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54]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 이재룡 옮김

pumpkinn 2021. 1. 26. 09:16

밀란 쿤데라

 

오랜만에 책 한권 읽고는 리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끙끙거리기를 며칠. 머리로만 쓰고 있다가 마침 상파울로시의 생일로 공휴일이라 덩어리 시간이 주어진 오늘, 작정을 하고 컴 앞에 앉았다.

 

독특한 제목으로 인해 온갖 패러디가 난무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오랜 시간 내 주위를 맴돌던 책으로, 이제 더 이상 책장에 꽂혀있기를 거부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내게 다가왔다.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소설가 지망생 한 분이 이 책을 필사 중이라는 말씀에 호기심이 일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작가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다시 듣기 시작하면서였지만.

 

‘밀란 쿤데라’ 이름에서 풍겨나오는 뭔지모를 굵직하고 무겁게 느껴지는 카리스마. 그의 이름이 주는 뭔지 모를 혁명적인 분위기는 그의 삶과 사뭇 닮아 있었다.

 

20세기 이념 갈등의 한복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는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에서 음악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많은 작가들이 이념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듯, 밀란 쿤데라 역시도 20세기 이념의 갈등의 한복판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소련의 간섭을 받던 체코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1968년 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에 성공한다.하지만 그렇게 쟁취한 ‘프라하의 봄’은 1968년 8월 소련의 침공으로 찰라의 꿈으로 끝이 나고,  밀란 쿤데라는 75세의 나이로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된다.

 

 

"나의 삶은 비밀이며, 그 누구와도 상관 없다"

 

망명자의 신분으로 파리에 정착한 밀란 쿤데라는 ‘신비주의 작가’로 불려질 만큼 폐쇄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인 삶을 사는지는 재밌는 일화로 전해진다. 우편물을 등기로 보내면 받지 않는다. 보통 우편으로만 보내도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반송한다는 것이다. <김영하의 팟캐스트 중>

 

비록 망명자로서의 신분으로 파리에 거주하며 자신의 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프랑스 소설가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할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인으로 글을 쓰지만,  ‘프라하의 봄’ 사태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작가로서 끊임없이 그 시대적 배경에 관련된 글을 써내려 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역시 시대적 배경이 ‘프라하의 봄’이다.

 

독특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어로 먼저 썼지만, 밀란 쿤데라가 직접 프랑스어 번역판을 출간하고, 이 불어판을 정본으로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유럽인이라면 두 가지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은 당연하며, 체코어로 쓰는 것과 프랑스어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며 작품 활동에 있어 굳이 모국어를 고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체코의 국적을 버리고 프랑스인이 된 밀란 쿤데라.  그가 자신의 조국에 느꼇던 분노와  절망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어려풋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의 책은 우리 나라에서 특히 많이 읽혀졌는데, 그의 공산주의 키치에 대한 비판이 1988년~1990년 사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이 퇴조하고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전세계 공산주의가 시대적 막을 내리는 배경과 잘 맞아 떨어져 90년 초반 우리 나라 문학계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큰 영향을 끼친 작가라고 김영하는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전세계를 통틀어 발표된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소설로, 밀란 쿤데라 자신 역시도 이 작품을 능가하는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이러한 최고의 칭송을 받는 작품인지, 읽기도 전에 내게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소설가가 할 일은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벗겨내고
생의 가벼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

 

그래서일까? 그는 작정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이야기를 장장 507쪽에 걸쳐 보여준다.

 

사실 나는 제목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건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라는 건지 매번 여러 번을 반복해서 되뇌어보곤 했다. 

 

원래 원제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인데 한국 편집자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해야 한다는 고집아래 제목이 이렇게 지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단어 하나의 순서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임팩트는 확실히 다른 강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존재가 인간이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것, 내 삶이 일회적이고 뭔가 그림자처럼 사라져가는 그러한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역사, 문화, 사회적 관계와 가족 같은 끈에 묶여 있는데 무거움과 가벼움을 어떻게 이분법적 논리로 가를 수 있을까.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쁨을 가를 수가 있을까.  책의 전반에서 보여지는 두 커플들,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프란츠와 사비나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표지에 올려진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중절모를 쓴 신사' 작품이 우선 시선을 끌었다. 책을 펴자 아무런 프롤로그도 인사말도 없이 제목 차례가 나오고 곧장 본문으로 이어지는 것이 독특하게 느껴졌다.

 

책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한 글로 시작 된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P12)

 

이 부분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정승민 교수의 설명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우리가 죽고 난 후 분해된다. 이 우주의 시간이 무한하다고 보면 결국은 이 원자가 모여 우리 같은 사람이 또 된다. 그리고 또 죽으면 또 무한 속에서 또 만들어지고. 그러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계속된다는 의미다. 즉, Eternality 연한한 돌아온다는 것, 너도 나도 이 순간도 계속 돌아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행동 하나나가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계속 반복되어진다고 생각하면 엄청나게 무거워지고 진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회귀>가 아니고 일회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한 번 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똑같다는 의미가 된다. 왜냐면 사라져 버리니까. 그러면 내 마음대로 살면 되니까 얼마나 존재가 가벼워지게 되겠냐고 작가는 가정해보는 것이다”

 

 

무거움과 가벼움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똑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P13)

 

밀란 쿤데라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생각에 동의한다. 삶은 무거움과 가벼움, 빛과 어두움, 흑과 백의 양자택일 이분법적 양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좀 더 복합적이며 혼돈의 색깔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위험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바로 ‘이분법적 사고’였다. 오로지 이 세상은 흑과 백, 선과 악, 음과 양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 이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세상은, 흑과 백의 세상이 아닌 회색Zone의 세상이었고, 선과 악만의 세상이 아닌, 선으로 시작해도 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시작은 악의 모습이었으나 선으로 이어짐도 느꼈다. 음과 양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양극만 존재하며 그 사이의 간극을 무시하는 것은 오만이고 폭력이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 바로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각자 지닌 색깔이 너무 강렬하기에 섞이지 못하고 나만 옳다고 주장하게 되며 각자의 소리만 질러대기에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이뤄질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중 어느 하나는 온전히 긍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온전히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원전 6세기의 파르메니데스가 살았던 세상이 지금보다 더 단순했던 삶을 살았던 것만은 아닐터,  어쩜 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천의 얼굴을 가진 줄리엣 비노쉬가 테레자였고, 내가 좋아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토마시였다니.

 

토마시와 테레자

토마시는 하룻밤의 실수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정이 없다. 아들을 보러 갈 때마다 약속을 미루며 양육비 외로 아들에 대한 ‘사랑의 값’으로 요구하는 것에 진력을 내며, 죽을때까지 아들을 보지 않으리라 결심을 한다. 그런 토마시에게 부성애로 운운하며 아버지의 권리를 위해 싸우라는 강요하는 부모와도 관계를 끊어버리는 토마시에게 남겨지는 것은 여자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토마시는 여자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잠은 같이 자지만 수면을 함께 취하지 않는 이유다. 즉 한 여자와 친밀함 속에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떤 여자에게도 얽히고 싶지 않은 토마시도 운명이 허락한 반복되는 6번의 우연으로 테레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되며 스스로의 법칙을 깨게 된다.  그녀와 한 침대에서 함께 잠을 자는 관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다며 사랑과 섹스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주장하며 사랑하는 테레자를 곁에 두고도 자유 분방한 삶을 누린다. 그동안 몇 명의 여성을 만났냐는 친구의 질문에 200여명의 여성과 보냈다며, 그래봐야 계산을 해보면 일 년에 8명 정도의 여성을 만났으니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라며 태연스레 말할 정도다.

 

‘프라하의 봄’ 사태 이후, 공산주의자들을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교해서 기고한 기사로 실력있는 외과 의사였던 토마시는 유리닦기 청소부의 길을 가게되지만, 그는 놀랍게도 그 역할을 만족하며 자유를 느낀다. 외과 수술의로서 느끼지 못했던 자유, 그것은 일이 끝나면 자신의 직업을 잊고 자기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한 토마시는 자신이 테레자를 사랑하는데 왜 테레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영혼 토마시는 ‘가벼움’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그런가하면 테레자는 진지한 사랑을 꿈꾼다. 아름다웠던 테레자의 엄마는 자신에게 구혼하던  9명의 구혼자 중 가장 떨어지는 남자와 하룻밤의 실수로 임신을 하게되고, 테레자를 갖게 된다. 가장 모자라는 구혼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 그녀는,  급기야 남편과 어린 딸을 버리고 도망가고, 더 질이 떨어지는 남자와 결혼을 하며 삶을 포기한듯 여자로서의 품위는 버리고 그렇게 가볍게 살아간다.

 

테레자가 진지하고 고결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타고난 성품도 있었겠지만, 환경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엄마와 닮은 외모를 가진 테레자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엄마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워내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를 느끼고자 한다.

 

지적이고 똑똑한 테레자는 엄마로 인해 학교도 그만두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그녀는 좀 더 고결한 사랑을 꿈꾸며, 책을 가까이하며 신분상승을 원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토록 탈출하고자 했기에 그녀는 토마시에게 그토록 자신이 원하는 순수하고 진지하고 영혼이 깃든 사랑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렇게 테레자는 무거움의 상징으로 대비되며 나타난다.


사비나 역을 연기한 배우가 매력적인 레나 올린이었다니. 탁월한 캐스팅이었다.

프란츠와 사비나

그런가하면, 또 다른 커플인 프란츠와 사비나의 관계는 반대로 나타난다. 잘생기고 지적이고 촉방받는 대학교수는 프란츠는 무거움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후, 어머니의 모습에서 보호하고 존중해야 된다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을 그리게 된다. 사랑하지 아내와 결혼한 것은 부인인 마리클로드가 자신을 버린다면 자살하겠다는 그 말이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다짐이 그녀와의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다.

 

프란츠는 매력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인 사비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아내가 있는 도시 안에서는 애인과 섹스를 나누지 못하며 없는 학회를 만들어 다른 도시에서 사랑을 나누는 성품의 소유자다. 제네바에서 정부와의 섹스를 자제하는 것은 실은 자신이 다른 여자와 결혼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이었다.

 

사비나와 사랑에 빠진 그는 사비나와의 진지하게 생각하며 자신과 사비나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드러내고자 부인에게 애인이 있음을 알린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부인에게  자신에게 애인이 있음을 알린 후, 홀가분함을 느끼는 그는 아홉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진실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돌아가신 엄마를 보며 ‘정조’를 덕목 중 으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정조가 우리 삶에 통일성을 부여하며, 정조가 없다면 우리 삶은 수천 조각의 덧없는 인상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프란츠와는 달리, 사비나에게는 ‘배신’이 중요한 가치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새계로 떠나는 것,”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비나.

 

그러한 그녀를 사랑하며 뭔지 모를 불안감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남성 프란츠가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을 가졌던 것은 무의식 속에 느껴지는 이런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다름에서 오는 긴장이 안겨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 많은 다름 속에서  서로가 다르게 갖고 인식하고 있는 ‘진리에서 살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비나는 자신의 내밀성을 상살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뻐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토마시에 버금가는 자유로운 영혼인 사비나는 역시나 ‘가벼움’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토마시와 사비나가 둘의 관계를 계속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둘의 조합은 어떤 그림으로 그려졌을까 궁금함이 일었다.


에로틱한 우정을 이어가는 티모시와 중절모를 쓴 사비나

 

 

토마시와 사비나

지적이면서 각가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외과의사와 예술가 조합이 매력적이다. 둘은 자신들의 관계를 ‘에로틱한 우정’이라 표현했다. 자신의 연인의 아내인 테레자에게 신문 기자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준 것도 사비나였다.

 

소울 메이트였던 두 사람이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가벼움’의 상징인 두 사람은 상대방의 삶과 취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았을까 아니면 결국 그 둘 중 하나는 자신이 추구해왔던 감정이나 철학에 배반하며  서로의 다른 가치관 속에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무거워져 갔을까. 그 둘의 그림이 자연스레 그려지며 호기심이 일었다.


프라하의 봄

키치 (Kitsch)

‘키치’는 책을 읽는 동안 내게 가장 가슴을 가장 치열하게 치고 들어온 개념이었다.

사비나가 가장 못 견뎌했던 것이 바로 키치인데, 키치의 단어적 의미는 ‘싸구려, 짝퉁, 하급, 모조’의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하지만 쿤데라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그러한 피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확고 부동한 신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정 관념을 키치라고 보았다.  그것이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바로 그게 싸구려 ‘키치’라는 것이 정영진 교수의 설명이다. 

즉, 키치는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라는 것.

 

정영진 교수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키치는 고급 문화, 주류 문화에 대해서 하급 화 비주류 문화, 변두리 문화를 의미하는데, 밀란 쿤데라는 뭔가 고상한 것이 아닌, 육체적인 것, 똥이나 섹스와 같은 그러한 것은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B급으로 생각하는 그런 관념 자체가 키치라는 것이다. 뭔가 포장하고 아닌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권위적으로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야 말로 참을 수 없는 키치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똥’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스탈린의 아들이야기, 천국에서는 똥을 싸지 않는다는 시니컬한 비유는 재밌었다. 신학자들이 그런 연구까지 하다니..)

이러한 관념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이 아니라, 현실을 비틀어 왜곡을 한다는 게다. 그런면에서 이게 바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싸구려라는 것. 진리나 진실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 포장하고 거품을 키워서 아름다운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 키치라는 것.

고정 관념을, 타의가 심어놓은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태도, 있는 그대로의 삶의 실상을 질식하고 그것들이 좀 불편하더라도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예술을 하는 태도이고 삶을 살아가는 태도인데, 전체주의, 독재주의에서는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은 자꾸 숨기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뻔한 것을 자꾸 포장하고 왜곡하고 계속 재생한 해내는 것. 감정을 획일화 시키고, 감정의 자판기를 만드는 감정의 독재자. 이것이 키치라는 것이다.

 

‘키치’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핵심을 찌르는 설명이었다.  밀란 쿤데라가 사비나를 통해 집요하게 보여주는 키치의 실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내가 속한 문화와 관습 속에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학습된 키치 안에 묶여있는지 소름이 끼치는 전율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도 ‘열려있는 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밀란 쿤데라가 보여주는 키치의 실체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동안 얼굴이 화끈거리며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렇다. 물론 우리 인간은 ‘키치’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 뱃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학습되어진 역사와 문화와 풍습 속에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학습된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쩜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한 발 뒬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내가 갇혀있는 키치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닫혀있는 키치의 문을 조금씩 열다보면 포용과 존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모습을 받아들이며 좀 불편하고 아프더라도 실제와 현실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그런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명치 끝이 아파오는 아픔이 느껴졌다. 배를 심하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복통이 느껴졌다.


 

또 다시 무거움과 가벼움

 

토마시의 가벼움과 테레사의 무거움이 함께 하며 부딪치는 불협화음과 갈등은 세월과 함께 참으로 꾸준히도 이어진다. 그런 상황 속에 압력으로 다가오는 정치적인 긴장을 느끼게 되는 토마시와 테레자는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세월이 흘렀음일까. 그들은 조금씩 성장하며 성숙한 관계로 이어지는 보여준다.

 

무거움의 화신이었던 테레자는 조금씩 토마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되돌아보게 된다. 토마시가 취리히로 가게 된 것도,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그리고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도 단순히 토마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자신이 토마시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닐까, 테레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카레닌에게 느끼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있는 그대로의 사랑,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 어쩌면 토마시를 향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던 테레자, 토마시가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며 그렇게 토마시가 사랑한다고 해도 불안해하며 부정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테레자였다.

 

인정받는 능력있는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그가 유리 닦이 청소부로 전락하고, 급기야는 시골로 내려와 농부가 된 토마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곁에 있어주었음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희끗한 머리로 서투론 손놀림으로 트럭을 수리하는 그를 보는 테레자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게 되며 토마시를 한결 성숙해진 시선으로 보게 된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은 바로 나야.” (중략)

토마시는 미안해하는 데레사에게 답한다.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천직이라나,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천직이란 없어. 누구에게도 천직이란 없어. 천직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생각지 않게 자신의 삶 속에 끼어든 6번의 우연으로 테레자를 만나게 되고, 모세와 오이디푸스의 신화 속의 관념에 사로잡혀 급기야 자신의 삶의 철학에 반하는 행동의 결과로 테레자와 함께하게 되는 토마시.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테레자의 진지한 무거움으로 인해 가볍고 자유로왔던 삶이 흔들리게 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자유롭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듯 가벼웠던 삶은 진지하고 무거운 테레자로 인해 자꾸만 지상으로 끌어내려지고, 날아오르던 날개에 추가 달리며 조금씩 땅으로 내려오며 무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꼭 나빴을까? 그렇지 않다. 늘 여성들과의 만남으로 테레자를 힘들게 했던 토마시는 드디어 테레자 곁에서 행복을 느낀다.

 

‘가벼움’의 상징인 토마시는 ‘가벼움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가볍지 않은’사람이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을 눌러 짓이기던 무거움을 덜어내며 조금 덜 무거운, 성숙한 여성으로서 토마스와 ‘드디어’ 행복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방황과 갈등 속에 조금씩 성장해갔고, 성숙해져 갔다.

 

그렇게 둘이 조금 덜 가볍고, 조금 덜 무거운 사람이 되어 성숙해진 모습으로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그들은 트럭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제 겨우 둘이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랑을 느끼게 되어 행복의 절정 속에 맞이한 토마시와 테레자. 

 

삶에 안녕을 고하는 그 순간에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행복의 절정 속에 눈을 감는 것.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을까? 남겨지는 고통도 남겨두고 가는 슬픔도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사랑. 단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가 슬플 뿐이다.

 

사비나의 고백처럼, 토마시는 돈후안으로 살았지만, 죽을 때는 트리스탄으로 죽었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 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먹먹함이 차올라 급기야는 눈물 한 방울 툭 떨어지게 했던 결정적인 구절이었다. 그렇게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는 그들을 데리고 먼 은하수로 데리고 올라가 버렸다.토마시의 가벼움과 테레사의 무거움이 함께 하며 부딪치는 불협화음과 갈등은 세월과 함께 참으로 꾸준히도 이어진다.  그런 상황 속에 압력으로 다가오는 정치적인 긴장을 느끼게 되는 토마시와 테레자는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세월이 흘렀음일까. 그들은 조금씩 성장하며 성숙한 관계로 이어지는 보여준다.

 

무거움의 화신이었던 테레자는 조금씩 토마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되돌아보게 된다. 토마시가 취리히로 가게 된 것도,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그리고 시골로 내려오게 된 것도 단순히 토마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자신이 토마시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닐까, 테레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카레닌에게 느끼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있는 그대로의 사랑,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 어쩌면 토마시를 향한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던 테레자, 토마시가 자신만을 바라보지 않는다며 그렇게 토마시가 사랑한다고 해도 불안해하며 부정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테레자였다.

 

인정받는 능력있는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그가 유리 닦이 청소부로 전락하고, 급기야는 시골로 내려와 농부가 된 토마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곁에 있어주었음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희끗한 머리로 서투론 손놀림으로 트럭을 수리하는 그를 보는 테레자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게 되며 토마시를 한결 성숙해진 시선으로 보게 된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은 바로 나야.” (중략)

토마시는 미안해하는 데레사에게 답한다.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천직이라나,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천직이란 없어. 누구에게도 천직이란 없어. 천직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생각지 않게 자신의 삶 속에 끼어든 6번의 우연으로 테레자를 만나게 되고, 모세와 오이디푸스의 신화 속의 관념에 사로잡혀 급기야 자신의 삶의 철학에 반하는 행동의 결과로 테레자와 함께하게 되는 토마시. 그의 결정적인 실수는 테레자의 진지한 무거움으로 인해 가볍고 자유로왔던 삶이 흔들리게 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자유롭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듯 가벼웠던 삶은 진지하고 무거운 테레자로 인해 자꾸만 지상으로 끌어내려지고, 날아오르던 날개에 추가 달리며 조금씩 땅으로 내려오며 무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꼭 나빴을까? 그렇지 않다. 늘 여성들과의 만남으로 테레자를 힘들게 했던 토마시는 드디어 테레자 곁에서 행복을 느낀다.

 

‘가벼움’의 상징인 토마시는 ‘가벼움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가볍지 않은’사람이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을 눌러 짓이기던 무거움을 덜어내며 조금 덜 무거운, 성숙한 여성으로서 토마스와 ‘드디어’ 행복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방황과 갈등 속에 조금씩 성장해갔고, 성숙해져 갔다.

 

그렇게 둘이 조금 덜 가볍고, 조금 덜 무거운 사람이 되어 성숙해진 모습으로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그들은 트럭 사고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제 겨우 둘이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랑을 느끼게 되어 행복의 절정 속에 맞이한 토마시와 테레자. 

 

삶에 안녕을 고하는 그 순간에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행복의 절정 속에 눈을 감는 것.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을까? 남겨지는 고통도 남겨두고 가는 슬픔도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사랑. 단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가 슬플 뿐이다.

 

사비나의 고백처럼, 토마시는 돈후안으로 살았지만, 죽을 때는 트리스탄으로 죽었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 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먹먹함이 차올라 급기야는 눈물 한 방울 툭 떨어지게 했던 결정적인 구절이었다. 그렇게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는 그들을 데리고 먼 은하수로 데리고 올라가 버렸다.

 

 

마치며...

 

처음에 읽었을 때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와 배경으로 깔려있는 ‘프라하의 봄’의 시대적 사건들로 피상적인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공부를 하면서 그 장면들을 따라가면서 그 의미가 하나하나 다가왔고, 밀란 쿤데라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깊이 느껴가는 동안 감동과 전율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먹먹함과 울컥함이란. 때로는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멍한 충격 속에 빠지기도 했다. 그와 함께 반성하게 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며 통찰하게 햇다.  그동안 당연하게 느꼈던 것들에 질문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화두를 던져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사회적 의무와 제도, 규제와 사회적 역할이 무거움이라면, 그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날개를 달고 비상하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것은 가벼움일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규범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인간 모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질서는 무너지고 사회적 파멸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한번 뿐인 인생을 사회적 규범과 사회적 시선에 갇혀 나의 꿈도 욕망도 저버리고 그렇게 무겁고 숨 막히는 삶을 살아야 옳은 것인가? 아닐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사회적 인간으로서 살아가지만, 때때로 그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숨을 쉬게 해주며 무거움을 덜어내어 주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라는 존재를 보담아 주며 가벼이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삶.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 속에서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성숙으로 이끌어주고, 그렇게 우리는 삶을 배워가는 것.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진맛이 느껴지며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작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내겐 그런 작품이었다. 그래서 끝을 내지 못하고 자꾸만 뭔가 써야 할 것 같은 그런.......

 

왜 많은 독자들과 작가들에게 인생작으로 꼽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대열의 끄트머리 쯤에 조심스레 함께 줄을 서는 내가 보인다.

.

.

 

토마시와 테레자는 죽음과 함께...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무거움과 가벼움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Now We are Free가 떠올랐던 이유다.

 

Hans Zimmer - Now We are F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