리고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무너져 가던 계몽의 시대, 현실에 대한 그의 재치 넘치는 신랄한 풍자는 사람들의 가슴을 저항심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는 새로운 문화 코드로 자리 잡던 이성적, 합리적 사고, 자유와 민주적인 제도들을 대표하는 시대정신이었다. 그래서 후대에 빅토르 위고는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썩어가는 권력을 풍자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P206 볼테르는 1694,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P207 천재들은 종종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을 스스로 깨우치곤 한다.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교 측이 그토록 강조했던 신앙이 아니라 신을 정밀하게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쓰였던 정교한 논쟁술을 그는 신을 의심하는 데 썼던 것이다.

 

>> 피식피식 웃음이 삐져 나왔다. 그 똑똑한 천재 학생은 가르쳐 주는대로 배우지는 않고 그걸로 왜려 창을 들이대는 엉뚱한 무기로 활용했으니..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선생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기도 하고..^^;;


 

P207 볼테르의 생활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그는 박사들과 함께 신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벌일 만큼 진지하고 하구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매우 활달했고 심지어 방탕하기까지 했다. 밤늦게까지 마치 십계명을 시험하듯놀다가 종종 아버지에게 쫓겨나기도 했고 친척집에 보내지기도 했다. 어찌된 셈인지 사람들은 그이 방탕에 관대하기만 했다. 뛰어난 재치가 악행마저 유쾌한 사건으로 보이게 했던 탓이다. 뒷날 볼테르는 신이 우리를 세상에 내보낸 까닭은 쾌락을 마음껏 즐기게 하기 위해서다라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웠는데, 그의 생활은 이 말을 증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 무척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고 있는 재치 넘치는 천재. 그것에 당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누릴 줄 아는 볼테르는 분명 멋지고 매력적이고 경외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수 많은 사람에게 대리만족의 즐거움도 느끼게 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의 방탕함은 여러 사람에게 방탕의 모습으로가 아닌 자신들의 상상 속에 많은 부분 미화되어 비쳐졌을 것이다.

 

내 동생 친구 중에 볼테르와 비슷한 아이가 있었다. (이 부분에서) 무척 아름답고 똑똑하면서도 살짝 방탕스러워보였던 아이. 나는 스스로 정해 놓은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한 언니였다면, 그 아이는 아주 자유 분방해 보이는 아이였는데, 여느 아이들 같았으면 아마도 내 동생이 그런 아이와 어울리지 못하게 했을 나였다. 내 동생을 못 믿는 건 아니었고 자신의 삶을 똑뿌러지게 헤쳐나가는 동생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행여나 물이 들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하지만 그 아이는 달랐다. 대학 수석을 놓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일도 똑뿌러지게 책임있게 해내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던 것이다. 학생이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다하면서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 그것에 대해 내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물론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도 즐긴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대범함에 놀라웠고,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삶의 모습만이 옳은 삶은 아니라는 것. 사람마다 저마다의 색깔이 있고,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면, 나와 다른 모습의 삶이라해도 그 나름의 의미는 있고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볼테르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 아이가 떠올랐다. 내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아이..


 

P208 볼테르는 1721년 어느 연회에서 직위 높은 귀족에서 대놓고 말대꾸를 하다가 하인에게 흠씬 얻어맞고 만다. 격분한 볼테르는 다음날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로 유명 인사를 감옥에 오래 가두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된다. 결국 그는 프랑스를 떠나는 조건으로 풀려나 영국으로 추방된다.

 

>> 하하하~ 넘 웃겼다~ ^^;; 불 같은 성격이란..^^ 그의 반항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분위기는 마치 캔디의 테리우스를 닮았다. 넘 멋지다..^^


 

P209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인가에 대해 논쟁을 한다면뉴턴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진리의 힘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엄밀한 논증에 기초한 뉴턴의 자연과학은 볼테르에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 절대 동의하고 공감한다. 진리의 힘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히는 사람은 존경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존경은 커녕 경멸로 이어질 것이다.


 

P210 나의 목표는 사소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정신의 역사를 쓰는데 있다. 나는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인간이 어떤 단계를 밟아 야만 상태에서 문명을 이룩해 왔는지 알고 싶다.볼테르는 역사를 꿰뚫어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를 예술과 정신의 진보에서 찾았다. 이 원리를 깨달은 철학자만이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다.


 

P212 엄숙, 경건이라는 포장 속에서 온갖 악행이 행해지던 시대, 그의 삶의 태도는 퇴례적이라기보다는 쾌락을 솔직하게 누릴 줄 아는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 그래서 그가 멋진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어서..라거나 삶이 나를 알아주지 않기에.. 또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성 포기가 아닌, 자신이 삶에서 누리고자 하는 즐거움과 쾌락을 당당하게 누릴 줄 아는 것. 겉으로 교양과 엄숙을 포장하며 뒤에서 온갖 짓 다하는 썩은 귀족들의 구역질 나는 생태가 아닌, 자신의 삶을 진정 즐길 줄 아는 것, 그 당시 그것을 쾌락 추구로 보였을지 모르나, 저자의 말대로 퇴폐적이라기보단 쾌락을 솔직하게누릴 줄 아는 건강한 삶의 방식이었을 거란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P213하느님 저를 친구들에게서 구원해 주소서. 내 적은 내가 처치하겠습니다.”라고 뇌까릴 정도였다.

 

>> 푸하하하하~ ^^ 한탄도 저렇게 유머 가득 멋스럽게 하는 볼테르~ ^^

 


 

P214 볼테르는 사상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이성과 평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억압에 맞선 투사였다.

 

>> 샤르트르가 떠올랐다.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그.. 프랑스에는 참으로 매력적인 철학가가 많았던 듯싶다.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수리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 루소

(제대로 된 교육은)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지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한다.

“나는 (루소의) 책을 읽으면 네 발로 기고 싶어진다.- 볼테르

 

P217 루소 (Jean-Jacques Rouseau, 1712~1778) 1712,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수리공의 둘쨰 아들로 태어났다.

 

>> 오우~ 난 지금껏 루소가 프랑스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


 

P217 열여섯 살이 되던 1728년 어느 날, 루소는 산책 중에 성문이 닫혀 버ㅣ자 마침내 숙소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진정한 삶을 찾아 무작정 방황의 길을 떠났다. 시인 서정주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루소의 삶이 바로 그랬다. 근 정말 바람같이 스산하게 떠도는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성숙시켜 갔다.

 

>> 바람이 키운 아들.. 로만틱하거나 멋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가슴 한 켠에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창 예민했던 나이.. 책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겨했던 소년 루소. 너무 늦은 시각 성문은 닫히고, 그 길로 방황의 길을 떠나는 그 뒷모습이 그려져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준비를 하고 떠난 것이 아닌 그냥 순간의 결정으로 무작정 떠나는 루소. 여비도 옷도 아무런 준비 없이 오로지 진정한 삶을 찾아 무작정 떠났던 방황의 길.. 그 때 그의 머리 속엔 어떤 생각들로 가득했을까..? , 아무런 생각 없었을까..? 자유를 느꼈을까...? 암튼, 아무리 미화시켜서 상상을 해보려 해도 싸한 아픔에 먹먹해지는 가슴을 어쩌기가 힘들다.


 

P225 1761, 연애 소설 <<신 엘로이즈>>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루소가 이 집을 찾아오던 한 백작부인에게 느낀 연애 감정을 소설화한 것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황홀경 속에서 쓰인이 책은 나오자마자 프랑스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사고, 감정의 절제가 미덕이던 시대, 루소는 애절하고 강렬한 감정을 거침없이 분출했다. 이로써 이제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은 수치라기보다 유행이 되었다. 루소가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대접받는 이유이다.

 

>> 참으로 많은 색깔을 가진 루소이다. 루소가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이었다는 것도, 그가 성공한 음악가였다는 것도 이색적이고, 철학가에 낭만주의 문학가라는 것. 참으로 많은 얼굴을 가진 루소다.


P225 1762년 일종의 교육 성장 소설인 <<에밀>>이 나왔다. 이 책은 루소가 20년간의 성찰과 3년의 집필 끝에 이루어 낸 역작이다. (…) 소설 속에서 에밀은 태어날 때부터 루소가 경멸하는 대도시의 해로운 사회 풍속과 완전히 떨어져 자연과 벗하며 자란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말라는 규칙 외에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15년간 에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선생은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지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한다’. 요샛말로 한다면 학생 중심의 발견 학습과 인성 교육을 하는 셈이다. <<에밀>> 2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육체의 단련, 심신의 조화, 강제보다는 자율에 입각한 교육을 지향하는 혁신적인 교육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 이런 그가 왜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아이들 모두를 고아원에 보냈던 것일까..? 루소가 성공하기 전 너무 가난해서 키울 수 없었던 환경이었기 떄문이었을까..? 그는 아이들을 다시 찾아왔을까..? 부인이었던 테레즈 르 바쇠르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것을 아무런 반항 없이 찬성했던 걸까..? 많은 의문이 따른다. 루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하고 존경받는 철학자이고 문학가임을 알기나 했을까..? 루소의 피는 이어지고 있을까..? 암튼.. 가슴 아픈 일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지간에..


 

P227 루소는 정치사상 측면에서 국민주권과 저항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루소의 사상은 이성과 합리의 잣대로 모든 일을 평가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진정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해준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져 있다. 명예, 도덕, 수치심 들은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나의 요구를 재단하는 도구들이다. 이것들은 삶에 질서를 주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듯 보인다. 반면, 필요 없는 열등감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나의 삶을 억누르고 왜곡하며 비굴하게 만들기도 한다. 루소는 합리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보이는 사회의 가치 규범들이 사회와 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지를 되묻는다. 그러곤 타락한 문명 이전의 자연 상태로 상징되는 이상적이고 선한 인간의 본성을 제시함으로써, 제대로 된 삶과 사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루소의 외침은, 이성과 도덕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우리들에게 진정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찾아보라는 호소일지도 모른다.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동프로이센의 수도이긴 했지만 인구 5만명 안쪽의 조그마한 도시였다. 칸트는 이 도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 도덕과 내 마음속 도덕 법칙 - 칸트

“ 더욱 빈번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것은 나의 심정을 경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운다.  ,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

 

P229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1724년 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동프로이센의 수도이긴 했지만 인구 5만 명 안쪽의 조그마한 도시였다. 칸트는 이 도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 칸트의 여러가지 독특한 성향 중에서도 바로 이 부분이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가 물론 철학자이고 자신의 시간을 철칙으로 지키며 자신의 삶을 컨트롤 했다지만, 다른 세상을 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을까..? 물론 다른 세상을 알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게다. 그는 책을 통해서 세상을 알았으니, 단지 책을 통해 보고 느낀 그 곳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과연 정말 없었을까..? 참으로 독특한 철학자 칸트..


 

P231 강사 일을 하면서 칸트는 독특한 교육 원칙을 하나 세웠다. 중간 수준의 학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바보는 도와줄 길이 없고 천재는 자기 힘으로 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참으로 이해되는 부분이다. 천재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고, 바보는 대책이 없고, 가능성이 있는 중간 수준의 학생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 역시 선생님이다.


 

P231 칸트의 유명한 하루 시간표. 칸트는 일생에 단 두번 일과표에서 벗어났단다. 한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또 한번은 프랑스 혁명 소식이 실린 신문 기사를 읽다 일과표를 어겼다.

 

>> 그의 성실함과 엄격한 시간 관리에 경외심도 일었지만, 칸트가 내 남편이 아니어서 하느님한테 감사했다.^^;; 칸트 같은 남자가 내 남편이었다면 숨을 못 쉬었을 것 같다. 그 엄격함과 절대적인 성실함 앞에 질식할 것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존경심은 있었을지 몰라도.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유를 느끼고 싶고, 어떤 규율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고 싶은 나. 그런 절대적인 엄격함이 억누르는 일상 속에 견뎌내지 못했을 것 같다.


 

P233 일과표를 보면 알 수 있듯, 칸트는 벼락치기로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공부 벌레였지만 그렇다고 꽉 막힌 사람도 아니었다. 사교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했고 재치 있는 이야기로 인기가 많아 어딜 가나 환영받았다. 그럼에도 사색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에 걸친 규칙적 일과 덕분에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 .. 그렇게 앞뒤좌우상하로 꽉 막힌 학자가 아니었구나. ^^;; 삶을 즐길 줄 아는 철학자였고, 공부도 사색도 열심히 하는 성실함이 삶 전체에 깔려있던 철학자. 그의 성실함을 조금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습관이 되면 미래의 일이 과거의 것처럼 선명해진다는 구본형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구본형 선생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쓰시고, 칸트는 매일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공부를 하고 사색을 하고, 나는 매일 시간표에 따라 잠을 충실히 잔다. 이런~


 

P234 칸트는 흄의 사상 덕분에 이성의 합리성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밝히리라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과학의 확실성을 세우기 위해 무려 11년 도안 고민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781 51세의 나이에 <<순수이성비판>>을 펴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800여 쪽에 달하는 내용을 5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날아갈 듯 썼단다.

 

P235 이 책을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어려움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난해한 문체에 익숙해지면 논증의 정교함에 푹 빠져 버리고 만다. 그토록 복잡한 논증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하나의 목표로 향하는 인간 지성의 결정체, 그것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이다.

 

P235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한 칸트의 작업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흄이 무너뜨린 경험의 확실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에 맞서 신과 신학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세계를 과학의 세계와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세계로 나누었다. 과학의 세계에서 칸트는 인간의 경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흄이 무너뜨린 경험의 확실성을 다시 세웠다. 흄은 경험의 확실성을 바깥 대상에 두어서 회의론에 빠졌다면, 칸트는 그 확실성을 우리의 정신이 경험을 만들어 내는 구조에서 찾았다.

 

P235 우리의 경험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만들어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험을 만들어 낸다. 또 같은 장미꽃이라도 딱정벌레와 토끼에게 장미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눈의 생김새와 두뇌 구조가 다른 탓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 형식과 열두 개의 범주라는 지성의 구조를 사용하여 인간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지성의 구조는 경험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여기서 경험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경험도 확실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흄이 일으켰던 이성과 경험의 위기, 과학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이와 반대로 칸트는 신과 종교는 과학이 밝힐 수 없는 세계에 있다고 함으로써 과학의 위협으로부터 신을 지켰다.

 

P236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인과 법칙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이다. (칸트는 자연현상이나 과학에 대해서는 인과 법칙을 적용했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인간이 자유로운지, 왜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다. 자유와 도덕은 신과 종교가 있는 세계, 즉 과하이 밝힐 수 없는 세계에 있는 까닭이다. 신에 대해 과학적 질문을 던질 수 없듯, 도덕에 대해서도 이유를 묻지 말아야 한다. 이익과 이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의무에 따라 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칸트의 윤리학은 의무의 윤리학이라고 불린다.

 

P237 인간에게는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답하는 이성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실천이성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무 의식이다. 의무 의식에 따라 행동의 결과에 관계없이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주위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단지 동정심이 일어서, 남을 돕는 게 좋아서 돕는 일은 참된 도덕적 행동이 아니다. 동정심도 없고 기쁨도 얻지 못하지만 도와야 한다는 의무 의식에 따라 남을 돕는 행위가 참된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 행위의 원칙인 도덕 법칙은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다만 ‘………해야 한다라는 정언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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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행위 그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도덕적 명령. 나 자신의 격률. 즉 생활 신조가 모든 사람의 것이 되어도 좋다고 인정될 떄 그것이 곧 도덕 법칙이 되는 것이다. 정언명령에 반대되는 것이 조건부 명령 즉 가언 명령이다. 예를 들어 상을 받고 싶으면 어려운 친구를 도와라처럼 ‘…… 한다면이란 조건이 없으면 명령이 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P238 …… 더욱 빈번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것은 나의 심정을 경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운다. 즉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소의 도덕 법칙.>> 별일이다. 절절한 사랑고백도 아니고 로맨틱한 내용도 아닌데, 이 글을 읽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평생을 삶의 진리를 찾아 탐구하고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성실함으로 바친 위대한 철학자 앞에 느껴지는 경외심 때문이었을까..?


  

 

 

헤겔 (G. W. F. Hegel. 1770~1831)은 뷔르템베르크 공국 (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역)의 수도 슈튜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절대정신의 철학자 - 헤겔

“진리는 언제나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 - <헤겔 전집> 속지에 적힌 소포클레스의 말

“철학자로 태어나다니 신의 저주를 받은 거야.- 헤겔의 불평

 

P243 헤겔 (G.W. Hegel, 1770~1831)은 뷔르템베르크 공국(지금의 독일 남서부지역)의 수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P247 프랑스 혁명을 어떤 내실도 갖추지 못한 죽음, 분열이고 양배추 대가리를 둘로 동강 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가 비판한 것은 현실로 나타난 무질서였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혁명의 의미도 모르고 날뛰며 약탈과 착취를 일삼았고, 혁며이 가져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흥분하고 열광했다. 하지만 헤겔은 혁명의 본질적인 면을 파악하려 애썼다.모든 사건에는 본질적인 면이 숨겨져 있다. 헤겔에게 그 본질적인 면이란 절대정신 Absoluter Geist이고, 인간의 역사는 이 절대정신이 그 본질을 점차 분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역사는 이성적인 자유를 점차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고대 국가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만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만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발전은 절대정신이 아닌, 몇몇 뛰어난 영웅들의 활약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절대 정신이 이들을 조정하고 있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영웅을 선택해 자신을 실현시킨다고 본 것이다군주

 

P248 말을 탄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이 광경을 보고는 감격에 겨워 말을 탄 절대정신(세계정신)을 보았다라고 적었다.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로 확대한다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등에 업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절대정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에 입각하는 살아있는 절대정신을 자신의 눈으로 본 헤겔의 가슴 벅찬 감격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라면 어땠을까..? 난 요한 바오로 2세를 2m 간격 정도에서 뵌 적이 있다. 파라과이에서 대학 다닐 당시 친구의 권유로 청소년 movement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초대로 함께 했더랬는데, 그때는 단지 교황을 가까이서 뵌다는 것일 뿐, 다른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그런 느낌은 없었더랬다. 단지 유명인사를 가까이서 뵈었다는 마치 유명한 관광 명소에서 사진 찍고는 왔다갔다는 기념 증거물을 남기는 그런 느낌였을 뿐. 하지만 지금 만나뵈면 아마 그 느낌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만나뵈고 싶어도 뵐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셨지만. 암튼, 존경하는 누군가를 가까이서 뵌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기운이 내게로 전해져 오는 듯한 그런 느낌 아닐까..? 그래서 함께 이는 벅찬 감동..


 

P249 변증법은 정(긍정) – (부정) – (부정의 부정)의 형식이다. (…) 정명제는 반명제에 의해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명제가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반명제는 오히려 정명제를 더욱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합명제는 정명제와 반명제의 내용을 종합하여 더 확실한 사실을 보여 준다. 변증법의 성격은 이렇듯,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P250 하이델베라크에서 그는 세 번째 대표작 <<엔치클로페디>>도 출간했다. 엔치클로페디는 영어로 ‘Encyclopedia’즉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헤겔은 절대정신과 변증법의 논리로 그 당시에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학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철학 체계를 완결 지었다. 이 때문에 헤겔의 철학은 도저히 침몰시킬 수 없는 거대한 함선이 되었다. 헤겔은 더욱 유명해졌고, 마침내 프러시아 제국의 사상적 중심지로 떠오르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대표작 <<법철학>>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P250 베를린 대학 교수 시절의 헤겔은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던 청년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혁명 이후 계속된 혼란을 바라보며 공허한 자유 이념의 한계를 깨닫고, 시대를 구원할 대안을 국가에서 찾았다. 헤겔은 당시 출현한 시민 사회의 혼란은 이념, 정신의 부재 탓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 부족한 이념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라고 생각했다.

 

P250 헤겔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이다. 그는 이 공동체를 인륜이라 불렀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서 최고의 인륜이다. 국가는 나아가야 할 이념을 제기하면서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인륜이 되는 모델을 프로이센에서 찾고, 인륜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입헌군주제를 제안했다.


 

P251 헤겔은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큰 철학자이다. 그가 죽은 뒤 출간된 <<헤겔 전집?? 각 권 속표지에는 진리는 언제나 여러가지로 이야기된다라는 소포클레스의 말이 적혀있다. 어떤 이들은 헤겔의 절대정신에서 독재를 정당화하는 파시즘의 냄새를 맡으며 그를 인간 소외의 주범으로 비판한다. 실존철학자들이 그들이다. 또 어떤 이는 역사를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사회변혁 이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는 진리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 뒤 전개된 모든 철학에서 헤겔은 넘어야 할 산으로 남아있으면서 계속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헤겔을 공격하건 받아들이건 간에 현대 철학은 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헤겔에 대한 평가(?)를 읽으면서 프로이트가 떠올랐다. 심리학의 거장 프로이트. 그이 이론을 받아들이던 심리학에서 프로이트 학파와 반프로이트 학파로 나뉘어진다는 글을 읽고는 그가 심리학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가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자신들이 몸 담았던 분야에 거대한 산이 되어 여전이 그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위인들. 누구에게나 주어진 24시간 속에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자신들의 성을 구축한 거장들. 나도 내가 속한 이 곳에서 조그맣지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랜 시간 기억될 나의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P252 생전에 헤겔은 철학자로 태어나다니, 신의 저주를 받는 거야라는 농담을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혼란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시대의 본질을 모색한 축복받은 철학자였다. 저주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난해한 문체와 방대한 저작들과 씨름해야 하는 후대 학자들이리라.

 

>> 하하하~ ^^;; 저자의 표현에 그만 까르륵~ 넘어갔다. 나처럼 철학의 자도 모르는 사람도 헤겔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이미 여러 책을 통해 많은 위인들의 입을 통해 들어 있을 정도니, 그의 명성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니 저주받을 사람은 헤겔 본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난해한 문체와 방대한 저작들과 씨름해야 하는 후대 학자들이라는 안광복 박사의 말이 얼마나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까르륵 넘어가게 했는지..^^


 

P252 헤겔 철학은 어렵다. 그러나 헤겔은 어려운 만큼 깊은 가치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진 철학자이다.

 

>> 헤겔 헤겔 헤겔~!! 사실 그가 변증법을 내놓은 철학자임은 수도 없이 들어왔고 헤겔~’ 하면 변증법~!!’ 하고 답해야 할 것 같은 통과게임 같은 느낌마저 드는 것은 아마도 그렇게 귀가 따갑게 들어온 덕분일게다. 너무나도 많이 들은 이름. 호기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녔으나 인터넷을 뒤져 찾아볼 만큼의 관심사는 아녔던 철학자. 하지만 안광복 선생을 통해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쇼펜하우어 (Arther Shopenhauer, 1788~1860)은 1788년 2월, 유럽 북쪽의 단치히 (발트 해에 닿아 있는 폴란드 북부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지극한 사랑이 낳은 염세주의 - 쇼펜하우어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고 세계는 근원적으로 약하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젊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괴테의 충고

 

P254 독일 철학자 쇼펜아우어 (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큰 흐름에서 본다면 메이저급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계를 무대에 비유한다면, 주연배우이고 싶어했지만 결국 밤무대 가수 수준에서 삶을 접어야 했던 사람에 가깝다고 할까?

 

>> 하하하하~ 메이저급 철학자가 아닌, 주연배우이고 싶어했던 밤무대 가수급의 철학자.. 하하하하~ 표현이 너무나도 걸작이었다. ^^ 암튼. 놀랍다. 내가 기억하는 몇 안되는 철학자들 중의 한 명인 쇼펜하우어가 겨우 그정도의 철학자 등급으로 매겨졌다는 사실이..


 

P254 사실 그는 철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철학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정작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 중에는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철학 사상보다는, 엽기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기이한 행동과 돌출적인 언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이다.

 

>> 갈수록 태산이다. ^^;; 정말 궁금~ 쇼펜하우어는 대체 어떤 철학자인지.. 밤무대 가수 정도의 철학자가 이 서양 철학사 책에 이름을 올린 것도 궁금하다. 넘 엽기적이어서 올렸나..? ^^


 

P255 쇼펜하우어는 1788 2, 유럽 북쪽의 단치히 (발트 해에 닿아 있는 폴란드 북부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네덜란드계였다.


 

P257 어머니와의 잘못된 관계 때문인지 그는 여자를 경멸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여자란 불행의 근원이며 참된 감정이나 이해력을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보았다.

 

>> 어렸을 때의 경험과 기억은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어머니로 인해 평생 여자를 불행의 근원이라 생각하며 독신으로 지낸 쇼펜하우어. 그토록 그는 감성이 여린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강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그만큼 엄마의 사랑을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P258 원래 괴팅겐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칸트 연구가인 슐체의 강의에 감동을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슐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플라톤과 칸트는 그 뒤 평생토록 그를 인도하는 두 별이 되었다.

 

P258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며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를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진리를 알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를 넘어 세상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칸트에게서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외부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거나 결정되지 않으며 주체인 인간 의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쇼펜하우어 특유의 우울함이 예전에는 일종의 정신 질환 같았다면, 이제 두 철학자의 사상을 만나면서 염세주의 사상이라 할 만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 큭큭~ 일종의 정신 질환이 사상이라 할만한 것으로 탈바꿈.. 하하하하~ 돌아가시겠다~ 본인은 무척 심각하고 진지했을텐데 정작 남들의 시선엔 정신질환 같은 우울증으로 보였다는 것.. 참 재밌는 현상이다. 사실 난 괜히 우울한 척 하고 심각한 척 하며 다니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을 좀 더 가까이 알고 보면 그야말로 ~’인 경우가 많다보니.. 물론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한 사람들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더라는 것이 내 경험상의 이야기. 정말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깊은 사고를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사는 이들은 유쾌하고 명랑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선지 쓸데없이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진지한사람들 보다는 하하~ 웃으며 넘길 줄 아는 여유롭고 밝은 사람이 난 좋다.


 

P259 쇼펜하우어의 박사 학위 논문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는 별다는 반응을 얻지 못했따. 그러나 이 논문을 주의 깊게 읽은 소수의 사람 중에는 대문호 괴테도 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와의첫 만남을 거의 아려지지 않고 있지만 학식이 깊고 업적이 많은 젊은 쇼펜하우어 박사의 방문은 나를 흥분시켰고 서로 배움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이 대가는 여러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젊은 염세주의자에게 다음과 같은 적절한 충고를 던져 주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대문호의 관심을 받고, 대문호의 조언을 듣고, 대문호의 마음을 흥분시켰던 젊은 염세주의 철학자. 그가 철학계에선 크게 이뤄좋은 업적이 없어 밤무대 가수 정돌 비유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대문호의 가슴을 흥분시킬 만큼 매력적이고 학식 깊은 철학자였던 것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괴테처럼 대문호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고 흥분하며 사랑어린 조언까지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떨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역시 모두 헛되고 헛되도다..하면서 자신의 세계로 숨어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갑자기. 그의 느낌은 어땠을지..


 

P260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 자체로는 매우 의미 있는 액이다. 당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 세계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학문은 이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결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신체도 객관화된 의지일 뿐이다. 자연과 인간을 움직이는 의지는, 비록 겉으로 볼 때 그 차이점을 잘 알 수 없지만 원리적으로는 모두 같다. 의지란 곧 충동과 욕망을 뜻한다. 식물이 자라고 돌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고, 동물이 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모든 것은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

 

P260 그런데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것들은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충동과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의지 (욕망)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므로, 채우고 또 채워도 여전히 생겨난다. 인간은 그렇게 충족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늘 고통을 받는다. 따라서 그는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고 세계는 근원적으로 악하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심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충동과 요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 그때에만 바다와 같이 고요한 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고요함을 느끼기 위해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는 쇼펜하우어. 금욕적인 분위기에서 보면 에피쿠로스와 비슷한데, 한 명은 쾌락주의자로 불리고, 다른 한 명은 염세주의자로 불리운다. 재밌다.


 

P263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앞으로도 주요한 철학 사조가 되기는 힘들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 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높은 기대치에서 나온다는 점 말이다. 염세주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비판 정신에 바탕을 두어야만 의미가 있다. 숱한 비난과 조롱에도 쇼펜하우어는 단순한 기인이 아닌, 현대 사상과 문명에서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철학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상 내면에 깊이 깔린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이다.

 

>> 저자의 결론에 가슴에 싸한 아픔과 함께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그이 극도적인 염세주의적 행동 그 이면엔 인간 혐오가 아닌,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가 깔려있다는 말이 내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사실 난 쇼펜하우어를 학생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잘 알지도 못했지만, 그렇게 온 세상의 모든 걱정은 다 짊어진 듯한 세상을 등지는 것 같은 그의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삶을 살짝 엿보며, 아파 누워있는 아빠는 무관심한채 내버려두고 파티를 일삼는 한 여인에 대한 실망감과 마땅히 받아야 했던 엄마의 사랑은 커녕 차가운 냉랭함은 그에게 세상은 차갑고 고통으로 가득한 것으로 비쳐졌던 것은 당연한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상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고 감성이 여렸던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아픔이 함께 일었다.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1758~1857) 실증주의의 창시자. 그는 프랑스의 몽펠리에서 태어났다.

 

 

 

 

 

 

보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 - 콩트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P265 허수아비는 아무리 때려도 저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대상을 세워 놓고 마구 공격하는 것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라고 한다.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1798~1857)는 실증중의의 창시자로 불린다. 실증주의란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만 탐구하려는 학문적 견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P265 실증적인 것만을 중시하는 과학 문명은 화경 파괴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계량화하려는 실증주의는 도저히 점수화할 수 없는 많은 가치들을 망가뜨리는 폐해의 근원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P266 사람들 대부분이 콩트의 허수아비를 보고 있을 뿐, 사상가 콩트와 실증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콩트가 현대 과학적 사고의 가장 중요한 기틀을 다진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는 한물간 철학자처럼 평가받는 콩트를 굳이 다루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P266 콩트는 1798년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P267 그의 반항적 기질은 이곳에서도 여전했다. 그런데도 콩트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그가 관료들의 무사 안일, 속물근성, 대중에게 지지받지도 못하면서 고집만 부리는 권력자들의 못된 속성 등에 저항했던 까닭이다.

 

>> 프랑스엔 이런 반항적이면서도 인기 많은 학생 출신의 매력적인 철학자가 많았던 듯싶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볼테르가 떠올랐다. 재치와 풍자의 천재 철학자. 난 반항 끼가 많고 모범적이지 않는 건달스러운 학생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겐 모범학생이 더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느껴지는 부류다. 하지만 꽁트처럼 자신의 본분인 학생의 의무인 공부도 잘 하면서 정당치 못한 것에 꿈틀거릴 줄 알고 소리를 낼 줄 아는 반항아. 넘 매력적이지 않나..? 이런 아이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자신의 할 일을 다 하면서 책임을 다하면서도 반항하고 삶을 느끼려고 하는 아이들은 확실히 느끼고 체험하는 삶의 폭이 다르다. 지나고 보니 알겠다. 학생 시절 내가 좀 더 용기를 내어 이런저런 경험을 해보아도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


 

P267 어느 날, 한 교수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거만하게 질문을 던지자, 콩트도 똑 같은 자세로 답변을 했다. 교수는 콩트의 무례함을 꾸짖었고, 콩트는 교수의 무례함을 고발하며 파면을 요구하는 서명을 돌렸다.

 

P268 더없이 가난했지만 젊은 콩트는 다양한 학문들을 배우고 익히며 행복해했다. ‘다락방의 달콤한 자유’, 어디에도 thhrehl지 못하고 지적으로 방황하는 젊은이였던 이 시기의 콩트는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 진정한 보헤미안의 모습..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 속에 가난하지만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보헤미안이 좋다. 광기로 자살하는 보헤미안이 아니라.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나오는 자살한 두 젊은 시인의 죽음이 내게는 내가 느낀 이상으로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보헤미안을 떠올릴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떠올리며 비교를 하려드니 말이다. 사실 충격이라기 보다는 화가 났더랬다.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 행복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이 화가 치밀었다. 물론 나름의 환경과 상황이 그들을 그리로 이끌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쩜.. ‘그럼에도 불구하고행복하게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멋지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음..하는 나의 이기심이 발동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P268 생 시몽은 교회의 권위가 이성적인 학문으로 대체되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꿈꾸었다. 특히 그는 자연을 정복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뒤에 생 시몽과 콩트는 결별하게 되지만, 콩트는 그에게서 이타적인 삶과 경제의 중요성을 배웠다.

 

P273 콩트의 실증주의 사상사 계보를 그릴 때 반드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윤리 책에 등장하는 공리주의, 실용주의 같은 주요 사상들은 모두 그의 실증적이고 사회 지향적인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만큼 콩트가 사상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P274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콩트의 사상은 과학의 정신이 자연물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에까지 확장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사회학 등 인문과학의 탄생에, 콩트는 시조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역할을 했다. 인류가 광신의 뒤끝에서 조악한 추리에 매달리고 있던 시대에, 콩트는 진정 과학적인 삶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던 철학자였다.

 

>> 안광복의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철학사의 흐름을 어깨너머로 구경하며 재밌는 얘깃거리와 함께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저자의 넉넉한 시각에서 철학자를 단순히 그의 사상이 옳다 그르다가 아닌, 그 철학자가 그 당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고뇌하여 내놓은 사상을 그 시대적 배경에 맞춰 이해하려는 모습이 훈훈하게 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마치 스캇 팩이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는 달리 환자들을 치료하며 다각적 시선으로 신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신을 떼어 놓기도 하는 인간애가 느껴져 그의 철학사 이야기가 이리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콩트와 보와의 사랑이 보의 죽음으로 너무나도 짧게 끝나버린 것이 내내 마음 한 켠에 아픔으로 남는다.

 

 

 

 

벤담 (Jeromy Bentham, 1748~1832)는 런던의 전형적인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벤담

(스승) 벤담은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철학에서 위대한 개혁가이기는 했다.

- J. S. 밀의 스승에 대한 평가

 

P276 벤담 (Jeremy Bentham, 1748~1832) 1748년 런던의 전형적인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P278 벤담은 일생일대의 로맨스를 경험했다. 백작의 조카딸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도 벤담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편지를 여러 차례 주고받았지만, 무척 소심했던 그는 사랑 고백도 못한 채 계속 독신으로 지냈다. 30년 뒤인 1805, 예순 살이 되어서야 겨우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지만 결과는 정중한 거절이었다.

 

>> 가슴 아프다 해야 할까.. 바보 같다 해야 할까..? 30년이 지나서야 고백을 하다니.. 30년이 지나서야 고백할 용기를 내다니.. 그래도..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가져가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비록 정중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지만.. 가슴 한 켠에 묻혀있던 고귀한 감정이 보답 받는 느낌이 아녔을까 싶다. 벤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미련과 후회를 무덤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괜히 내가 다 고마웠다.....


 

P279 벤담의 철학은 쾌락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쾌락주의에 따르면 사람들의 행동은 쾌락과 고통이 지배한다. 쾌락은 곧 선이며 행복이다. 반면, 고통은 악이고 불행이다. 올바른 행위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양을 늘리는 것이고, 잘못된 행위는 쾌락의 양을 줄이는 것이다.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쾌락을 계산해 밝힐 수 있다. 그 기준은 강도,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지속성, 순수성 등 6가지이다.

 

 

P280 참고서를 샀을 경우에는 쾌락의 강도 면에서는 떨어질지 몰라도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지속성, 순수성 면에서는 모두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참고서를 사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라 새로운 쾌락이 생기고 (생산성),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고통이 생기지 않을뿐더러 (순수성), 성적이 오르면 그 기분 좋은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어머니 말씀대로 참고서를 사는 것은 게임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을 주기에 더 윤리적이다. 벤담은 여기에다 쾌락의 일곱 번째 기준으로 범위를 추가한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쾌락뿐만 아니라 인애라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얻는 쾌락도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 윤리적 행위란 결국 그 집단의 최대 행복이다. 벤담은 이것을 공리성의 원리’,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라고 불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유명한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모든 법률에는 개인의 쾌락과 집단 전체의 쾌락이 조화되어야 한다.

 

>> 벤담의 쾌락에 대한 기준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어떤 고통을 잊고자 하는 말초신경 자극하는 쾌락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복으로 이어지는 쾌락. 즉 왠지 부정적으로 쓰여지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의 뜻이 아닌 밝고 긍정적인 의미의 쾌락. 우리가 삶 안에서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그 행복의 양을 늘려가면 그만큼 고통의 시간은 줄어들고, 우리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우리도 행복한. 그것이 쾌락주의로 불린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 집단의 행복을 무시하지 않고, 집단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이 무시되지 않는..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 바람직한 사회.


 

P281 벤담은 원형 감옥이라는 새로운 감옥 구조를 고안했다. 당시 감옥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전체 집단의 쾌락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벤담은 이런 사람들에게 외적 제재. 즉 처벌을 할 필요성은 인정했다. 처벌이 범죄를 예방하는 기능을 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처벌 자체는 고통을 주는 악이다. 필요한 양 이상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따라서 벤담은 고통은 최소화하고 효과는 극대화하는 감옥 구조를 생각해 냈다.


 

P283 벤담은 사색하는 학자라기보다는 행동하는 지성에 가까웠다. 책도 활동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썼다.

 

>> 가만히 사색만하는 철학가보다는 행동하며 사색하는 행동하는 지성인 철학가가 더 좋다. 삶이 느껴지고, 인간미가 느껴지고,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가에게 사색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바 아니고, 또 그렇게 사색을 하며 획을 그은 훌륭한 철학가들을 보며 나의 이런 생각이 살짝 흔들리는 것 부인할 수 없으나. 행동하는 철학가, 행동하는 지성인이 좋다. 어쩜 이것은 나의 경험주의적 성향에서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P284 1832, 벤담은 그가 노력했던 선거법 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고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여든 네 살의 나이였다.

 

>>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철학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만족한 듯 웃음을 머금고 자는 듯이 눈을 감은 벤담.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지금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이곳 분위기도. 따뜻한 아침 햇살이 비치는 까페 창가에 앉아 이 아름다운 장면을 읽고 있는 나. 행복한 아침이다.


 

P284 밀은 스승 벤담을 위대한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철학에서 위대한 개혁가이기는 했다라고 평한다. 실제로 벤담은 아주 독창적인 사상을 연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사색이라는 구름 속을 노닐던 철학을 살아 있는 인간 문제 속으로 가져왔다. 구체적인 삶의 문제 속에서 철학을 실현시킨 사람이었던 것이다. 칸트나 헤겔에 비하면 철학 역사에서 벤담의 위상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에 미친 벤담의 영향은 오히려 이들보다 더 크다. 그런 점에서 벤담은 작지만 큰 철학자였다.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런던에서 경제와 역사 분야에서 꽤 알려진 학자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돼지의 철학에서 인간의 철학으로 -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P286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1863) 1806년 런던에서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P287 아버지의 조기교유은 좀 심한 감이 없지 않지만, 결코 국, , 수 중심의 단순 암기식 교육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 밀은 아들에게 책의 내용을 설명해 주거나 암기시키는 법이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들 스스로 고민하고 이해하게 했다. 그러곤 아침마다 하는 산책 중에 아들에게 읽은 책의 내용을 설명하게 하고 여기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밀의 회상에 따르면, 성격이 급한 아버지는 아들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리면 가끔 크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대체로 자상하고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게다가 동생들에게 배운 내용을 가르치게 해서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스스로 정리해 보도록 했다. 아이의 수준에 맞추는 눈높이 교육은 아닐지라도, 탐구 학습과 발표식 수업을 통해 창의성과 논리력을 키워 준 셈이다.

 

>> 아들 밀도 밀이지만, 아버지 제임스 밀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자식을 가르치는 일이라는데, 그렇게 아들이 혼자 고민하고 이해하기를 기다리며 탐구학습을 하게 하는 아버지의 인내심, 그리고 교육열.. 참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가르치며 배운 내용을 정리하게 하는 지혜로움. 한창 놀구 싶었을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그렇게 열심히 잘 따라줜 아들 밀이 아빠에게 얼마나 귀엽고 자랑스러워 보였을까..


 

P287교육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처럼, 밀은 교육을 통해 지적으로 완벽한 아이로 거듭났다. 그는 세월이 흘러 유명해진 뒤에, 점점 학생 중심으로 흘러가는 당시의 교육에 대해, 싫은 일은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들만을 기르고 있다며 혹평한 적이 있다. 시대 최고의 영재였던 밀이 던진 이 말은, 어렵고 지겨운 것은 무조건 나쁘고 잘못되었다고 몰아붙이는 지금 우리의 교육 풍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전적으로 공감한다.


 

P291 그는 선은 곧 쾌락이고 고통은 악이며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쾌락을 주는 행위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공리주의자였다.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더 많은 쾌락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쾌락에는 질적으로 더 높은 인간의 쾌락과 더 낮은 동물의 쾌락이 있다. 인간은 본성상 고귀한 것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쾌락과 동물의 쾌락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큰 쾌감을 준다 해도 선뜻 동물의 쾌락을 선택하지는 않을 터다. 또한 인간은 정신적인 쾌락을 좇을수록 덕을 기르게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이익이 된다. 반면, 물질에 대한 욕심, 지배욕과 같은 동물의 쾌락은 얻으려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따라서 질적으로 더 높은 인간의 쾌락이 그보다 못한 동물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 결국,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더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 구구절절 단어 하나하나 공감되는 글이다.


 

P291 근 단순히 행복의 증가에만 신경 쓰지 않고 인간다운 품위를 갖춘 사람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겼다.


 

P291 1830, 스물네 살의 밀은 자신의 철학처럼 품위 있는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애가 둘이나 딸리 유부녀 핼리엇 테일러였다. 밀은 그녀를 깊고 강한 감성의 소유자이며 예민하고 직관적인 지성을 갖추었으며 뛰어나게 명상적일뿐더러 시적 자질을 갖춘 여성이라고 극찬했다. 남편이 있었음에도, 밀은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불륜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한 이 삼각관계는 밀 가족들의 반대를 뺴고는 어떤 추문도 낳지 않았다. 둘의 관계는 철저하게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테일러 부인은 밀에게 좋은 친구였을뿐더러 훌륭한 학문적 파트너였다. 밀은 <<자서전>>에서 테일러 부인과의 만남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제라고 적었다. 둘의 정신적 사랑은 20년 넘게 계속되다가 헬리엇의 남편이 죽은 지 2년 뒤 비로소 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러나 로맨틱한 연애는 비극으로 끝나야 더 아름다운가 보다. 아내 핼리엇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7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 더 함께하지 못한 슬픔의 고통, 이루 말할 수 없으나 핼리엇과 테일러는 행복했을게다. 오랜 시간동안의 정신적인 사랑.. 그리고 현실로 이루어진 사랑.. 그들은 짧았지만 깊은 사랑 속에 함께 했으니. 차가운 이성과 품위 높은 사상을 가진 밀에게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핼리엇. 굳이 밀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그런 밀이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지적이며 품위있는 여성이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밀의 사랑이야기...


 

P293 밀은 사상의 구름에만 머무는 사유 기계가 아니었다. 그도 여느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처럼 사회 활동과 개혁에 열심히 뛰어들었다.

 

>> 역시 행동하는 지성인.. 멋지지 않을 수 없다.


 

P293 정치인으로서의 밀은 젊은 시절만큼이나 급진적이었다. 여성 차별이 일반적이었단 세상에서 남녀평등을 강하게 부르짖었고, 노동자 계층의 권리와 평등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밀의 정치적 입장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 입문서라고 평가받는 그의 <<자유론>>에 잘 드러나 있다.

 

>> 밀은 마치 완벽한 인간으로 비쳐진다. 그의 품위 있는 사상과 깊이 있는 지식 그리고 차가운 이성 뜨거운 감성을 지닌 밀. 행동하는 사상가 그리고 사회적인 성공.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삶 속에 누릴 수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은 아닌 것. 마치 성서에 나오는 4대 성조들 중 요셉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성조 요셉. 아름다운 철학자 밀.


 

P294 밀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권력에도 강하게 반대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사회를 발전시키는 이들은 주어진 체계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웃사이더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주장을 하는 듯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은 이런 견해조차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할 수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개인들이 충분히 교육 받고 성숙한 도덕을 갖추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 공감공감~!!


 

P295 그러나 한 시대의 비판 정신이 사회에 받아들여져 상식으로 굳어졌을 때, 그 상식은 저항하기 어려운 편견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예컨대, 밀이 자유를 주장한 밑바탕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교육 받고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제를 무시한 채 무조건적인 평등과 자유만 주장한다면, 사회는 교양이 교양을 대접받지 못하고 천박함이 천박함으로 느껴지지 않는 야만의 상태로 떨어질지 모른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편견과 천박스러움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이제는 상식처럼 느껴지는 밀 사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P298 원전 속으로: 여론에 따라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더 나쁘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한다 해서, 그 사람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어떤 한 사람이 자신과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허용될 수 없다.

 

>> 중학교 때 내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져 속 시원함이 느껴졌다.

 

 

 

 

키에르케고르 (S. A. 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 코펜하겐 자수성가한 상인의 7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신 앞에 선 단독자 - 키르케고르

“폭탄은 터져서 주위를 불태울 것이다.

 

P298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원해서(?) 실연을 당했고, 이름난 작가가 되었다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과 끊임없는 논쟁에 휘말리면서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음’. 키르케고르의 삶에서 눈에 띄는 점만 뽑는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겠다.

 

>> 우하하하하~ ^^;; 정말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하하하~ 길거리에 서서 읽다가 뒤집어졌음~ 하하하하~ ^^;;


 

P299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수성가한 상인의 7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P300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의 비밀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다.

 

>> 이해가 안갔다. 왜 원망을 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스스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들었을까..?? 아버지가 지난 날을 그로 인해 가지고 살았던 죄책감을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는 없었을까..? 물론 나름의 이유야 있었겠지만. 더욱이 신학생이었던 자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도로써 그런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너무나도 엄격한 신앙 교육으로 어린 시절이 없었다고 기억하는 키르케고르이기에, 그렇게 엄격하게 자신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켰던 아버지가 정작 당신은 그런 행동을 했음에, 분노와 실망감을 느낀 것 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나,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절망과 방탕의 길로 들어섰다는 부분이 나에겐 이해가 가지 않았다.


 

P301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의 쾌락을 좇아 산다. (…)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뿐이다. 쾌락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산다. 쾌락만을 좇아 살지 않고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한다는 뜻이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산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군자처럼 살아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리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윤리적 인간이 되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P302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스스로 신을 믿고 따르리라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린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 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결단과 도약이 필요하다.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똑 같은 이치다. 키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P303 하지만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성적 나쁜 이유를 자기 아닌 데서 찾곤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주변 사람들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만 둘러댄다.

 

>> 글씨 못쓰는 애들이 애꿎은 연필 탓만 한다.’며 놀리듯 꾸짖던 중학교때  공책 검사를 열심히 하시던 국어 선생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


 

P303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라고 외친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의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터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P304 1855 10월 어느 날, 키르케고르는 교회와의 싸움에 기진맥진하여 거리에서 쓰러졌다. 그로부터 한달 뒤 그는 병원에서 42년의 짧은 삶을 마쳤다.

 

>> 이렇게 죽은 키르케고르의 삶은 내게 충격이었다. 나는 왠지는 모르지만 키르케고르가 무척 로맨틱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더랬다. 그의 이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최명희 선생님이 자주 말씀해주셨기 때문일까..? 그가 올젠이랑 그냥 결혼했더라면, 그렇게 사랑한 여성을 그렇게 억지로 파혼하고 스스로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던 키르케고르. 아빠의 고백을 듣지 않았더라면.. 아빠의 비밀을 알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방탕속으로 빠뜨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방탕했던 삶을 용서하고 그냥 올젠과 결혼을 했더라면..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키르케고르의 삶은 내게 수많은 if를 떠올리게 했다.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P207 철학자의 뒤안길: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르케코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 버려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기독교 신자인 키르케고르는 그 답을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는라인 강 근처에 있는 트리어 시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 마르크스

“철학은 이제 거꾸로 세워져야 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서로 다르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P309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을 없애고 모두가 잘사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에 진지하게 응답한 철학자가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이다,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사싱이 한 시대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일 당장 직장에서 쫓겨날 처지인 사람에게 이 꽃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처구니 없을뿐더러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에게 닥친 시급한 문제는 꽃의 존재가 아니라 해고되지 않을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고상한 철학적 고민은 별 호소력이 없다. 왜 이런 가난과 사회 갈등이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이를 해결할지가 바로 그 시대에 맞는 철학의 고민거리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시대의 철학자였다. 그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현실의 문제가 어디서 생겨나는지 적극적으로 밝히고 해결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 이론을 무기로 삼아 모순에 찬 현실을 변혁하려 한 혁명가였다.

 

P310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혁명가 마르크스는 노동자도 농민도 아닌 부유한 유대인 법률가 집안 출신이다. 1818년 라인 강 근처에 있는 트리어 시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집안은 대대로 랍비를 배출해 온 명문가였고, 아버지도 상당히 교양 있는 사람이었단다.

 

P311 냉철하면서 동시에 정열적인 마르크스의 면모 때문에, 청년 헤겔파 사람들은 그를 이념의 황소 머리라고 불렀다.

 

>> 냉철하면서 동시에 정열적인 마르크스에 대한 표현은 그의 외모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고집스럽고 엄격해 보이면서도 정열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임이 사진 속의 마르크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오스트리아 태생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나는 그가 동유럽 출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때문. 게다가 랍비를 여러 명이나 제출한 유대 법률가의 명문 집안 태생이라는 배경이 내게 참으로 그와 매치가 안되는 낯선 배경처럼 느껴졌다.


 

P312 사회주의는 공산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공산 사회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며 내 것과 네 것의 구분 없이 재산을 공유하는 사회이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 사회의 특징을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라고 명확히 한 바 있다.

 

P313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모르고 있어도, 역사는 어떤 정신적인 힘에 의해 하나의 이상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고 있다는 거다. 마르크스도 역사가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간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발전의 종착점은 모두가 같이 일하고 똑같이 잘사는 공산 사회다.하지만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헤겔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은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 아니라, 경제적, 물질적인 발전이다. 맷돌이 봉건영주의 사회를 만들고 증기기관이 산업자본가의 사회를 가져오는 것이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정신적인 힘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는 철학은 이제 거꾸로 세워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기준이 아닌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준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역사를 물질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유물론자라 불린다.

 

P318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태어난 이래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마르크스의 공산 사회를 향한 실험에 뛰어들었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를 위험하게 여긴 나머지 3분의 2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맞섰다. 한 세기동안 전 세계가 그로 인해 둘로 나뉘어 대립했던 셈이다.

 

>> 한 철학자의 이념이나 사상이 한 나라의 이념으로 받아들여져 세계의 1/3이라는 숫자의 나라가 그 이념을 받아들이고 다른 2/3는 반대 입장에서 선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렇게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국가의 미래가 달라지고, 그 안에 속한 국민이 통째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 무섭다. 이렇듯 정신 세계가 한 개인 뿐만이 아닌 국가.. 나아가 세계까지 변화시킨다는 사실로 볼 때,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독일 작센 주의 한 시골 마을 뢰켄에서 태어났다.

 

 

 

 

 

 

허무를 딛고 일어선 초인 - 니체

“신은 죽었다.

 

P321 백 마디로도 힘든 말을 단어 하나로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낱말 하나는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호소력 있다. 논리를 뛰어 넘어 가슴에 곧바로 파고드는 까닭이다. 이런 말들은 아무나 쉽게 생각해 내지 못한다. 촌철살인의 말들은 재치와 지혜뿐 아니라. 오랜 경험과 사색이 쌓인 뒤에야 비로소 나온다. 니체 (Fr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수백 권의 책으로 설명해야 할 내용을 불과 몇 구절만으로 표현할 줄 아는 철학자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길고 정교한 논리는 오히려 하찮게 여겨진다.


 

P322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그의 말들은 니체를 정확히 이해했다는 표현 자체가 멋쩍을 정도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그의 글은 <<성경>>과 비슷한 감동을 준다. 전체를 읽지 않아도, 마음을 파고드는 경구들 하나하나만으로도 생활 속에 무뎌진 감수성과 생명력을 일깨운다는 뜻이다. 진정 니체는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큰 가르침을 전달하는 철학의 카피라이터라 할 만하다.

 

>> 철학의 카피라이터~ ^^ 표현이 넘 세련이고 분위기 있었다. ^^


 

P323 니체는 1844년 독일 작센 주의 한 시골 마을 뢰켄에서 태어났다.

 

P325 니체는 어떤 모임에서 위대한 음악가 바그너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최고 권위를 누리던 아버지뻘 되는 위대한 음악가와 점점 명성을 얻어가던 풋내기 문헌학도는 둘 다 쇼펜하우어 사상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바그너와의 우정은 이후 니체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굵직한 자리매김을 한 철학자와 음악가의 만남이라니.. 너무나도 아름다운 만남이 아닌가. 그렇게 유명한 위인들이 살아 생전 그렇게 깊은 유대감을 느끼며 함께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쇼펜하우어는 복두 많다. 괴테의 관심을 그리도 받더니, 인제는 니체와 바그너도 그에 열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비록 철학계에서는 메이저가 아니라 밤무대 가수정도의 위치밖에 못되지만 그에게 열광하는 매력적인 팬들을 많이 가졌던 듯싶다. 왕부럽~


 

P329 루 안드레이스 살로메 등 몇몇 여인들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지만, 마치 사막에서 온 사람이 세속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렀던니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세련되지 못했다. 결혼을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해 본 적도 있지만, 모든 시도는 결국 철학자에게 결혼은 코미디이다라는 유명한 말로 끝맺고 만다.

 

>> 이상하게도 철학자들에겐 사랑과는 인연이 없는 듯싶다. 물론 모든 철학자가 그랬던건 아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철학자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철학자들은 사랑에는 불운했던 듯싶다. 기껏 사랑을 만나면 일찍 죽던가, 아니면 몇 십 년 후에 사랑 고백을 해서는 정중한 거절을 당한다던가.. 암튼.. 생각 많은 철학자들에게는 사랑이란 어쩜 사치스런 감정으로 여겨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P329 1885년 그는 인류의 기념비적 저작이라고 할 만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VUSOGTVU.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를 독일어 식으로 읽은 말이다. 이 책의 차라투스트라는 실제 조로아스터와는 별 상관이 없다. 요새 표현으로 한다면, 유명인의 이름만 빌린 일종의 패러디 작품이다.

 

>> 하하하~ ^^;; 넘 웃겼다. 물론 유명인 이름을 빌린 패러디 작품이라 해서 그 유명한 책이 그저 패러디로 끝나는 건 아님을 넘 잘 알지만, 저자의 표현이 넘 재밌었다..^^


 

P330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모두를 위한, 그러나 아무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인류 전체를 위해서는 위대한 예언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라 받아들여지지 못하리라는 뜻이다. 그는 이 책을 쓰고 매우 만족하여 독일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자부 했다.

 

>> 나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이다.


 

P331 1889년 니체는 파국에 이른다. 광장에서 마부에게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갑자기 졸도해 버렸다. 그는 마침내 미쳐 버렸고 1900, 쉰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했다.

 

>> 눈물이 핑 돈다. 마부에게 매를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고 울다가 미쳐버린 니체. 무엇이 그에게 그토록 절절한 눈물을 흘리게 했던 것일까..? 그는 왜 미쳐버렸을까..? 왜 정신을 놓았을까..? ? ?? 수많은 물음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기만 하다.


 

P331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의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미친 니체를 돌보았는데, 이 누이는 니체를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신속하게 니체 문헌 보관소를 만든 뒤, 니체의 글을 체계적으로 모으고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녀느 니체의 글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과장함으로써 시대가 요구하는 입맛에 맞추어 내놓았다. 비로소 니체는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현대의 니체 연구자들은 그의 책들이 누이동생 엘리자베트에 의해 상당수 의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 대단한 동생. 결국 니체의 명성은 여동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구나. 그의 똑똑한 여동생이 그의 문헌을 체계적으로 모으고 편집하여 출판까지 해준 것은 고마운 일인데, 니체의 글을 의도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내놓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원본 훼손. 어쩜 니체의 사상이 잘못 왜고되어 알려졌을 수도 있으니 이만저만 안타까운 사실이 아니다.


 

P331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를 적으로 여기게 했고, 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를 타락하고 비윤리적인 철학자로 만들었다.하지만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도덕의 파괴도, 인종차별주의도 아니었다. 니체가 강조한 점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주어진 규범에 주눅 들지 말고, 삶을 긍정하면서 주어진 운명을 꿋꿋하게 개척해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건강하지 못한 생애를 통해 오히려 건강한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제시한 철학자였다. 그가 생명과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생철학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 아쉽다. 그가 조금 더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좀 더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좀 덜 섬세한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추구하고 깨닫게 해주려던 많은 이념과 사상들을 좀 더 확실하게 그의 삶으로 살아내며 보여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성공은 느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너무 젊은 나이에 정신을 놓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는 미국 동북부 버몬트 주의 작은 도시 벌링턴에서 태어났다.

 

 

 

 

 

 

지식은 도구다 - 듀이

“학생은 태양이고 다른 것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

 

P335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는 미국이 아직 세계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던 남북 전쟁 직후에 태어나서, 1,2차 세계 대전을 거쳐 조국이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1950년대까지 살다 간 사람이다. 90여 년의 긴 생애 동안 듀이의 철학과 교육관은 미국 전체에 널리 영향을 미쳤고, 그의 말고 행동은 곧 미국의 국가철학이다시피 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가장 미국적인 철학을 만든 미국의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P336 듀이는 1859년 미국 동북부 버몬트 주의 작은 도시 벌링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영국 이주민의 후예였다.

 

P336 듀이는 어린 시절부터 농장 일과 신문 배달, 목재 세는 일 등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 형편이었는데, 듀이는 자신의 처지에 전혀 불만이 없었던 듯하다. 뒷날, 그는 삶을 배우는 데는 그 같은 환경이 이상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생계의 일부를 떠맡으면서 일찍부터 책임감과 성실함을 기른다는 게 그 이유다. 이처럼 책임을 통한 학습을 강조하는 듀이의 교육관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는 일하지 않고 책만 보는 책벌레들을 싫어했다. 진정한 학문과 삶의 가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노동을 나눌 때 얻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338 듀이는 헤겔의 철학을 배웠다. 그리고 세계와 지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헤겔의 이론에서 감명을 받았다.

 

P338 학자들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듀이는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다. 이 주장의 실제 가치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는 주장보다 더 이로운 결과를 낳느냐에 있다. 한마디로 지식은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일 때만 가치가 있다. 이처럼 지식을 그 자체로 추구하지 않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 여기는 듀이의 견해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P338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선되고 진보하게 마련이다. 지식이라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으로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지식이란 없다. 지식은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의 노력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런 헛된 노력을 버리고 생활에 더 유익한 더 나은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듀이의 지식관은 과학 지식을 강조하는 그의 교육관에도 잘 나타나 있다.

 

P339 듀이의 지식관은 윤리에 대한 견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철학자들은 오래 세월 동안 선이란 무엇인지, 윤리적인 사람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러나 윤리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윤리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 절대적으로 윤리적이고 선한 것이란 없다. 윤리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각의 상황에서 나 자신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윤리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 공감공감~!!


 

P340 듀이는 아동 중심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경험이다.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존재다. 진정 효과적인 교육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외우게 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주고 이를 통해 학생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듀이의 교육관은 학생은 태양이고 다른 것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도 학교도 아닌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아 가는 학생이다.

 

P342 듀이는 철학자의 진정한 역할은 공허한 과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듀이는 자신이 필요한 사회 문제에는 언제든지 뛰어들었다.

 

P343 우리는 물질주의 밑에 깔린 또 다른 미국적 가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지성에 대한 믿음과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민주주의의 신념이다. 듀이는 실용성을 내세우면서도 끊임없이 이 점을 강조했다.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실용주의는 천박한 졸부의 사상일 뿐이다.

 

 

 

 

 

버트런드 러셀 (Burtrand Russell, 1872~1970)은 영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 - 러셀

조가처럼 차고 엄숙하며 예술처럼 화려한 장식도 없으면서 숭고할 만큼 순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 - 수학에 대한 러셀의 찬사“나의 삶을 사로잡았던 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 지적 욕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었다.

 

P345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불행하다고 믿었던 귀족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심가할 정도로 웅ㄹ해서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세상사에 지치고 죄악에 억눌려~’라는 찬송가 가사에 가슴 뭉클해했다. 자신이 일흔살 까지 산다고 하면, 이제 겨우 인생의 14분의 1을 살았을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할 정도였다.

 

>> 크억~!!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하하하~ ^^;; 요롷게 야물딱진 꼬마를 보면 머리에 피똥두 안 마른 것이하며 중학교 때 우리의 당돌함을 꾸짖으시던 선생님의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다섯 살의 나이에 세상사에 지치고 죄악에 억눌려~’라는 찬송가 가사에 가슴 뭉클해하는 애기 철학자 러셀.. 얼마나 귀여웠을까..? ^^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우리 막내 동생이 떠올랐다. 역시 다섯 살 때 쯤였던 것 같다. 밥 먹는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막내.. “정훈아 왜 울어..?” 아무 대답 없던 막내.. 몇 번의 물음에 겨우 하는 대답..”음악이 넘 슬퍼서..” 그때 나는 밥을 먹으면서 외로운 양치기를 듣고 있었다.. 막내의 깊은 감수성에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암튼.. 러셀을 보면 철학가는 어릴 때부터 다른가 보다.


 

P345 삶의 무의미함 때문에 계속 고뇌하며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소년은 열한 살 무렵에 비로소 구원의 빛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학이었다. 소년은 보통 사람이라면 쳐다보기조차 싫은 복잡한 수식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수학을 좀더 잘 알고 싶은 욕망으로 삶의 무거움을 견뎌냈다. 소녀은 이성적인 만큼 감성적이기도 했다.

 

>> ~ 증말 돌아가시겠다~ 하하하하~ 삶의 무거움을 수학을 좀 더 잘 알고 싶은 욕망으로 견뎌낸 소년 러셀을 떠올리니 도저히 웃겨서 돌아가시겠다. 정말 독특한 녀석(?)이었네..^^


 

P346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 1872~1970)은 러셀의 패러독스로 잘 알려진 뛰어난 수학자였다. 또한 철학자로서 논리학을 통해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 했을뿐더러, 거꾸로 수학적 방법을 논리학에 도입하여 기호논리학이라는 분야에 큰 공헌을 남겼다. 20세기 철학계에는 언어의 엄밀한 분석과 정의를 통해 신과 자유, 존재 등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을 풀어 보려는 분석철학(언어철학)이 크게 유행했다. 분석철학을 한 폭의 그림에 비유한다면, 러셀은 논리학과 언어 분석 작업을 통해 그림이 그려질 도화지를 펼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P346 러셀은 학문적 엄밀함에 목숨 거는 차디찬 학자에 그치지 않았다. 이미 소년 시절에 나타난 생활의 이중성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는 지극히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지만, 일상ㅇ의 삶은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할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는 평생 네 번 결혼했고 요란한 사회 할동 탓에 두 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가난한 이웃과 사회 기구를 후원하느라 버스표 한 장 사기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 가난한 전과자는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 극적 반전을 보이기도 했다. 굵직한 사회적 쟁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러셀의 이름이 등장했고, 그에 대한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따. 러셀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사회 활동가, 문필가, 방송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 와우~!! 짤막하게 소개된 러셀의 삶을 읽으며 그가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이면서도 얼마나 가슴이 뜨겁고 열정적인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느껴졌다. 그야말로 그의 삶은 그가 활동하던 활동분야에서나 개인적인 삶 자체에 ‘Passion’ 그 자체로 똘똘 뭉쳐있었던 듯싶다.온갖 굵직한 사회적 쟁점마다 그의 이름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빗발치고, 감옥도 두 번이나 다녀온 전과자고, 결혼도 네 번이나 했던 차갑고 뜨거웠던 철학자. 넘 매력적이다. 과연 그를 감당해낼 여성이 있었을까..? 마치 피카소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정열적이었던 삶을 살았던 화가 피카소..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은 그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들의 삶 속에 시들어갔던 스토리를 보며.. 그의 삶과 사랑에 대한 광기어린 열정과 정열... 러셀이 그랬던 듯싶다.그렇게 한 삶을 불태우며 살았던 사람들. 넘 멋지다.


 

P346 러셀은 1872년 영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P349 그가 열두 살 무렵, 할머니는 손자에게 <<성경>>을 한 권 선물해 주었다. 책 안쪽에 그대는 나쁜 짓을 하려고 군중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성경 구절을 써 주었는데,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간직한 신조가 되었다.

 

>> 멋진 할머니와 멋진 손자.


 

P348 우울한 일상에 돌파구를 마련해 준 건 형 프랭크였다. 프랭크는 러셀이 열한 살 무렵에 기하학을 가르쳐 주었다. 러셀은 뒷날 이때의 경험을 첫사랑처럼 짜릿했다고 떠오리곤 했다. 자시의 표현대로라면 조각처럼 차고 엄숙하며예술처럼 화려한 장식도 없으면서 숭고할 만큼 순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수학의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 나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러셀이 수학에 대해 느꼈던 이런 첫사랑의 짜릿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으나, 그가 얼마나 수하게 매료되었는지, 수학이 얼마나 그의 가슴에 열정의 불을 질러놓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러셀은 부모 복은 없었지만. 할머니 복 형 복은 있었던 듯. 형 프랭크가 참 신기하다. 어떻게 동생에게 수학을 가르쳐줄 생각을 했을까..? 형 프랭크도 보통은 아녔던 듯 싶다. 몇 살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열 한 살 동생이라면 놀거리나 다른 것을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었을건데. 아마도 가정 분위기가 학구적이었던 것 같다. 러셀.. 참 매력적인 철학자다.


 

P349 1890, 움직이는 수학 공식 같던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열여덟 살 소년 러셀은 영국 최고의 명문인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이때 그를 심사했던 교수는 유명한 철학자 화이트헤드였다. 그는 러셀의 뛰어남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만남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20년 뒤, <<수학 원리>>라는 책을 공동 저술하여 수학과 철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저지른다.

 

>> 움직이는 수학 공식 같던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열 여덟 살 소년 러셀. 하하하하하~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까..?? 읽다가 그만 까르륵 넘어갔다. ‘움직이는 수학 공식같던 러셀..^^ 그가 어떤 모습ㅇ이었는지 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 나름 매력적이었을 학구적이고 지적인 분위기..^^


 

P352 러셀은 순수 철학과 수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감옥에서 그는, 세계와 언어는 각각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의 단위(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두 세계는 서로 대응 관계에 놓여 있다는 내용의 논리적 원자론을 발전시켰다. 명제를 분석하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 이론을 개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두 이론은 분석철학계에 강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이론이다. 

 

P352논리적 원자론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명제는 세계와 1 1로 대응하기에 의미를 갖는다는 이론이다. , 언어는 명제라는 최소의 단위(원자)로 이뤄져 있고, 이는 명제가 나타내는 최소의 사실(원자) 1 1의 관계에 있다. 예컨대 철수는 키가 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철수가 키가 크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므로 의미 있다. 여기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몇몇 분석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사실과 1 1 대응 관계에 있는 주장들의 구조를 완벽하게 알아낸다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세웠다,

 

P353기술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때때로 주장의 주어가 우리로서는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대상인 경우가 있다. (…) 이러한 어려움을 러셀은 기술 이론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간단히 풀어 버린다. 언어를 분석해서 주장 속에 담긴 존재에 대한 기술을 드러냄으로써 기묘한 주장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예를 든다. 이 말은 사실, 첫째, ‘프랑스 왕이 있다’, 둘째, ‘그는 대머리이다라는 두 명제가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주장은 대상의 존재를 나타낸다. 이것이 참이어야만 전체 명제가 의미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 프랑스 왕은 없으므로 주장 전체는 거짓이다.

 

>> 그들에겐 참 간단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참으로 복잡하고 심오해 보인다. 암튼, 수학자에 철학자에 논리학에.. 대체 러셀의 천재성의 끝은 어디인지..


 

P356 러셀은 죽을 때까지 중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1952년 여든 살에 그는 세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마흔 살 연하의 여성과 네 번째 결혼을 감행했다. 70여 권의 저서 중 20권이 여든살 이후에 나온 것일 정도로 저술 활동도 끊임없이 계속했으며, 1970년 아흔여덟 살의 나이로 눈을 감기 전까지 잔혹한 학살극이 될 것이 분명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을 폈다. 옳지 않은 일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철학자의 역할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 마지막까지 정열과 열정을 불태운 러셀. 여든 살의 나이에 사랑이란 감정을 가진 그가 대단해보였고, 그의 저작 중 근 1/3이 여든 이후에 쓰여졌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옳지 않은 일엔 당당하게 비판을 가하는 행동하는 철학자였음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마치 그는 근 1세기에 가까운 삶을 마치 활화산처럼 그렇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태우고 간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런 러셀을 철학자로서, 수학가로서, 문필가로써..또 한 인간으로써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 건가..


 

P357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사로잡았던 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 지적 욕구,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었다고 고백한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이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P357 철학자의 생명은 건전한 비판 정신에 있다. 모두가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치달을지라도, 철학자는 판단력이 무뎌진 사회에 끊임없이 경종 울리는 시대의 이성이어야 한다. 눈먼 다수가 원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점에서 러셀은 진정 용기 있는 시대의 철학자였다.

 

 

 

 

 

비트겐슈타인 (Ludwig Josf Johann Witgenstein, 1889~1951)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 -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정신적 경험이었다.- 러셀

 

P360 이 시기 철학자들 사이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우리가 쓰는 언어를 정교하게 하는 일이었다. 논리는 우리의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또한, 논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오류 없는 정교한 언어를 만든다면 결국 우리의 생각도 오류가 없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프레게가 구체화한 이 같은 관심은 결국 오류 없는 완전한 언어, 즉 인공 언어를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 물론 획기적인 시도고 그 시도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한치의 오류 없는 완전한 언어를 만들어내면 우리의 생각도 오류가 없이 완전하게 될 것이란 그들의 생각..너무 이상적인 생각 아녔을까..? 사고와 논리와 언어.. 왠지 갈증 나는 주제다.암튼..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위험한 생각들을 읽으며 느꼈던 황당함내지는 갸우뚱거림이 느껴졌다.


 

P361 현대 철학자 중 일부는 아직도 철학적 작업을 논리와 언어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소하는 것이라 여긴다. 이들을 흔히 분석철학자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P361 비트겐슈타인은 1889,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 대체 오스트리아는 어떤 나라길래.. 이렇게 많은 철학자들과 문학가.. 그리고 음악가를 배출해낸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오스트리아 빈에 가면 모두가 음악가가 되는 분위기라는데..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P363 러셀은 친구에게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정신적 경험일었다고 했으며, 그를 완벽한 천재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 천재 러셀이 말한 천재의 전형 비트겐슈타인.. 상상이 안간다.. 위인은 위인을 알아보나 보다. 화이트 헤드는 러셀의 비범함을 첫 눈에 알아봤고,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비범함을 첫 눈에 알아보았다. 누구 나 알아보는 사람 없나..?? 하하하하하~ ^___^;;


 

P363 비트겐슈타인이 공식적으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러셀에게 배운 세 학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는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의 스승처럼 여겨지는 측면도 있었다. 러셀은 논리학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되레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서 영감을 얻곤 했다.

 

>> 이럴 수 있었음에는 러셀의 배움에 대한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P364 1914,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주저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자원입대 했다. 그가 전쟁에 나간 이유는 이념이나 민족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를 전쟁터로 내몬 것은 20대 젊은이 특유의 감상적인 혈기였다. ‘죽음에 직면해 보는 경험을 통해서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었던 거다.

 

>> 이런거였나..? 영화에서 한창 파티 중이거나 가족끼리의 즐거운 모임 중에 갑자기 전쟁이라며 얼굴이 상기되어 웃으며 뛰어 들어오는 청년.. 그리고 다들 마치 무슨 게임이라도 나가듯 서로서로 다투어 참가 서명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애인들을 뒤로하고 전쟁터로 향하는 젊은이들. 나는 그장면이 이해가 안갔더랬다. 나라를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 이해 가는 부분이나, 난 왜 그들이 그렇게 들떠 신나하면서 가는 것인지를.. 바로 이런 마음에서였던건가..?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의 혈기..


 

P364 비트겐슈타인은 특유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가장 먼저 위험한 임무를 맡았고 침착하고 용감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여러 번 훈장을 받았다.

 

>> 참으로 독특한 철학자. 다른 독일 철학자들이 대학 안에서 전쟁과는 상관없이 순진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실전에 뛰어들어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완수하고, 훈장도 받고 그러면서도 철학자로서의 의무도 다하여 전쟁 출전 5년 동안 그 유명한 <<논리철학 논고>>를 써냈다니 혀가 끌끌 차인다.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철학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실은 책을 펴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그야말로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군인으로서의 임무도 다하면서 또한 본분인 철학자로서의 삶을 치열히 치뤄낸 사람. 그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 자신의 철학을 삶안에서 살아내는 사람은 멋지다 아니할 수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게다.


 

P365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쓰이는 말들이 실제 상황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명제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는 가능한 상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명제들과 상황들은 각각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으며, 똑 같은 논리 구조로 되어 있다. 즉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 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언어를 이런 식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 왔던 신, 자아, 도덕의 근거등에 대한 논의는 뜻 없는 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이 의미하는 대상은 세상에 없다. 따라서 이런 논의들은 말이 안 되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언어란 과학처럼 실제 세계를 설명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P367 1926, 사소한 체벌이 문제가 되어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수도원 정원사 보조 노릇을 하다가, 절친한 누이 마르가레테의 부탁으로 집을 설계해 주기도 했다. 극도로 절제되고 단순하여 논리학을 구현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저택은 지금도 현대 건축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재벌의 막내 아들임에도 부엔 관심이 없고 철학가로 명성을 날리고도 사범대학엘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더니 그만두고는 수도원 정원사로 일하다 인제는 설계까지.. 그것도 단순한 설계로 끝난 것이 아닌, 지금도 현대 건축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을정도의 설계라니. 이 철학사에 나오는 많은 철학가들이 그랬지만, 이렇게 한 사람 안에 많은 능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울 뿐이다.


 

P369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철학적 탐구>>가 발간되었는데, 이 책은 또 한번 철학자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자아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언어는 <<논리철학 논고>>에서처럼 세상의 무엇을 가리킴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망치!’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망치를 지시하기 때문에 뜻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상화에 따라 망치 좀 갖다줘!’라는 뜻으로도, ‘저기 망치가 있어!’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언어가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을 지칭하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의 법칙을 따르듯, 제각각 말이 사용되는 다양한 삶의 양식속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의 명확한 관계를 밝혀서 오류가 없는 이상적인 언어를 만들려는 작업은 무의미하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말들이 쓰이는 각각의 삶의 상황을 드러내고 보여 줌으로써 오류를 줄이는 일뿐이다. 우리는 이제 이상적인 언어를 만들려는 사상누각을 버리고 일상의 언어라는 거친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 마음에 드는 결론이다. 그는 역시 멋진 철학자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것을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진리에 대한 열정과 겸손이 없으면 이렇게 자신이 펼쳤던 이론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수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으리라. 비트겐슈타인 그는 내게 참으로 인상적인 철학자였다.


 

P370 비트겐슈타인은 언젠가 자신의 책이 철저하게 윤리적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비트겐슈타인이 진정 말하고자 한 바는 언어의 본성이 아닌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분석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 주었던 것은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지닌 한계였다.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삶에 겸손하게 순응하는 자세,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려 했던 것은 오히려 이 점이 아니었을까?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은 현상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시킨 사람. 그는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니츠 (오늘날 체코의 프로스초프)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는 유태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판단중지, 다시 생활 세계로 - 후설

“나는 철학자로서 살아왔으며, 철학자로 죽기를 원한다.- 후설의 유언

 

P372 현상학에 대해 어렴풋이 정의를 내리자면, 인간의 의식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현상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히는 학문정도가 될 듯싶다.

 

P373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은 현상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시킨 사람이다. 후설 이후에 현상학은 20세기를 주도한 철학 사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P373 후설은 1859년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니츠(오늘날 체코의 프로스초프)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는 유태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P374 그 당시는 심리학주의가 수학과 철학계를 주름답던 시절이었다. 심리학주의란 수학이나 논리의 법칙은 모두 심리학으로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2+3=5’와 같은 수학식도 결국 반복되는 경험과 습관을 추상화에 얻은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학문의 기초는 심리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는 얘기다. 1891년에 발표된 후설의 저서 <<산술의 철학>>은 그가 이러한 심리학주의적 사고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P375 유명한 사상가들 중에는 고집불통이 참 많다. 세상을 자기 논리에 맞출지언정, 자시의 생각을 세상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후설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독일의 수학자 프레게가 <<선슐의 촐헉>>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자, 후설은 자기 사상의 오류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전향해 버린다. 열등감에 젖은 사람은 똥고집만 세지만, 정말로 치열하고 진지하게 사는 사람은 남의 비판을 발전을 위한 조언으로 고맙게 받아들인다. 후설이 바로 그랬다. 그는 프레게가 지적한 심리학주의의 허점과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 그렇게 똥고집 부리는 사람이 어디 유명한 사상가들 뿐이겠는가..? 수 많은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 (때때로 나도 그들 중의 하나고) 하지만 정말 자존감이 높고 자신이 진정한 가치를 삶 안에서 실현하며 살고자 하는 진지하고 치열한 이들은 남의 비판을 차분한 마음으로 냉정을 잃지 않고 잘 받아들인다. 그것이 옳던 그르던.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공통점이다. 뭐 누구는 부지깽이를 들고 싸웠다지만 하하하~ 암튼, 때때로 그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재밌는 일화도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지만, 후설같이 후덕한 위인에게서 느껴지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수정하며 성장시켜가는 모습은 고개를 깊이 숙여 조예를 표하고 싶은 경외감이 느껴진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철학에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예나 대학으로 찾아갔던 프레게를 여기서 이렇게 다시 이름을 보게 되어 괜히 반가왔다. .. 내가 반긴다해서 그가 날 알아볼 것두 아닌데.. 하하하~ ^^ 또한 비트겐슈타인을 러셀에게 보낸 사람도 프레게 아니던가.. 위인들의 관계 싸이클은 참으로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끼리끼리 만나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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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 F. L. G Frege, 1848~1925) 독일의 철학자. 논리학을 기초로 노리주의를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P377 후설은 프레게처럼 수학이나 논리가 만들어 낸 진리가 우리의 의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지향성이라는 용어를 끌어들인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항상 어떤 것에 쏠리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파악하는 수학적 법칙이나 논리적 진리는 우리의 의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학적 의식에 나타나는 한에서만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이야말로 이러한 진리들이 언제나 진리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의식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상학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경험에 앞선다. 후설의 현상학을 선험적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P379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노에시스 (Noesis) – 노에마 (Noema) 상관관계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로 자유란 뜻인 노에시스는 생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노에마는 그리스어로 사유된 것이란 뜻으로, ‘생각의 대상을 가리킨다. 이 둘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밀접하게 붙어있으며, 이 같은 구조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생겨난다. 후설은 바로 이러한 순수 의식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모든 학문을 엄밀하게 만들 수 있는 기초를 세우려 했다.

 

P381 현대 과학 문명은 객관적인 것이 곧 진리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수치를 측정하고 법칙을 밝혀 과학적인 증거를 들이대는 것이 무엇보다 정확하고 가치 있다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고는 가치 없다며 버림받기 일쑤다. 이에 반해 후설은, 확실한 것은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을 객관적이고 수치화된 세상에 끼워 맞추려는 과학 문명에 맞서, 주체적인 이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점에서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철학자였다.

 

>> 후설.. 이름에서부터 후덕한 성품이 느껴진다. 같은 자 돌림이라 그런가..?? ^^;; 암튼 그의 겸손하고 후덕한 성품처럼 그가 강조했던 것은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이었고 인간을 객관적이고 수치화된 세상에 끼워 맞추려는 과학 문명에 맞서, 주체적인 이성과 인간성의 가치를 강조했다니.. 저자 안광복의 표현처럼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철학자였던 듯싶다.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존재를 둘러싼 거장들의 싸움 - 하이데거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지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

 

P383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이다.

 

>> 하이데거.. 난 첨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가 그리 유명한 철학자였구나.. ^^;;


 

P384하이데거는 1889년 인구 4000명 가량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시골 산장에 틀어박혀 사색하고 연구하다가 1976년에 사망했다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을까?

 

>> 큭큭~^^;; 저자의 이런 표현에 정말 돌아가시겠다~ ^^ 키르케고르를 읽으면서 터졌던 바로 그 웃음이 요기서두 터져버렸다~ ^^


 

P385 철학에는 구체적인 존재자들이 아닌 존재자체의 의미를 다루는 형이상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하이데거는 브렌타노의 책을 통해 형이상학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P385 하이데거는 철저하게 학생 위주의 강의를 했다. 그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수업을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학생들이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토론에 참여하기를 끊임없이 권했다. 얼마나 학생들에게 심혈을 기울였던지, 강의가 끝난 지 10년 뒤에도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 개개인의 성향과 관심사를 모두 기억해 낼 정도였단다. 인간을 다른 인간 존재와 더불어 있는 존재로 파악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 대단한 선생님. 강의가 끝난 10년이 지난 후에도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성향과 관심사를 꿸 정도였다니 그의 학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자기 세계에 빠져있던 스승 후설과는 전혀 달랐던 제자 하이데거. 현대 철학자들은 갈수록 존경스런 철학자들이 많이 나타난다.


 

P386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탐구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존재자체이다.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연구했다. 세상에는 돌, , 나무, 동물 등 수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런 것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묻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오로지 인간만이 존재에 대해, 있음없음을 구별할 수 있으며 왜 자신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자, 즉 현존재 Da-Sein’라고 보았다. 존재에 대해 밝히려면 바로 존재를 알고 있는 존재, 즉 현존재인 인간을 탐구해야 한다.

 

P387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살아간다. (…) 이런 식의 삶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이라고 한다. 이 같은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최종적인 가능성인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것 때문에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상의 쾌락, 다른 이들과의 관계 등에 몰두하면서 계속 비본래적인 삶을 살아 간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인간은 삶의 매 순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미리 경험해 본 죽음이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삶을 반성하게 만들고 스스로 결단하여 새 삶을 기획하도록 만든다.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가 현재 나의 삶을 바꿔 놓는다. 오직 인간에게만이 이처럼 있지도 않은 미래가 현실을 규정한다.

 

P390 고등하교 도덕윤리 교과서에는 하이데거를 실존철학자로 소개한다. 물론 대중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결단에 따르는 진정한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는 실존철학자이다. 보는 이에 따라 그는 현상학자나 해석학자로도 불린다. , 국가라는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원조로 비난 받는가 하면, 정반대로 국가 권력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신좌파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하이데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그의 사상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정작 하이데거는 존재밖에 연구한 것이 없다. 그는 가장 깊은 근원에 대해 물음을 던짐으로써 가장 넓게 영향을 끼친 셈이다.

 

P291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상적인 것들에만 마음을 두고 산다. 한 친구가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라는 물음을 던질 때, 그 친구를 철학자 같다고 놀리며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쓸모 없어 보이는 이런 질문들이 오히려 일상에 대한 관심보다 더 유용하다. 원리를 이해하면 답을 외운 친구보다 문제를 더 잘 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삶과 세상을 고민하며 방향을 세운 사람은 무작정 세상을 따라 사는 이들보다 더 알찬 삶을 보낸다. 일상과 너무나 동떨어져서 쓸모 없어 보이는 하이데거의 존재 탐구는 우리에게 진정 유익한 물음이다.

 

 

 

샤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사상계의 제임스 딘 - 샤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P393 1960, 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 지식인들에게 샤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다. 흘러간 옛 노래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듯, 그네들에게 샤르트르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문화 코드. 그는 사상계의 제임스 딘이라 할 만한 인물로, 구속받기를 싫어했고 자신과 사람들을 얽매려는 모든 것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는 파격적인 계약 결혼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저서조차 따로 보관하지 않을 정돌 재산에 무관심했으며, 한편으로는 죄책감 없이 쾌락을 누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 그가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이름은 귀가 따갑게 들었고,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을 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그가 이렇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흘러간 옛노래을 들으며 가슴 뭉클함을 느끼듯 그런 아련함을 안겨주는 문화코드인지는 몰랐다. 제임스 딘 처럼 반항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P394 사르트르는 190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노벨상 수상자인 슈바이처의 사촌으로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다.

 

>> 흐미~ 슈바이처의 사촌.. 대단하네..


 

P395 어린 사르트르에게 이런 상황은 운명이 내려 준 은혜였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불안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집안의 잉여 존재로 여겼다. (…)주변의 귀여움을 샀던 천사 같던 외모는 점점 추하고 보기 싫게 변했다. 그는 이제 노력해도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이미 나 자신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자서전인 <<>>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린 사르트르의 고뇌는 다분히 각색된 느낌이 든다. 어찌되었든, 사르트르의 어린 시절은 그의 전 생애를 요약해서 보여 주는 듯하다. 그는 평생 규범과 질서에서 자유롭기를 원했고 무신론자였으며 삶의 목적을 글을 쓰는데 두었다.

 

>> 많은 철학자들의 어렸을때의 환경이 그들의 사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 한번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긴 어디 철학자들 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어렸을때의 환경과 성장과정이 결국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러운 사실인지...


 

P396 사르트르를 다룬 전기들은 이 시기의 그를 지성적인 혁명가로서 그 어떤 감저이나 가치, 또 어떤 도덕 속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멋있게 그리고 있다.


 

P397 시몬 드 보무아르와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둘은 나중에 계약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들의 게약 결혼은 한번 살아 보고 결혼하자는 식의 동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들은 처음부터 정식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자유를 추구했던 두 사람에게, 인습의 굴레와 주변의 눈에 얽매여 어쩌도 못하고 서로를 구속하는 결혼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싿. 결혼했기에 억지로 같이 사는 생활은 결혼이라기보다 억압과 구속일 따름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언제나 신뢰와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어야만 진정한 결혼 상태에 있다고 여겼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가식 없이 신실한 애정으로 함께 있는 상태 말이다. 둘의 관계는 따로 또 같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듯싶다. 그들은 사르트르의 입대를 앞두고 루브르 박물관 앞 벤치에서 결혼 계약을 맺었다. 처음의 계약 기간은 2년이었지만, 둘 사이의 계약은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 나는 저자가 써놓은 바로 이부분만을 읽고는 내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라 생각하는 따로 또 같이를 사르트르와 시몬느가 결혼이란 형식을 거치지 않았을 뿐 그런 이상적인 삶을 살았나보다 생각하며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녔던 것 같다. 그들의 따로 또 같이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내스타일의 따로 또 같이가 아녔던 듯싶다. 거의 마치 누가 서로 많은 애인을 갖느냐 시합을 하듯 보란듯이 그렇게 서로 떠들썩하니 자랑을 하며 그렇게 자신들의 본능에 불타는 감정을 육체와 함꼐 맡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떤 형식이나 제약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계약 결혼이란걸 추구한 것, 자유로운 관계를 원했던 것까지는 이해가 가나 그들의 애정행각엔 어떤 의미나 사랑이 느껴졌던 것이 아닌 오로지 동물적인 감각만 발휘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류작가 보부아르와 사상계의 제임스 딘 사르트르의 관계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사랑이 아녔던 듯싶다. 나는 그들이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그런 사랑을 했는 줄 알았더랬다. 아니, 어쩜 그런 사랑이길 내가 바랬던건지도 모르겠다. 암튼, 철학자라고 해서 그의 삶까지 존경받아야 하는 삶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마치 내가 선생님이나 신부님 수녀님께 느끼는 그런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바라보는 이의 이기심이 여기서도 작용되었는지 모르겠다. 완벽성 추구. 마치 성자여야 하는 듯한 그런..


 

P398 사르트르는 다양한 구토 경험을 통해 세상 모든 존재의 본모습을 보이려 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 것 따지고 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있을 뿐이다.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다는 느낌과 무의미에서 오는 허무감, 주인공이 구토를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이 놓인 극단적인 허무의 현실을 완전한 긍정으로 탈바꿈시켰다. 1943년 발표한 <<존재와 무>>에서,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 목적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오히려 그 때문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적 존재로 거듭난다. (…)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에서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P399 하지만 인간은 반대다.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져 있을 뿐이다. 또한 다른 사물과는 달리,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펼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를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으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P399 한편으로 자유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민과 불안에 싸여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한다. 군인, 공무원 등 사회가 주느 역할에 안주하며 무한한 자유가 주는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를 좇음으로써 스스로 삶을 결단해야 하는 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으로 본다.

 

P400 진정한 인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주변과 상황을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살기에 긍정적이며 도전적이다. 진정한 인간 실존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P401 자유의 투사였던 사르트르도 마르크스 이론에 동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사회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점차 평등한 쪽으로 나아가며 인간 개개인은 이를 위한 도구라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의 자유는 무엇에 대해서도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처음부터 공존하기 어려웠다. 결국 1956년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떤 소련이 부당하게 체코를 침략하자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 결별을 선언했다.

 

P402 그 뒤로도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투쟁했다. 알제리 전쟁, 미국의 베트남 참전, 드골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프랑스의 68혁명 등 굵직한 역사적 투쟁의 중심에 항상 그가 있었다. 심지어 1970년대에는 시인 김지하가 독재 정권에 맞서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인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P403 부담스러운 자유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스스로 결단하며 당당하게 맞서라는 사르트르의 외침은 누구라도 새겨 들어야 할 삶의 진리다. 불의를 눈앞에 두고도 꼬리를 내리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변명만 늘어놓는 우리 소시민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P403 원전속으로: 지식인을 위한 변명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의 구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중략) 지식인이 자신의 직업에서 피해야만 할 가장 큰 위험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너무 조급히 일반화하려는 자세다. (중략) 지식은 일반화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아직 일반화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반화된 인간이란 이루어 나가야 할존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 사이비 지식인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니다. 하지만…’, 또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라고 말할 뿐이다. - <<지식인을 위한 변명 중에서>> -

 

 

 

하버마스 (Jurgen Habermas, 1929~)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모든 물음은 가치가 있다. - 하버마스

“올바른 대화는 서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고, 그 내용이 참이어야 하며 상대방이 성실히 지킬 것을 믿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P404 논쟁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다. 논쟁을 할 때는 상대의 설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능력과 자시게 더 중요하다. 물론 명쾌한 논리로 상대를 입도 뻥끗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은 수긍한다기보다 짓눌려 있을 뿐이다.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 분노는 더욱 커지다가 언젠가 폭발하여 다시금 갈등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 이것은 내가 중학교때 데일 카네기로부터 배운 것이다. 나는 그래서 논쟁에 휘말릴때마다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편하게 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찌된 일인지 그 어렸을 때도 그랬던 내가 커서는 그런 대화 속의 여유로운 마음이 많이 없어진 듯 하다. 꼭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 감정이 상할 때도 있곤 하는 나를 느낀다. 대체 왜 나는 나이를 꺼꾸로 먹는 것일까..?


 

P405 하버마스는 항상 수용의 대가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철학, 과학,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언어학, 언론학, 문학, 심리학, 정치학 등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과 정교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상대의 주장이 정당하다면 주저 없이 인정하곤 했다. 너무 긍정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나머지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사상가하고만 논쟁을 한다는 오해를 살 정도였다.하버머스의 태도는 자신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억압과 지배 없는 사회, 해방된 인류를 꿈꾼다. 그리고 자유로운 대화와 의사소통으로 그런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뛰어난 철학자는 자신의 품성 속에서 세계를 변혁할 원리를 찾아낸다. 하버마스가 바로 그렇다.

 

>> 논쟁 중에 상대방의 의견이나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그릇 크기와 진리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열정적으로 펼치다가 상대방의 주장이 오를 때 주저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런 사람이야 말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결코 상황적인 것과 자신의 인격을 동일시하지 않음으로. 그로 인해 자신이 무시당했다거나, 자신의 실력이 모자른다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하버마스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는지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P405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그 뒤 굼머스바흐라는 조그만 도시로 이사를 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다. 자신의 회상대로라면 그는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P407 자연은 이제 인간이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나아가 과학이라는 잣대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중요해지면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얼마나 도덕적이고 인간적인지보다, 무슨 능력이 얼마나 있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들 스스로도 상대를 이용과 억압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P409 하버마스는 제1세대 거장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견해를 폈다. 그는 이런 해방된 사회는 이성을 통한 논쟁과 가르침, 곧 계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비판 이론가들이 비난을 퍼붓던 인간의 합리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물질문명의 열어 문제들은 이성 자체의 결함에서라기보다, 아직 이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탓에 생긴 것으로 보았다.


 

P410 가다머나 하버마스 모두 열린 마음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가다머는 그를 초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단다.

 

>> 역시 큰 그릇은 다르다. 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하버마스를 초빙한 가다머의 역량에 고개가 숙여진다. 다양성의 존중. 얼마나 멋진지..


 

P411 그는 합리성을 단순히 논리적 사고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에서 찾는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이성의 잣대를 세운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항상 억압을 낳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짓누르고 위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 까닭이다. 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대화와 합의 속에서 나온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토론 가운데서 최선의 결론을 맺을 수 있다.그는 올바른 대화의 기준으로, 서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고, 그 내용이 참이어야 하며, 상대방이 성실히 지킬 것을 믿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평등하고 수평적이야 함을 든다. 이렇게 이루어진 토론에서 우리는 서로가 합리적이라고 인정하는 최선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지 못한 대화는 폭력일 뿐이다. 그는 대화 속에서 이성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 독창적인 철학의 장을 열었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추구한 대화의 윤리, 담론 윤리학은 현대 민주 사회에 도덕과 근거를 제시해 주는 이론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P413 인간은 누구나 합리적인 이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해결책은 대화뿐이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이성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건다. 하버마스의 기대가 헛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셀 푸코 (Michel Paulo Foucault, 1926~1984)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푸아티에에서 잘나가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명의 비밀코드: 광기, , 병원, 감옥 - 미셀 푸코

“광기를 배제한 우리의 문명은 이성 혼자서 독백하는 것과 같다.

 

P414 미셸 푸코 (Michel Paul Foucault, 1926~1984)는 샤르트르 이후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푸코의 인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해서, 그의 저작은 하나도 빠짐없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 오우~ 대단한 푸코~!! 나는 그의 이름을 이 서양 철학사 책을 통해서 처음 들어봤지만, 그가 이리도 유명하고 사랑받는 철학자인 줄은 몰랐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참 매력적이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친근감 가는 분위기. 한참을 바라보다 그 이유를 알았다. 바로 대학시절 내가 참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수학 교수 Mr. Roger Wolf와 너무나도 흡사했던 것. ^^ 괜히 반가웠다. 그의 사상이나 이론은 모르지만, 그냥 단지 내가 좋아하던 수학 교수님을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무척 좋아졌다. ^^;;


 

P416 고등 사범학교는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등 프랑스 최고의 지성들이 거쳐간 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학생들 가운데는 자부심과 젊은이 특유의 치기가 넘치는 괴짜들이 많았다. 푸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꼭 싸움닭 같았다. 하루 종일 고독하게 지내다가 친구들에게 야유를 보낼 때만 말을 하고, 남들과 어울려야 하는 식사 시간에는 누구든 공격하고 아무하고나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괴짜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 가까울 듯싶다.싸이코 같은 행동도 수재들에게는 천재의 행동으로 정당화되는 법, 푸코 역시 그랬다. 그는 고등 사범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그룹에 들었다, 또한, 끊임없이 읽으며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사색하는 성실한 공부자세로 이름난 학생이기도 했다.

 

>> 하하하하하~ 싸움닭, 괴짜, 정신병자. 하하하하~ ^^ 저자의 표현이 넘 재밌다. ^^ 암튼. 저자의 말대로 아무리.. ‘괴짜를 벗어나 정신병자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수재 학생들에게는 천재의 행동으로 미화되어 보여 지는 법.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수재의 괴이한 행동은 왜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싶다.


 

P418 푸코는 역사를 철저하게 분석하여 실증적인 문헌을 들이대며 철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기의 광기란 이성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이미지에서 느껴지듯, 신비롭고 이성으로 얻지 못하는 그 무엇을 주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광기는 반사회적인 범죄로 여겨졌다. 미친 사람들은 거지, 범죄자, 게으름뱅이와 함께 감금당했고 처벌받았다. 푸코는 그 이유를 노동력을 중시했던 당시의 직업관에서 찾는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곧 죄인으로 여겨졌다. 광기도 이런 측면에서 교정해야 할 죄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의 산업 발달로 일손이 달리자, 더 이상 광인을 범죄자나 거지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지 않게 된다. 광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석방되었던 것이다, 이제 수용소에는 과인들만 남았고 광기는 비로소 치료 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모든 광기를 질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야나 고흐, 니체에게서 보듯, 광기는 이성을 뛰어넘는 혜안을 주기도 한다. 광기를 배제한 우리의 문명은 이성 혼자서 독백하는 것과 같다. 이성적인 것이 곧 최선이고 바람직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광기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통제하기에 앞서, 우리는 광기 앞에서 우리의 이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푸코는 광기와 같은 소소한 소재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유 구조를 드러내고 그 한계를 밝히려 했다.

 

P420 각각의 시대에는 우리네 앎을 만드는 거대한 인식의 틀이 있다. 이를 푸코는 에피스테메 Episteme’리 한다. 푸코는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듯, 수많은 구체적인 문헌 자료들을 통해 각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 곧 에피스테메의 모습을 밝히려 했다.


 

P423 1984년 푸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만다. 사이은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하버마스, 퍼트남 등 동시대의 지성들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볼 때 58세라는 그의 생애는 너무 짧았다. 푸코는 관념의 세계를 공허하게 헤매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무척 달랐다. 그는 치밀한 사료 수집과 역사 분석으로 한 시대나 사회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새로운 철학 방법론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생전에 그의 강의를 들었던 미국 학생들은 그를 ‘frog fog’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frog fog’프랑스의 푸코라는 말을 발음에 빗대어 비꼰 것이다. 그의 글이 문학적 수사와 알 듯 모를 듯한 역사 자료로 치장된 나머지,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란다.

 

>> 히궁~ -_-;;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 1902~1994)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94년 영국 런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열린 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 포퍼

“나하고 논쟁하고 싶다고? 난 논쟁 따위는 하지 않아. 대신 총을 갈기지.

- 포퍼와 논쟁하던 나치 젊은이가 내뱉은 말

 

P425 철학자 카를 포퍼 (Karl Rainmund Popper, 1902~1994) 190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94년 영국 런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20세기 전부를 살다 간 셈이다. 긴 생애 동안 그는 엄청난 과학 발전의 시대이자 탐욕과 독선이 빚어낸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 전체를 바라보았다. 철학자의 임무가 세계를 큰 눈으로 바라보고 근본 문제를 진단하여 바람직한 대안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포퍼는 대단한 행운아였다. 한 세기 전부를 체험 속에서 진단하고 이것이 검증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P427 포퍼는 시위 도중에 한 학생이 경찰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개인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키는 이념이라면 올바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한 개인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키는 이념이라면 올바를 수 없다.’는 포퍼에 동의한다.


 

P429 포퍼의 철학은 자기 이념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차 반성할 줄 모르는 이 젊은이에게 제기하는 반론 같은 느낌을 준다. 무엇이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다루는 <<탐구의 논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포퍼에 따르면, 이론은 반증 가능성이 있을 때 진정 과학적이다. 즉 어떤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 역시 가다머처럼 독단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론을 견제하는 모습이다. 반증 가능성이 있을 때 진정 과학적이란 그의 이론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P430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내놓기에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틀리 수 있고 (반증이 가능하고),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계속 성장, 발전하며 좀더 올바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부단한 토론과 이성적인 반증이 가능한 가운데서 과학은 성립된다.P432 열린 사회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인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류는 발전한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제도가 필요하게 된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또한 열린 사회는 닫힌 사회와 같이 이상과 계획에 따라 개인들을 억누르고 희생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 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간다.


 

P433 그는 논쟁을 위한 싸움닭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학생이 질문을 잘못했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상대가 상당한 석학일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이 그와 논쟁을 벌이던 중에 부지깽이를 휘두를 만큼 흥분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비트겐슈타인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지만 포퍼도 못지않았으니, 둘 사이의 싸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도 싶다.

 

>> 까르르르르륵~~~ ^^;; *떼구루루~* 아고 배야~ ^^;; 세상에 얼마나 화가 나고 뚜껑이 열렸으면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휘둘러댔을까..? 하하하하하하~ 괴짜적인 불 같은 성격의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와 만남은 벼락과 천둥 속에 번개불이 번쩍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세기의 두 석학이 싸우다가 부지깽이를 들고 난리 부르쑤 추는 모습을 본 사람들.. ~ 그들이 부럽다~ 일생일대기의 아주 멋진 장면였을건데~ ^^암튼.. 넘 웃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외모서부터 그의 성격이 드러나 보이지만, 포퍼.. 사진으로 보기에는 무척 부드러워 보이는데.. 넘 재밌는 철학자다..^^


 

P434 그러나 포퍼의 과격함은 학문의 장에서만 그랬다. 일상에서 포퍼는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그가 학생들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학생들도 그를 사랑했단다. 연구를 위해 외딴 곳에 집을 얻어 아내와 은둔하며 지냈지만, 말년의 포퍼는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손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등 여느 행복한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그럼 그렇지~!! 역시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속일 수가 없다. 그는 자상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교수님이고 남편이고 할아버지였던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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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 (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이해는 역사적이다 - 가다머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좋은 책은 최소한 9년간 숙성시켜야 한다.”

 

P436 가다머 (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할 때면 언제나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먼저 했단다. 그는 우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했을 뿐 아니라, 더 알고 싶어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든 살이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때도, 당시에는 피라미 대학 강사에 지나지 않았던 로티의 강의를 열심히 청강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P436 가다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쓴 <<진리와 방법>> 역시 현대 해석학의 기초를 다진 저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언젠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정답을 바라지 않고 던지는 질문은 더욱 기고 넓은 사고를 이끌어 내는 법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설명하는 철학에서도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와 답변이란 별 의미가 없겠다. 끊임없이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음미하며 평가하는 가운데 삶과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것, 그것이 가다머가 해석학을 통해 진정 이루려 했던 일이다. 이 점에서 가다머는 우리네 삶에 정답 없는 열린 질문을 던진 철학자라 하겠다.

 

P437 가다머는 100년을 넘게 산 독일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P438 스물세 살의 나이로 <플라톤 대화에서의 기쁨의 본질?이라는 논문으로 고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천 년 된 자로의 의미를 탐구하는 고전학은 머리보다 엉덩이가 중요한 연구 분야다. 천재성보다는 얼마나 성실하게 옛날 책들을 뒤졌느냐에 따라 결실이 달라지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그의 논문은 최우수 평점을 받았다. 이 사실은 그의 성실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P438 하이데거는 흔히 존재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우리 문명의 코드인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잣대로 세상의 존재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려 한다. 따라서 세상 존재들은 이성적으로 얼마나 잘 파악될 수 있느냐에 따라 객관성과 엄밀성이 결정되며, 여기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이 아닌 세상 존재 그 자체에 더 가치를 둔다.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이미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정신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가 우리의 정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P439 하이데거와의 만남에서, 가다머는 독창적인 그의 사사에 큰 충격을 받는 동시에 엄청난 열등감을 느꼈다. 플라톤을 빼고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으면서도 자기만족에 빠져 지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 거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우월함에 눌려 질식한 것만 같아 도피처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연구에 더욱더 몰두했다. 그러나 고전학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보다 텍스트의 진실성과 의미에 더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하이데거 철학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하이데거 철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 들었고, 마침내 스물아흡 살에 하이데거의 지돌 플라톤의 변증법적 윤리학이라는 제목의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했다. 이로써 그의 긴 학창 시절은 끝났다.


 

P440 명쾌한 스탕ㄹ리스트로 유명했던 그도 풋내기 교수시절에는 독일 철학자들 특유의 난해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동료들은 학문의 난이도를 판단 할 때 ‘Gad(Gadamer의 약자)’라는 말을 붙여 말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Gasd1은 어려운 학문, Gad2는 그보다 더 어려운 학문이라는 식이었다. 그만큼 가다머의 강의는 알아듣기 어렵고 난해했단다.

 

>> 하하하하하~ Gad 1~ Gad 2~??  하하하하하~ 넘 웃겨서 돌아가시겠다..^^;; 무척 귀엽고 윗트있는 놀림~ 하하하하~ ^^


 

P441 해석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맞서 제안된 정신과학의 탐구 방법이다. 자연과학은 객관성과 엄밀성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P442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황산벌 싸움이라는 사건이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갈 리는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어떤 시대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하나의 사건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가다머가 이해는 역사적이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P443 대상의 의미를 다루는 정신과학의 연구 방법은 자연과학과 같은 수 없다. 자연과학을 통해 하나의 법칙을 만들어 다양한 의미를 하나의 설명 원리로 단순화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정신과학은 거꾸로 한 사물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의미들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처럼 가다머는 인간의 이해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정신문화가 과학적 방법에 귀속될 수 없음을 보이려 했다. <<진리와 방법??은 과학적 엄밀성이 정신과학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P444 가다머는 자신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철학적 수업 시대>>에서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반성하여 철학적 깨달음을 얻는 삶은 지적이면서도 유쾌하다. 그러나 이는 충고하기는 쉬워도 자신이 하기는 어려운 인생훈이다. 유능한 상담자는 충고하고 강요하기보다 직접 모범을 보이는 법이다. 가다머는 한 세기가 넘는 기 삶을 통해 자기 사상을 몸소 실천해 보여 준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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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축제 올리기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완전 웅녀의 자손의 인내를 시험했던 시간...

 

리뷰와 함께 철학자들 사진을 함께 올리고 싶었는데..

그 사진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진을 붙일 때마다 컴이 프리징되어 버리는 것..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올릴까 하다가.. 3일을 그렇게 내리 씨름하다보니..

나중엔 오기가 생겼다...

 

리뷰는 다 써놓고.. 사진 때문에 못 올리고 있다니..

.. 정말 돌아가실 뻔 했다...

 

누가 사진을 꼭 올리라고 하는 것두 아닌데..

왜 그리도 사진에 목숨을 걸었더랬는지..^^;;

원래 사람 얼굴을 보면 그들의 삶이나 상황이 좀 더 쉽게 느껴지는 나의 성향때문였을 것..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증도 사라지고...^^;;

 

암튼..

나도.. 낙타의 인내를 조금은 가지고 있구나.. (3일동안의 인내..^^;;)

느꼈던 시간이었다..^^;;

 

철학과 재즈..

잘 어울리지 않나..? ^^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를 읽으며 들었던 수많은 음악 중의 한 곡..

Norah Jones I’ve got to see you..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