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독서리뷰 151]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 우석균 옮김

pumpkinn 2018. 8. 22. 10:03

청년 네루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이렇게 유쾌하고 명랑하고 해학적이고 코믹하며 재치 발랄한 책이 또 있을까. 200페이지 남짓 안 되는 얇은 책이기도 했지만,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어버린 책이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작가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란 책도 내겐 생소한데 어떻게 이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었을까. 아마도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듣다가 주문을 해놓고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칠레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이슬라 네그라'(검은 섬)에서 마리오 헤메네스라는 우편배달부와 우연하게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마치 어른 동화처럼 느껴지는 맑고 순수하면서도 어두운 사회적 배경이 그림자로 드리워진 소설.

 

El Cartero de Neruda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표현이 전혀 과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이슬라 네그라에 오는 편지는 오로지 네루다 시인에게 오는 것뿐이다. 한 마디로 마리오는 네루다를 위한 우편배달부다. 마리오 히메네스의 캐릭터가 아주 재밌게 그려져 있는데, 나중에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에 대해 읽으면서, 어쩜 마리오는 안토니오 자신을 그려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는 괴짜 시인.

 

감히 말 조차 건넬 엄두도 내기 힘들 정도로 조심스러운 그 유명한 네루다 시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눈치를 보며 그 주위를 맴도는 마리오. 그 이유가 재밌다. 언젠가 산티아고에서 알게 될지 모르는 절세미인들에게 네루다의 시집에 받은 싸인으로 폼을 재기 위해서가 이유였다. 그 모두가 분명하지 않은 미래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오는 그 일념 하나로 열심히 눈치를 살피며 그 주위를 맴돌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마리오의 모습이 귀엽다.

마리오는 몇 번이나 시집을 들이밀려고 했다. 그러나 시인이 편지를 거두어들이는 굼뜬 동작, 후한 팁을 내미는 날렵함,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 두어 달 동안은 초인종으로 쓰는 종을 칠 때마다, 절묘한 시구를 빚어낼 찰나에 있는 시인의 영감을 살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22)

 

얼마나 웃었는지. ‘시인의 영감을 살해하는 듯한 느낌’. 네루다가 말하는 메타포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식상함에서 벗어나 내 안에 담겨 있는 느낌을 풀어 표현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 - 네루다와 마리오

 

 

어느 날, 드디어 대화를 끄집어낼 용기를 낸 마리오와 네루다와의 대화를 보자.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중략)
“제기랄, 나도 시인이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네루다가 다시 손잡이를 잡고 들어가려 했을 때 멀리 새가 나는 걸 바라보던 마리오가 말했다.
“제가 시인이라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시인이 아니라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지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 마리오는 점차 네루다와 함께 하며 메타포가 무엇인지 배우게 되고, '시인이 아니라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몰랐던 마리오는 자신 안에 있는 느낌들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며 점점 네루다와 가까워진다. 그렇게 시작된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은 네루다가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서 피노쳇 정권으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에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를 사랑하게 되고, 암송을 하며 흉내내기를 하다가 급기야 자기만의 메타포로 시를 쓰게 된다. 그리고, 그 메타포로 베아트리스의 사랑을 얻게 되고, 드디어 사랑하는 베아트리스와 결혼까지 하며 아들까지 낳게 된다. 심지어 네루다가 마리오의 아들의 대부가 되기도 한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는, ‘우리의 승리’라며 이슬라 네그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피서 관광객 모두를 불러 파티를 열고,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마리오.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면서 네루다를 프랑스 대사로 보냈을 때, 이슬라 네그라를 그리워하는 네루다에게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상의 소리를 녹음기에 담아내는 마리오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사람을 좋아하고 유머 넘치는 깊은 연륜을 가진 네루다에게 그런 순수 청년 마리오는 얼마나 신뢰롭고 사랑스러운 친구로 비쳐졌을까.


 

 

중간중간 네루다와 마리오의 사이에 끼어드는 과부 등장 부분 또한 별미다. 오로지 자기의 딸을 놈팽이(?) 마리오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원초적인 엄마 과부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인데, 너무 웃긴 것은 생뚱맞게 그 모든 책임이 네루다에게로 돌아간다. 마리오가 자기 딸내미를 꼬신 것이 바로 네루다의 시 때문이니, 그것은 바로 네루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는 논리인 게다. 엉뚱하게 젊은 남녀의 애정 문제에 끼어들게 된 네루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거’라며 용기를 내라고 나름 마리오를 위로하지만, 오로지 딸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네루다 집에 쳐들어와 폭포처럼 쏟아내는 메타포로 네루다까지 긴장시키는 부분은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거라며 의기양양하던 네루다의 모습에 그만 깔깔 넘어갔다.

 

스토리는 그렇게 재밌게 이어지지만, 결국 격동의 시기에 있던 칠레의 사회적 문제는 이슬라 네그라에까지 스며들게 되고, 쿠데타로 아옌데 대통령이 죽게 되면서 병이 들어 이슬라 네그라에서 휴양 중인 네루다에게도 그 여파가 미치게 된다. 그리고 네루다의 죽음과 함께 <낀따 루에다> 잡지사의 시 공모전에 시를 써 보낸 마리오 역시 피노쳇 정권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스토리는 끝이 난다.

 

빠블로 네루다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스카르메타가 이처럼 네루다라는 인물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집념을 보인 것은 그의 친근한 성격에 반해서였다. 책 한 권 내본 적 없는 까마득한 후배 문인과도 유머를 섞어가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P168)

 

이 책을 읽다 보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얼마나 빠블로 네루다 시인을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파블로 네루다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민중 시인으로써 진중한 시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직접 앞치마를 둘러메고 음식을 서빙하기를 즐겼다. 그가 얼마나 격의 없이 사람들을 대했고, 사회적 지위를 떠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인품의 소유자인지, 그래서 네루다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 그려진 네루다의 모습이 소설 속에서 왜곡된 인물이 아님을 알 것이라는 것. 그가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시인 다운 시인’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안토니와 스카르메타는 기존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들과는 달리 삶의 활력이 넘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스카르메타의 작품에는 재치 넘치는 문장과 해학,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 등이 쿠바 혁명과 칠레 민중연합 정권이 야기한 역사적, 사회적 사명감과 함께 녹아들어 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민중 시인으로서의 네루다도 좋았겠지만, 시인의 이런 면모에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스카르메타 자신과도 서로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음에 끌렸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인생의 반 이상을 남미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남미의 문학 작품에 대해 무지했음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스페니쉬 권에서 10년, 폴츄기스권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하지만 남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조금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Pablo Neruda에 대해 검색을 하며 그가 칠레의 민중 시인으로서 얼마나 많은 냉철하고도 따뜻한 지혜가 번득이는 어록들을 남겼는지 접해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사랑은 우리를 삶에서 구하기를.

 

 

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브라질과는 달리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다. 몇 년 전, 남편과 칠레 여행을 갔을 때 여행 가이드가 준 주의에 버스를 타고 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길 건널 때 신호등 꼭 지키시고요. 길 잘못 건너다 경찰한테 걸리면 절대 돈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수갑 채워서 감옥으로 직행이에요. 특히 브라질 사람들이 많이 그래요. 여러분들 브라질에서 오셨죠? 꼭 지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웃긴 했지만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우린 서로 그곳에서 처음 만난 여행객들이지만, 우리 모두 '브라질'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에, 서로 겸연쩍은 모습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도 우리는 동양인이니 그들만큼 부끄럽진 않았던 것 같다. 비록 브라질에서 왔지만 브라질 사람은 아니라 이거지. 

 

얼마 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바로 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쿠데타에 맞서 대통령 궁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며 죽음을 택했던 아옌데 대통령. 아옌데의 죽음과 함께 피노쳇 정권으로 이어지고, 그 악명 높은 피노쳇 정권 때 얼마나 많은 칠레의 지식인이 죽음을 당했는지 지금까지도 그 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독재 정권의 포악한 모습은 어느 나라나 닮은 그림이다.

 

어쨌든, 파블로 네루다가 추구한 사상과 이념을 여러 면에서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고, 덕분에 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살고 있는 남미의 작품들을 좀 더 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는 한 마디..

 

Il Postino를 꼭 봐야겠다. 영화에서는 네루다와 마리오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그리고 과부는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마지막 낯선 이들에게 잡혀가는 마리오의 모습등..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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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와 스까르메따에게 이 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곡이 있을까 싶다..

가끔씩 공원을 돌다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을 들을 때면...

가슴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느낌이 들곤 한다...

 

잘하든 못하든...

우리는 그렇게 꿋꿋하게 자기 자신의 길을 만들며...

우리의 길을 가는 것 아닐까...

 

Juan Manuel Serrat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Caminante no hay Camino....

 

길을 걷는 이에겐 

이미 만들어진 길이 아닌, 걸으면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의 곡...

 

네루다와 스카르메다에게 올리고 싶다...